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2 (네가 내 애인이 되기까지)
소파에 무료하게 누워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어째 이 시간엔 항상 재미 없는 프로그램만 방영을 해주는 것 같았다. 흥미란 단 1퍼센트도 없는 어린이 프로그램, 인터넷 강의 프로그램…. 따분하기 그지 없는 TV 화면을 바라보기만 하다 작게 하품을 하곤 리모콘의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띠리릭- 소리를 내며 TV가 꺼졌고, 순식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다. 이렇게 무료하고 심심한 날엔 유독 네가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더라. 대략 일주일 전인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다짜고짜 네가 자취하는 집을 찾아 갔을 때가 저번 주니까… 일주일 정도 됐겠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오래 누워있다 일어난 탓에 머리가 핑- 돌며 살짝 어지러웠다. 간단히 만나 영화라도 보자며 약속을 잡아 볼까,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눠 보자며 카페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볼까….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하던 고민이었다. 그러나, 기나긴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허무맹랑하기만 했다. 다음에. 그냥 다음에 하자.
"……."
사실,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마음의 준비라기엔 살짝 유치하고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어쨌든 느낌은 그러했다.
이토록 멀리 돌아왔는데, 더이상 미룰 순 없을 듯했다. 일단 말솜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닐 뿐더러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진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진심을 전할 생각인데… 넌 받아줄까.
*
거의 2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가 가까워질수록 괜히 떨리는 것만 같았다. 2년 사이 바뀌었을 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아마 더 예뻐졌겠지. 날 보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가장 먼저 무슨 얘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더욱 여성스러워진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너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시간이 흐르긴 흘렀구나. 긴 머리칼에 넣어진 굽실굽실한 웨이브, 꽤나 여성스럽고 단아한 치마와 하이힐이 그저 예쁘게 보였다. 어째 내가 없던 사이에 더 예뻐졌네. 연애라도 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짧은 시간 동안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어렸을 때 자주 놀곤 하던 놀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추억의 장소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릴 기다려주고 있었다. 한없이 높기만 하던 그네는 어느새 낮아져 있었고, 알록달록하던 미끄럼틀의 칠은 거의 벗겨져 있었다.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였다.
'오늘 한가해? 집 가면 뭐하냐.'
'나? 그냥 뒹굴뒹굴…. 인터넷 쇼핑몰이나 뒤지든가….'
'그럼 늦게 들어가도 상관 없겠네.'
'… 어?'
'나 저녁에 오세훈이랑 술 마시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가자.'
그리곤 오세훈과 만나기로 약속한 술집으로 향했다. 사실 뒤늦게야 든 생각이지만, 내가 괜한 짓을 한 것만 같았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것이니 최대한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 건넨 말이었다. 그러나, 술집에서 오세훈을 만나고부터 약간의 후회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분 탓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왠지 나보다 오세훈을 더욱 반가워하는 듯한 모습에 1차로 화가 났고, 오세훈과 되도 않는 내기를 하며 억지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모습에 2차로 화가 났다.
'그만 마셔. 속 버려, 이러다.'
'안돼. 내가 꼭 이겨서 오세훈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야.'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화가 났다. 몇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잘 익은 사과와도 같았다. 분명 화는 나는데 쉽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슬슬 취기가 오르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마주하고 어떻게 화를 내. 난 절대 못해.
'이것은 세훈이의 술잔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멀쩡하다는 티를 내던 오세훈마저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목소리도 커진 걸 보니, 녀석은 이미 취한 듯했다. 특이한 술버릇을 가지고 있는 오세훈은, 일단 취하면 평소보다 목소리가 두 배로 커졌다. 목소리만 커지면 다행이지, 심지어 어린아이라도 된 양 문장에 제 이름을 넣어 말을 하곤 했다. 그리곤, 궁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 물건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상대해주기 귀찮은 이상한 술버릇이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싶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나였다.
'야, 볼래? 이건 세훈이 휴대폰인데… 여기 버튼을 누르면, 짜잔- 밝아진다?'
'그래.'
'김종인 너도 눌러보지 않을래?'
'않을래.'
'뭐라고?!'
'나! 나 눌러볼래! 세훈이의 휴대폰 버트은- 내가 눌러보지!'
오세훈의 말에 대충 대꾸를 해주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더욱 아이처럼 변한 네 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반쯤 풀린 눈을 힘겹게 꿈뻑이며 손을 뻗어 녀석의 휴대폰을 빼앗는 모습이 조금은 위태로워 보였다. 고작 소주 몇 잔으로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귀여운 술버릇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하필 오세훈과 쿵짝이 잘 맞는 것 같아 약간은 질투가 났다.
'오오- 진짜 버튼을 누르니까 화면이 밝아졌어. 이건 세후니의 휴대폰 입니다아-'
'이건 세훈이 립밤이야. 귀엽지? 김종인아, 귀엽지 않아? 이것 좀 봐줘-'
양 옆에서 쫑알쫑알거리는 소리에 이젠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자꾸만 세후니, 세후니- 하며 애교스럽게 오세훈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따끔하게 혼을 내주고도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묘한 기분이었다. 속이 쓰릴까 걱정이 되면서도 화가 났고,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은 너무나도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분명 좋은데 좋지 않은, 싫은데 싫지 않은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점점 속이 쓰려오는지 인상을 찡그린 채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오세훈을 흘끗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잔뜩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술잔에 반쯤 채워져있는 술잔을 집어드는 네 모습에 황급히 술잔을 빼앗곤 대신 내 입에 털어 넣었다. 쓰디쓴 투명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갈 땐 정말이지 괴로웠다.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난 이래서 술이 싫어.
'야, 가자. 일어나. 셋 셀 동안 안 일어나면 놓고 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가 싶었다.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오세훈을 따라 넷 다섯 여섯을 외치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네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지어졌다. 술병엔 술이 반도 넘게 남아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간 누구 하나는 죽어날 것만 같아 일찌감치 집으로 향해야 했다. 안 가겠다며 화를 내면 어쩌지, 하는 작은 걱정이 샘솟았지만 다행히 협조를 잘 해주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곤 거리로 나왔다. 예상대로 택시가 쉽게 잡히지 않아 20분 정도를 벌벌 떨며 서있어야 했다. 찬 공기를 맞아 술이 조금은 깬 건지, 오세훈이 쭈욱-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 난 버스 탈래.'
'어? 그럼 나도 버스! 세후니야, 같이 버스를 타자아-'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오세훈의 뒤를 졸졸 따르기 시작하는 너를 황급히 붙잡곤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술집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둘이 끈끈한 정이라도 맺은 듯했다. 이렇게 될 거라곤 과연 누가 알았을까. 그냥 다 내 잘못이었다. 애초에 같이 가자며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나 혼자 오는 건데….
오세훈에게 대충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몇 분 뒤 도착한 택시에 몸을 실었다. 어디까지 갈까요? 네? 아, 잠시만요. 말을 건네오는 기사 아저씨에게 더듬거리듯 대답을 하곤 조심스레 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취하기 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둔 너의 집 주소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노란 메모장에 적힌 문장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곤 죄송하다는 말까지 덧붙인 뒤에야 택시는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가 많이 취했나 보네유.'
'아…, 그러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곯아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내부의 탁한 공기를 내보내고자 창문을 살짝 열곤, 어깨에 살포시 놓인 작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술도 못 마시면서 오세훈 하나 이겨보겠다고 끝까지 억지로 마시긴. 마음속으로 잔소리를 내뱉곤 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다음부턴 술 마시지 마. 특히 오세훈이랑은 더더욱. 술은 나랑만 마셔. 귀여운 술주정도 나한테만 부려. 얼마든지 다 받아줄 수 있어. 따끔히 화를 내고도 싶은데, 그러기엔 네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오늘은 그냥 이쯤에서 넘어갈게.
조심해서 가라며 굳이 300원은 받지 않으시는 기사 아저씨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곤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방금 잠에서 깨 눈이 침침한 건지, 자꾸만 손으로 눈을 비비는 너와 천천히 발을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곤, 술 기운 탓인지 아직 잠이 덜 깬 탓인지 네 걸음이 살짝 더딘 것도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곤 너와 시선을 마주했다.
'걷기 힘드냐.'
'… 아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을 천천히 꿈뻑이는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네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 걸었으니 분명 발이 아프겠지. 그래서 걸음이 느린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찬찬히 정리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업을까.'
'응?'
'업자.'
'… 안돼…. 나 치마가…'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살짝 젓는 너를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내뱉곤 겉옷을 벗어 네 허리에 둘러주었다. 그리곤 네 앞에 등을 보이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슬쩍 머뭇거리던 네가 곧이어 내 등에 업혀왔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르게 고쳐 잡았다. 그리곤 집까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등에 머리를 꼬옥 기댄 채 고른 숨을 내뱉기만 하는 네 모습이 귀여웠다.
'미안…. 나 무거워어-'
'아니야, 가벼워.'
'…….'
'야.'
'네에-'
'다음부턴 이렇게 많이 마시지 마.'
'…….'
'왜 답이 없어.'
'…….'
'대답 해야지.'
'…….'
'끝까지 대답 안 하네.'
'…….'
'아무리 오세훈이라지만, 나 아까 진짜 화났어.'
'…….'
'세후니가 뭐야, 세후니가.'
'…….'
'나랑 마실 거 아니면, 앞으론 절대 마시지 마.'
'종이니야.'
'…….'
'김종인은 바보지이-'
'… 내가 왜 바보야.'
'내 마음도 몰라주고…. 종이니… , 김종인은 바보야.'
'어쭈.'
알 수 없는 말만 내뱉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 술김에 그냥 하는 말이겠지. 별 의미 없는 말이겠지. 자고 일어나면 전혀 기억이 안 나겠지.
'난 김종인 마음 다- 아는데….'
'무슨.'
'진짠데?'
'그래?'
'그래, 바부야-'
'내가 너 좋아하는 것도 알아?'
'…….'
'모르잖아.'
'…….'
'…….'
'…….'
'자는 거야, 자는 척하는 거야.'
금세 쥐죽은 듯 조용해진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바로 방금 전까지 말끝을 늘이며 이런저런 말을 하더니 그새 잠이 든 건지, 너는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무슨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냥 언젠가 한 번 쯤은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아? 맨 정신일 땐 절대 묻지 못할 텐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물어보겠어.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알싸한 술 냄새가 자연스레 풍겨왔지만, 그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메모장에 적혀있던 비밀번호까지 입력하고 나서야 집 안으로 발을 옮길 수 있었다. 그저 깜깜하기만 한 거실의 불을 켜곤 침실로 보이는 방을 찾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깔끔히 정돈되어있는 침대 위로 너를 살포시 눕히곤 조심스레 침대 끝에 걸터 앉아 곤히 잠든 네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는 네게, 난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
조심스러운 손길로 네 겉옷을 벗겨 의자에 걸쳐두었다. 답답해 보이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주고도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이불을 꼬옥 덮어주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그리곤, 항상 앞머리에 가려있던 둥그런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조심스레 닦아내 주었다.
'덥냐.'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곤히 잠든 네 모습에 대고 작게 말을 건넸다.
'아…, 불편해….'
불편한지 자꾸만 몸을 뒤척이던 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런 너와 시선을 마주하곤 작게 웃음을 지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어떡하지-?'
'화장실?'
'속이 울렁거려어-'
'토할 것 같아?'
속이 많이 울렁거리는 건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은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조그마한 입에 내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화장실 갈까. 급하면 내 손에 해도 되니까…'
'으으…, 좀 괜찮아졌다-'
괜찮아졌다며 내 손을 잡아 떼어내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종이야, 언제 갈 거야?'
'너 잠들면.'
'나 계속 안 자면?'
'밤 새려고?'
'아니- 사실 좀 졸려….'
'그럼 누워야지.'
'누우면 속이 울렁거릴 것 같은데 어떡해?'
'… 몰라, 그건.'
'…….'
'내가 여기서 자고 갈 순 없잖아.'
게슴츠레 뜨인 눈을 가만히 마주하다 먼저 시선을 떨구어 버렸다. 왠지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도 같았다. 반쯤 풀린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애교 섞인 목소리…. 이보다 야할 수가 있을까.
'자고 가면은- 안 되는 건가?'
'안 되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애써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겨두었다. 내가 여기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림과 동시에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마음속으론 애국가 가사를 읊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낯설기 그지 없는 감정을 애써 뒤로 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더운 여름날의 청계천 폭포를 떠올리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술만 마셨을 뿐인데 어떻게 한 순간에 말투와 행동이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건지…, 정말이지 신기했다. 곤히 잠든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다시 이불을 꼬옥 덮어주곤 조심스레 불을 껐다. 어둠으로 가득 찬 방 안은 더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 자.'
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곤, 잠이 든 네 모습을 마지막까지 몇 번이나 확인하며 살금살금 방을 나섰다.
*
'종이니야.'
'김종인은 바보지이-'
'내 마음도 몰라주고…. 종이니… , 김종인은 바보야.'
그때 그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이제 와 물어봤자 어차피 너는 기억이 안 나겠지만, 이쯤 되니 다시금 궁금해졌다. 너에 관한 거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난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네가 꽁꽁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도대체 뭐길래 숨기는 거지. 네 마음이 어떻길래. 내가 모르는 네 마음이 뭔데….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다짜고짜 묻는다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언젠간 알게 되겠지. 언젠간 마음 편히 털어놓게 될 날이 오겠지. 마음속으로 합리화를 하며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오총무가 쏜다! 지금 당장 ○○ PC방으로 달려오면 크나큰 혜택이 주어질 것입니다~]
언제 도착한 건지 모를 게임 광고와도 같은 이상한 문자 메시지를 한 번 훑곤 바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 스팸 메시지함으로 보내버릴까, 어쩔까 고민을 하다 결국 내린 결정이었다. 그날 이후로 다신 연락을 하지 말라 했건만 자꾸 문자나 카톡을 보내오는 오세훈에 슬슬 짜증이 났다. 사실 녀석이 잘못한 건 없었지만, 그냥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내가 왜 너 때문에 질투를 느껴야 하는 건지, 왜 하필 술만 마시면 둘이 쿵짝이 그리 잘 맞는 건지…. 초등학생이나 할 만한 유치한 질투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끝까지 안 오냐? 아이템 선물도 필요 없다 이거야? 오호랏.. 충격적이네.. 지금 PC방.. 무섭게 생긴 어떤 아저씨랑 나밖에 없어.. 단 둘 뿐이라고..]
밝은 대낮부터 술을 처먹은 건지, 오세훈은 자꾸만 이상한 문자를 보내왔다. 녀석의 메시지에 자판을 입력하는 것마저 귀찮아 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온 모음 하나를 입력해 답장을 보냈다. 그리곤 요즘 흥행하는 영화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접속했다. 아무래도 장르는 로맨스가 낫겠지.
내일… 그래, 내일.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며 크게 요동을 치는 것만 같았다. 더이상 미룰 순 없었고, 미뤄선 안 됐다.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마음을 전할 때가 온 것이었다. 사실, 졸업식 날 그냥 보냈다는 게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나중에 언젠간 할 거라며 자꾸 미루기만 하던 고백은, 입대를 코앞에 두고도 결국 할 수가 없었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 다른 놈이 채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하루하루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이건 모두 내게 잘못과 책임이 있는 것이었다. 용기가 부족해 하지 못한 고백, 직접 맞서보지도 않고 겁만 내며 전하지 못한 진심…. 이제 슬슬 전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돈독한 친구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핑계일 듯했다. 그런 같잖은 핑계로 고백을 주저하고만 있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물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지금껏 숨겨온 진심을 솔직히 전하고 싶었다. 그에 따르는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은 없었다. 그냥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만 전하고 싶었다. … 내가 널 이만큼 좋아하는데, 그걸 네가 알아줬음 좋겠어.
[내일 뭐하냐]
딱딱하기 그지 없는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향했다. 그리곤 옷장을 열어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있는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놓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평소 옷을 입는 스타일에 대해선 그닥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으나, 왠지 내일은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야 할 듯했다.
"……."
그러나 단 30초 만에 다시 옷장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뭔가 신경을 써 치장을 하는 건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해야지. 그냥 자연스럽게….
가만히 침대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즈음, 휴대폰에서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보낸 문자 메시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똑같지 뭐.. 개강 전까진 매일 집에서 뒹굴뒹굴.. 왜?]
영화나 보러 가자. 무미건조한 메시지를 작성해 보내곤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그리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휴대폰을 집어들어 오세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게임에 푸욱- 빠져있던 건지, 녀석은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 왜.
"뭐하냐."
- 게임.
"나 머리 말이야. 올린 게 낫냐, 내린 게 낫냐."
- 너 어울리는 거 없는데, 하나도.
"……."
- …….
"너 계정 해킹 당해라."
- … 역시 김종인이야. 항상 내 기대를 저버린다니까.
감탄사를 내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오세훈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다. 애써 무시한 채 전화를 끊어 버리고자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내려는 찰나, 다시금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반 올림.
"그런 거 말고."
- 그럼 뭐 어떤 거…. 근데 왜? 너 누구 만나? ○○이 만나러 가냐?
"아, 그냥."
- 그냥은 무슨…. 알고 보니 약속 있어서 PC방도 안 온 거였구만.
"그런 거 아니라고. 게임이나 해라."
- 내가 손질 해줄까? 나 쓱싹쓱싹 잘하는데.
"그건 너나 열심히 해."
- 그러고 싶어도 보여줄 사람이 없다.
"얼른 애인을 만들어."
- 우리 과가 남탕이라는 걸 알고도 그렇게 말하는 넌 과연 제 정신인 걸까?
"……."
- 일단, 나보단 네가 먼저 애인을 만들었음 해.
제법 얄미운 어투로 말하는 오세훈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간단히 인사말을 전한 뒤 통화를 끊었다. 괜히 전화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무얼 저질러놓고 그걸 도로 후회하는 일이 많아진 것만 같았다. 이게 내일까지 이어져선 안 되는데…. 고백을 해놓고 후회하지만 않았음 좋겠다. 제발.
자꾸만 마음이 붕붕 뜨는 것만 같아, 책상 위에 놓인 얇은 책 하나를 집어들곤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책 하나로 마음이 진정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였다. 베개에 머리를 기대 눕곤 책의 표지를 넘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한 번 읽어보라며 큰 누나가 선물로 준 사랑 시집이었다. 겉 표지부터 연한 분홍색인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첫 페이지를 넘기자 나오는 하얀 배경에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 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머지 않아 진짜 멋진 남자가 되어서 찾아갈게. 그땐 우리 지금의 친구 사이가 아닌, 연인 사이 하는 거 어떨까.
더이상 미뤄선 안 되겠지.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머릿속으로 종종 그림을 그려 보곤 해. 근데 난 도무지 감을 못 잡겠어. 너한테 난 뭘까. 내가 생각하는 너와 네가 생각하는 내가 같을 순 없는 걸까.
네가 나를 둘도 없는 좋은 친구로 보든, 친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든, 그건 신경 안 써. 그냥 말하고 싶어. 내가 널 이만큼 좋아해왔고, 앞으로도 좋아할 거라는 걸.
[다섯 시, 너희 집 앞에서 만나.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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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편부터 초록글이라니.. 어느 방향으로 절을 하면 되는 건가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랑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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