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9 (사건의 시작점: 발단)
[내가 잘 봤겠어? 고친 거 틀리고 찍은 것도 틀렸어.]
문자에서 왠지 짜증이 잔뜩 섞인 듯한 녀석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큭큭거리며 웃곤 천천히 자판을 입력했다. 그래, 시험 보느라 고생했다.
3일 동안 치러진 1차 지필평가가 드디어 끝이 났다. 첫 날 시험이 끝나자마자,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한 채 문학 시험의 난이도는 어땠냐며 내가 집어준 부분이 시험에 나왔냐며 이것저것 묻던 박찬열쌤의 들뜬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난이도는 단정지어 말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어려운 문제도 있었고, 쉬운 문제도 있었거든요. 쌤이 집어주신 부분은 꽤 나왔어요. 시험을 그닥 잘 보지 않아 축 늘어진 내 목소리까지도 말이다.
약속대로, 오늘은 벚꽃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꿋꿋이 안 가겠다 말하던 김종인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바꼈다면서 같이 벚꽃 구경을 가겠다며 며칠 전에 연락을 해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셋이 사이좋게 벚꽃을 구경하러 가는 줄 알았건만, 녀석에게선 어젯밤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다. 내일이 할머니 생신이라 학교 끝나자마자 아빠 차를 타고 할머니댁에 가야 할 것 같다며 말이다.
[미안. 잠깐이라도 구경하고 가려 했는데 안될 것 같아. 미리 준비해놓을 게 좀 많다네.]
[사진 많이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라.]
녀석에게서 왔던 문자를 다시금 확인했다. 김종인은 지금쯤 옷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1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분명 내가 먼저 도착했을 거란 생각에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음료라도 사러가려던 찰나, 익숙한 모습이 저 멀리서 보였다. 그는 짙은 네이비 색상의 캐쥬얼한 자켓을 입고있었다. 항상 머리칼에 덮여있던 이마가 오늘은 훤히 보였다. 시원하게 앞머리를 올려 왁스로 스타일링을 한 그는 지금껏 봐왔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손엔 카페에서 사온 듯한 아메리카노 하나와 레몬에이드 두 개가 들려있었다.
"선생ㄴ…"
멀리서 소리쳐 그를 부르려다 괜한 장난기가 발동해 급히 말을 끊었다. 그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뒤쪽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뒷모습이 웃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 어."
"아…, 죄, 죄송해요!"
검정색 컨버스를 신은 그의 발끝만 바라보며 살금살금 다가가다, 무슨 인기척이라도 느껴졌던 건지 갑작스레 몸을 돌리는 그와 부딪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적잖이 놀란듯 보이는 그가 허둥대며 나를 걱정해주기 시작했다.
"괜찮아? 미안, 뒤에 너 있는 줄도 모르고…."
사실 아픔보단 창피함이 더 컸다. 마치 체육시간에 허들을 뛰어넘다 넘어졌을 때의 감정과 비슷할 테지. 애써 괜찮다며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그가 환히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 번진 시원시원한 입매를 바라보다 황급히 시선을 내려 그의 손에 들린 음료들을 바라보았다.
"… 아, 쌤. 오늘 김종인 안 와요."
"응? 왜? 같이 오겠다 하지 않았어?"
"오늘 할머니 생신이셔서 할머니댁 가봐야 한대요."
"아, 그래?"
"네에…."
"음, 그럼 괜히 두 개 사왔네."
"… 미리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제 손에 들린 레몬에이드를 슬쩍 흔들며 그가 말했다. 그리곤 멋쩍게 웃으며 내 앞으로 하나를 건넨다. 감사의 뜻으로 작게 목례를 하곤 두 손으로 레몬에이드를 받았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손바닥에 흥건히 묻었다. 축축한 손바닥을 대충 교복에 문질러 닦으려 하자, 그가 잠시 내 행동을 제지시키더니 제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줘 봐."
"네? 뭘…."
"일단 손."
제 손을 척 내밀며 다짜고짜 줘 보라 말하는 그에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손이요…. 손…. 괜히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를 바라보며 살풋 웃던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아 제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주기 시작했다.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다 작게 웃음을 지었다. 손의 물기를 다 닦아내준 그가 내 손에 들려있던 레몬에이드 컵에 제 손수건을 둘러 다시 내 손에 쥐여주었다. 연한 하늘색에 심플한 포인트가 들어가있는 손수건은 그와 참 어울렸다.
*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10분 정도를 기다리다 버스에 올라탔다. 빈 자리가 띄엄띄엄 두 개 정도 있었지만, 왜인지 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저 내 앞쪽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있는 그에게 저기 빈 자리가 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켜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외수업을 할 때 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는 그가 약간은 부담스러워 애써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휘황찬란한 색을 뽐내고 있는 간판들이 여럿 보였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다.
*
과연 벚꽃의 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4월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TV나 영화 속에서만 보던 벚꽃잎이 흩날리는 거리를 내가 걷는다니. 나의 로망과도 같았던 영화속 장면에 내가 쏘옥 들어간 것만 같았다. 산들산들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동그란 벚꽃잎이 하나둘 떨어졌다. 다섯 살 꼬마의 엄지 손가락 크기와도 같은 꽃잎은 지나치게 옅은 분홍색이었다.
"쌤, 나 궁금한 거 있어요."
"궁금한 거?"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벚나무 진짜 많네요."
"많이 검색해서 알아봤지. 멀리까지 가기엔 다음날 피곤할 것 같고, 최대한 가깝게 온다고 한 게 여긴데… 마음에 들어?"
"그럼요. 완전 예뻐요. 저 이렇게 벚꽃…"
"사진 찍어줄게."
갑자기 제 휴대폰을 꺼내들며 말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원래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성격이라 그의 말은 꽤나 부담스럽게 들려왔다. 그러나 싫다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어쩡쩡하게 서서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멀리서 초점을 잡는 듯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땐 그가 아이폰이라는 게 정말이지 다행인 것 같았다. 화질 좋고 잘 나오기로 유명한 아이폰…
"○○아, 웃어."
"웃은… 건데요…."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진이 한 장 찍혔다. 분명 눈을 감는 순간에 셔터가 눌린 것 같은데… 아, 왠지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사진을 찍자마자 내쪽으로 휘적휘적 걸어와 바로 사진을 보여주는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대단히 못 나왔을 거라 예상을 했던 건지, 사진이 생각보단 괜찮게 나온 듯했다. 분명 그의 최신형 휴대폰 화질도 한 몫 했겠지만….
*
휴대폰 갤러리엔 금세금세 사진들이 쌓여갔다. 나 혼자 찍힌 독사진, 아름다운 풍경 사진, 그와 찍은… 셀카 사진. 마치 갤러리의 삼분의 일이 오늘 찍은 사진들로 가득찬 것도 같았다.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점심식사라기엔 조금 늦은 감도 있었지만, 배가 너무나도 고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유명한 파스타집이 있다며 나를 이끌고 향하는 그에게 여긴 또 어떻게 안 거냐, 평소 자주 와봤냐 물었고, 그는 역시 한결같이 답했다. 검색했지, 검색.
김종인과 박찬열. 그들은 너무나도 달랐다. 맛있는 음식 좀 먹으러 가자며 녀석에게 맛집 검색을 해보라 하면 귀찮아하던 김종인과는 달리, 그는 필요할 때마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 말고도 둘은 아예 딴판이었다. 원체 성격이 무뚝뚝해서 말도 틱틱거리듯 내뱉고 로맨스 따위와는 거리가 먼 김종인과, 성격도 다정다감한데다 부드러운 말투를 가지고있는 박찬열. 완전 극과 극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듯했다.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개와 고양이 사이랄까…. 어쩌면 그보다 더한 사이일지도. 어찌됐건 둘은 상극이었다. 그것도 심각한 상극.
카페에 앉아 간단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바닐라라떼를 마시고 있던 사이에 날은 많이 어두워져있었다. 분명 시간이 늦은 탓은 아니었다. 고작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아니, 비는 이미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창가엔 미세한 빗줄기가 군데군데 묻어있었고, 길바닥도 살짝 젖어있는 듯했다.
"쌤, 우산 있어요?"
"… 아니, 나 빈 손이야."
"아아…, 어쩌죠. 나도 없는데."
"소나기 같은데 어차피 곧 그치지 않을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컵의 바닥에 남은 휘핑크림을 빨대로 휘저었다. 그리곤 휴대폰을 꺼내 오늘의 날씨 정보를 검색했다. 비가 안 올 거라 자부하며 엄마가 건네는 우산도 마다하고 집을 나서던 내 모습이 괜히 눈앞에 아른거렸다. 왜 아침에 일기예보를 보지 않은 건지…. 아니 그보다, 왜 엄마가 건네는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은 건지…. 그게 조금 후회가 되면서도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후회를 해봤자 나아질 건 단 1퍼센트도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얼른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것 뿐이겠지.
*
"… 비 안 그칠 것 같지 않아요? 어째 갈수록 많이 오는 것 같아요…."
"… 큰일이네."
난감하다는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잠시 고민하는듯 싶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사색에 잠긴듯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금 입술을 떼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갈까?"
"뛰어서요?"
"보니까 여기 근처에 편의점도 없는 것 같아. 우산은 못 구할 것 같고, 늦기 전엔 들어가야 하는데 오늘 안엔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서."
"… 어떡하죠.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갈 걸 그랬나봐요."
"… 미안해. 괜히 기다려보자 했나 봐."
"아, 아니에요. 쌤이 잘못한 건 아니죠….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손사레를 치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갈 때까지 카페 문을 대신 잡아주던 그에게 살며시 웃어보였다. 뒤이어 그가 밖으로 나왔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화창했던 하늘과는 생판 다른 모습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마치 여름 장마철과 같이 시원하게 쏟아져내리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천천히 제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해요?"
"우산 대용으로 사용할 게 이것밖에 없어서."
"… 아, 그래도 이건 아니죠. 옷 다 젖잖아요."
"어차피 젖을 건데 이왕이면…"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저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점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야. 라고 말하는 그에게 무어라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제 겉옷이 우산이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막는 그의 행동이 그저 놀라웠다. 덕분에 머리에 비를 맞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그냥 그가 걱정되었다. 왠지 내쪽으로 제 옷을 더 기울여주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저러다 감기 걸릴텐데….
황급히 뛰어 제법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거기엔 아마 비를 피하러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었다.
그가 제 자켓의 물기를 탈탈 털었다. 분명 겉옷을 뒤집어쓰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칼은 살짝 젖어있었다.
"괜찮아? 많이 젖었어?"
"네? 아, 조금요. 치마랑 다리만 살짝…. 쌤은 좀 많이 젖으신 것 같아요."
"나?"
흥건히 젖은 겉옷을 두어 번 털던 그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젖은 셔츠가 영 찝찝한지 그가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있자니 괜스레 미안해져 애꿎은 땅바닥만 바라보다 웅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뭐가?"
"저 때문에 선생님이… 아, 그…"
"응?"
"선생님 옷이… 그니까…"
"하하, 뭐라고?"
"… 아니에요."
괜히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가 꽤나 웃긴 건지 그의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왔다. 뒷통수가 왠지 따깝게만 느껴졌다.
"음, ○○이는 23번 타고가면 돼."
"23번… 왜 차고지 대기중이라 뜨죠?"
"어?"
버스 운행 정보를 알려주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도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골똘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저거 아니면 안될텐데. 그쪽으로 가는 버스는 하나밖에 없을 거야, 아마. 뒤이어 나온 그의 말은 괜히 내 등골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23번 안 오면 어떡해요? 나 집에 못 가요? 비도 이렇게 오는데?"
"… 아니, 올 거야. 좀만 더 기다려보자."
"인터넷엔 도착 정보가 없다고 떠요…. 그리고 여긴 왜이리 택시가 안 보여요?"
"에이, 걱정하지마. 갈 수 있어."
"… 선생님은 몇 번 타고가요?"
"난 600번. 왜? 같이 타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리곤 다시 화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안내 화면이 야속하기만 했다. 젖은 옷을 입고있어 몸도 점점 추워지는 듯했다. 달달 몸을 떨며 팔을 비볐다. 택시는 커녕 그 흔한 버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은 깜깜하기만 했다. 이제 갓 7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추워?"
"그냥 조금요. 쌤은 괜찮아요? 닭살 돋았는데…."
괜찮다는듯 그가 살며시 웃어보였다. 그리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가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아."
"네?"
"… 같이 갈까?"
"어디를요?"
"음, 우리집."
기나긴 고민 끝에 말을 꺼낸 사람처럼 그는 망설이듯 대답을 했다. 그저 벙찐 채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듣진 마."
"아, 이상하게… 듣는 거 아니에요."
"비는 많이 오는데 버스는 안 오고, 택시도 안 잡히고… 좀 걱정이 돼서. 600번 버스는 7분 뒤면 오거든."
"… 그럼 나 선생님 집 가서 뭐해요?"
"몸 좀 녹이다 가. 빗줄기 좀 약해지면 데려다줄게."
*
그의 말대로 정확히 7분 뒤에 600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엔 버스 정류장 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다. 자연스레 지옥철이 연상되는 버스였다. 지옥버스…. 그래, 이건 지옥버스였다. 하필 비오는 날의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평소보다 두세 배로 많은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낑겨 간간이 숨만 내쉬며 어렵사리 버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탈출'이라는 말이 적합하게만 느껴졌다. 버스 안의 텁텁하고 습한 공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바깥 공기가 꽤나 시원했다. 비릿한 비냄새와 신선한 흙냄새가 섞인 듯한 오묘한 냄새가 풍겨왔다. 바로 조금만 가면 집이라는 그의 말에 아까와 같이 빠르게 뛰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비는 아마 내일까지 이어질듯 싶었다.
*
어색하게 신발을 벗곤 쭈뼛쭈뼛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남자 집이라곤 김종인네 집밖에 가본 적 없던 내가 다른 남자의 집에 와보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먼저 씻고 나오겠다던 그가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챙겨 화장실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째깍, 7시를 훌쩍 넘긴 시간…. 아무래도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 할 것만 같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누르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신호 연결음이 얼마 가지 않아 전화를 받은 엄마는 '여보세요?'가 아닌 '어디니?'로 첫 말을 뗐다.
"아, 나 여기… 친구네 집."
- 친구네 집? 어딘데?
"좀 멀어. 얼마 정도 걸리는진 정확히 모르겠는데…."
- 벚꽃은? 잘 봤고?
"응, 잘 봤어. 아, 우산 챙겨올 걸 그랬나 봐. 진짜 비가 올 들은 몰랐네…."
- 엄마가 뭐랬어. 비 온다고 우산 가져가라 했지? 하여간 말을 안 들어.
"그래도 교복은 많이 안 젖었어."
- 친구한테 우산 있었어? 다행이네. 언제 올 거야?
"음, 글쎄. 빗줄기 좀 약해지면 가려고…."
- 비 내일까지 온대. 밤엔 더 많이 온다는데 집에 어떻게 올래? 그냥 자고 와.
"어? 아…."
왠지 과외선생님의 집이라곤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을 해선 안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친구네 집이라며 대충 얼버무렸던 건데, 아무래도 괜한 짓이었던 것 같다. 밤길도 위험하고 비도 많이 오는데 그냥 하룻밤 거기서 자고 아침 일찍 집에 들렀다 등교를 하라는 엄마의 말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 알았어. 내일 일찍 갈게."
그렇게 하겠다 대답하는 수밖에.
*
가만히 거실을 둘러보다 살며시 그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심심하면 방 구경을 해도 좋다던 그의 말이 뒤늦게야 생각이 나서였다.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도 되나 싶었지만 이미 방문을 열어버린 이상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걱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방은 꽤나 깔끔했다. 하얀 가구와 브라운 계열의 가구들이 어우러져 제법 모던적인 느낌을 주는 듯했다. 딱 하나 의아한 점이 있다면, 그의 침대맡에 리락쿠마 인형이 하나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취향인진 잘 모르겠지만 왠지 웃음이 났다. 리락쿠마…. 내가 중학생 때 즐겨 쓰던 볼펜에 그려져있던 캐릭터였다.
구석엔 기타도 두 개 있었다. 거실에 피아노도 있던데… 그는 음악을 꽤나 좋아하는 듯했다.
"뭐해?"
"네? 아, 그냥… 구경이요. 방 구경."
"아아, 근데 내 방 되게 볼 거 없지 않아?"
"… 아니요. 리락쿠마 인형도 봤는걸요."
"… 아…."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손에 들린 수건으로 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침대에 털썩 앉는다. 하얀 반팔 티셔츠와 남색 아이다스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은 평소 봐왔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프리해 보였다.
"쌤, 저…"
"응?"
"엄마한테 전화 했는데요. 여기 친구 집이라 했거든요?"
"아, 응."
"……."
"하하, 자고 오라셔?"
"… 네에.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난 상관 없어."
"……."
"너만 괜찮으면 된 거지 뭐."
살풋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젖은 교복이 찝찝하기도 할 거고 어차피 자려면 편한 옷을 입어야 될 것 같다며 제 옷장을 뒤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다시 되돌릴 순 없는 것이었다.
"… 내 옷이 너한테 다 클텐데, 어쩌지."
"… 아, 괜찮아요.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옷장을 뒤적거리던 그가 마침내 내가 입을 옷가지를 꺼내 건넸다. 하얀 반팔 티셔츠와 까만 트레이닝 바지였다. 분명 바지는 몇 번 걷어야 할 것이었다. 그가 건네준 옷가지를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갑작스레 생겨난 궁금증에 다시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선생님, 기타 잘 쳐요?"
"기타?"
"네. 저기 기타 두 개 있잖아요. 아, 거실엔 피아노도 있던데…."
"내 입으로 잘 친다 하긴 좀 그렇고… 취미로 하는 거야. 기타도, 피아노도."
"정말요? 참, 김종인 걔도 피아노 좀 치는데."
"종인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구나.
"종인이랑 많이 친한 것 같더라. 둘이 언제부터 알던 사이야?"
"음…, 꽤 오래 됐어요. 초등학교, 중학교도 같이 다녔거든요."
"그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괜히 입술을 한 번 축이더니 다시 입술을 떼 말을 잇기 시작한다.
"종인이 좋은 애지?"
"네?"
"왠진 모르겠지만 난 항상 종인이랑 트러블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 종인이가 나를 많이 싫어하나봐."
"… 아닐걸요. 걔 괜히 질투나서 그러는 거예요."
"질투?"
"아, 질투… 라기보단 그냥 쌤이 부러워서? 첫 날 키가지고 발끈하는 거 보셨잖아요. 분명 쌤이 키도 크고 그러니까…"
"넌 종인이 좋아해?"
"네?"
그의 물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한 번 더 되묻게 됐다. 좋아… 하냐고 물었다. 분명 좋아하는 건 아닌데 선뜻 대답을 못하겠다.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꾸욱 다물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종인이가 너를…"
"……."
"음, 아니야."
"… 저 김종인 안 좋아해요."
"……."
"걔 맨날 저한테 장난만 치고, 틈만 나면 놀리고 그러거든요. 삐지기도 엄청 잘 삐지고. 뭐… 잘 삐지는 만큼 쉽게 풀리긴 하지만요."
"… 그렇구나."
"화도 잘 내요. 요즘들어 사소한 것에도 쉽게 화를 내는 것 같더라구요. 그럴 땐… 좀 짜증나기도 하고."
"……."
"어쨌든, 김종인을 좋아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
그저 내 말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이던 그가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몇 초 간의 침묵이 이어졌고, 더이상 할 말 없나 보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다시금 그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네?"
"나는 좋아?"
정말 예상치 못한 물음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유독 까맣다. … 선생님을 싫어할 이유는 없죠. 그렇다 해서 김종인이 싫다는 건 절대 아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도 같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것인지도 이해가 안 갔다. 쉬이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애매모호한 분위기에 괜히 입술만 바싹바싹 말랐다. 그저 침만 꼴깍 삼키며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오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살포시 포개졌다.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피해야겠단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다. 머릿속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가 된 지 오래였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촉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맞물린 입술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곧이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꽤나 이질적인 느낌에 서툴게 그를 받아냈다.
'특히 봄이 오면 더 사랑을 하고 싶어지는데요.'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첫 키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곤 하죠.'
'키스,'
'…….'
'하고 싶냐.'
'야, 괜찮아. 언젠간 사랑하는 사람이랑 첫 키스 하게 되겠지. 너무 조급해 할 필요 없어.'
왠지 모르게 갑자기 김종인 생각이 났다. 어디선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도 일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난, '첫 키스'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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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알짝 늦었죠? 원래 월요일에 오려 했는데 그날 마침 오티.. 지 뭐예요.. 하하...☆
이제 새 학기가 시작하기까지도 일주일이 안 남았네요. 방학과 2월은 왜이리 짧은 거죠...ㅠㅠㅠㅠㅠㅠ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