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2 (널 어떻게 할까)
그렇게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조차 모르겠을 만큼 특별한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혼자 등교를 하고 혼자 하교를 했다. 급식도 혼자 먹으려 했지만,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우리반으로 찾아와 같이 급식을 먹으러 가자 말하던 오세훈 탓에 단 둘이 급식실로 향해야 했다. 요즘들어 오세훈이 자꾸만 내게 친근하게 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혼자인 것보단 훨씬 나았다. 맞은편에 앉아 열심히 급식을 먹던 오세훈의 입에선 항상 김종인에 대한 말이 나왔다. 너희 도대체 화해는 언제 할 것이며, 언제쯤 다시 예전처럼 티격태격하며 지낼 것이냐는 한숨 섞인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물음에 난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동안 김종인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교실을 나설 일이 있으면 항상 뒷문을 이용했고, 최대한 복도 쪽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복도를 거닐다 녀석으로 보이는 뒷모습을 발견하면 일부러 걸음을 늦추거나 아예 다른 방향으로 발을 옮기기도 했다. 이래도 되려나 싶었지만 일단은 녀석을 마주하기가 어려울 듯했다. 녀석과 크게 싸운 뒤로 집에서 혼자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아무래도 김종인보단 나에게 잘못이 많은 것 같았다. 김종인을 알게 된 이래로 녀석이 그렇게 크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을 뿐더러,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종인은 그런 심한 짓을 할 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난 김종인을 믿지 못하고 멋대로 녀석을 몰아세운 셈이었다. 당연… 내가 잘못한 것이겠지.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김종인이 흔쾌히 받아줄진 미지수였지만, 일단 내 진심은 전하고 싶었다. 그때 널 의심하고 다짜고짜 몰아세워서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말이다.
과외수업이 있는 금요일은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입을 맞췄던 그날 이후로 그를 처음 마주하게 될 것이었으며, 열심히 피해다녔던 김종인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될 것이었다. 학교 수업시간 내내 저녁에 있을 과외수업 생각 탓에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그쪽에 신경을 가한 나머지, 졸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종인은 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며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냐 걱정스레 물어오던 그에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김종인을 만나 어색함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잘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녀석이 조금은 걱정되었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지도 궁금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다행히 그는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나름의 배려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의 실수였다고 치부하기에도 애매할 만큼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수업 내용에 관한 말들만 길게 늘어놓을 뿐이었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말투와는 다른 한층 차분히 내려앉은 말투와 목소리에 괜히 주눅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그니까, 여기 마지막 행이 거의 주제라 보면 돼.'
*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요일 저녁….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밖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가만히 침대에 드러누워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복습하기 위해 활짝 펴두었던 한국지리 문제집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공부를 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머릿속엔 헛생각이 뭉실뭉실 피어나기 바빴고, 공부 내용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어넣으려 애쓰면 마치 같은 극의 자석이라도 되는 양 튕겨나갈 뿐이었다. 그래서 머리도 좀 식힐 겸 잠시 휴식을 취하자 생각하고 침대에 누워있던 게… 벌써 세 시간이나 됐다. 어째 고3인데 공부를 더 안 하는 것만 같다. 고3에겐 공기놀이나 실뜨기도 재미있게 느껴진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다. 그냥 누워있기만 해도 재밌었고, 벽지에 규칙적으로 그려져있는 문양이 총 몇 개인지 세는 것마저 재밌었다.
"……."
휴대폰을 집어들어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온 연락이라곤 전부 게임 초대 메시지 뿐이었다. 분명 연락이 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괜한 행동이었나 보다. 아무 사진도, 상태메시지도 없는 녀석의 프로필이 허전하게 보였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친구 사이마저 못 하게 될 것만 같아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단단히 화가 난 김종인은 절대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을 듯하니, 아무래도 잘못이 더 많은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게… 맞는 것이겠지.
[뭐해?]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제일 흔한 두 글자를 입력할 수 있었다. 흡사 전남친/전여친이 보내올 법한 흔해빠진 문장이었다. 그리곤 심호흡을 크게 하며 전송 버튼을 꾸욱 눌렀다. 그와 동시에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물은 이미 엎어져버린 후였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짤막한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의 초조한 심정과도 깉았다. 두근두근….
답장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다. 안 와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왔으면 좋겠다.
*
결국 김종인에게선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다. 역시 괜한 짓이었다. 안그래도 화나있는 녀석의 신경을 더욱 돋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뭐하냐고 물어보는 건… 너무 눈치없는 행동이었던 것 같다. 내가 왜 그랬지….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괜한 오기가 생기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이미 보내버린 문자, 씹히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더 보내 보아도 손해볼 건 없을 듯했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흔해빠진 내용이 아닌, 내 의도를 직접적으로 전할 수 있을 만한 문자를…
[김종인, 이따 9시 쯤에 놀이터에서 잠깐 볼 수 있어?]
[아, 우리 어렸을 때 항상 놀던 그 놀이터야. 할 말 있어서..]
문자 주제에 길면 확인하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두 개로 나누어 보냈다.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할 것 같아 멋대로 약속을 잡아버린 건데… 사실 녀석이 약속 장소로 나와줄지도 미지수였다. 문자 답장도 보내지 않는 놈이 과연 나와줄까 불안하긴 했지만 일단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날씨가 많이 풀리긴 했지만, 분명 저녁이니 밖은 쌀쌀할 것이었다.
*
예상대로 놀이터에 먼저 도착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10분 정도 남아있었다. 가만히 그네에 앉아 천천히 그네를 움직였다. 삐그덕거리는 소리에 약간 소름이 끼쳤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만 같아 기분은 좋았다. 여기서 김종인을 처음 만났었는데…. 한없이 순수하고 다정하기만 하던 녀석이 왜이리 무뚝뚝하게 변한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변한 모습이 더욱 익숙했다. 갑자기 잘해주면 이상했고, 갑자기 따스히 웃어주면 어색했다. 일단 지금은… 틱틱거리는 김종인의 말투마저 그리웠다.
쌀쌀한 저녁바람이 차가워, 집업에 달린 후드를 썼다. 모자를 쓰고 안 쓰고는 천지차이라더니…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모자 하나만 썼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따뜻했다. 김종인은 언제 오려나. 자꾸만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게 됐다. 1분 간격으로 확인하던 게, 지금은 어느새 30초가 되어있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올수록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네의 손잡이를 잡고있는 손이 시려워 소매 속으로 손을 쏘옥 집어넣곤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었다. 주머니 속엔 김종인이 화이트데이 선물로 줬던 사탕 몇 개가 들어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던 사탕이 겉옷 주머니 속에도 들어있었다니….
포도맛 사탕을 하나 꺼내 껍질을 깠다. 껍질 속에 들어있는 보랏빛 사탕이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손가락으로 사탕을 꺼내 입 속에 쏘옥 집어넣곤 혀로 사탕을 굴렸다. 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가득 메우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 으음…."
아무래도 김종인은 안 올 생각인 듯했다. 약속을 잡으면 항상 10분 전엔 먼저 나와있던 녀석이, 약속 시간까지 3분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도 모습을 안 비추는 걸 보면 말이다. 내 문자를 보고도 그냥 무시를 하는 건지, 아님 아직 내 문자를 확인하지 않은 건지…. 둘 중 하나였다. 왠지 헛걸음을 친 것 같다는 생각에 허망감이 들어 사탕을 와작 씹어 먹었다. 사탕 속에 들어있던 시럽이 짭조름했다. 역시 썬키스트 사탕은 단 맛 뒤에 짠 맛이…
"… 아."
머릿속으로 썬키스트 사탕에 대해 평론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쓰고있는 후드 끝을 살짝 잡아당기는 손길이 갑작스레 느껴져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 녹아버린 사탕을 꿀꺽 삼키곤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향한 곳엔 검정색 스냅백을 꾸욱 눌러 쓴 김종인이 있었다. 갑작스레 녀석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얼떨떨해,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와주었다. 내 문자에 대한 답장은 해주지 않았지만 이렇게 약속 장소까지 나와주었다는 사실 하나가 그냥 고마웠다.
"왜 불렀어."
웅얼거리는 듯한 녀석의 목소리가 공기중에서 흩어졌다. 오랜만에 녀석의 목소리를 듣고, 오랜만에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는 정말이지 반가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종인은 제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듯 스냅백을 푸욱 눌러 쓴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조심스레 시선을 올려보이자, 녀석이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냅백 챙의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 윗부분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입 부분은 정확히 보였다. 보기에도 따갑고 쓰라려 보이는 상처가 입술의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다른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김종인과 다투고 난 다음날 교실에 들어섰을 때, 얼굴 가득히 자리한 상처를 대충 데일밴드로 가려놓았던 한 남학생의 얼굴…. 바로 전날 송민희와 함께 조퇴를 했던 남학생이었다.
"… 잠깐만. 너 얼굴이 왜이래? 누구랑 싸웠어? 좀 봐봐."
손을 뻗어 녀석의 얼굴을 감쌌다. 이마저도 피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녀석은 얌전히 있어주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꽤나 군데군데 여러이 자리잡고 있는 상처들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왜 이러는 거야? 너 누구랑 치고받고 싸운 거야?"
"싸운 거 아니야. 우리반 애들 싸움 말리다가 그냥…"
"……."
"싸운 거 아니라고."
"… 알았어."
제법 틱틱대듯 말하던 녀석이 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곤 내 옆에 있는 그네에 털썩 앉았다. 어렸을 적과는 다르게 꽤나 낮아진 그네에 앉아있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따라서 그네에 앉았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녀석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건네야겠단 생각이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잘 지냈어?"
"못 지낼 이유 없잖아."
"……."
"넌."
"응?"
"잘 지냈냐고."
"… 나야 뭐."
"금요일에 과외 했어?"
"아…, 응. 했어."
"…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로 놀이터 모래를 툭툭 건드리는 김종인의 발끝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하고 싶었던 말을… 녀석을 여기로 불러낸 이유를 꺼내야겠지.
"… 내가 널 왜 불렀냐면,"
"……."
"미안하다 말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
"의심하고 오해해서 미안. 내가 그땐 정신이 너무 없었나 봐. 너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
"… 선생님 집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잖아."
"응."
"난 그걸 너한테만 말해줬는데, 그게 한순간에 과장이 돼서 싹 퍼졌길래 너를 의심했던 거야.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
"… 진짜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난 너 그렇게 화내는 것도 처음 봤고… 또…"
괜히 감정이 벅차올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긴 싫어 천천히 목을 가다듬었다. 일단 녀석을 의심해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고, 미안했다. 생각해보면 김종인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나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난 아무렇지 않게 녀석을 소문의 근원으로 오해해버리고 말았다. 그게 너무나도 싫었고, 내 자신이 밉기만 했다.
"너 울어?"
"… 으응…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럴 땐 눈치도 빠르다.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은 건지, 아님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나를 눈치챈 건지, 녀석이 내 쪽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그 물음에 괜히 울음이 밀려와 어린 아이처럼 엉엉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김종인이 작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왜 우는데."
"… 몰라, 나도."
"고개 들어봐."
"… 왜…, 싫어…."
"아까부터 모자는 왜 쓰고있는 건데. 추워?"
손가락으로 내가 쓰고있는 후드를 톡톡 건드리며 묻는 녀석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어, 고개 좀 들어보라는 녀석의 말에도 고개를 더욱 떨궜다. 그런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던 녀석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춰왔다. 아래쪽으로 향해있던 내 시선에 녀석의 운동화가 들어왔다. 이제 어느 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여 보아도 온통 김종인의 모습이 보일 것이었다. 그게 어색하기도 하고 괜히 가슴이 떨리기도 해 몹시 난처할 따름이었다.
"나 봐봐."
"… 싫다니까."
"왜 싫어. 울어서 못생겨진 얼굴 좀 보자."
"… 아, 하지마…."
"뭘 하지마."
장난기 섞인 녀석의 목소리가 왠지 다른 때보다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자꾸 마음 한 구석이 찌릿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게, 기분이 이상했다.
푸스스 웃어보이던 녀석이 푸욱 눌러 쓰고있던 스냅백을 살짝 고쳐 쓰곤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녀석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쌍꺼풀 라인이 유난히 더 짙어 보였다. 표정없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곧이어 천천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나도 심한 말 해서 미안."
"……."
"나 아니라고 하는데도 자꾸 의심하는 게 너무 짜증나서 그랬어."
"……."
"미안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녀석이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그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너랑 나랑 똑같이 잘못한 거니까, 이제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
"……."
"찔찔이처럼 울지도 말고."
"… 안 울어."
"방금도 울었잖아."
"… 아니거든."
"코 빨개졌어, 이 아가씨야."
계속 안 울었다며 발뺌하기에도 우스워 그냥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못 말리겠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리곤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듯하더니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다시금 입을 열기 시작한다.
"포도 냄새나."
"응?"
"포도 먹었어?"
"… 아, 포도맛 사탕 먹었어."
"어쩐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굽히고 있던 다리를 펴곤 내 이마에 살짝 딱밤을 주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일부러 아픈 척을 해보이며 이마를 문지르자 녀석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을 따라잡으려 빠르게 걸음을 놀렸고, 일부러 천천히 걷는듯 보이던 녀석이 내 쪽을 바라보며 제법 짜증스레 말을 내뱉었다.
"빨리 좀 와."
*
지난 며칠 동안은 혼지 등하교를 했다. 급식은 다른 친구들과 먹었고, 나 대신 오세훈을 옆 반으로 보냈다. 가끔가다 급식실에서 오세훈과 단 둘이 밥을 먹는 모습이 보이면 괜히 화가 나면서도 질투가 났다. 내가 의도한 일이긴 했지만, 그런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엄청난 후회감에 시달려야 했다. 혼자 먹게 놔둘 순 없어 내 아바타로 오세훈을 보냈던 건데… 오히려 그게 더 좋지 않은 것만 같았다.
야자를 하고 집으로 향할 땐 스토커마냥 몰래 뒤에 숨어서 천천히 뒤를 밟곤 했다.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오세훈에게 부탁을 하기가 조금은 불안했다. 안그래도 둘이 급식도 같이 먹는데, 집까지 같이 가게 된다면 왠지 조만간 사랑의 씨앗이 싹틀 것만 같은 빌어먹을 불안감이 스멀스멀 생겨난달까. 어쨌든 오세훈에게 맡기기보다는 집까지 무사히 잘 들어가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무료하게 책상에 앉아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하기 위해 억지로 문제집을 펴놓고 있던 내게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뭐 하냐 묻는 짧은 문자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 결국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지금 딱히 하는 거 없어. 간간이 네 생각 좀 하는 중이야. … 솔직하고 싶은데, 절대 이렇게 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 곧이어, 어린 시절에 자주 뛰놀던 놀이터에서 9시에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서둘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얼굴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스냅백을 푸욱 눌러 쓴 채.
*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9시가 살짝 넘은 시각이었다. 예상대로 놀이터엔 아무도 없었고, 어떠한 불빛도 비치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그러나 그네에 앉아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곧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 괜히 마음이 복잡해져 한숨을 작게 내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후드를 뒤집어 쓰고있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미안하다 사과를 전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면서도 여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 아직까지 쌓여있던 약간의 짜증감과 분노감이 한층 누그러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한 번 더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너 울어?'
'… 으응…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부모님께 야단을 맞은 어린 아이라도 되는 양 엉엉 울어버리는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올 뻔했다. 분명 달래줘야 할 것 같긴 한데, 왠지 자꾸만 장난을 걸고 싶다는 나쁜 마음이 들었다.
네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너를 빤히 바라보는 내 심정이 어땠을지, 너는 아마 죽어도 모를 거다.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다는 기분이 강아지가 아닌 너한테 들 줄이야.
뒤에서 봐도 귀엽고, 위에서 봐도 귀엽고, 밑에서 봐도 귀엽고, 정면에서 보면 더 귀여운 너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우는 건 싫은데, 우는 모습마저 귀엽고 예뻐서 계속 계속 보고 싶어지는 모순적인 감정을 내가 느끼고 있어. 얄궂다 생각하지마. 다 네가 좋아서 그래.
'나 봐봐.'
'… 싫다니까.'
'왜 싫어. 울어서 못생겨진 얼굴 좀 보자.'
'… 아, 하지마….'
'뭘 하지마.'
미치겠다. 진짜 어떡하지. 너무 귀엽잖아. 사람이 이렇게 귀여울 수도 있는 건가. 아님 그냥 너라서 귀여운 건가. 내가 너한테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나 봐.
울어서 빨개진 코가 마치 루돌프 같았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는 작은 몸을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안그래도 여린 애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 그런 애한테 내 화를 이기지 못하고 무작정 심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뼈저리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안아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데, 울리지나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생각해보면 너를 울리는 장본인은 꼭 매번… 나인 것 같았다.
'포도 냄새나.'
'응?'
'포도 먹었어?'
'… 아, 포도맛 사탕 먹었어.'
'어쩐지.'
달달한 향이 네 근처에서 솔솔 풍겨왔다. 그와 동시에 멀쩡하던 정신마저 어지러워지면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간 뭔가 위험해질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너한테서 내가 좋아하는 포도 향이 난다는 건… 좀 위험하잖아.
먼저 걸음을 옮기자, 뒤에선 약간 조급해 보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빨리 좀 오라 타박을 주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걸음을 더욱 빨리 해온다. 그 모습마저… 좋아서 그냥 미칠 것 같았다. 왜이리 귀여운 건데. 너무 좋잖아…. 내가 너한테 빠져도 아주 단단히 빠졌나 보다.
널 어떻게 할까,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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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주바보 김종인이네요..
참, 전 글이 초록글에 올라갔었더라구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잘 것 없는 제 글이.. 어떻게.. 하.. 감격스러워요. 다 독자 여러분들 덕분이에요! 더 좋은 글로 보답해드릴게요ㅠㅠㅠㅠㅠㅠㅠㅠ 제가 드릴 건 그것밖에 없네요..☆
스폰지밥/러블리/두부/종이니/기화/핫초코/공삼이육/네네스노윙/지블리/로운/똥잠/알콩/아가야/Paper/세젤빛/꽯뚧쐛뢟/얍얍/늘봄/종이페이퍼/고구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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