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용히, 정말 쥐죽은 듯이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보냈어.
이틀이 지났는데 김태형씨는 오지 않았지.
3일째 되는 날.
나를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전정국이 들어오더니 내 옆에 누웠어.
그리고 말했지.
"지금 선배 태형이형이 어제 오기로 했는데 왜 안오지?라는 생각 하고 있죠?"
소름이 쫙.
"역시. 나 돗자리 깔아야 되나봐"
"..."
"나랑은 아예 말을 안하기로 결심했어요?"
"...."
"재미없다"
"....."
"놔줄까"
"응."
"..."
이번엔 전정국이 입을 다물었어.
"나 보내줘."
"내가 왜? 누구 좋으라고?"
"...."
"나 원래 뭐든지 쉽게 질리는데 선배도 예외는 아닌가봐."
".."
"근데, 질렸는데 난 계속 선배가 내꺼였음 좋겠어요. 마치 지금처럼."
지금도 난 전정국의 것이 아닌데, 저렇게 단정짓고 있는 꼴이 참 말이 아니었지.
딱히 대꾸해줄 말이 없어서 그냥 침대에 누워 전정국한테 등돌리고 있었는데,
"지금 선배가 그렇게 누워있는 모습이 꼭 선배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
"무기력한 선배는 싫은데."
"...."
"내가 다시 보내준다고 나랑 잘 지내지 않을거잖아요."
"....."
현실직시를 잘 하고 있으니까 뭐 별다른 할 말이 없어서 대꾸도 안하고 있었지.
"나 보라고 강요하지 않을테니까 내 말이나 들어줘요."
"..."
"나도 원래 이렇게까지 하는 나쁜 놈은 아닌데.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김태형의 여자라니까.
그게 너무 화가나고 또 김태형, 김태형.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형한테 들었겠지만, 나랑 그 형..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둘은 평생 친해야한다는 운명을 타고났어요. 집안끼리 관계가 우호적이니까.
그렇지만 우리 집안보단 형네 집안이 훨씬 우위에 있었고, 우리 엄마아빠는 늘 굽신굽신, 나는 형한테 장난감을 빼앗겨도 아무말도 못하고.
싸우면 나만 혼나고, 우리 엄마아빠가 형네 엄마아빠한테 사과하고. 심지어 난 사모님한테 반성문도 써서 제출했어요.
앞으로 형이 하는 일에 함부로 대들지 않겠다고. ㅋㅋ 웃기죠? 그때 나 겨우 한글 뗀 초등학생이었는데.
중학교때도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우리엄마가 바쁜 사모님이랑 회장님 대신해서 내가 아닌 형네 교실로 공개수업 참관하러 갔어요. 그것도 3년내내.
그걸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서 절대로 한국에서 학교 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아빠를 설득해서 고등학교는 외국에서 다녔어요.
대학교도 그 나라에서 졸업하려고 했는데, 회장님이 형이랑 나랑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다니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나는 지금 우리 학교 지원도 안했었는데 합격했어요. 참..세상이라는게 이 지경이예요 돈에 죽고 돈에 살고..ㅋㅋㅋㅋ
암튼, 한국에 돌아와서 좋은 기억이라고는 정말 예쁜 누나 한명이 날 매일 힐끔힐끔 쳐다본다는 것. 그게 너무 좋아서 며칠 즐기다가 드디어 만나자고 쪽지보내며 용기낸 날.
그 날, 또 내 인생에 김태형이 초를 쳤죠. 그 누나가 김태형의 약혼녀라니."
"....."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날 싫어하는 선배가 이 얘기 듣고 무슨 감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알아줘요. 선배를 해하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걸."
난 끝내 아무 말도 못하고 전정국이 방을 나가는 뒷모습만 바라봤어.
나를 이렇게 가둔 건 전정국의 잘못이지만, 이런 행동을 불사할만한 이유도 이해를 못하는게 아니었기에,
"괜찮아요?????"
나를 찾아와서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본 후 전정국을 신고해서 감옥에 가둬버리겠다고 악을 쓰는 김태형씨를 달래서 그냥 넘어가자고 완곡하게 설득했어.
의도치 않게 전정국의 상처가득한 마음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더 아프게 한 내가 지금 이 상황의 가장 큰 죄인이었으니까.
"진짜 괜찮은거 맞지?"
"아 글쎄 그렇다니까요~ 한 오백번 물어봤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김태형씨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위안이 되고 마음이 좋았어.
그러나 마음 한 쪽에 전정국이 떠나질 않았지.
전정국이 해 준 얘기를 김태형씨랑 얘기해볼까.
이미 다 알고 있으려나.
마음이 상당히 복잡해서 김태형씨가 뭐라고 하는지 귀에도 잘 안들어왔어.
'
근데 내 속마음을 김태형씨도 눈치챘나봐.
"그 쪽이 나한테 전화한 날에, 정국이한테도 전화가 왔어요. 내가 노발대발하면서 이틀 내에 추적해서 너 찾아간다고 하니까. 3일만 시간을 달라더군요. 만약 그 전에 그쪽을 찾으러 온다면 그쪽도 죽이고 자기도 같이 죽을거래요. 내가 아는 전정국은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캐릭터라서 나는 일단 기다렸죠. 초조하게."
"....."
"그래서 하루 늦었어요 미안해요. 전정국이 나오면서 나한테 한마디 하더라구요. 미안하다고"
"...."
"맘 같아선 사과고 나발이고 신고해서 합의없이 재판때리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어요. 어쨌든 그 쪽이 내꺼잖아요."
나 때문에 마음고생했을 김태형씨 생각하니까 눈물이 핑 돌아서 얼른 고개를 숙였지.
이 얽힌 인간관계에서 가장 핵심은 누굴까.
나? 회장님? 돈?..
비행기를 타고, 납치된 뒤 처음으로 공항을 제정신으로 통과한 뒤 내 집으로 돌아왔어.
"어? 깔끔하네?"
"내 작품이예요."
"?????에이..."
"살면서 청소라는 거 처음 해봤는데, 역시 내 적성에 안맞아. 중간에 역겨워서 토할 뻔 했어요. 그냥 아줌마 불러다가 할 걸."
집에서 지가 다 쌓아놓은 책들도 나보고 꽂아놓으라고 하고, 지 책상정리 자기가 씻고 나온 화장실 정리, 옷정리 다 나한테 하라고 한 게 김태형씨인데...
살면서 빗자루 한 번, 걸레 한 번 만져본 적 없다는 김태형씨가 우리집을 쓸고 닦았다니...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짝짝짝.
"처음한 것 치고 굉장히 깔끔한데요?"
"내가 한 번 하기로 한 건 제대로 하거든요."
"그럼 앞으로ㄷ.."
"그런 말은 하지 마. 진짜 싫으니까. 우웩.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3일전에 먹은 스테이크가 음메하면서 목구멍으로 빠져나올 것 같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귀여웠어. 표정은 무표정인데 ㅋㅋㅋ
암튼 다시 돌아온 일상에 바로 적응해서 나는 김태형씨 점심도 차려드리고, 학교에 휴학 취소하려고 전화했는데 휴학신청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어서 다행이다 싶었지,
김태형씨 점심 먹은 거 다 치우고나서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는데,
"아 나 진짜 창피하다"
"??"
"나 진짜 평생 갈 흑역사 하나 만들테니까 봐봐"
".....?"
김태형씨가 갑자기 내 얼굴을 감싸쥐고, 입술을 맞췄어.
그리고는,
"사귀자. 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