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3 (나의 봄, 나의 계절, 나의 전부)
오전 4시 27분,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누나가 선물로 준 시집은 벌써 다섯 번이나 정독을 했고, 이젠 내용을 통째로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엄청난 영감을 받아 시인처럼 시라도 한 편 쓸 수 있을 듯했다. 밤을 지새운 탓인지, 거울에 비친 얼굴은 꽤나 볼품없어 보였다. 눈 밑에 다크써클도 살짝 내려온 것 같고, 눈도 퀭한 것 같고…. 가장 멋있어 보여야 할 오늘인데, 왠지 벌써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떨쳐내고자 옷을 벗곤 간단히 샤워를 했다.
오전 7시 9분, 별로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아침 밥을 차려 먹었다. 귀찮은 날엔 항상 빵을 먹거나 안 먹곤 했는데, 오늘은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아침 식사로 빵이 아닌 따끈따끈한 밥을 먹어야만 오늘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았다. 근원조차 모를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학창 시절 누구든 하나씩은 갖고 있던 징크스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세훈아. 나 흰색이 어울려, 남색이 어울려?]
왠지 착하게 말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가 잘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아, 오세훈에게마저 정갈한 어투로 문자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녀석에게서 온 답장은,
[미친놈... 말투 왜저럼..? 극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오전 11시 53분, 약속 시간까지도 어느새 대략 다섯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점심 식사론 식빵 세 장과 포도주스 한 잔을 마셨다. 원래 입으려 한 남색 와이셔츠와 까만 슬랙스는 아쉽게도 입을 수 없게 되었다.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포도주스가 담긴 컵을 식탁에 잘못 내려둔 탓에 포도주스를 잔뜩 엎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주스로 얼룩이 진 옷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후 2시 39분, 입술이 자꾸 마르는 것만 같아 립밤을 발랐다. 립밤 하나로 금세 촉촉해진 입술에선 상쾌한 민트 향이 났다. 너무 신경을 쓴 탓일까, 배도 살살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음악시간 가창 시험을 준비하는 심정, 점수가 엉망인 성적표를 들고 엄마 앞에 우뚝 서있는 심정과도 같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이런 걸 갖고 이렇게 떨려하고 불안해하는 건지, 나도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케이블 채널에선 개그콘서트를 방영해주고 있었다. 평소 재밌게 보던 개그 코너였지만, 지금은 왠지 일말의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TV에선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TV를 보고 있는 건지, TV가 나를 보고 있는 건지 제대로 분간조차 되지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심장은 두근두근 빠르게 요동치기 바빴고,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오후 4시, 옷장에서 겉옷을 꺼내들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도 일찍 가서 기다려야지. 고작 두 번 가봤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이 제법 낯설지가 않았다. 앞으론 네 자취방을 찾아갈 일이 잦아졌음 좋겠다.
오후 4시 46분, 이미 도착해버린 네 집 앞에 멀뚱히 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할 즈음, 네게서 문자가 왔다.
[김종이야.. 나 10분 정도 늦을 것 같은데.. 너 걸어와, 버스 타고 와? 출발했지?]
텍스트로도 느껴지는 초조함과 다급함에 피식 웃으며 내게 보낼 답장을 천천히 입력하기 시작했다.
[나도 좀 늦을 것 같다. 버스가 안 오네. 천천히 나와]
오후 5시 8분, 역시 오늘도 예쁜 네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몰래 심호흡을 하곤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왔냐.
오랜 친구 사이를 깨뜨릴 만한 말은 뭐가 있을까. 사실 아직 두려워. 굳게 마음 먹고 나온 거긴 한데, 너를 오래 알아와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고백을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 그래도 말할 거야. 더이상 미루기 싫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후회를 했는지 몰라. 진작 말할 걸, 진작 좋아한다 할 걸, 내 마음이 이렇다 진작 말할 걸…. 가까운 길을 멀리 돌고 돌아 이제서야 온 나지만, 오래 준비해온 만큼 내 마음은 진심이야.
너와 있을 때면 난, 항상 딱딱하기 그지 없는 일상 생활 그 너머의 것들을 상상하게 돼. 내 마음을 전부 표현하기엔 이 세상의 단어가 너무 부족한데 어쩌지….
예나 지금이나, 넌 내게 있어 언제나 분홍 빛이야. 물론 지금 뿐만이 아닌 먼 미래에도 그럴 거고.
*
[나도 좀 늦을 것 같다. 버스가 안 오네. 천천히 나와]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내 문자에, 곧이어 김종인의 답장이 도착했다. 항상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와 나를 기다리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녀석도 늦을 것 같다니 조금은 다행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10분이나 기다리게 될 것만 같아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옷을 고르는 데에만 시간이 꽤나 걸렸다. 날이 갈수록 김종인을 만날 때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무슨 신발을 신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커져만 갔다. 늦지 말자, 늦지 말자 마음속으로 다짐 아닌 다짐을 했건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늦어버리고 말았다. 오랜 고민 끝에 골라낸 옷은 연한 분홍색의 원피스였다. 거울 앞에 모습을 비추어보곤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이쯤 되니 김종인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같았다. 왜 항상 치마를 입고 나오는 걸까, 어디 데이트라도 나가는 줄 아나, 내가 네 남자친구라도 되는 줄 아나… 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걸 어떡해.
마지막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하곤 서둘러 구두를 신었다.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플 것도 같았지만, 꾸욱 참고 감수해야 했다.
현관 문을 열자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휘감아왔다. 아직 풀리지 않은 날씨 탓에 살짝 몸이 떨리긴 했지만, 나름 견딜 만한 추위였다. 저도 늦을 것 같다며 천천히 나오라 답장을 해온 김종인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벽에 기댄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건지 녀석이 살짝 고개를 돌려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왔냐."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어? 언제 왔어?"
"나도 방금."
방금 왔다는 말에 살짝 안도하며 어색히 웃어보였다. 가자.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곤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김종인을 따라 걸음을 뗐다. 걸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구두 신었네. 발 아프게."
"… 원피스엔 구두가 제일 잘 어울려서."
"오래 걸으면 발 아프잖아."
"뭐, 나름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그래야지. 두 번은 안 업어줘."
"응?"
그저 앞 쪽에만 시선을 둔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곧이어 녀석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론데. 두 번은 안 업어준다고."
"… 엥…."
"너 취했을 때."
"……."
"……."
"……."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찔끔찔끔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내가 취한 날, 김종인이 집까지 대려다 줬다 했지. 그럼…
"… 업어줬다고?"
"무거워서 죽는 줄 알았어."
장난스레 웃어보이며 말하는 김종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그냥 넘어가자.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빨개진 내 얼굴을 보며 녀석은 자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밉게 느껴졌다. 녀석을 살짝 흘기곤 한 걸음 떨어져 혼자 빠릿빠릿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닥보다 훨씬 높이 띄워진 발의 뒤꿈치가 살살 아파왔지만 상관은 없었다.
"넘어져, 그러다."
뒤에선 웃음기 섞인 김종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하곤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 놀리는 맛에 사는 김종인은 군대를 다녀와도 여전했다. 조금은 달라질 거라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삐진 것 같네."
"아니네요."
언제 따라온 건지, 김종인은 내 옆에 우뚝 서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에 팔을 둘러오며 툭 내뱉듯 말을 건네오는 모습에 흠칫 놀라긴 했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대답을 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녀석의 향수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여전히 그 향수였다. 내가 사줬던 향수…. 상당히 마음에 드나 보네. 줄곧 이 향수만 사용하는 걸 보면….
*
예상대로 영화관 안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무슨 장르의 영화를 볼 거냐는 내 말에 김종인은 꽤나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로맨스. 로맨스…. 웬 로맨스지. 군대를 다녀오더니 취향마저 바뀌어버린 건가. 왜 굳이 로맨스를…?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지만 어색히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팝콘 먹을 거야. 아이처럼 말을 내뱉곤 두리번거리며 팝콘 코너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 몰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리가 얼마나 길면 휴대폰 화면이 모자르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오세훈 못지 않게 어깨도 넓어. 살짝 짝다리를 짚은 채 팝콘을 주문하는 뒷모습이 어쩜 저리 완벽할 수 있는 거지. 사진이 김종인의 멋짐을 다 담지 못하네…. 머릿속으로 김종인에 대한 찬사를 내뿜고 있을 즈음, 입에 빨대를 문 채 녀석이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왜 웃고 있냐. 야한 생각 했지."
"아, 뭐라는 거야!"
마치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발끈하며 크게 소리를 쳤다. 그와 동시에 내 쪽으로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꽂혀왔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어버리던 녀석이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아니라고 치자. 장난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며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김종인의 입꼬리는 더욱 시원히 올라갔다.
*
오랜만에 보는 로맨스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더이상 할 게 없던 고3 시절,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달래보고자 영화 한 편을 다운받아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엔 제목 하나에 끌려 무작정 다운을 받은 것이었고, 그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였다는 건 영화의 중반부 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별로 유명한 영화가 아니었어서 그런지 사람들 사이의 언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 흥미롭게 본 영화였고, 나도 연애를 한다면 꼭 그런 알콩달콩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곤 했었다.
오늘 본 로맨스 영화는 제법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였다. 꽤나 명랑하고 발랄한 성격을 지닌 여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밖에 모르는 순정파의 정석인 남자 주인공. 평소 괜찮게 보던 배우들이 맡은 배역이라 그런지 더욱 집중이 잘 되는 것도 같았다. 옆에 김종인이 있으니 자꾸 사소한 것도 신경이 쓰이고 집중이 안 될 것만 같았는데, 나름 영화에 집중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만 걱정이었던 건, 영화가 너무나도 조용하고 잔잔한 분위기라 녀석이 잠들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자는지 안 자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문득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을 때, 의외로 녀석은 올곧은 자세로 앉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스크린을 보고 있는 녀석의 옆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다면 금세 내 시선을 의식해왔을 녀석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런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화에 흠뻑 빠진 듯 보였다. 김종인과 로맨스 영화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다 좋았는데 마지막이 좀 아쉽다. 여자도 남자랑 같이 떠날 줄 알았는데…."
"남자 떠났어?"
"… 응? 마지막에 남자 해외 나가고 끝났잖아."
"아,"
작게 탄성을 내뱉는 김종인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봐놓고 금세 내용을 까먹어 버린 건지, 녀석은 금시초문이라는 양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게 조금은 이상했지만 그냥 넘기곤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점심을 가볍게 먹은 탓일까, 배가 너무나도 고팠다.
*
영화관을 나섰을 때의 하늘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때를 나타내주고 있었고, 배가 너무나도 고픈 나머지 김종인과 음식점으로 향해야 했다. 뭐가 제일 먹고 싶냐는 녀석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곤 피자와 돈가스를 답했다. 그럼 돈가스 먹자. 골똘히 생각을 하던 김종인이 현명하게 돈가스를 선택하고 나서야 근처 유명한 돈가스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제법 낯선 분위기를 풍기는 돈가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시간 때라 그런지, 손님들이 많았다. 자리들은 거의 손님으로 차있었고, 군데군데 위치한 얼마 없는 빈 자리로 이동해야 했다.
"나 돈가스 완전 오랜만에 먹어봐!"
"난… 아,"
"왜? 왜 말을 하다 말아?"
"군대에서 마지막으로 먹었어."
"… 아…, 많이 힘들었구나. 군대 얘기만 나오면…."
"고르기나 해."
메뉴판을 건네며 단호하게 말해오는 김종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배싯 웃어보였다. 난 이거 먹을래! 이게 제일 맛있어 보여!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며 녀석에게 말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곤 제 것까지 주문을 마쳤다. 아직 음식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 듯했다.
"야."
"응?"
"넌 내가 이름을 불러줬음 좋겠어?"
"이름?"
"어."
"이름…."
"솔직히 야, 너, 이런 건 좀 정이 없잖아."
"… 뜬금없이 왜? 맨날 그렇게 불러왔잖아."
"그냥 궁금해서."
"당연히… 이름 불러주는 게 더 좋지."
"그래."
"……."
"○○아,"
"……."
"이게 더 좋다는 거지."
"… 응…."
작은 목소리로 내뱉어진 내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김종인이 제 앞에 놓여있던 물컵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크게 한 모금을 마시곤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로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저 이름 하나를 다정하게 불러주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혹여나 들킬 세라 작게 호흡을 내뱉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안 그래도 마주하기 어려운 시선…. 너무 떨리는 나머지 이젠 아예 녀석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듯했다.
"… 아, 감사합니다."
작게 일렁이던 물컵 속 액체의 움직임이 잠잠해졌을 무렵,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이런 저런 자잘한 것들을 챙겨주기 시작하는 김종인 탓에 심장이 터질 것도 같았지만, 정말이지 기쁘고 설렜다.
*
처음 가본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맛과 가격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다만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끝맛이 살짝 느끼했달까….
영화 티켓의 값을 김종인이 모두 지불했던 게 미안해, 밥 값은 내가 녀석의 몫까지 지불을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꼬르륵 소리가 절로 나던 배는 어느새 포만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소화나 시킬 겸 공원을 산책하자는 녀석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우리가 다니던 고등학교 쪽으로 쭈욱 가다 보면 보이는 넓은 공원…. 수능 날이었을까, 팡팡 터지는 폭죽들을 구경하던 공원이었다.
녀석과 나란히 선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바로 옆에 위치한 벤치에 털썩 앉았다. 높은 구두를 신은 내 발을 흘끗 바라보며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리는 녀석의 모습에 멋쩍게 웃어보이곤 애꿎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집에 갈 땐 버스 타고 가자. 너 발 아파서 안 되겠다."
"에이…, 아니야. 괜찮아."
애써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정말 괜찮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내 모습에 김종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앞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발이 아프긴 했지만, 걱정을 해주는 모습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걱정스레 건네오는 말 몇 마디로 아픔이 싸악 달아나는 것도 같았다.
"여기 기억 나냐. 너 수능 끝난 날 폭죽 구경했었잖아, 여기서."
"당연히 기억 나지…. 그때 얼마나 멋있었는데. 또 보고 싶다-"
까맣게 변한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도시의 하늘은 검정색 물감을 뒤집어 쓴 것도 같았다. 넓디 넓은 밤하늘엔 반짝이는 별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웠는데."
"시끄러웠다니! 완전 멋있었어."
녀석의 말에 살짝 발끈을 하며 말했다. 그리곤 또다시 찾아온 정적…. 그저 앞 쪽에만 시선을 둔 채 눈을 꿈뻑이기만 하는 김종인과 나. 조용하게 들려오는 도둑 고양이의 울음소리. 급격히 잔잔해진 분위기에 찬찬히 머리를 굴리며 대화 주제를 떠올리려 할 때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몰랐겠지만,"
"……."
"폭죽 소리에 숨어서 몰래 고백했었어."
"……."
"좋아한다고."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저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걸까.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슬쩍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저 앞 쪽에만 시선을 둔 채 일정한 간격으로 눈을 꿈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김종인의 옆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 다시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무슨 말 할 것 같아?"
그리곤 곧이어 녀석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해왔다. 얼떨결에 맞닿아진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왠지 피할 수가 없었다. 눈을 마주하자 다시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짓던 녀석이 다시 앞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참 오래 알았지."
"……."
"놀이터에서 너를 처음 만났던 게 아직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고등학교도 졸업 했어."
"……."
"넌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난 너랑 등하교도 같이 하고, 학교 끝나면 맛있는 것도 사먹고 하던 사소한 일상이 좋았어."
"……."
"앞으론 자주 못 보겠구나 싶어서 졸업하는 것도 싫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니까 나도 좋아."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심장은 미친듯이 두근거리기 바빴고, 그저 아랫입술만 깨물며 녀석의 목소리에 집중을 했다.
"전부터 계속 말하려 했어. 근데 자꾸 미루게 되더라."
"……."
"난 지금 이런 사이도 좋고 행복한데,"
"……."
"말 한마디로 이런 사이마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게 너무 겁이 났어."
"……."
"처음엔 부정도 많이 했지. 그냥 순간적인 감정이라고, 잠시 착각을 하고 있는 거라고."
"……."
"혼자 정리도 해보려 했어. 무엇보다 난 너랑 멀어지는 게 싫었으니까."
"……."
"근데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더라."
"……."
"그래서 그냥 언젠간 말하자 생각했어."
"……."
"툭 던지듯 말해볼까, 지나가다 흘리듯 말해볼까."
"……."
"그러다 또 혼자 마음속으로 삭이고."
"……."
"계속 그러다 보니 벌써 몇 년이 지났어."
그저 입을 꾸욱 다문 채 녀석의 목소리에만 집중을 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달콤한 말들을 쭈욱 늘어놓는 김종인의 목소리는 더욱더 달달해서 녹을 것도 같았다. 잠시 입술을 닫곤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이던 녀석이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술을 뗐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아,"
"……."
"좋아해."
"……."
"더이상 사심없인 널 못 보겠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가슴 설레는 세 글자가 마음속에 코옥 박혀왔다. 지금 내가 보고 듣는 게 현실인지 꿈인지 제대로 분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콩닥거렸다. 그니까, 김종인은 지금 내게…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 좋은 놈 아니야."
"……."
"삐지기도 잘 삐지고, 가끔 욱할 때도 있어."
"……."
"남들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무심하고 무뚝뚝해."
"……."
"… 많이 어색하고 서툴 거야."
"……."
"네가 느끼기에 부족한 부분들, 안 좋은 부분들, 고치도록 노력할게.
"……."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진 나도 모르겠어."
"……."
"그냥 네가 좋아."
고백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나랑 연애하자."
마지막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눈물샘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혼자 꽁꽁 숨겨온 감정을 이젠 드러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전긍긍하며 사소한 것에도 온갖 신경을 쓰고, 아무 것도 아닌 녀석의 행동에 혼자 떨려하던 내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혹여나 마음을 들키게 되진 않을까 매일을 두려움에 떨던 나, 자꾸만 녀석을 어색해하며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던 나, 졸업을 함과 동시에 자주 못 보게 될 거라며 온갖 걱정을 해대던 나. 지난 날의 내 모습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올라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혼자 마음 졸이며 짝사랑을 해온 지도 벌써 몇 년일까. 일 년, 이 년, 삼 년…
"… 울어?"
적잖이 당황한 듯한 김종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녀석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싶더니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무릎을 굽힌 채 내 앞에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춰온다. 그게 너무나도 부끄럽고 쑥쓰러워 얼굴을 더욱 가렸다.
"손 치워 봐. 얼굴 좀 보자."
곧이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린 김종인이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녀석에게 꼬옥 잡힌 손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내주는 녀석의 손길에 살짝 흠칫하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그시 나를 바라봐오는 눈빛에 심장이 멎을 것도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 애꿎은 녀석의 손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 나도 좋아해."
"……."
"… 용기가 부족해서… 그동안 말 못했어."
내 손을 잡고 있던 녀석의 손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머릿속은 새하얗기만 했다. 쉽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마음이 답답했다. 그저 입술만 깨물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녀석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두어 번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계속 그렇게 깨물면 피 나."
"……."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 좋다."
"……."
"… 사실 아직 안 믿겨."
그저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꼬옥 잡고 있던 김종인이 씨익 웃어보였다. 오늘따라 저 웃음이 더욱 멋있어 보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녀석이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기분이 묘했다. 앞으로 너와 나 사이엔 어떤 일이 펼쳐질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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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루어졌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 그냥 울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사해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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