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完 (안녕은 헤어짐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
시간은 흘러흘러 잘만 갔다. 매 순간 느끼는 거지만, 시간은 내 생각과 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빠르게 가라 하면 느리게 가고, 느리게 가라 하면 빠르게 갔다. 특히 어젯밤엔 더더욱 그랬다. 깜빡 잠이 드는 순간 눈을 뜨면 아침일 것만 같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잠이 안 오기도 했지만…. 졸업식의 아침은 이렇게나 빨리 찾아왔다.
"○○아, 부모님은 10시까지 가는 거 맞지?"
방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집어넣은 채 엄마가 물어왔다. 오늘이 지나면 더이상 입을 일이 없을 교복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짓던 엄마가 다시 방문을 꼬옥 닫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을 집어들었다. 처음엔 이상하다며 온갖 불평불만을 하던 교복인데, 그랬던 교복이 이젠 예쁘게 보였다. 졸업식이니 교복도 단정히 입고 예쁘게 하고 가야지. 마음이 울적하긴 했지만, 어차피 언젠간 다가올 날이었으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작게 미소를 지었다.
*
졸업식만 진행이 되는 오늘은 9시까지 등교를 해도 되는 날이었다. 졸업식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갈 것이고, 몇 주 되는 봄방학도 LTE 속도로 지나가 버리고 말겠지. 슬프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현실이 그러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나처럼 졸업을 바라지 않는 학생이 있을까, 싶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은 갑갑하기 그지 없던 고등학교 생활이 끝났다는 것에 대한 해방감과 곧 다가올 대학 생활에 대한 설렘으로,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행복한 하루가 될 게 분명했다.
"……."
마지막으로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곤 방을 나섰다. 졸업식이니 책가방을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아빠는 회사 때문에 못 가실 거야. 엄마 혼자 갈게. 종인이 엄마랑 같이."
터덜터덜 현관으로 향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컨버스화를 신어야겠다 생각하며 신발장을 열었다. 신발장의 가장 위 칸에 놓여있는 남색 컨버스화를 꺼내 발을 넣었다. 평소 까만 컨버스화를 즐겨 신는 김종인은 아마 오늘도 컨버스화를 신었겠지.
"다녀오겠습니다."
"○○아, 우산 챙겨야지. 밖에 눈 와."
꾸벅 인사를 하곤 현관을 나서려던 찰나, 우산을 챙기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날 눈이 올 건 뭐람. 날씨가 맑을 줄 알고 신은 컨버스환데…. 작게 한숨을 내쉬곤 예쁘게 묶여있는 컨버스화의 끈을 풀었다. 어째 아침부터 기분도 별로인 게,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되는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
다행히 눈발은 거세지 않았다. 콩알 만큼 작은 눈송이들이 길바닥 위에 닿자마자 금세 녹아버려, 길 위엔 어떠한 눈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투명한 우산을 들고 나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까, 까먹고 우산을 챙겨가지 않아 편의점에서 싼 값으로 구입한 우산이었다. 사실 사놓고 약간의 후회감이 들 때가 많던 우산이지만, 이 우산이 오늘 같은 날씨에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
오늘도 역시나, 집 앞엔 김종인이 서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녀석은 항상 나보다 일찍 나와 나를 기다려주곤 했다. 이것도 벌써 몇 년 째인지 모르겠다. 이젠 놀랍다는 생각도 싸악 사라졌을 만큼, 어느새 당연한 일상과도 같이 되어 있었다. 녀석과 난, 학창 시절의 처음과 끝을 거의 함께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녕."
남색 우산에 가려 녀석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손만 내민 채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하나둘 손바닥으로 받아내는 녀석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이어, 녀석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해왔다. 졸업식이 끝남과 동시에 영영 안 볼 것도 아니고, 이대로 김종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괜히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자 울컥하는 것도 같았다.
"아, 왜 아침부터 눈이 오는 거야. 하늘이 너무 흐리다."
괜히 투덜대듯 말하곤 서둘러 김종인의 옆에 섰다. 그런 나를 보며 살풋 웃어버리던 녀석이 천천히 내게 발을 맞춰주며 입을 열었다.
"잘 잤냐. 난 잠이 안 오더라."
김종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나도. 나도 잠을 설쳤어. 녀석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러나,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녀석 쪽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비록 우산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야."
"응?"
"너 우산 접어 봐."
"왜? 눈 오잖아."
"접어."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도 해주지 않은 채 제 할 말을 내뱉는 녀석이 이상해 천천히 우산을 접었다. 접자마자 하얀 눈송이들이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던 김종인이 조심스레 제 우산을 내게 씌워주며 가까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깜짝 놀라 그저 입을 꾸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산의 어두운 색으로 인해 녀석과 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산 하나에 쏘옥 들어가 있는 너와 나…. 정말이지, 걸음을 옮기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기분이 묘했고 가슴이 설렜다.
"우산 때문에 얼굴이 안 보여서. 어차피 눈도 별로 안 오는데, 하나로 나눠 쓰면 편하잖아. 얼굴 보면서 대화할 수도 있고."
"… 맞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가 애매해 대충 긍정의 답을 해주었다. 움직일 때마다 어깨에 조금씩 닿아오는 느낌이 좋았다. 이런 가벼운 터치에도 심장이 두근두든 반응을 했다. 사실 이젠 익숙했다. 김종인의 표정, 목소리,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떨려하는 내 모습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녀석을 깊게 좋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졸업식은 강당에서 진행이 되었다. 넓디 넓은 강당 안엔 몇 백 개의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9반인 우리반은 오른 편이었다. 김종인과 간단히 인사를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각 반마다 세로로 길게 놓여있는 의자들을 멍하니 훑기만 하다, 내 이름이 붙여진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번호 순으로 지정이 된 자리였다. 나보다 훨씬 앞 번호인 김종인은 분명 저어- 앞 자리에 앉았겠지. 그래도 바로 옆 반이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녀석이랑 멀리 떨어질 뻔했다. 물론 지금 자리에서도 김종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 기분은 좋았다.
*
비어있던 많은 의자들은 어느새 학생으로 하나둘 채워졌다. 졸업식이라 그런지, 옷차림이 불량하던 몇몇 학생들마저 교복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비록 치마는 짧게 줄여져 있었지만….
진하게 화장을 한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저들끼리 모여 사진을 찍기 바빴다. 얼굴을 절반이나 가린 채 셀카봉을 높이 들어보이는 긴 생머리의 여학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마주칠 일이 없어진 송민희였다. 겨울방학 동안의 과도한 탈색으로 인해 머리칼이 많이 상한 듯 보였다.
"……."
내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 건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송민희와 눈이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먼저 황급히 시선을 돌린 쪽은 송민희였지만,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한 것도 같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강당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비 오는 날의 체육시간 아니면 별로 올 일이 없던 강당이 제법 낯설게 보였다. 창문이 저런식으로 생겼었구나. 구석엔 피아노도 있었구나…. 왠지 안을 훑으면 훑을수록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첫 날이 떠올랐다. 그땐 어울릴 친구가 없어 상당히 우울했었는데…. 오세훈과 떠드느라 내 카톡에 답장도 않던 김종인의 모습, 그에 화가 나 시업식이 끝난 이후 녀석에게 조곤조곤 따지던 나의 모습. 모두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 빨리! 빨리 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잠시 추억에 잠겨있을 즈음, 꽤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오세훈의 목소리인 것도 같았다. 잘못 들었겠거늘, 생각하며 졸업식 일정이 세세하게 적혀있는 프린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오세훈을 닮은 목소리가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어 고개를 들어보았다.
"어? 저기 있다."
목소리를 닮았다고만 생각을 했지, 그게 진짜 오세훈일 거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나를 가리키며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녀석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세훈의 뒤엔 살짝 인상을 찡그린 김종인이 있었다. 표정이 영 말이 아닌 걸 보니, 마지못해 오세훈에게 끌려온 것인 듯했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떡해. 사진 찍어야지."
사진을 찍는 무리들 중 남학생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세훈은 여러 면에서 꽤나 소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제 휴대폰을 들어보이며 급히 셀카모드로 전환을 하던 녀석이 김종인을 향해 말했다.
"넌 인상 좀 피고, 인마."
"뭔 사진이야. 여자 애들도 아니고."
"뭐래. 사진은 여자 애들만 찍어? 너 그러다 나중에 가서 후회해. 아…, 내가 졸업식 때 왜 사진을 안 찍었을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분명 이럴 거라고."
"아, 그럼 한 장만 찍든가."
"한 장만 찍지 않을 건데? 이것도 다 추억이야."
제법 새침하게 대답을 내뱉은 오세훈이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좀만 옆으로, 아주 살짝만."
마치 사진작가라도 된 양 자세를 이렇게, 저렇게 하라며 내게 요구를 해오는 오세훈의 모습에, 어색히 자세를 고칠 수밖에 없었다. 증명사진을 찍을 일이 있다면 자주 가곤 하던 사진관의 주인 아저씨에게서만 듣던 말을 녀석에게서 듣게 될 줄이야….
"의자, 좀만 옆으로…. 반만 남게…."
"… 이렇게?"
"아, 좋아. 그리고 뭐냐…, 김종인 너 여기 걸터 앉아."
의자의 반 쪽을 가리키며 오세훈이 말했다. 의자 하나에 둘이 나눠 앉으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 꽤나 부끄러운 소리에, 그저 벙찐 채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네가 김종인 무릎 위에 앉는 것도 괜찮을 것 같…"
"……."
"… 지 않아. 미안. 이런 장난 그만 칠게."
황급히 사과를 해오는 오세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김종인이 내 옆에 살짝 걸터 앉았다. 순식간에 닿아오는 느낌에 화들짝 놀랄 틈도 없이, 휴대폰 카메라로 각도를 잡아오는 오세훈 탓에 서둘러 포즈를 취해야 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촬영 버튼을 눌러버린 오세훈이 제법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한 의자에 같이 앉아있는 나와 김종인, 그리고 더욱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굽힌 채 뒤에 서있는 오세훈…. 오세훈은 심지어 눈도 감았다. …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사진이었지만, 녀석은 꽤나 만족하는 듯 싶었다.
"이야, 나 사진작가나 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원서 넣을 때 사진학과도 좀 고려해 볼 걸."
꽤나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오세훈을 빤히 바라보던 김종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먼저 걸음을 뗐다. 그런 김종인을 바라보며 오세훈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쟤 원래 저렇게 부끄럼이 많았냐. 알면 알수록 이상한 놈이야."
덩달아 발을 떼려던 오세훈이 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왔다.
"아, 사진은 카톡으로 보내줄게."
*
졸업식은 꽤나 식상한 절차로 진행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라 해서 그다지 특별할 건 없었다. 중학교 졸업식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꽤나 진부한 졸업식이었다.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고, 교장선생님과 각종 위원회에 속하신 학부모님들의 훈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곤 졸업 축하 영상을 시청했으며, 전교 회장의 기나긴 연설도 들었다. 지난 학교 생활에 대한 노력과 수고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전교 회장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곧이어, 한 살 어린 전교 부회장이 전교 회장에게 꽃다발을 전해주었고, 마지막으로 졸업식 노래를 부르며 강당에서의 일정은 끝이 났다. 클리셰의 정석을 보여준 듯한 졸업식이었다.
그 다음은, 간단히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둘 각자의 교실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엄마를 만났고, 예쁜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보라색 포장지에 하얀색 리본으로 장식이 된 예쁜 생화 꽃다발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식 땐, 여러 개 꽂혀있는 막대사탕 주위로 비누 꽃이 둘러싸여 있던 꽃다발을 받았었지…. 졸업 축하해, 우리 딸. 뒤이어 들려오는 엄마의 말에 생긋 웃어보였다.
*
교실의 뒤쪽엔 반 아이들의 가족 분들이 서계셨다. 어머니와 아버지, 심지어 고모나 외삼촌까지도 계셨다. 길고도 짧았던 지난 시간 동안 공부를 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천천히 새겨 들었다. 생각해보면 수시나 정시 상담 이외엔 담임선생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던 적이 없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담임으로서도, 한국지리라는 한 과목의 선생님으로서도 굉장히 좋으신 선생님이었는데….
"지난 1년 동안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있었지만 너희들과 함께 하는 1년이 행복했단다."
"쌤, 오글거려요…."
"졸업식엔 뭐든 오글거리게 하는 거야."
선생님의 한 마디에 교실 안은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었다. 사실 웃기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그저 아랫입술만 꾸욱 깨물며 뒤에 서있는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곤, 좀 웃으라며 손가락으로 제 입꼬리를 올려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번호대로 한 명씩 졸업장을 나눠주시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이제 이 시간만 끝나면 모든 것이 끝이겠지. 정신 차리고 보면 이 순간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 있겠지. 학교와 정이 들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김종인과 함께 했던 학교 생활이 끝이 난다는 게 아쉬웠다. 같이 등교를 하고, 같이 급식을 먹고, 같이 하교까지 하던… 그런 소소한 일상이 바로 내일이면 그리워질 게 뻔했다.
[끝나고 뭐해. 부모님이랑 점심 먹으러 가?]
저를 생각 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문자를 보내온 걸까. 엄청난 타이밍에 살짝 놀라곤 서둘러 답장을 입력했다. 점심은 집에서 먹고, 저녁에 외식할 거야. 넌? 문자가 끊길까 두려워 일부러 의문형으로 답했다. 그러자, 김종인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나랑 점심 같이 먹자, 그럼.]
거절할 이유는 없었을 뿐더러, 애초에 거절할 마음도 없었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녀석의 문자 메시지에 긍정의 답장을 보내곤,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과연 이렇게 허무한 졸업식이 또 있을까 싶었다. 몇몇 학생들은 아까 찍지 못한 사진을 지금에서야 찍고 있었고, 몇몇 학생들은 벌써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랑 사진 한 장 찍지 그래?"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엄마가 말을 건네왔다. 하긴, 선생님과 찍은 사진 한 장 정도는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도 전에 갑작스레 내 손목을 잡아오는 누군가로 인해 그 자리에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 안녕하세요. 저 옆 반 오세훈인데요, ○○이 친구예요."
멀뚱히 서있는 엄마에게 제 소개를 간략히 하던 오세훈이 다짜고짜 제 휴대폰 카메라를 들어보였다. 그러더니, 내게 제 얼굴을 가까이 밀착해오며 함께 셀카를 찍기 시작한다. 바람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포즈를 취하며 바람처럼 사진을 찍어낸 오세훈이 씨익 웃으며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아무래도 아까 강당에서 찍었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급하게 다시 사진을 찍으러 오진 않았을 테지.
*
북적북적한 와중에 어렵사리 선생님과 사진을 찍곤 교실을 나섰다. 그러나, 교실 만큼 복도도 사람들로 복잡했다. 김종인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는 내 말에, 엄마는 녀석의 어머니와 함께 먼저 집으로 향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내 손에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여주었다. 종인이랑 맛있는 거 사먹고 와, 마지막인데. 마지막이라는 말이 유독 슬프게 들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였다.
옆 반으로 걸음을 옮기곤 가만히 뒷문 앞에서 녀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사진 삼매경에 빠진 듯 보이는 오세훈은 제 담임선생님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김종인은…
"누나 갈게. 맛있는 거 사먹고 와.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알았어. 조심해서 들어가."
김종인이 누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큰누나는 일 때문에 바빠 아쉽게도 오지 못할 거라던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김종인과 많이 닮은 녀석의 작은누나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어린 시절, 녀석의 집에 놀러갔을 때마다 자주 보곤 했었는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곧바로 내 얼굴을 알아보며 덩달아 반갑게 인사를 해오는 그녀다. 졸업 축하해. 이제 대학생이네? 종인이가 많이 괴롭히지? 언니가 혼내줄까? 이런저런 말들을 많이 늘어놓던 그녀가 이내 멋쩍게 웃어보였다. 바로 뒤에 어슬렁 어슬렁 모습을 드러낸 김종인 탓이었다.
"그럼 갈게. 둘이 점심 맛있는 거 사먹고. 당연 네가 사야 하는 거 알지?"
김종인의 등을 살짝 때리며 그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리곤 활발히 손을 흔들며 자리를 피해 주는 그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것도 같았다.
"초밥 먹고 싶어."
나를 보자마자 해오는 말은 꽤나 엉뚱했다. 초밥이 먹고 싶다는 건 초밥을 먹으러 가자는 소리겠지.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초밥… 먹자. 먹으면 되지.
*
아침에 내리던 눈은 어느새 그쳐 있었지만, 길 위엔 하얀 눈이 얕게나마 소복이 사여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꽤나 많이 내린 듯했다.
그저 하얗기만 한 눈 위를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길은 녀석과 나의 발자국으로 하나둘 규칙적인 모양이 새겨지고 있었다.
"배고파?"
"아니, 아직. 너는?"
"나도."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던 김종인이 내게 물어왔다.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아직 배는 고프지 않았다. 내 대답에 녀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로 인해 살짝 빨개진 녀석의 왼손엔 내 것과 같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우리 엄마와 녀석의 어머니는 취향마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럼 잠깐 산책이나 할까."
*
산책이나 하고자 천천히 걸음을 옮겨온 공원엔 아무도 없었다. 꽤나 좋은 시설로 꾸며진 공원이었지만, 길 위엔 아이스크림 껍질과 구겨진 담뱃갑 등 쓰레기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그나마 깨끗한 길 쪽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김종인이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끝났네."
"……."
"졸업도 했고, 이제 진짜 끝이다."
"… 그러게."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꼭 오늘을 마지막으로 영영 보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불안했다. 졸업은 했지만 봄방학 때 자주 만날 거지? 대학 가도 시간 나면 자주 볼 거지? 묻고 싶었지만, 멍청이 같은 입술은 꼬옥 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예전 같았다면 바로 물어봤을 텐데. 너를 대하는 방식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바다에 갔을 때 네가 먼저 물어왔던 적도 있으니…. 너 못지 않게 먼저 장난을 걸 때도 많던 난데, 어쩌다 이렇게 네게 말도 쉽게 못 붙일 정도가 된 걸까.
"실감 안 나지."
"… 응, 하나도."
내 대답에 녀석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한숨을 길게 내쉰다.
"미안."
"… 뭐가?"
"그동안 사소하게나마 귀찮게 굴었던 거,"
"……."
"다 미안해."
"……."
"이제서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한데, 그래도 언젠간 말하고 싶었어."
"……."
"내가 너 속상하게 한 적 많을 거야."
"… 아니야."
"싸우다 홧김에 심한 소리 한 적도 있는데,"
"……."
"그거 진심 아니었던 거 알지."
"……."
"자주 만나진 못하겠지만,"
"……."
"잘 지내라."
잘 지내라는 한 마디에, 계속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뭐 이런 걸로 울고 그러냐며 잔소리를 해올 것만 같아, 억지로 눈물을 삼켜내려 애썼다. 대충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깨끗하던 소매는 어느새 눈물로 가득 번지기 시작했다.
"내가 연락하면 바로바로…"
"……."
"… 울어?"
앞만 바라보며 말을 건네오던 녀석이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겨왔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고작 이런 걸로 울긴 왜 우는 건지, 나도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김종인 앞에서 창피하게…. 그러나 지금은 창피함의 감정보단 아쉬움의 감정이 훨씬 컸다. 아예 보지 못하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자주 볼 수 없다는 게 싫었다. 매일 아침 교복을 입고 함께 등교를 할 수 없다는게 너무나도 싫었다. 시간은 왜이리 빠르게 흘러가버린 걸까. 자꾸만 시간 탓을 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어쩌겠어. … 난 그만큼 네가 좋아.
울음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술을 꾸욱 물었다. 우는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을 한 건지, 녀석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긴 정말 싫었는데, 결국 보이고 말았다.
"왜이리 서럽게 우는데."
"……."
"마음 아프게."
그런 내게 가까이 다가와 움츠러진 어깨를 꼬옥 끌어안아주는 김종인의 행동에,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하필 오늘따라 녀석의 말투가 다른 때보다 더욱 부드럽고 나긋하게만 들려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등을 토닥여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가슴팍에서 들려오는 작은 심장 소리 또한 좋았다.
함께 할 수 없을 바에야,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너 고백은 언제 하게.
나중에.
야, 고백 안 하냐?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아직은 아니야.
벌써 졸업이다. 이제 교복입곤 영영 못 만나. 아예 자주 만나질 못한다고. 고백은? 언제 할 건데?
… 아직.
지나친 실수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도대체 고백은 언제 할 거냐며 자꾸만 재촉을 해오는 오세훈의 말에,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고. 아직은 아니야. 계속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미루곤 했다. 그게 어느새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벌써 졸업이었다. 꽤나 끈질긴 오세훈은 오늘 아침 강당에서도 내게 물어왔다. 고백 언제 할 거냐.
너무 뜸을 들이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누누이 들곤 했지만, 아직 고백을 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직은 말할 자신이 없었다. 전하고 싶은 마음은 상당히 큰데, 그걸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저 좋아한다는 말론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감정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주저하는 건가. 이게… 잘 하고 있는 건가.
더이상 교복 입은 네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졸업을 함과 동시에 자주 보지 못하게 될 거란 사실도,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싫었다. 그래도, 볼 거잖아. 앞으로 안 볼 거 아니잖아. 단지 자주 못 본다는 것 뿐이지, 아예 안 보는 게 아니잖아. 싱겁기만 한 생각으로 대충 합리화를 했다. 더이상 교복을 입은 네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려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 중요한 건 미래잖아. 지금도 예쁜 넌 대학생이 되면 얼마나 더 예뻐질까. … 상상도 못하겠어.
난 지금 네가 왜 우는 건지 잘 모르겠어. 꼭 다른 곳으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서럽게 엉엉 우는 모습이, 너무 슬프다. 내 품 안에 안겨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는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네 머릿속에, 마음 속에 들어가보고 싶어.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몰래 엿보고, 엿듣고 싶어. 울지 마. 네가 울면 내 마음이 아파. 안녕이라 하지 마. 어차피 또 볼 거잖아.
"울지 마."
예나 지금이나, 넌 내게 있어 언제나 분홍 빛이야. 물론 지금 뿐만이 아닌 먼 미래에도 그럴 거고.
조금만 기다려 줘. 머지 않아 진짜 멋진 남자가 되어서 찾아갈게. 그땐 우리 지금의 친구 사이가 아닌, 연인 사이 하는 거 어떨까.
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술을 마시러 갈 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거예요.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도 맞으면서요.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조금만 가다가 조금만 환해지는 거예요.
하루에 일 미터씩 눈이 내리고
천 일 동안 천 미터의 눈이 쌓여도
우리는 가만히 부둥켜 안고 있을까요.
미끄러지는 거예요.
눈이 내리는 날에만 바깥으로 나가요.
하고 싶은 것들을 묶어두면 안 되겠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망한 것을 사과할 일도 없으며,
세상 모두가 흰 색이니 의심도 서로 없겠죠.
우리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모호해지기 위해서라도 삿포로는 딱이네요.
당신의 많은 부분들,
한숨을 내쉬지 않고는 열거할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부분들까지도.
당신은 단 하나인데 나는 여럿이어서,
당신은 죄가 없고 나는 죄가 여럿인 것까지도
눈 속에 단단히 파묻고 오겠습니다.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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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라라라랄라라라~ 드디어 완결이네요! 1월부터 연재를 시작해 어느덧 벌써 6월.. 와..... 제가 이렇게 한 시즌을 끝낸 건 모두 여러분들 덕분이에요 :)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이 닳고 닳도록 계속 할 거예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과도 같이 답답했던 우리 여주와 종인이.. 시즌 투에선 고구마 대신 달달한 사탕이나 왕창 먹읍시다 우리...☆ 사실 애착이 가는 캐릭터들이 많아요.. 특히 감초 역할을 아주 톡톡이 해주고 있는 우리 세훈이.. 정말 마음에 드는 캐릭터예요 :-D 무섭긴 하지만 시즌 투에선 더 무서워질 찬열이, 점점 분량이 많아질 경수, 그리고 우리 종인이까지.. 다들 각자 개성이 넘쳐나는 캐릭터들이랍니다 :-b
프롤로그부터 시작해 이렇게 완결까지 함께 달려와준 제 소중한 암호닉분들, 독자분들,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흐흫흐흐ㅡ흐흐흐흫.. 전 조만간 브금 정리, 텍파 공지로 다시 찾아올게요! 텍파를 만드려면.. 음.. 꽤 걸리겠죠..? ㅎㅎㅎㅎㅎㅎ 그래도 행복하네요:) 커다란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랄까요? 더 할 말 있었는데 까먹었다.. 궁금하신 점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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