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1 (새로운 시작)
"… 아으…."
지금이 몇 시야…. 어제 저녁,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하며 과음을 했던 탓에, 속이 쓰리면서도 울렁거렸다. 워낙 술을 못 마시는 나였던지라, 고작 소주 몇 잔으로도 꽐라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잘 뜨이지도 않는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옮겼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년을 넘게 살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기상을 해보다니….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게 술의 위력이구나. 고작 소주 몇 잔으로 뿅- 가버린 내 모습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 번 술의 대단함과 강력함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시각은 오후 1시 36분이었다. 난 이제 눈을 떴는데 벌써 하루의 절반이 지나가 있다니, 정말이지 끔찍했다. 느긋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발을 디뎠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가방과 의자에 걸려있는 반코트가, 어젯밤 나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보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평소 술을 잘 못 마셔 입에도 가져다대지 않았던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말이지. 다만 다행인 건, 그렇게 헤롱헤롱한 와중에도 집엔 용케 잘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주 몇 잔에 필름이 끊겨버렸던 건지, 이상하게도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제대한 지 두 달 된 김종인을 어제 처음 만났고, 카페에 가서 얘기를 나눴고, 놀이터에 갔지. 그리고…
'오늘 한가해? 집 가면 뭐하냐.'
'나? 그냥 뒹굴뒹굴…. 인터넷 쇼핑몰이나 뒤지든가….'
'그럼 늦게 들어가도 상관 없겠네.'
'… 어?'
'나 저녁에 오세훈이랑 술 마시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가자.'
얼떨결에 술을 마시러 갔지. 거기서 오세훈이랑 과연 누가 더 잘 버텨낼까 내기를 했고… 옆에선 김종인이 그만 마시라며 나를 말렸고… 분명 거기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상의 기억은 아예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뻗어 곯아떨어진 건지, 옷도 입고 나간 그대로였고, 화장도 그대로였다. 이게 바로 피부가 안 좋아지는 지름길이지. 술이 웬수다, 웬수. 속으로 한탄을 하며 갈아입을 옷을 챙겨들곤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머리는 어질어질, 속은 울렁울렁…. 죽을 맛이었다.
*
오랜만에 만난 김종인은 분명 예전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좀 더 남자다워졌달까. 어쨌든 고딩 김종인, 새내기 김종인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뭐? 휴학을 2년이나 했어? 왜? 난 너 이제 4학년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아르바이트도 하고 뭐 이것 저것 하다가….'
'그럼 너도 2학년 올라가는 거네. 이야, 우린 영원한 친구인가 봐. 나도 2학년, 너도 2학년, 김종인도 2학년. 크- 멋있어.'
2년 휴학을 했다는 내 말에 오세훈은 깜짝 놀라며 말을 내뱉었다.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싶어 아무렇지 않게 답을 하자, 녀석은 금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르바이트와 부족한 공부를 목적으로 신청했던 휴학이지만, 이렇게 길어질 줄은 나도 몰랐다. 2년 만에 다시 학교를 나가려니 막막하기도 한데, 그건 군대를 다녀온 김종인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닌데, 공교롭게도 녀석과 같은 년도에 졸업을 할 수 있을 듯했다. 아주 우연적으로 들어맞은 것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저 같은 년도에 같이 졸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김종인이 군대에 가있을 동안, 난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다. 마치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자친구라도 된 양 매일을 의욕 없이 보내곤 했다. 녀석의 존재가 내게 이리도 크구나.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의도치 않게 확인사살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기다리면 오겠지. 더 멋진 남자가 되어 돌아올 거야. 기다리고 기다리다 내 머릿속에서 살짝 잊혀져 있을 때쯤 녀석은 돌아올 거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혀질 거야.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과 함께 잊혀질 거라 생각했던 녀석은,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내가 군대를 간 것도 아닌데, 왜이리 길게만 느껴지는 걸까. 내가 너를 생각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생각할까. 아니, 나를 기억하긴 할까. 사소한 거에 잘 삐지고 장난기도 많은데, 혹여나 안 좋은 소리를 듣진 않을까. 밥은 잘 챙겨 먹고 잠은 잘 자고 있을까. 훈련 받는 거 많이 힘들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저 나 혼자만의 걱정만 늘어갈 뿐이었다. 녀석의 소식을 알고 싶다 해도 알 길이 없었다. 김종인이 보고 싶을 땐 녀석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교복을 입은 풋풋한 모습…. 바쁜 와중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내서 면회를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감이 수없이 밀려왔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 그냥 갔다올 걸 그랬네…,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녀석은 제대를 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더욱 멋있어진 것도 같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난 아직도 녀석의 얼굴만 보면 하고 싶던 말도 달아나 버렸고 온몸이 꽁꽁 얼어 붙었다. 내가 김종인을 대하는 방식이라든가, 녀석을 보면 저절로 느껴지는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일어났냐]
[속은 좀 어때]
[아직 자나 보네]
[잠꾸러기~~~]
휴대폰 홀드를 열어, 언제 도착한 건지 모를 문자 메시지들을 쭈욱 읽어내렸다. 전부 김종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고작 문자 메시지 하나로도 이렇게 가슴이 떨리다니, 나도 참 큰일이었다. 내가 먼저 전화나 카톡을 하지 않으면 끝까지 연락이 안 올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다음날 바로 연락을 해올 줄이야…. 은근 감동이었다. 그동안 자주 보지 못해 서운하긴 했지만, 어제를 기점으로 왠지 녀석과 다시 예전처럼 가까워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잠꾸러기 뒤에 물결 세 개…. 귀여…
"……."
이쯤 되니 나도 참 팔불출 같았다. 그저 눈에 콩깍지가 씌여 김종인이 하는 행동들, 그 중 사소하디 사소한 행동이라 해도 모두 귀엽고 멋있게 보였으니 말이다. 짝사랑만 벌써 몇 년 째, 해를 거듭할수록 내 증세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이제 막 씻고 나왔어... 뭐해?]
살짝 덜 마른 앞머리에선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휴대폰 화면 위로 내려앉은 물방울들을 대충 문질러 닦곤, 김종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면도 중]
면도 중이라면서 답장은 왜이리 빠른 건지…. [역시 멀티태스킹의 귀재군요?] 라며 꽤나 우스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침대에 털썩 앉아 가만히 녀석의 답장을 기다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는 건 정말이지 설레고 떨리는 것 같다. 남녀 사이엔 적당한 밀당이 필요하다고들 말하지만, 내겐 전혀 필요가 없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웬 밀당? 아니, 사귀는 사이라 해도 난 밀당 같은 거 절대 안 해. 문자가 도착하면 바로 답장을 보내고, 최대한 솔직히 내 감정을 표현할 거야. 밀당을 어떻게 해. 문자가 오면 당장 바로 답장을 보내고 싶어 죽겠는데….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도대체 이 문자엔 어떤 답장을 보내야 할까. 어떻게든 문자를 이어가고 싶은데, 이런 간단하디 간단한 내용엔 더이상 뭘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문자나 카톡은 대충 이러하다. 휴대폰을 손에 꼬옥 쥔 채 그 사람에게서 답장이 오기만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답장이 오면 황급히 내용을 확인하고, 어떻게든 문자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의문형으로 답장을 한다. 물론 지금의 나도 그렇다. 어떻게든 연락을 이어가고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굴려 답장을 보내려 하지만, 녀석의 간결한 문자 메시지로 인해 아예 뿌리가 쏘옥 뽑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은 허황된 느낌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항상 그래왔던 김종인이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약간의 서운감이 느껴졌다. 나만. 나 혼자만. 녀석은 전혀 모를.
♬♪~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잠잠하던 휴대폰에선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삐죽이던 입술을 다시 집어넣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녀석의 이름에, 괜히 꼴깍- 침이 삼켜졌다. 그리곤 혹여나 전화가 끊길 세라,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 여보세요- 순식간에 차오른 설렘 사이를 비집고 나온 첫 마디가 조금은 떨렸다.
- 뭐해.
"그냥… 앉아있어."
- 안 심심하냐.
"심심하지…. 면도는? 다 했어?
- 응.
"그렇구나. 빠르네…."
- 갈게.
"응?"
- 너한테 간다고.
"뭐? 너 여기 주소 알아? 모르잖아…."
- 왜 몰라.
"… 엥?"
- 어제 보니까 나랑 그리 멀지도 않던데. 느긋하게 걸어 간다. 30분 정도 뒤에 문 열어 놔.
의미 모를 말들만 술술 늘어놓던 녀석이 먼저 통화를 끊었다. 분명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겠다는 건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자취하는 집에 다짜고짜 찾아 오겠다니…. 따로 감춰야 할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아무 꾸밈 없는 후리한 모습으로 녀석을 맞이한다는 게 조금… 아니, 많이 꺼림칙했다. 그렇다 해서 집인데 잔뜩 치장을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고, 아예 안 꾸미고 있자니 또 그렇고…. 안 그래도 술 기운 탓에 어지럽던 머릿속이 이런 저런 고민들로 휩싸여 더욱 복잡해졌다. 흘끗 시계를 확인하곤 서둘러 화장대 앞으로 가 머리를 손질했다. 방금 감고 나온 머리가 조금은 부스스했지만, 다행히 빗질 몇 번으로 매끈히 정리가 되었다. 집 안임에도 불구하고 비비크림과 틴트를 바르고 있다는 게 웃기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곤 거울에 이리저리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잠옷용 반바지가 살짝 짧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게 아니면 입을 옷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이대로 있어야 했다. 30분…. 말이 30분이지, 눈만 꿈뻑이면 금방 지나가버릴 짧은 시간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며 집 안을 말끔히 정돈하기 시작했다.
*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소파에 앉아 있기도 어느새 3분… 아니, 4분 째였다. 안 그래도 조용한 집 안에 TV도 꺼져있으면 괜히 어색할 것만 같아, 서둘러 TV 전원을 켰다. 밝아진 화면에선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자두의 얼굴이 나타났다. 자두…. 자두 맞나? 이름이 자두인지 앵두인지도 헷갈렸다. 하필 투니버스 채널이 맞춰져 있을 게 뭐람. 다시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돌리려 할 찰나,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온 건가 싶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매무새를 정돈하곤 천천히,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 녕?"
꽤나 바보같이 내뱉어진 인사말에 입술을 꾸욱 깨물곤 마음속으로 이불킥을 했다. 그런 나를 흘끗 바라보던 김종인이 제 손에 들린 보석바를 한 입 깨물었다. 그리곤 내게 제법 묵직한 편의점 봉투를 건네온다. 봉투 속엔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들이 담겨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발을 디디는 녀석을 바라보며 고맙다는 말을 작게 건네곤 부엌으로 걸음을 옮겨 아이스크림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너 이런 만화 보냐."
"… 아, 아니야! 채널 돌리려 했는데 마침 딱 네가…. 그러는 넌 아직도 그런 캐릭터 양말 신냐?"
소파에 앉아, 부엌에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하던 녀석이 피식 웃음을 짓곤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빨간 야구잠바가 김종인과 꽤나 어울렸다.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오는 녀석을 흘끗 바라보며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정리해 넣곤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어째 눈높이가 더욱 높아진 것도 같았다. 어젠 힐을 신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역시 맨 바닥에서 녀석을 마주하니 확연히 그게 느껴졌다. 키가 더 컸구나. 몸도 더 좋아졌…
"어, 보석 하나 떨어졌다."
"보석?"
"이거, 보석 모양 얼음."
"아, 빨리 찾아! 그거 녹으면 바닥 끈적끈적해진단 말이야…."
내 말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바닥을 살피던 녀석이 허리를 굽혀 보석 모양 분홍색 얼음을 집어들었다. 어울리지 않게 보석바라니…. 문득, 딸기맛 요맘때를 먹던 오세훈이 떠올랐다. 역시 단짝 친구 아니랄까 봐, 둘 다 입맛이 소녀스러웠다.
"아, 맞다. 너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궁금했던 것을 물으며 김종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를 보며 의아하게 묻는 나를 그저 내려다 보기만 할 뿐, 녀석에게선 어떠한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묵묵히 보석바만 깨물어 먹으며 침묵을 지키는 녀석의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식탁 의자를 꺼내 털썩 앉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아이스크림 막대를 쓰레기통에 버리곤 덩달아 내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냐니. 어제 내가 데려다 줬잖아, 집까지."
"… 뭐라고?"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 네, 하나도…."
"오세훈이랑 내기 한 건 기억 나냐."
"응, 거기까진 기억 나."
"오세훈이 그랬잖아. 휴대폰 메모장에 미리 집 주소 좀 적어두라고."
"나한테?"
"그래."
"왜?"
"취하면 데려다 줘야 되니까."
'야, 너 메모장에 집 주소 좀 미리 끄적여 놔.'
'주소? 왜?'
'너 취하면 집 못 찾아 갈 것 같아.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해둬야, 어? 걱정이 없어진다고.'
'…….'
'그래야 나랑 김종인 둘 중 멀쩡한 놈이 집까지 데려다 주든가, 어쩌든가 하겠지. 어때, 완전 똑똑하지?'
'… 그다지….'
'… 충격.'
오세훈과 내기를 하기 전 나눴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김종인은 분명 얼마 마시지 않았을 거고…. 아, 메모장에 적힌 주소를 보고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준 거였구나. 내가 스스로 잘 들어온 게 아니라…. 그것도 모르고 난 내 자신을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괜히 부끄러웠다.
"… 아, 잠깐…"
순간, 부끄러운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옷차림은 입고 나간 그대로였고, 또…
"나 아무 짓도 안 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 표정이 좀."
"… 그래서… 내기는 누가 이겼어? 당연히 내가 졌겠지?"
"잘 아네."
"……."
"근데 오세훈도 완전 꽐라 돼서 갔어."
"아깝다. 오세훈 취한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어야 하는데…."
"넌 앞으로 술 마시지 마."
"왜…. 나 술 취하면 막 진상이야?"
"어."
"… 나 그렇게 취할 정도로 마셔본 건 어제가 처음이야."
"그니까 다음부턴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 알았어…."
꽤나 무섭게 말을 해오는 김종인을 슬쩍 바라보며 알겠다 대답을 했다. 약간의 위압감이 느껴져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마치 아빠한테 꾸중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 술버릇도 알고 싶어."
"난 그런 거 없어."
"에이…."
"에이는 무슨 에이야."
"나중에 한 번 김종인 만취하게 만들어 봐야지."
"큰일 날 소리 하네. 술 싫어."
"쳇."
단호하게 흐름을 끊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TV에선 아직도 자두 만화를 방영해주고 있었고, 서둘러 리모콘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소파의 가장 끝 자리에 앉아있는 녀석과는 살짝 떨어진 자리에 살포시 앉으며 TV를 껐다. TV의 전원이 꺼짐과 동시에 싸늘하고 무거운 기류가 녀석과 내 주위를 감도는 것만 같았다. TV를 괜히 껐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리모콘을 집어들고자 손을 뻗었을 때, 녀석이 입을 열었다.
"설마 평소에,"
"……."
"그 손바닥만 한 옷을 입고 집 앞 편의점을 갔다 온다던가, 그러진 않겠지."
"… 아, 이거…. 이건 그냥 잠옷인데…."
짧은 바지를 내려다보며 어색히 답했다.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는 건지, 그냥 별 관심이 없는 건지, 녀석은 팔로 머리를 괸 채 거실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옆에 놓여있던 쿠션을 집어들어 내 무릎 위로 올려주곤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요즘은 안 바빠?"
"어. 제대하고 자취할 집도 구했으니까, 개강 전까진 한가하지. 너도잖아. 맞지."
"응. 음…, 강아지들은 집에 있어?"
"이제 본가에."
"아아, 외롭겠네."
"조금."
"… 다시 학교 나가려니까 막막해."
"처음만 그렇지. 다니다 보면 익숙해져, 너도 모르는 사이에."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토록 내가 보고 싶어하던 김종인이 맞는 걸까,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좋았다. 거의 2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어제 다시 만나게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김종인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온갖 불안감과 우울감이 느껴지는 위태로운 상태라 해도, 김종인이 곁에 있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그만큼 녀석은 내게 크나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없어선 안 될….
"그… 이렇게 오랜만에 봐서 좋아. 내가 비록 면회는 못 갔지만…."
"넌 나 없는 동안 알바 하고, 공부 하고, 그렇게 지냈어?"
"응. 대충 그럭저럭 지냈지."
"오세훈도 네 소식을 잘 모르더라. 둘이 연락 별로 안 했었나 봐."
"그치…. 별로 안 했어. 그래도 초반엔 좀 했는데, 서로 바빠지다 보니까… 안 하게 되더라고."
내 말에 김종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런 녀석을 따라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곤 배싯 웃어보였다. 팔로 머리를 괸 채 그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던 녀석이 슬쩍 내게 다가와 앉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지."
"어, 뭐…. 반갑지…. 너도 그렇고 오세훈도 그렇고…."
"……."
"오세훈 걔도 뭐…, 많이 남자다워졌더라."
살짝 쑥쓰러워져 애꿎은 오세훈도 함께 언급하며 대답을 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건 물어보나 마나지. 안 반가울 리가 없잖아….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연락 한 통으로 인해 지난 날을 추억할 수 있을 만한 만남이 주어지게 되었고, 어렵사리 그들과 재회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오세훈도, 김종인과 같이 조금은 남자다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마를 훤히 드러낸 헤어스타일이 약간 낯설긴 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교복 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으로, 학교 근처 카페나 분식집이 아닌 술집에서 녀석들을 마주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나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교복을 입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벌써 스물 세 살이 되었네. 시간 참 빠르지. 누누이 느끼는 거지만, 시간은 참 빨라. 하지만 행복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들뜨고 기뻐.
그러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분명 그 중엔 만나기가 꺼려지는 사람이 있고, 다신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 나 일주일 전인가? 문자 왔었어.'
'문자? 누구한테?'
'박찬열.'
'… 아.'
'군대 잘 갔다왔냐는, 그런 식상한 문자던데.'
'… 그래서? 뭐라 답장 했는데?'
'씹었어.'
어제 카페에서 김종인과 나눴던 짧은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박찬열. 박찬열…. 그동안 잊고 지내던 이름이었다. 영영 어딘가로 가버리곤 나와 녀석을 싸악 잊은 채 살아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녀석에게 연락을 해왔다는 말을 듣자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그는 줄곧 집 앞으로 찾아오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꾸준히 출석 도장을 찍던 그는 점차 횟수를 늘려갔고, 의도치 않게 매일이다시피 그의 얼굴을 봐야 했다. 딱히 내게 볼 일이 있어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오늘은 왜 온 것이냐며 묻는 나에게 그는 애매한 답만 해줄 뿐이었다. 그냥. 오고 싶어서. 와 보니까 너희 집 앞이네. 그런 그가 조금은 이상해 슬슬 그를 피하기 시작했고, 최대한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럴 때면-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이면-그는 내게 전화나 문자를 해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상황에 휩싸여 있는 건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그의 연락을 일체 무시하곤 하루하루를 내 뜻 대로 보냈다. 그런 내게 지쳐 스스로 멀어지기를 결심한 건지, 꾸준히 집 앞을 찾아오던 그의 모습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직 안심하긴 이른 걸까.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잠시나마 내게 불안감을 안겨주던 '박찬열'이라는 사람은 내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김종인의 말 한 마디로 인해 다시금 상기가 되고 말았다.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가.
"집 괜찮네. 혼자 살기엔 좀 넓어 보이지만."
"난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집 안을 천천히 훑던 김종인이 말했다. 처음 와보는 거라 그런지, 많이 신기하면서도 낯선 듯 보였다. 두리번거리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푸스스 웃곤 입을 열었다.
"거실 형광등 하나가 살짝 깜빡깜빡거리는데, 나중에 갈아줘."
"수고비 만 원."
"아, 무슨…! 그 돈으로 차라리 형광등 하나를 더 사겠다…."
투덜거리며 무릎 위에 놓인 쿠션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소리내 웃던 김종인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혼자 사니까 어때. 잘 때 무서워서 인형 안고 자나?"
"뭐래…. 절대 아닌데? 혼자 편하게 푸욱 잘 자거든요."
"어, 그럼 오늘 밤에 귀신 만날 거야."
"… 아니야, 하지 마."
"나 닮은 귀신."
"뭐야, 끔찍하게…."
"끔찍하다고?"
끔찍하다는 말에 살짝 발끈을 하던 녀석이 이내 씨익 웃어보였다.
"그 조그맣던 애가 언제 이렇게 독립을 해선."
"… 꼭 우리 아빠처럼 말하네."
"개강하면 바빠지겠지."
"… 그렇겠지? 너도, 나도…."
"그래도 자주 봐."
"……."
"바쁘다는 핑계 대면서 어떻게든 안 만날 궁리 하기만 해."
"… 안 해."
"네가 수업 듣는 시간이랑 나 만나는 시간은 아예 별개인 거 알지."
"……."
"수업 시간표에 나 만나는 스케줄을 따로 추가해 놔."
"… 너나 그렇게 해.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는 내가 아니라 네가 대겠지."
"별로."
고개를 살짝 젓곤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건네오는 말과 행동, 표정 등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어제 저녁 과음을 한 탓인지,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김종인의 목소리 때문인지, 설렘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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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생각보다 엄청 빨리 왔죠? 저도 이렇게 빨리 오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어쨌든 좋은 거겠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텍파는 제가 일일이 한 분 한 분 메일링으로 전부 보내드렸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일일이 메일링을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그래도 그렇게 많은 분들이 신청을 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끄응 몇몇 메일은 반송이 되던데.. 그건 저도 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ㅠㅠㅠㅠㅠㅠㅠ 일단 댓글은 달아드렸는데, 꼬옥 확인해 주세요! 뭐든 확실히 해야죠 :) 벌써 시즌 투라니.. 감회가 새롭네요.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돌아와서 시즌 투 느낌은 안 나시겠지만.. 우리 초심으로 돌아가 보도록 해요! 이제 또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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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하트)
새로운 시즌이니, 다시 암호닉 신청을 받아야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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