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은 무서운 말만을 남기고 쌩하니 다과방을 나가버린 찬열의 뒷꽁무니를 눈으로 쫓았지만 찬열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백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여버렸고 두려운 궁생활에 희망이 더욱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예비세자비마마, 앞으로 마마를 보필하게 될 염상궁이옵니다.""아...네. 안녕하세요.""앞으로 약 이주간은 교육관들과 함께 기본적인 궁중예절과 가례를 위한 교육을 받으실 겁니다. 가례를 올리기 전 한달간은 이 별궁이 마마의 처소가 될 것입니다.""저... 혹시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에요?""내일이면 왕실대변실에서 혼인에 관련된 공식 보도자료를 발표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마마의 신변이 노출될 것이고 왕실근위대의 보호를 받는다 하여도 각종 위험의 가능성이 있음이 염려되어 일주일 동안은 학교에 등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아... 그렇다면 세자저하는...""중전마마께서 세자저하는 대외적인 행사를 비롯한 모든 일정에 참여하시어 떳떳한 가장의 모습을 보이라 하시었습니다."다행인지도 몰랐다. 학교에 자신이 찬열과 혼인을 하여 이 나라의 왕세자비가 된다는 소식이 퍼진다면 어떻게 될까. 백현은 상상하기도 싫은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찬열이 학교에 간다면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아마 아이들과 함께 자신을 조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교육이 끝나시면 바로 식사예절에 대한 궁중예도수업과 함께 저녁을 드셔야 합니다."백현은 궁중예절에 대한 수업을 듣고 바로 별궁의 식당으로 이동하여 수업을 받았다. 평소 국회의원의 아들로서 허례허식의 예절을 강요받았던 백현으로서는 이 교육이 어렵지 않았다. 모든 교육을 마치고 자신의 처소로 들어간 백현은 고단한 하루를 떠올리며 잠자리에 들었다."세자저하. 곧 주상전하와의 만찬시간이옵니다. 채비를 하시지요.""알겠습니다."찬열은 아바마마와의 저녁시간에 무슨 이야길 꺼내야할까 고민을 하다가 만찬시간에 맞춰서 장소로 이동을 했다. 항상 근엄하고 냉정한 표정의 아버지는 여느때와 같이 먼저 도착하여 앉아계셨다."늦었구나.""아바마마 덕분에 고단한 하루를 보내어 잠시 낮잠을 청하였더니 그리 되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허허... 말에 뼈가 있구나 그래. 세자빈은 만나보았고?""예.""어떠하더냐? 내 아직 만나보지 못하여 궁금하였는데 사돈의 말을 들어보니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라고 하더구나.""..."찬열은 아버지가 일부러 겉도는 이야기만을 꺼내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은 지금 그것에 맞장구처줄 기분이 아니었다."아바마마. 저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그래. 알고 있었다.""알고... 계셨습니까... 이번 혼사를 밀어 붙인 것이 아바마마인줄 아옵니다.""그렇다. 문제가 있더냐?""어찌...이러십니까."찬열은 덤덤하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얘기하는 아바마마의 대답에 울컥 목이 매었다. "어찌 이러냐고 물었느냐. 하루하루 국회에선 왕실폐지안이 올라가고 있다. 국민들은 더 이상 왕실을 대한민국의 존재자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세금을 갉아먹는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한단 말이다. 너의 증조할아버지가 이 왕실을 지켜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너는 모르겠지. 지금 왕실은 가장 큰 고난에 부딪혔어.""해결책이 그깟 대통령후보와의 결탁입니까. 왕실에서 이런 썩은 수법을 쓰니까 국민들이 외면하는 것입니다.""썩은 수법이라... 이 왕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못할 것이 없다. 넌 니가 이용당했다고 생각하겠지. 진정으로 니가 이 왕실을 사랑한다면 왕세자로서 스스로를 희생하여 본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거라."아바마마의 말씀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아니였다. 아직 철이 덜 든것인지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 가슴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실을 위한 희생이라니... "무조건적인 희생은 없습니다. 다음달로 예정된 혼례를 치루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그래. 말해보거라.""왕실의 가장 큰 행사인 가례로 인해 국민들의 관심이 왕실로 쏟아질 것입니다. 저는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 아이와의 따뜻한 부부의 모습 기대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강요하지도 마세요.""...다음은?""제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이혼을 하도록 윤허해 주십시오.""그건 안된다. 왕실 역사상 단 한번도 이혼이라는 전례는 없었어. 그 아이를 후궁으로 들이거라.""아바마마. 국민들은 왕실의 구식적인 모습에 실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일부일처제인 국가에서 제가 후궁을 들인다고 한다면 왕실은 시대를 역행하는 촌스러운 제도로 남아있게되는 것입니다.""왕위에 오르고 바로는 아니된다. 대비마마의 생전에 너희 부부은 행복한 모습만을 보여드리거라. 아직 옛분이시다. 너희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실거야.""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도 덕분에 어지럽겠네요. 아바마마."찬열은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에는 변백현의 사진과 프로필이 대서특필 될것이다. 피곤한 하루를 끝내고 더욱 피곤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찬열은 일찍 잠에 들었다.다음날 백현은 등교를 하지 않는다는 김실장의 통보에 찬열은 홀로 등교하였다. 자신이 교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반은 어수선했다. 어떻게 저 찐따새끼가 세자빈이 될 수 있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여자아이들과 자신들이 괴롭히던 찐따가 세자빈이 된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뒤틀리는지 씩씩대며 빈자리만 노려보고 있었다."너 언제부터 저 찐따새끼랑 연애했냐.""닥쳐. 연애는 무슨... 쪽팔린다.""큭. 왕실이 발표한 전문에는 같은 반친구인 두분께서 열렬한 사랑을 통해 이른 결혼이 성사되었다는데?""하아...""희주는 어떡하냐. 완전 이혼녀 다됐어.""희주랑 나 어떤 변화도 없어. 그냥 법적으로 결혼을 할 뿐이야."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재운 선생님의 통제하에 수업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찬열은 계속 눈에 밟히는 빈 자리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자리와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각종 욕설과 음담패설이 매직으로 쓰여져 있는 책걸상엔 가장 큰 글씨로 '찐따새끼'라고 적혀져 있었다. 찬열은 다시 생각해봐도 저 찐따랑 결혼을 한다니 자신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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