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1 (너에겐 들리지 않는 혼잣말)
비가 지나치게 쏟아져 내리는 어느 오후였다. 이른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밖은 어두컴컴했다. 햇살 한 줄기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세찬 빗줄기들이 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빗물로 흠뻑 젖었다. 비릿한 비 냄새가 코끝을 찌르듯 풍겨왔다. 문득, 아침잠을 깨우던 어느 뉴스의 여자 앵커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이번 태풍은 지난 태풍들과는 달리 세력이 대단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오늘 하루는 밖에 나가는 걸 삼가야 하며, 창문엔…'
시들시들한 꽃잎과 연약하게 부러진 줄기에서 바람의 흔적이 고즈란히 묻어났다. 줄기가 꺾인 꽃 하나를 집어들어 손으로 꽃잎을 어루만졌다. 패랭이꽃이었다. 짙은 자줏빛이 마치 붉은 피와도 같았다.
우산 하나 없이 거센 빗줄기 사이를 걸었다. 교복은 이미 흠뻑 젖어 제법 묵직해진 지 오래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하얀 운동화가 더러웠다. 분명 흙탕물을 밟았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화의 군데군데엔 더러운 흙먼지들이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만히 빗길을 걷기만 하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역시 아무런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그저 까만 바탕화면에 어플 몇 개, 큼지막한 시계 위젯…. 그것이 다였다. 요새 도통 문자도, 전화도 없는 너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두 손으로 잡았다. 수많은 빗방울들이 휴대폰 화면에 후두둑 떨어져 화면이 지저분하게 보였다. 화면에 맺힌 물방울들로 인해 자판이 제대로 눌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깜빡거리는 커서 뒤로 무슨 말을 입력해야 할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라고 하지. 어디냐고 할까. 누구랑 있냐고 할까. 보고 싶다고 할까.
정신을 차려봤을 때 난 물 속이었다.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있는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처절하게 느껴졌다. 분명 수영은 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이상하게도 내 주변엔 아무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 흔한 구름 한 점도 없었고, 그 흔한 아파트 단지도 없었다. 분명 낮이었지만 하늘은 어투컴컴했다. 태풍이라면서 바람조차도 불지 않았다. 그저 거센 빗줄기에 어느새 불어나버린 개울물에 나만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 살려주세요!'
들릴 리도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나 혼자 남겨져버려,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럴 땐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TV에서 보았던 긴급 상황에서의 대처 방법 또한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나로 정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쯤, 저 멀리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네 모습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가슴까지 늘어뜨린 찰랑이는 긴 머리가, 바람 하나 없는 차가운 공간 속에서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더욱 짙고 까만,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보고있었다.
'… 야! ○○○!'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네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그 이름이 네 이름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 사실 아무 표정 없는 네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감정이 없었다. 몰랐는데, 옆엔 박찬열도 있었다. 서로 맞잡고있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박찬열 손에 네 손이 잡힌 것이었다. 큼지막한 손이 감싸고 있는 네 하얀 손이 희미하게 보였다. 둘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려달라 손을 내미는 나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차갑고도 무심한 눈빛에, 그만 눈물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물살에 떠내려갈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아무 미동도 없었다.
'내 목소리 안 들려?! 야! ○○○! 대답 좀 해봐!'
발버둥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아이가, 박찬열의 이끎으로 인해 점점 멀어져갔다. 나를 잊은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지만,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더 두려웠다.
뭔가 허황된 기분이 들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조차 힘들 물줄기가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씨발.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곧 죽더라도 난 네 안에서 죽고 싶었고, 평생을 고통과 함께 살아간다 해도 난 네 안에서 아프고 싶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라 했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라곤 안 했어. 기껏 와서 흔들어놓고 너 어디 가. 너와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네가 없다는 건 말이 안돼.
어디야? 너 지금 어딨어. 난 어디지? 나도 내가 어디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정말 모순적이게도,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밤하늘은 고요하기만 했다. 군데군데 박혀있는 별들이 떨어지기라도 할듯 위태로워 보였다. 만약 떨어진다면 내게 떨어졌음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너라 생각하며 떨어지는 별을 두 손으로 받아보고도 싶었다. 넌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별이 되어 다시 돌아온 거지, 묻고도 싶었다.
별아, 사실 난 너를 좋아해. 여지껏 왜 숨기고 있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널 좋아해. 그동안 말 안 해서 미안. 내 고백 받아주지 않아도 좋아. 아무 불평 안 할 테니, 그냥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말아.
지나가다 익숙한 네 향을 맡기만 해도 걸음을 멈춰. 샤워하다 왜 네가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어. 양치하다 널 떠올리고 웃어. 자기 전에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 가끔 네 꿈을 꾸곤 해. 나는 온통 네 생각 뿐이야. 내가 하는 말, 무슨 의미인진 너도 잘 알겠지.
나는 이만큼 너를 좋아해.
-
빌어먹을 악몽이었다.
*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땀이 흥건하게 맺힌 이마를 짚곤 흠뻑 젖은 반팔 티셔츠를 펄럭였다. 꽤나 지독하고도 무서운 꿈을 꿨다.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을….
시곗바늘은 어느새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났을 시각이었다.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전화번호부에 들어가 익숙한 이름 세 글자를 찾았다. 다행히 그대로였다. 사라지지 않았구나. 역시 꿈이었구나. 이제 현실로 돌아온 거구나. 역시 사라지지 않았구나. 내 별…. 별아.
[잘 데려다 줬다. 난 이제 집 감.]
작은 알림소리를 내며 오세훈의 짧은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문자와 동시에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만 같았다.
*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나를 의심하기만 하는 모습에 그만 화가 났었다. 그래서 평소 앞에선 하지도 않던 욕을 해버렸고, 마음에도 없는 소릴 연달아 해버렸다. 그 모습에 상처받아 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그러나 그게 나로 인해 생겨난 결과라는 게, 내가 너를 울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욱 견디기 힘들 만큼 싫었다. 사실 발걸음을 떼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말을 너무 거칠게 한 것 같았다. 상처가 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는 게 너무나도 후회가 되었다.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왠지 예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옆반으로 향하자마자 자연스레 들려오는 온갖 루머들과 심한 음담패설들로 인해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뭐야, 알고 보니 양다리?'
'양다리라니?'
'걔, 옆 반 남자애랑 맨날 같이 다니지 않냐? 둘이 사귀는 것 같은데….'
'헐…, 아니지. 그 옆 반 남자애랑 잤을 수도 있잖아.'
'아니라니까. 내가 그 사람 얼굴을 봤다고. 걔는 아니었어. 대학생이었다니까.'
'… 대박. 진짜 양다리라는 거야? 존나 쩐다….'
'아님 그냥 섹파 사이일 수도 있지. 그 대학생이든 옆 반 남자애든, 그냥 섹ㅍ…'
더이상 들어주지 못할 것만 같아 먼저 주먹을 날렸다. 싸움이라곤 태어나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때려야 하는 건지, 어디를 때려야 하는 건지에 대해 그저 무지하기만 했다. 싸움을 본 적은 있어도 해본 적은 없었다. 본 거라 해봤자 한창 허세 가득할 시기인 중학교 2학년 남학생들의 싸움이라던가,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어느 아저씨들의 싸움이 전부였지만….
바닥으로 나가 떨어진 남학생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왠지 아까 학교 벤치에서의 내 모습 같았다. 갑작스레 의미 모를 이유로 뺨을 맞던….
'이… 씨발! 뭐야?!'
'너야말로 뭐야. 이상한 헛소리 퍼뜨리고 있던 게 너였어?'
'헛소리?'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해보이는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바닥에 나가 떨어져있는 녀석의 위로 올라타 무작정 주먹으로 녀석을 쳤다. 제법 빨갛게 부어오른 주먹이 점점 얼얼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때린 만큼 맞기도 했다. 세게 물어 작게 찢어져있던 입술의 끝 부분이 살짝 터져 아릿했다. 비린 피맛이 혀끝을 맴도는 것도 같았다.
'씨발! 내가 뭘 잘못했어?! 소문 퍼뜨린 건 저년인데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뭐?'
'난 그냥 걔가 어떤 대학생 집에서 나오는 걸 본 게 다라고!'
녀석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녀석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송민희를 부르고 있었다. 제법 모여든 학생 사이엔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덜덜 떨고있는 송민희가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고개를 푸욱 숙이는 모습이 딱 그거 같았다. 피해자 코스프레. 정작 피해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지.
'… 종… 종인아…, 미안해….'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눈물을 후두둑 흘리며 작게 말하는 송민희의 턱을 한 손으로 잡아올려 눈을 마주했다. 갈피를 잃은듯 보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를 때릴 생각은 없었다. 여자를 때리는 남자는 무식한 거야. 여자는 때리면 안돼. 여자는 연약한 존재야. 그러니까 남자가 지켜줘야 해. 그래야 멋진 남자야. 종인이는 꼭 멋진 남자가 되렴. 어릴적부터 엄마가 누누이 말하곤 했던 것이다. 멋진 남자가 되어라….
그래서, 나는 내 여자 지키려고.
'나한테 왜 미안해? 네가 사과해야 할 사람 나 말고 따로 있잖아.'
'…….'
'걔한테 진심으로 사과해.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하고 다닐 만큼 가벼운 애 아니야.'
'…….'
'그리고, 걔 그 집에서 아무 일도 없었어. 뭘 알고나 말해.'
'…….'
'아니다, 그냥 관심을 꺼. 더이상 너랑 부딪히는 일 없었음 좋겠다.'
그대로 송민희를 지나쳐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냥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얼굴 군데군데 생겨난 상처들을 보며 경악을 해보이던 오세훈이 뭐라 물어올 틈도 없이 수업종이 울려버렸다. 상처난 곳이 꽤나 쓰라렸다. 보건실을 가볼까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귀찮았다.
박찬열 집에서 나오는 아이를 우연히 본 놈이나, 그 사실에 뼈와 살을 덧붙여 헛소문으로 둔갑시킨 송민희나, 둘 다 그게 그거였다. 따지자면 후자가 더 싫었지만, 지금으로썬 둘 다 비슷했다. 그냥 다 짜증이 났다.
*
도저히 수업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학교에 있어봤자 수업 내용은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을 게 뻔했으며, 잠도 오지 않을 것이었다.
4교시가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향했다. 조퇴를 하겠다는 내 말에 담임선생님은 꽤나 쉽게 허락을 해주셨다. 아무래도 상처투성이인 내 얼굴과 잔뜩 다운된 표정이 한 몫 했을 테지.
*
무료하게 누워 TV를 시청하는 것도 몇 시간이나 지속되니 따분하기만 했다. 이 시간에 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만화 채널을 틀어 짱구를 시청했다. 몇 년이나 지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짱구의 빨간색 상의와 노란색 반바지는 그대로였다. 더이상 에피소드도 할 게 없었던 건지, 짱구가 중심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 중심인 소재들도 많았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재미가 없었다.
*
점심도 먹지 않은 상태였기에, 저녁 시간이라기엔 약간 이른 시간이 되었을 즈음 밥을 먹었다. 냉장고 속에서 반찬을 몇 개 꺼내곤 흰 쌀밥을 밥그릇에 가득 담아 맛있게 먹었다. 아까 어설프게 치료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입을 벌릴 때마다 따끔거리던 입술이, 역시 밥을 먹을 땐 더욱 아팠다.
'…….'
곧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할 시각이었다. 밖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의도치 않게 야자를 빠지게 되었다. 평소 지루하기 그지없던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게 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좋은 일이었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기만 했다.
'여보세요.'
- 야자 빠지니까 좋냐? 아니지, 오후 수업까지 다 빠지고 집에 일찍 가니까 좋냐?
'어, 좋아.'
- 부러운 새끼…. 잠이나 자지 왜 전화했냐. 곧 야자 시작한다.
'너 오늘 집에 혼자 가?'
- 나 원래 혼자 가는데.
'둘이 가 보는 건 어때.'
- 무슨 소리야?
'걔 좀 집에 데려다 줘.'
- 뭐?
'나 없으니까 집에 혼자 가야 되잖아. 위험한데 어떻게 혼자 보내. 네가 집까지 좀 데려다줬음 좋겠는데.'
- …….
'PC방비 일주일치 내가 낸다.'
- …….
'… 형아, 제발요.'
- 오케이, 콜.
자존심까지 굽히며 부탁 아닌 부탁을 해보였다. 하여간 쪼잔한 놈이다. 어차피 들어줄 거면서 안 들어주기라도 할 것마냥 튕기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어쨌든간에, 나 대신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녀석의 말에 괜히 안심이 되었다. 혼자 보내기 불안했는데, 내심 잘된 일이었다. 질투는 났지만, 괜히 걱정하며 집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것이었다.
*
그리고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이다. 끔찍한 악몽을 꾸긴 했지만 그래도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집에 잘 데려다 주었다는 오세훈의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기분에 한숨을 길게 내쉬곤 침대에서 내려왔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반팔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두었다. 그리곤 시원한 물을 마시기 위해 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향했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 악몽을 도대체 왜 꿨던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거센 물살에 휩쓸려가는 내 모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박찬열과 무심히 등을 돌려버리던…. 분명 꿈이었지만 꿈 속의 나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제발 잊혀졌음 좋겠는데… 짜증나게도 꿈 속의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감기와 재생을 반복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여백에 네 얼굴이 둥둥 떠다녀. 이거 왜이러는 거지.
"……."
하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매일이다시피 놀이터에 출석해 동네 아이들과 미끄럼틀을 타며 놀고 정글짐을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다 어느날, 하얀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러 나온 한 여자아이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자아이가 아닌 강아지에게 더욱 관심이 갔던 것이지만…. 평소 애완동물을 좋아라하던 나에게, 작고 하얀 강아지는 충분한 관심거리였다.
'이 강아지 몇 살이야?'
'한 번 만져봐도 돼? 그냥 쓰다듬어 보기만 할게. 제발….'
소녀에게 내가 처음 건넨 말이었다. 이름은 하양이, 나이는 몰라. 근데 되게 귀엽다. 하양이 매일매일 보고 싶어. 너 매일 오면 안돼?
관심이 처음으로 향했던 곳은 단연 강아지 쪽이었다. 작고 하얀 게 어쩜 그리 귀여운지, 흔히들 하는 깨물어주고 싶다는 표현이 딱 적절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강아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죽게 돼버렸고, 한동안 우울해하던 소녀의 곁에서 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겨두지 못했다는 게 아직까지 한이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도 이렇게 슬픈데 넌 오죽 할까. 난 달래주는 방법도 잘 몰라서, 우는 너를 안아줄 수도 없어. 내가 어떤 말을 해주어야 네 기분이 나아질까. 내가 어떤 말을 해주어야 네가 웃을 수 있을까.
고작 9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에겐 크나큰 고민거리였다.
정확히 어느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관심은 네 강아지가 아닌 너에게 쏠려있었어. 처음엔 강아지가 좋았지. 그 다음엔 강아지와 함께 놀이터에 오는 네가 좋았어. 근데 그 다음엔… 아, 결국엔 그냥 네가 좋더라. 나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어. 누가 그랬는데,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없는 거래. 그래서 난 널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유따위 만들지 않으려고. 좋아하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냥 좋은 거야. 너를 왜 좋아하냐 물어보지마. 그냥 좋아. 아무 이유 없어. 그냥 너니까 좋은 거야. 너니까 다 좋아.
*
악기를 잘 다루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어린 시절에 피아노 학원을 몇 년 다녔었기에 피아노는 꽤 칠 수 있었다. 수준급은 아니었지만, 다들 잘 친다고 칭찬을 해줄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
'기타 치는 남자 멋있지 않아? 난 피아노 치는 남자도 좋은데, 기타 치는 남자도 좋아.'
흘러가듯 내뱉어진 한 마디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기타 치는 남자가 좋다길래 큰 맘 먹고 기타를 배워볼 생각도 했었다. 기타를 구입하고 기타 학원을 다니기엔 돈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갈 것 같아 주변에 기타를 가지고 있는 친구를 구해 직접 부탁도 했다. 자기 형이 기타를 가지고 있다며 제가 원할 때 치킨을 사주면 무료로 과외를 해주겠다 비아냥거리듯 말하던 오세훈의 제안을 억지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틀만에 때려쳤다. 정말이지 기타는 나와 전혀 맞지가 않았다. 기타 치는 남자가 좋다 해도 상관없어. 피아노 치는 남자를 더 좋아하게 되도록 내가 만들면 되지.
*
박찬열. 박찬열의 '박'자만 들어도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도 모를 놈이 요즘들어 자꾸만 내 신경을 긁어댔다. 제법 뚜렷하고 큼지막한 이목구비와, 모델 뺨치는 큰 키를 가진 박찬열은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별로 웃기지 않은 말에도 항상 웃고있는 인상이 싫었다. 종인아, 숙제를 해와야지. 매번 이렇게 꾸준히 해오지 않으면 선생님이 곤란해지잖아. 하하. 어린 아이를 다루는 듯한 조근조근한 말투나, 항상 말 끝에 따라붙는 어색한 웃음소리. 정말이지 모든 것이 싫었다. 왜 과외선생 해요? 유치원 교사가 제격일 것 같은데.
박찬열은 선한 인상 뒤에 음흉한 속내를 갖춘 사람인 듯했다. 자기 제자를 집으로 이끌지 않나, 제자와 입맞춤을 하지 않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열이 뻗쳤지만 아예 상종을 하지말자 다짐하기엔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바보같이 가만히 있다 한순간에 빼앗겨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했다.
따지고보면 나보단 박찬열의 조건이 더욱 훌륭했다. 매일 장난만 치고 시비 걸기 바쁜 나보단, 항상 다정하게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주는 박찬열에게 더욱 마음이 쏠리는 건 당연한 것이겠지. 나랑은 맨날 싸우고 서로 얼굴 붉히기 바쁜데, 박찬열이랑은 매일을 웃으면서 보내잖아.
그래도 너에 관해선 내가 박찬열보다 아는 게 더 많아. 네가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한다는 거, 박찬열은 모를 걸. 네가 짜장면보다 짬뽕을 더 좋아한다는 거, 박찬열은 모를 걸. 네가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 하양이였다는 거, 박찬열은 몰라. 나만 알아. 박찬열은 너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난 너에 관해 아는 게… 많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남자들의 심리는 모두 동일하듯, 나도 그랬다. 손도 잡아보고 싶고, 포옹도 해보고 싶고… 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연인 사이가 아닌 이상 그럴 순 없는 것이었다. 우리 사이를 무슨 사이라 정의 내려야 하지. 친구긴 친군데… 소꿉친구? 소꿉친구라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제 너랑 다른 관계가 되고 싶어. 서로 티격태격대며 싸우기만 하는 편한 친구 사이 말고, 애정이 듬뿍 담긴 가슴 설레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연인 사이… 하고 싶다. 매번 부끄러워서 틱틱대듯 말하는데, 그거 진심 아니야. 그냥 미친 척하고 좋아한다 말해버릴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랬다간 너를 얻기는 커녕 너를 잃어버리게 될까 두려워 그냥 마음 속으로 삭히고 있어. 넌 아려나 모르겠다. 아마 모르겠지. 그냥 앞으로도 몰라줘라. 아직은… 많이 쑥쓰러워.
질투나니까 박찬열이랑 가깝게 붙어있지마. 질투나니까 내 앞에서 오세훈 얘기 꺼내지 마. 네 첫 키스 상대가 박찬열인 거? 그냥 신경 안 쓰고 싹 잊어버릴래. 대신 마지막은 내가 될 수 있게 해줘. 네 모든 것의 처음은 내가 될 수 없다 해도, 마지막은 내가 될래. 내가 네 마지막 할래. 입 밖으론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이지만, 마음 속으론 실컷 할래. 하루를 마다하고 자꾸만 내 마음을 흔들어놓는 넌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생각인 건데.
Why 내 가슴속에 Why 들어와 맘대로 흔드는 거니.
타이밍 하난 기가 막혔다. TV 프로그램에 깔린 배경음악의 가사 중 한 구절이 마치 내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오늘은 아마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샐 것만 같았다. 자꾸만 방금 들었던 노래 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Why 내 가슴속에 Why 들어와 맘대로 흔드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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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늦었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래 기다려주신 독자분들, 정말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역시 개강을 하니 정신이 없군요. 정신도 없고, 시간도 없고.. 엉엉 슬퍼요. 참, 바로 그저께와 어제가 우리애들 콘서트였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들 갔다 오셨나요? 전.. 이번주에 가요♡♥ 스포 같은 거 하나도 안 보고 싶었지만.. 거의 다 본 것 같네요...ㅎ 안돼.........
사실 늦은 이유는 따로 있어요.. 또 써놓은 글이 몽땅 날아가버렸지 뭐예요... 하..... 다시 쓰고 또 수정하느라 많이 늦어버렸네요ㅠㅠ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빨리 오려 노력할게요 :-) 다들 굿밤! 좋은 꿈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