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0 (About You)
"……."
아직 달아올라있는 입술을 두어 번 어루만지다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와 키스… 를 해버렸다. 딱히 생각없는 저녁 식사를 하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서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처음 느껴보는 묘한 촉감과 키스가 끝난 후 미안하다 말하던 낮은 목소리,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어색함까지…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좋았던 건 아니다. 그렇다 해서 그리 싫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설렘조차 없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있지만 분명 설렘의 감정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 자?"
"… 아니요. 아직이요."
"그래…. 늦었는데 얼른 자. 피곤할 거야."
갑작스레 방문이 열렸다. 자는 척을 해볼까 했지만 그가 말을 걸어오는 탓에 눈 감을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깜깜하던 방 안에 거실의 희미한 불빛이 새어들어왔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 말하는 그에게 애써 고개를 저어보였다.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처진 듯한 그의 모습에, 괜히 내가 더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제법 풀이 죽은 듯한 표정은 아까 집에 같이 가자 말할 때의 표정과 같았다.
"… 잘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지? 알람 맞춰놨어?"
"네에…. 걱정마세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잘 자라는 말을 끝으로 방문을 닫았다. 다시 방이 깜깜해졌다. 잠은 당연히 오지 않을 것이었다. 눈을 감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깜깜한 어둠 속엔 그가 있었다. 자꾸만 아른거리는 그의 모습에 머리가 아파왔다. 제법 넓은 침대가 영 어색했다. 머리맡에 놓인 리락쿠마 인형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렇게 몸을 몇 번 뒤척였던 것 같다. 그저 한숨만 내쉬며 애꿎은 이불보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협탁에 놓여있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조차 귀찮았지만 대충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건지 휴대폰 화면이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사진 왜 안 보내]
[나 방금 집 도착했다. 너도 집?]
김종인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연속으로 두 통을 보내온 녀석에게 답장을 보내려다 그냥 휴대폰 홀드를 닫았다. 녀석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내일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
맞춰놓은 알람 시간보다 더욱 늦게 눈이 뜨였다. 서둘러 교복으로 갈아입곤 대충 머리를 정돈하며 살금살금 거실로 발을 내딛었다. 무료하게 앉아 아침 뉴스를 시청하고 있던 그에게 머쓱히 인사를 하곤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던 그의 호의를 애써 사양하곤 황급히 현관을 나섰다. 다행히 비는 그쳐있었다. 하늘은 그리 맑지 않았지만 아침 공기는 제법 산뜻했다.
*
왜이리 늦게 왔냐, 엄마가 어제 분명 아침 일찍 들어오라 하지 않았냐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대던 엄마에게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말하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비 맞은 상태로 꽤 오랫동안 있었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조금 별로였다. 약간의 감기 기운도 있는듯 맑은 콧물도 흐르는 것 같았다.
*
혀를 끌끌 차며 오늘 하루 집에서 쉬라는 엄마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학교도 안 가고 집에서 쉴 만큼 그리 심한 감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등교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할 생각이 아니라는 건 당연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어제 일이 자꾸만 후회로 다가왔고, 그로 인한 책임은 모두 내게 있는 듯했다.
[왜? 어디가 아픈데]
아파서 오늘 학교에 못 갈 것 같다는 내 문자에 녀석의 답장이 도착했다. 사실 감기몸살이라 하기엔 살짝 양심에 찔려, 쉬이 자판을 입력해나가기가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던 건지,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 두어 번 목을 가다듬곤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프다며.
"아, 응…."
- 어디 아픈데?
"… 생리통…."
- … 아, 알았어.
감기몸살이라 했다간 목소리가 너무 말짱하다 생각할 것도 같아 일부러 생리통이라 답했다. 그러자 녀석은 알았다는 대답만을 남기곤 먼저 통화를 뚝 끊었다. 화면이 까만 휴대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곤 침대에 편히 누워 눈을 꼬옥 감았다. 아무래도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
꿈 하나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이렇게 길게 자보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꽤나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몇 번 움직이곤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시간은 벌써 5시 40분…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 점심을 모두 먹지 않아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팠다. 배가 너무나도 고파 꼬르륵거리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역시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해진 듯했다. 밥이나 좀 먹어야겠단 생각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문을 슬쩍 열었다.
"… 아, 깜짝이야."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느낌이 왠지 이질적이었다. 밖에서도 누가 손잡이를 같이 돌리는 듯한 느낌이랄까….
방문 밖엔 김종인이 서있었다. 교복을 입고있는 걸 보니 학교에서 바로 온 듯했고, 녀석의 손엔 편의점 봉투가 들려있었다.
"너희 어머니가 너 자고 있다 하시길래 조용히 들어가려 했는데, 안 자네."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은 김종인이 나를 스윽 지나쳐 방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녀석이 건네준 편의점 봉투 속엔 따뜻하게 데워진 물과 단 음식들이 몇 개 담겨있었다. 색깔별로 들어있는 키세스 초콜릿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아침에 녀석에게 했던 작은 거짓말이 떠올랐다. 생리통….
바닥에 털썩 앉아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어제 있었던 일을 분명 다 털어놓겠다 다짐했지만 왠지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벚꽃은 잘 봤냐. 사진 보내라니까 보내지도 않고."
"… 아, 잘 봤지. 진짜 예쁘더라."
"어디 보자."
녀석이 손을 뻗어 침대 위에 놓여있던 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어차피 갤러리는 잠겨있으니 쉽게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는데, 문득 저번에 녀석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줘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 휴대폰 홀드를 열곤 갤러리를 꾸욱 누르는 녀석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예쁘네, 벚꽃."
"그치…. 진짜 예쁘더라."
숨길 건 없었지만서도 왠지 불안했다.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며 구경을 하는 녀석의 모습으로 자꾸만 시선이 옮겨졌다. 열심히 사진을 넘기던 김종인의 손가락이 순간 멈췄고, 잠시 뜸을 들이던 녀석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박찬열이랑 셀카 찍었네."
"… 아, 응."
무심하게 사진을 들여다보는 김종인의 입에선 더이상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다음 사진으로 넘기는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제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박찬열의 사진을 보게 돼 기분이 나빠졌을까…. 녀석의 표정과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제 비 진짜 많이 오던데, 넌 일찍 들어갔냐."
"아…."
"잠도 일찍 자지 않았어?. 문자 보내도 답도 없ㄱ…"
"… 나 선생님 집에서 잤어."
순식간에 분위기가 추욱 쳐졌다. 공기마저 무거워진 듯한 기분에 침을 꼴깍 삼키곤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있는 녀석의 시선을 마주치긴 힘들 것 같아 애써 바닥을 바라보며.
"… 너 주저리 주저리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냥 결론만 말할게."
"……."
"… 어쩌다 보니… 키스도 하게 됐어."
"……."
"… 근데 진짜 아무 일도 없었고, 잠도 따로 잤어. 오해하진… 마."
"알아. 나한테 일일이 설명 안 해도 돼. 네가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거 알아."
역시 무표정인 녀석은 그저 침착하기만 했다. 너 정신이 있는 거냐, 어떻게 여자애가 남자 집에 함부로 들어가 잠을 잘 수가 있냐며 타박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미동 없이 내 말을 들어주고만 있는 녀석을 흘끗 바라보곤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어젠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자꾸 생각나더라고…."
"……."
"혼자 끙끙 앓기엔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너한테 털어놓는 거야. 아무래도 난 너랑 가장 친하니까…."
"… 응."
왜인지 녀석은 자꾸만 말을 아끼는 듯했다. 관심이 없어서 신경을 안 쓰는 것도 같았다. 그저 묵묵히 허공만 바라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듯 싶던 김종인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내일 보자. 내 머리를 꾸욱 누르며 녀석이 말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내 방을 나선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
어제 오후에 잠을 실컷 자서 그런지 밤엔 잠이 안 왔다. 어쩔 수 없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 했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까지 매곤 책가방을 멨다. 책상 위엔 어제 녀석이 건네주고 간 편의점 봉투가 놓여있었다. 어젠 정신이 없어 고맙단 인사조차 못했는데, 아쉬운대로 오늘이라도 전해줘야겠다.
어제 녀석이 줬던 초콜릿을 몇 개 집어든 채 일부러 5분 정도 일찍 집을 나섰다.
*
시간을 딱 맞춰 도착한 김종인과 나란히 등교를 했다. 어제 전해준 거 고마워. 고마우면 치킨 사. 여느 때와 다름없는 녀석의 대답에 살풋 웃음이 터졌다. 고맙다 말하면 녀석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고마우면 치킨 사. 고마우면 나중에 세 배로 갚아. 고마우면 ~해.
어제 야자는 어쩌고 우리집에 왔냐는 물음에 녀석은 그냥 몰래 말없이 째고 왔다 말했다. 야자가 하기 싫었다나 뭐라나…. 네가 야자 하고 싶은 날이 있긴 있냐는 물음에 녀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웃겨서 또 웃음을 터뜨렸다.
*
이따 점심시간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녀석은 제 교실로 쏘옥 들어갔다. 어제 하루 학교를 안 가고 집에서 쉬었더니 오늘 역시 등교를 하기가 싫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떼며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루 쉬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교실 안은 제법 낯선 곳이 되어버린 듯했다. 4월의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냉기가 감도는 것도 같았다. 물론 내 착각일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저들끼리 뭉쳐있던 아이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진 알 수 없었다. 어제 본 드라마 속 여자주인의 립스틱 색상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 말싸움을 벌이는 건지, 몇 주 전에 결혼을 하신 사회문화선생님이 속도위반이었냐, 아니었냐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 건지… 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애써 신경을 끄려 했지만, 자꾸만 내게 많은 시선들이 왔다갔다했다.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아닌지 분간도차 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저들끼리 조용조용 수군거리기 바빴다. 왜. 뭔데 뭐. 나도 같이 알자.
"대박이다. 대학생이랑?"
"그런가봐. 존나 능력 좋지 않냐?"
"능력 좋은 건 그 대학생 아니냐? 어떻게 고딩을 꼬셔."
"몰라. 어쨌든 둘 다 능력자인 건 맞는듯."
사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라는 건 장담할 수 있었다. 내가 자리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저들만의 대화를 끊지 않던 무리들 중 하나가 슬쩍 내게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제법 얄팍하게 생긴 남학생이었다.
"야, 너 대학생이랑 잤다며?"
"뭐?"
"존나 능력있다, 너. 대학생 어떻게 꼬셨어? 얼굴은 잘생겼어? 키는 커? 아, 테크닉은… 좋냐?"
슬쩍 눈치를 보며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낄낄거리는 무리들도 기분이 나빴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나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누가 그래?"
"글쎄? 누가 그러더라고. 나도 들은 거라 잘 모르겠는데…."
곧이어 예비종이 울렸다. 아쉽다는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남학생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제일 먼저 퍼뜨린 건지 알고 싶었다. 물론 그의 집에서 잔 건 사실이었지만, 소문은 지나치게 과장이 되어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것도 나와 박찬열, 그리고 김종인 뿐이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김종인한테만 털어놓은 건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은 자꾸만 같은 곳을 돌고 돌아, 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난 분명 김종인한테만 말을 해줬어. 근데 다음날 학교에 와보니 반 애들이 다 알고 있어. 이게 도대체 무슨 기이한 상황이란 말인가….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녀석에게 의심이 갔다. 김종인이 그럴 리 없어. 김종인은 아닐 거야. 김종인은 아니겠지? 김종인일 수도 있나? 김종인일까? 김종인… 인가. 김종인이네. 점점 녀석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약해져갔다. 분명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의심의 화살을 녀석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그거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니라고 너한테 털어놓은 거 아니란 말이야. 네가 아무리 박찬열을 싫어한다지만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박찬열을 싫어하는 만큼 나도 싫어하는 거야? 너 진짜 너무해. 어제 내 말 듣고 넌 무슨 생각 했어? 아, 이건 나만 알기 아쉬우니까 애들한테 퍼뜨려야겠다. 이딴식으로 생각했어?
*
1교시가 무슨 시간이었는지 생각도 안 날 만큼 그저 착잡했다. 내가 알던 김종인은 함부로 입을 털고 다니는 사람이었다는 걸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았다. 네가 이렇게 입이 가벼운 애인진 몰랐다, 김종인아. 몰라봐서 미안해. 이제야 너를 알게 되었어. 넌 그냥 장난이었다 하겠지. 넌 또 그냥 넘어가려 하겠지. 어이가 없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충격 그 자체였다.
쉬는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옆반인 녀석의 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오세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종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곤 아무렇지 않게 녀석의 반으로 들어갔다.
"왜? 또 게임하ㄷ… 어, 안녕."
나를 바라보며 건네는 오세훈의 인사를 애써 무시하곤 김종인의 팔을 잡았다.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며 왜그러냐 묻는 녀석에게 잠시 할 말이 있다 답했다. 여기서 하긴 좀 그렇고, 잠깐 밖에 좀 나가자며 말이다.
*
학생들이 자주 오지 않는 학교 뒤편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여기서 대화를 하는 게 가장 편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끌고 가는 거냐며 짜증 아닌 짜증을 내뱉는 녀석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놔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녀석의 뺨에 내 손이 거칠게 스쳤다. 찰싹- 하는 마찰음과 함께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만 같았다. 얼얼한 왼쪽 뺨을 어루만지던 김종인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뭐하는 거야?"
"그걸 몰라ㅅ…"
"왜이러는 거냐고."
"그게 지금 네가 할 말이야? 너 진짜 너무하다는 생각 안 해?"
"뭐?"
그저 차갑게 굳은 녀석을 빤히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와중에 모르는 척을 한다는 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내가 박찬열이랑 같이 잤다 했어?"
"……."
"박찬열 집에서 잤다 했지, 같이 잤단 소린 안 했어."
"무슨 소리야?"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난 네가 이렇게 함부로 입 터는 애인 줄 오늘 처음 알았어."
"아니, 무슨 소리냐고. 좀 알아 듣게 말해봐."
"누구한테 먼저 퍼뜨렸어? 나랑 박찬열이랑 잤다는 헛소문 퍼뜨리면 너한테 이득 되는 게 뭔데?"
녀석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정작 화를 낼 사람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꽤나 많이 화가 난듯 보였다. 김종인은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가식적이었다. 저번에 녀석의 집에서 의미 모를 설렘을 느꼈었다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녀석이 미웠다.
"대충 알겠어. 네가 뭘 말하는 건지."
"……."
"너에 대한 뭔 이상한 소문이 퍼졌나 본데, 그거 퍼뜨린 사람 나 아니야."
"… 넌 진짜 끝까지 거짓말이구나."
"거짓말 아니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
"널 어떻게 믿어? 어제 내가 했던 말 안 믿고 헛소문 퍼뜨린 것도 너잖아. 근데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내가 바보야?"
"야."
"너 진짜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야. 너랑 내가 알고 지내온 게 벌써 몇 년인데, 네가 어떻게 이래?"
"야, ○○○."
"난 그래도 항상 너 믿었어. 근데 뒷통수를 쳐도 어쩜 이렇게 쳐? 그동안 너한테 난 뭐였는ㄷ…"
"씨발, 나 아니라고!"
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있던 탓인지 녀석의 입술엔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제법 크게 소리친 녀석 탓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내 앞에선 욕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녀석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게 조금은 낯설고 두려워 고개를 떨구었다. 메말라있던 눈가가 조금씩 촉촉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녀?"
"……."
"아니라 해도 안 믿을 거면서 여기까지 날 왜 끌고 왔어?"
"……."
"솔직히 말해서, 그런 소문까지 퍼뜨리고 다닐 만큼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은 줄 알아?"
"……."
"네가 박찬열이랑 손을 잡든 입술을 비비든 침대를 뒹굴든, 내가 알 바야?"
"……."
"씨발, 내가 무슨 상관이야!"
"……."
"나는 너 믿는데 너는 왜 날 안 믿어?"
"……."
"박찬열이나 너나, 둘 다 똑같아."
"……."
"둘 다 존나 싫어."
빨갛게 달아오른 녀석의 왼쪽 뺨이 더욱 붉어진 듯했다. 차갑게 말을 내뱉곤 성큼성큼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녀석을 멍히니 바라보다 벤치에 털썩 앉았다. 저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내 앞에선 일체 욕을 않던 김종인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자꾸, 나는 너를 믿는데 너는 왜 날 안 믿냐는 녀석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크나큰 실수를 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눈물이 차올랐다. 2교시를 알리는 수업종이 쳤음에도 불구하고 교실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
2교시, 3교시, 4교시 모두 담당선생님께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보건실에 누워있었다. 머리가 아파서 왔다는 내 말에 보건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열은 없는데….
점심 먹을 기운도 없어 바로 급식실로 향하지 않고 교실로 향했다. 마음 편히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당장 여기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책상에 엎드려 훌쩍거리는 처량맞은 짓은 더더욱 하기 싫었다. 어차피 지금 책상에 앉아 책을 펴봤자 공부는 안될 것이었고, 할 것도 없으니 출석부 정리나 해야겠단 생각에 교탁 위에 놓여있던 출석부를 펼쳤다. 3교시를 마치고 조퇴한 학생이 두 명이나 있었다. 별 존재감 없던 남학생과 송민희였다.
*
웬일인지 그 이후로 교실에선 나에 대한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은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만큼 시간은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냥 신경을 꺼두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테지.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너무나도 고팠다. 혼자 석식을 먹을 바에야 차라리 매점에서 빵을 사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소보루빵 하나와 바나나우유를 사서 먹었다.
그리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엔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식혔다.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는 멜로디가 참으로 좋았다. 기분은 그리 썩 좋지 않았지만 나름 괜찮았다.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수학문제도 제법 몇 개 풀리는 걸 보면 말이다.
학교에서의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어차피 기다리고 있을 사람도 없으니 책가방을 천천히 싸도 되겠다는 생각에 조금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사물함 속에서 문제집 몇 권을 꺼내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문단속 담당인 남학생이 내가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괜히 미안해져 서둘러 가방 지퍼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문단속 담당인 학생만 봐도 저절로 김종인이 떠올랐다. 녀석도 문단속 담당이라 했는데….
"… 어…."
"안녕."
서둘러 가방을 메곤 교실을 나섰다. 그러다 뒷문에 기대 서있던 어느 남학생과 마주쳐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안녕.'이라 인사를 건네온 그는 다름아닌 오세훈이었다. 그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오세훈을 올려다 보자, 녀석이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집에 같이 가자."
"… 어?"
"싫어?"
"…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김종인 오늘 4교시까지만 하고 조퇴해서 너 혼자 가야 해. 혼자 가는 것보단 나랑 같이 가는 게 더 낫지 않아?"
김종인이 4교시를 마치고 조퇴를 했다 말하는 오세훈에, 그저 벙찐 채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제법 그럴 듯한 말을 내뱉는 녀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녀석이 왜 조퇴를 한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어?"
"너 김종인이랑 싸웠어?"
오세훈의 목소리가 제법 조심스러웠다. 녀석의 물음에 그저 묵묵히 걷기만 하자, 곧이어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알았어. 안 물을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오세훈과 같이 하교를 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색한 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녀석과 별로 할 말도 없었기에 그저 머쓱히 그에 따른 대답만 해줄 수밖에 없었다. 집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오세훈은 우리집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녀석에게 고맙다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인사를 하곤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키세스 초콜릿 하나를 건넸다.
"아, 고마워."
"그래. 너도 잘 가."
"그리고,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김종인이랑 꼭 화해해."
"… 아, 응."
"난 너희 둘 진짜 어울린다 생각하거든."
"……."
"갈게."
의미 모를 말을 던져놓고 오세훈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난 또다시 김종인을 떠올렸다. 제가 가야할 방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를 데려다주던….
사소한 것에서 자꾸만 난 김종인을 떠올렸다. 내 일상의 거의 모든 부분엔 녀석이 포함되어 있었다. 치킨을 먹을 땐 목부터 먹어야 한다는 녀석의 말과, TV 소리는 13이 가장 적당하다는 녀석의 말이 마치 법이라도 되는듯 난 항상 녀석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렇게 내 모든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인데….
내일부턴 또다시 등하교를 혼자 해야겠지. 김종인은 더이상 내게 먼저 다가와주지 않을 거고, 아예 벽을 만들 거야.
… 김종인, 미안해. 난 맨날 너한테 미안할 짓만 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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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몇 시간만에 다시 찾아왔네요. 다들 저녁은 드셨나요? 전 배부르게 먹었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