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방금 사오정에 빙의했던 것 같다. 귀가 왜 이러지. 팀장님 절에 다니신다 들었는데 혹시 삼장법사 신지..? 뱁새끼는 손오공이라서 까만 건지..? 볍신같은 상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설득력 있었다. 그럴싸해. 그렇게 되도 않은 생각을 하며 넋을 놓고 있었는데 팀장님의 말 한마디에 내가 사오정도 아니고 팀장님과 뱁새끼도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김별빛 씨, 대답 안 해주십니까? 투자하기 싫으시면 말고요."
분명 투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말이었는데 팀장님의 표정은 마치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대신 사표를 내놓으라는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코를 후벼파 나란 코딱지를 날려보낼 기세였다. 나는 하는 수없이 코털을 꽉 붙잡아 들었다. 그 투자 제가 하겠습니다. 해야죠. 네 하고말고요. 그게 무슨 사업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주주가 되는 게 제가 아빠 쪽에 있을 때부터 가지던 꿈이었습니다.
"아뇨.. 해요! 합니다..!!"
그제야 팀장님의 표정은 마치 라잌 티비에 나온 씨스타를 볼 때의 내 동생을 빼다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내 평생 가장 많은 정 팀장 강냉이 구경이었다. 엄마한테 가서 자랑해야지. 엄마는 모를꼬얌! 정 팀장 강냉이가 얼마나 귀한지! 그럼 이만 나가보라는 정 팀장의 말에 성시경이 춤추는 뻣뻣한 로봇처럼 팀장실 밖으로 나와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온 뒤에는 투명인간에게 맞는 중이던 성시경처럼 몸부림칠 뻔했다. 다행인 건 퇴근시간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한숨을 쉬며 다시 모니터에 집중을 하자 깜빡이는 하나의 대화창이 보였다. 차학연 님과의 대화. 사수님, 주말에 약속 있으세요? 아니 다들 주말에 꿀 발라놨나 왜 이러는 거야. 나는 퇴근 시간도 얼마 남았고 할 일도 딱히 없겠다 싶어서 그냥 휴게실로 불러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휴게실 한마디만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팀실밖으로 나갔다.
"저랑 이야기하고 싶으셨으면 말을 하시지 뭘 또 이렇게 불러내고 그러세요! 오늘 첫 출근인데 오해받겠다."
뱁새끼가 오자마자 되도 않은 말을 해주길래 대학시절 이후론 숨겨두었던 내 안의 티벳여우를 방출해주었다. 어서 와 티벳여우는 오랜만이지?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차학연은 빵 터지는 웃음을 보여주었다. 대학 때부터 이 표정만 지어주면 뱁새끼는 숨이 넘어갈듯이 웃었다. 대체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날 집에 와서 거울을 보고 한 번 지어봤는데 구성애 아줌마의 성교육처럼 신통방통하게 바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진짜 내가 웬만해선 눈물이 잘 안 나는 사람인데 요즘 따라 자꾸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주말에 약속 있는지는 왜 물어봅니까?"
"음.. 그때 미처 못 했던 데이트 신청하려고?"
"차학연 씨, 회사에서 말 놓지 마세요."
"그럼 이유를 주말에 만나서 사수님한테 말 놓고 싶어서인 걸로 하죠."
차학연이 방긋방긋 잘도 웃으며 말했다. 그때라니 무슨 개소린지도 모르겠고 이유가 아주 신통방통한 개소리여서 내게 강림한 티벳여우께서는 가실 줄은 몰랐다. 아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쨌거나 나는 이미 주말 하루는 약속이 있었고 내 소중한 주말을 모두 뺏길 순 없기에 주말에 선약이 있다며 데이트 신청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했다. 스윗펌킨-♡
"꿈으로는 이미 많이 꿔서 필요 없는데요. 그리고 주말이 이틀인데 설마 이틀 다 약속이 있을 거란 생각도 안드는데요."
대체 너에게 난 어떤 존재니..☆★ 아주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틀 다 약속은 없겠지 하는 뱁새끼의 표정을 보니 왠진 모르겠지만 굉장히 슬펐다. 주변 관계가 얕디얕은 내 심장을 저격했달77r..? 그래서 순간적으로 티벳여우님이 가실 뻔했지만 다시 스윗펌킨하게 말했다.
"맞긴 하지만..차학연 씨에게 줄 제 주말은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딱 하루만 시간 좀 내주시지 그래요. 사수님이 좋아하시는 한우 사드리려 했는데."
나란 여자 스윗펌킨 절대 한우라는 스윗함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저렇게 날 주말에 보고 싶어 하는데 내 넓은 아량을 펼쳐 주는 것일 뿐이다. 선약이 있는데 아직 시간 확정이 안 났으니 나중에 연락을 주겠노라고. 그렇게 말하자 왠진 모르겠지만 뱁새끼가 환하게 웃으면서 그럼 들어가시죠! 라 말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선 팀실로 나를 이끌었다. 건방진 뱁새끼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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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푸르른 들판을 달릴 치타 한 마리가 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내일이 주말이라니 비록 쉬진 못하지만 일을 안 하는 날임에 심장이 좌심방부터 우심방까지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계만 보며 일분 일초 세고 있었더니 어느새 뱁새끼가 내 옆으로 와서 버스 타면 같이 퇴근하자고 말을 걸었다. 그래서 대답을 하려는 순간 팀장실 문이 열리더니 팀장님이 나왔고 팀장님은 나를 보며 고개를 까닥이더니 손으로 밑을 가르치며 일층이라고 말하며 그대로 먼저 퇴근하셨다. 대체 나는 어째야 할까? 이휘재의 인생극장 대신에 김별빛이의 인생극장을 찍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 결심했어! 나는 다급하게 카톡창을 열어 똥을 찾았다. 어딨니 우리 똥이. 찾았다.
'똥, 똥아 뭐 하냐. 퇴근길에 누나 회사에 좀 들러라. 바로 옆이잖아. 제발. 들려줘.'
다급한 내 외침이 들리지 않니..? 사라지지 않는 1을 보며 심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라졌다! 기쁨과 동시에 좌절이 몰려왔다. 대답은 참 간결했다. 이런 똥 같으니.
'즐'
'가는 길에 저녁도 먹자'
'ㅅㄹ'
'씨스타 앨범도 사줌'
'ㄱㄷ'
망할 놈, 동생이라곤 하나뿐이라 애지중지 키웠더니 다 소용이 없었다. 물론 나보단 우리 여사님께서 고생하셨지만 말이다. 되바라진 놈. 어쨌거나 한결 상쾌한 마음으로 이미 거의 모든 동료들이 빠져나가서 몇 명 남지 않은 팀실을 보며 차학연에게도 말했다. 오늘 동생이랑 퇴근하기로 해서요. 먼저 갑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당히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내가 급히 만들어낸 일이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 일층으로 내려가보니 아침에도 보고 나온 등짝이 보였다.
"똥아!!!!!!"
"아 밖에선 그렇게 좀 부르지 말라니까."
몹시 짜증 난단 표정을 짓고 나에게 말하는 너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표정도 귀여워 보였다. 이내 가자고 말하며 한상혁에게 내 힘으로 팔짱을 끼곤 가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나와 한상혁을 바라보는 팀장님이 보여 아차 싶었다. 말씀 드린다는 걸 깜빡했네.
"아, 팀장님! 야, 인사해 한상혁! 우리 부서 팀장님이셔. 여긴 제 친동생이에요. 한상혁."
그런 내 말에 한상혁은 내가 너의 회사 생활을 가엾게 여겨 인사 정돈 해준다는 느낌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고 친동생이란 말에 표정이 조금은 풀린 팀장님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은 제가 동생이랑 퇴근하기로 해서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괜찮으니까 타세요. 어차피 가는 김에 두 분 다 같이 데려다 드리면 되죠."
이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잽싸게 말을 하고 가려는데 팀장님의 한마디에 다시 곤란해져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한상혁과 팀장님을 쳐다보고만 있는데 한상혁이 그런 나를 한심하게 보더니 이내 팀장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럼 저흰 이만."
허허허 짜식, 누날 닮아서 스윗펌킨이구나? 내가 동생 하난 잘 키웠어. 그 말을 끝내자마자 한상혁은 내 팔을 이끌어 걷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일을 해야지 왜 연애를 하냐부터 시작해서 끝난 마지막 말이 차학연이 왜 그 회사에서 나오냐는 말이길래 의아해서 되물었다.
"네가 차학연을 어떻게 알아? 대학도 달랐는데."
"아 그야! 대학 때 누나, 아니야. 몰라도 돼."
황급히 말을 돌리는 한상혁에 대학 시절엔 워낙 자주 집에 데려다줬으니 마주친 적이 있었겠거니 하고 그냥 똥에게 이끌려 가고 있었다. 평소엔 신경도 안 쓰는 놈이 남자만 데려오면 이것저것 트집 잡아 나에게 떨궈놓고야 마는 놈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멍멍이 자식아, 너 때문에 내가 이 나이에 제대로 연애를 못 했어. 짜증도 잠시 너무 끌려가는 것 같아서 한상혁에게 말했다. 야 근데 우리 어디 가?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단숨에 산산조각이 날 뿐이었다. 내가 곱창덕후에게 괜한 걸 물었다. 한상혁에게 이끌려 간 단골 곱창집은 역시나 한결같은 이모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이고~ 상혁이 어제 오더니만 또 왔어? 어제 먹은 5인분으론 부족했지? 별빛이는 어째 오랜만이네. 자 앉어, 앉어."
미친놈. 정말 지구 최대의 미친놈이다 한상똥은, 어떻게 어제 그렇게 쳐먹었으면서 날 또 이렇게 데려온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생에 곱창을 먹지 못하고 뒤진 건지, 아니면 지 곱창이 털려서 누군가에게 먹혀서 그게 한이 된 건지. 참으로 궁금했다. 이런저런 생각도 잠시 빠르게 나온 곱창에 모든 것을 잊었다. 이건 유전인가. 나도 곱창덕후의 기질이 샘솟고만 있었고 그렇게 한상똥과 치열하게 젓가락 펜싱을 해가며 열심히 먹느라 가방 속에 넣어둔 핸드폰은 뒷전이었다.
정택운 팀장님
-김별빛씨
-아직 저녁 먹습니까?
-이거 보면 답주세요.
-투자하기로 한 거 잊으시면 안됩니다.
차학연 선배
-아직도 시간이 안 정해졌어요?
-그럼 그냥 저랑 이틀 다 보죠!
-(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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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많이 쓰고 싶었는데 손목이 영 불편해서 더는 안되겠네요. 계속 지체돼서 죄송해요.
암호닉은 항상 받습니다. 덧글 달고 구독료 받아 가세요.
새로운 인물도 등장했고 치환도 드디어 알아내서 적용시켜봤는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그럼 부디 다들 좋은 주말 보내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