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9 (불안, 공포, 불안)
어둠으로 가득한 집 안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예전과는 달리 제법 입이 험해진 듯한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왔다. 이제 어떡하지. 몰래 도망을 가야 하나.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나가면 어디로 가. 김종인이 있을 학교로? 집 앞 편의점으로? 이 집의 주인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항상 웃는 얼굴만 보여주던 그였기에, 지금의 무표정은 마냥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내쉬며 침을 꼴깍 삼키기만 하자, 얼마 안 있어 그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아온다.
"왜 멍하니 서있어? 안 들어가?"
"… 서, 선생님은 안 바쁘세요?"
"응?"
"… 그…, 취직 준비도 하셔야 하고…."
"아,"
"……."
"너 쫓아다니느라 바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놓던 그가 이내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온몸은 이미 빳빳하게 굳어 그가 해오는 대로, 그가 만져오는 대로 가만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닿는 이질적인 느낌이 영 불쾌하기만 해,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내 나를 이끌며 거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그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슬쩍 주변을 살피는 듯싶더니, 겁에 질려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 내게 시선을 옮겨온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
"종인이랑 있을 땐 그런 표정 아니잖아."
이상하게도,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머릿속은 분명 여러 생각들이 섞이고 섞여 복잡했지만, 모순적이게도 도화지마냥 새하얬다.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그저 하나였다. 벗어나고 싶다. 어디라도 좋으니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내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그를 흘끗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냥 무섭고 두려웠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그가 내게 나쁜 짓을 하진 않을까. 과거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그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나름의 신의를 가지고 있던 과외선생 박찬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왜이리 집착이 심해졌어요.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따지고 싶은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박찬열이 안겨주는 공포감과 불안감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알고 있어?"
"… 뭘… 요?"
"내가 네 SNS 몰래 엿보고 있다는 거."
"……."
"아마 도경수가 다 말해줬겠지."
"… 그게 아니더라도, 선생님이 하시는 행동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어요. 너무 무서워서 속으로 부정만 했지, 살짝 짐작은… 갔거든요."
"그렇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어보이던 그가 옆 자리를 툭툭 쳤다. 앉아. 낮게 건네오는 말에 애써 고개를 젓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내 모습에 살풋 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다시금 내 손목을 잡아왔다. 몸에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흠칫흠칫 놀라게 되었다. 눈을 마주하기조차 무섭고 두려워, 일부러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아,"
"… 네."
"넌 날 싫어해?"
"……."
"……."
"… 네."
"왜?"
"… 그건 선생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내 그에게 전했다.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사실 그 자체였으니, 그가 상처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도리어 화를 내면 어쩌지- 하며 걱정을 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이는 건지, 아님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제대로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떠한 표정도 걸리지 않은 그를 슬쩍 바라보기만 하다, 다시금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래, 싫어할 수도 있지."
"……."
"근데 난 너 좋아해."
"……."
"어릴 적부터 내가 갖고 싶어하던 건 다 얻어왔어, 어떻게든."
"……."
"물론 너도 그 중 하나에 속해."
"……."
"김종인은 도둑놈이지."
"……."
"내 여자를 빼앗아 갔으니까."
이상한 말들을 줄줄 늘어놓던 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쳐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의 문이 닫혔다. 잠시나마 숨통을 틀 수 있겠단 생각에 안심하며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곤 쓰러지듯 소파에 털썩 앉아 마른 세수를 했다. … 이젠 뭐 어떻게 되는 걸까. 난 여기서 더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
이상하게도, 방금 그가 들어간 화장실 안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뭘 하길래 이리도 조용한 걸까. 왠지 모를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지만, 애써 기분탓일 거라 멋대로 치부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조차도 무섭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구속을 받는 상태로 1분 1초를 버텨내는 건 정말이지 힘들었다.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선, 그동안 익숙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불안에 떨고있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좀처럼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다. 조용하기만 한 화장실 안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에 비례하듯 공포감과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평소 물어 뜯지도 않던 손톱을 나도 모르게 물어 뜯게 되었고, 자꾸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침을 꼴깍 삼키게 되었다. 복잡하기만 한 머릿속을 찬찬히 정리하곤, 굳게 닫힌 화장실 문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아직 안에 있지. 안 나왔지. 문 여는 소리 안 들렸지. 고작 휴대폰 홀드를 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몇 번이나 화장실 쪽을 확인해야 했다. 아직 굳게 닫혀있는 문을 확인하곤 서둘러 오세훈의 번호를 찾았다. 바쁜 김종인은 지금쯤 학교에 남아 과제를 하고 있겠지. 이 와중에도 김종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제일 가까이 있는 남자친구에게 먼저 알려야 하는 건가? 하지만 걱정하게 만들긴 싫은데. 걱정 안 끼치게 하려고 지금껏 꽁꽁 숨겨왔던 건데…. 넓게 번져가기 시작하는 잡생각들을 뒤로하곤, 오세훈에게 전송할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의지와는 달리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손가락은 자꾸만 오타를 생성해냈다.
[오세ㅔㅎ누 ㅈㅣ금 나]
갑작스레 열린 화장실 문에, 문자 메시지를 덜 입력한 상태로 황급히 전송 버튼을 눌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그가 눈치챌 수 없게 서둘러 휴대폰을 쿠션 아래로 숨겼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같았다. 어색히 시선을 옮겨놓은 곳엔,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 내 행동을 눈치챈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기 시작했다.
"……."
천천히 내 쪽으로 발걸음을 떼오던 그가, 이내 내 앞에 우뚝- 걸음을 멈춰섰다. 그런 그를 슬쩍 올려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자, 무슨 의미인 건지 척- 하며 내게 손을 내밀어온다.
"휴대폰."
"……."
"휴대폰."
그저 한 단어만을 내뱉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한없이 새까맣기만 했다. 제법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난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다시금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제게 휴대폰을 주기만을 기다리는 듯싶던 그가 느리게 눈을 꿈뻑이더니, 이내 쿠션 아래로 손을 넣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최근 기록을 훑기 시작한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비밀번호를 걸어놓는 건데…. 귀찮아서 그냥 놔두었던 게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후회스러웠다.
"세훈이라는 애랑 많이 친한가 봐."
"……."
"네 주위엔 왜이리 남자 새끼들이 많아?"
"……."
"SNS 댓글도 다 남자. 여자 댓글은 가끔가다 하나 둘?"
무심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휴대폰 배터리를 빼내던 그가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배터리를 제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는다. 그런 그의 행동에 작게 인상을 찡그려 보이자, 검지손가락을 뻗어 내 미간을 꾸욱 눌러온다.
"화장실에 칫솔 두 개더라."
"……."
"몇 번 자고 갔나 봐, 종인이."
"……."
"둘이 집에서 뭐 해?"
"……."
"다 큰 남녀 사이에 입맞춤은 애들 장난이겠고."
"……."
"침대를 구르나?"
"…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뭘 설치해놓지 않는 이상,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알 수가 없잖아."
작은 미소가 걸린 그의 얼굴은 그저 섬뜩하기만 했다. 내가 알던 박찬열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생각을 하는 듯싶던 그는 다시금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아,"
"……."
"남자는 다 늑대야."
"……."
"김종인이라고 안 그럴 것 같아?"
"……."
"착각에 빠져 살지 마. 그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어."
"… 왜이리 입이 거칠어졌어요?"
"……."
"내가 알던 선생님이… 아닌 것 같아."
"원래 이랬어."
"……."
"둔한 네가 이제서야 눈치를 챘을 뿐이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나를 향해 건네오는 미소 또한 가짜처럼 보였다. 저 미소 뒤엔 분명 의미심장한 속셈이 숨겨져 있겠지. 양의 탈을 쓴 늑대… 아니, 양의 탈을 쓴 박찬열은 가면 갈수록 내게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이상, 난 최대한 말을 아꼈다. 아니, 말을 아낀 게 아니라 그냥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건네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발 가 줘요. 제발 날 내버려 둬요. 간절히 빌어봤자 그는 들은 체 만 체 비소만을 지어보일 게 분명했다. 말은 조금도 통하지 않는 딱딱한 벽과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략 한 시간 전 쯤엔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왔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인터폰을 확인하고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내게 가지 말라며 강압적으로 말을 건네오던 그는, 이내 내 손목을 붙잡아왔다. 초인종은 연속으로 세 번 정도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려왔지만, 문을 열어주는 건 고사하고 아예 확인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답답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이리 나를 괴롭히는 걸까.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한 사람의 일방적인 집착도 사랑과 관심이 될 수 있는 걸까. 물론 아니겠지. 아니지. 일방적인 집착은 그저 집착일 뿐이지.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병이지.
어느덧 창밖은 까만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을 정도로, 배고픔은 느껴지지가 않았다. 밖이 어두우니 김종인이 보고 싶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밥은 먹었을까. 설마 아직까지 학교에 있을까. 과제니 뭐니,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 피곤하겠다. 자연스레 치미는 김종인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보고 싶다. 단지 보고 싶다는 말론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이 보고 싶다. 배터리와 분리가 된 휴대폰으론 연락이 될 리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
적막으로 가득한 주변을 천천히 살피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이 든 건지,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그에게 닿게 될까 두려웠다. 일부러 살금살금, 조심조심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이 기회인 듯했다. 어디라도 좋으니, 단지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상태로 나가 버스나 택시를 타고 김종인 자취방으로 가자. 지금쯤 집에 있겠지. 여러 생각들을 머릿속에 펼쳐놓으며 운동화를 신으려던 찰나, 지갑이 방에 있다는 사실이 번뜩- 하고 떠올랐다. 없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주머니 속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잔돈은 없었다.
"어디 가?"
설상사상으로, 뒤에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끝인 건가 싶었다. 잠시나마 탈출을 시도하고자 했던 기대감은 순식간에 확- 꺼져버리고 말았다. 터벅터벅- 이내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는 듯싶던 그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아 끌었다.
"어디 가냐니까."
"… 밖에요."
"왜?"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나가면 안 들어올 거잖아."
"……."
"뭐, 나도 여기서 안 나갈 생각이야."
"……."
"말없이 몰래 나갈 생각 하지 마."
"……."
"너 묶어놓긴 싫어."
더욱 힘을 줘 손목을 잡아오던 그가 조금씩 내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난 당연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런 의미 없는 행동은 계속 반복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등에 닿는 딱딱한 느낌에 더이상 뒷걸음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 되고야 말았다.
"그냥, 우리 둘이 같이 살자."
"……."
"행복하게 해줄게. 응?"
"… 시, 싫어요."
"도망치지 마."
"……."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 아니야…."
"내가 고백했던 거 기억나? 난 그때보다 지금 더 네가 좋아."
"… 아니에요…."
"자자, 나랑."
"… 하지 마요!"
내 저항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입술을 포개오던 그가 내 뒷통수를 감싸왔다. 아무리 발버둥치며 그를 떼어내려 애써도, 그는 쉽게 밀려나지가 않았다. 입술이 맞물리기도 잠시, 순식간에 섞여버린 혀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싫어. 무서워. 어지럽게 더럽혀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단지 하나였다. 무서워-.
슬슬 숨이 차기 시작하는지, 그의 호흡이 가빴다. 이때다, 싶은 마음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작게 신음을 내뱉은 그가 흠칫 놀라며 내게서 떨어졌다.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훑으며 핏방울을 닦아내던 그의 시선이, 얼마 안 있어 내게 꽂혀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금도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찢어진 입술에선 빨간 핏물이 방울져 나왔다. 핏물 만큼이나 붉은 혀로 입술을 훑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이상해?"
"……."
"내가 무서워?"
낮은 물음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내게 차가운 시선만을 건네오던 그가 다시금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올수록 한 걸음, 한 걸음 또다시 뒷걸음을 쳐야 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발이 테이블 다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에선 아프다는 감각 또한 느껴지지가 않았다. 낮아진 내 자세에 그 또한 자세를 낮춰 나와 눈높이를 맞춰왔다. 묵묵히 서로의 눈동자만을 응시하는 지금 이 순간은, 너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까맣다 못해 어둡기만 한 그의 눈동자엔 겁에 질린 내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다시금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입을 틀어 막았다. 그런 내 손을 거칠게 떼어내려던 그는 이내 내 어깨를 밀어 딱딱한 바닥에 눕게 만들었고, 한 마리의 짐승이라도 된 양 위로 올라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떨렸다. 입을 꼬옥 막고있는 양쪽 손 또한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유난히 빨리 뛰는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난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무서운 사람도 아니야."
"……."
"네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
"씨발, 난 아니야."
이내 목 부근에 입술을 묻어오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 작은 비명이 터졌다. 온갖 저항을 해보아도, 발버둥을 쳐보아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줄줄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닦아낼 겨를도 없었다. 목덜미와 쇄골 쪽에선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이토록 무섭고 불쾌한 느낌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지 마요. 하지 마, 제발. 이러지 마요. 울부짖으며 건넨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공중에 흩어졌다. 그는 돌았다. 그는 미쳤다.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를 향해 내뱉는 격앙된 목소리엔 울음이 잔뜩 섞여 있었다.
"……."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반응 없는 집 안이 수상했던 건지, 현관 밖의 누군가는 두 번 정도 더 초인종을 눌러왔다. 이 시간에 누구길래 찾아왔을까- 라는 궁금증보단, 누구라도 날 도와줬음 좋겠다는 간절함이 앞섰다. 그건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오세훈이라도 상관이 없었고, 도경수 선배라도 상관이 없었고, 하다 못해 택배 아저씨라도 상관이 없었다. 아, 도경수 선배는 우리 집 주소를 모르지-.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밖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자음을 듣는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의 비밀번호를 아는 건 오직,
"……."
김종인 뿐이었으니.
철컥- 하고 현관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거실 안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현관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선이 향한 곳엔 예상대로 김종인이 서있었다. 손에 꼬옥 쥐고있던 녀석의 휴대폰이 투박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찍었다. 크나큰 충격에 휴대폰 액정엔 금이 갔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기라도 한 듯, 녀석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돌처럼 굳어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기만 하던 녀석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뛰어온 건지, 녀석의 얼굴과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반가운 얼굴을 보자 왈칵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터벅터벅-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오던 김종인이 다짜고짜 박찬열에게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찬열이 바닥을 굴렀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김종인은 있는 힘껏 박찬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리곤 점점 번지기 시작하는 고통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는 듯싶던 박찬열이 살기어린 눈빛으로 김종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이네, 종인아."
"… 네가 뭔데 여기 있어. 왜 있어, 여기."
차분한 듯한 김종인의 목소리엔 흥분이 서려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던 박찬열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갸웃해 보인다.
"무슨 상관이야."
"뭐?"
"내가 여기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네가."
"……."
"병신 같은 새끼야."
"……."
"넌 네 생각만 하느라, 네 여친이 그동안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지."
"……."
"그러고도 남자친구라 할 수 있어? 넌 그저 네 좋은 맛에만 사는 새끼잖아."
"……."
"눈치는 어디다 말아 먹었어? 남자친구? 애인? 씨발, 말이 애인이지. 네가 애인 자격이나 있냐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듣기만 하던 김종인이 주먹을 쥐었다. 빨갛게 물든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아마 화가 많이 난 듯했다. 잔뜩 굳혀진 표정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 또한 녀석이 열받은 상태라는 걸 또렷이 보여주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런식으로 행패 부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
"그동안 안 보이더니, 정신이 이상해져서 돌아왔네."
"……."
"너 이런 거 범죄야. 알아?"
"……."
"내 여자 집은 어떻게 알아냈어, 개새끼야."
욕지거리를 섞어 날카롭게 말을 건네던 김종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박찬열은 연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들 날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네."
"……."
"도경수도, 너도, 네 애인도."
"……."
"다들 왜 그러는 거지. 난 지극히도 멀쩡한데."
그가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김종인의 머리칼을 흩뜨려놓더니,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비틀거리듯 위태롭게 걸음을 디디던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와 김종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중에 또 봐. 무섭기 그지 없는 한 마디를 내뱉곤, 그가 쾅- 하며 현관 문을 닫았다. 한 차례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집 안엔 냉랭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불안감만을 안겨준 채, 박찬열은 사라져 버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 우릴 휩쓸고 지나간 거지. 머릿속은 여전히 새하얗기만 했다.
"……."
"……."
넋이 나간 사람이라도 된 양 멍하니 서있던 김종인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륵- 주저 앉았다. 제 무릎을 세워 팔을 기댄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버린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녀석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연신 내뱉어지는 한숨엔 다양한 감정들이 복합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잔뜩 웅크러진 몸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다,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것도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이러려고 숨겼던 건 절대 아닌데.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 너,"
"……."
"바보야?"
꽤나 차갑게 들려오는 한 마디에 또다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낸 김종인이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줄줄 흐르기 시작하는 내 눈물에도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녀석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처럼, 김종인도 울고 있었다. 녀석의 우는 얼굴을 마주하자, 이상하게도 더욱 눈물이 샘솟았다. 우는 김종인을 처음 봐서 그런 걸까,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아리기도 했다. 제 볼에 선명히 남은 눈물 자국들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 없애버리던 녀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다시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난 몰랐잖아."
"……."
"박찬열이 널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도… 아니, 박찬열이 네 앞에 모습을 비췄었다는 것조차도."
"……."
"하나도 몰랐어."
"……."
"왜 말 안 했어."
"……."
"다른 사람한텐 말 안 해도, 나한텐 제일 먼저 알렸어야지."
"……."
"진짜…"
"……."
"… 몰랐잖아, 하나도."
굵은 눈물 방울이 김종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어쩌지. 어쩌지, 이제. 역시 내가 큰 잘못을 했구나.
'약속 하나 하자.'
'별거 아닌데,'
'서로 숨기는 게 없었음 좋겠어.'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하는 거 알지.'
'우리 서로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숨기고 말고 할 거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건 맞는데,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
'너 걱정할 것도 같아서 일부러 말 안 하려 했는데,'
'내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이런 건 너랑 다 공유를 하고 싶어서, 그래서 말했어.'
김종인이 해왔던 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역시 말을 했어야 했나. 걱정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했던 건데. 그냥 혼자 해결하려 했는데. 혼자…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너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던 거야."
"무슨 걱정."
"……."
"내가 걱정을 하든 말든, 무조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미안해…."
"왜 너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려 해."
"……."
"제일 먼저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
"… 난,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사소한 것까지 너한테 다 알리고 싶어해."
"……."
"하다 못해 아침 메뉴가 뭐였는지, 옷은 뭘 입었는지, 신발은 뭘 신었는지조차 다 말해주고 싶은데,"
"……."
"왜 넌 아니야."
"……."
"사소한 것까지 다 보고를 하라는 게 아니잖아."
"……."
"그런 큰 일이 있었음 당장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
"약속 했잖아, 나랑."
"……."
"서로 숨기는 거 없기로 하자고."
"……."
"난 도대체, 누구랑 약속했던 거야."
김종인의 목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가시가 되어 귓가에 쏙쏙 박혀오는 말들에 가슴이 아팠다. 박찬열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떡하지. 화가 많이 났나 봐. 난 이제 어떡하지….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예 박찬열에 대해서 입을 꾸욱 다물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나름 걱정을 안 끼치게 하려던 마음이 오히려 녀석에게 상처를 줘버렸다.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후회감보단 불안감이 더욱 앞섰다. 내게 실망을 했으면 어쩌지. 이제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너무 상처를 줘버렸어.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줘버렸어. 미안해, 미안해. 들리지도, 닿지도 않을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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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이 되어서 돌아왔어요.. 저번 화 댓글이 180을 넘었.. (감격) 부족한 글인데, 이렇게나 많은 사랑 주셔서 감사해요. 전 정말 감사하다는 말밖에.. (감격)
아, 항상 하는 말이지만 요즘 날이 많이 더워요. 덥다고 이불도 안 덮고 자고 그러진 않죠, 다들? 에어컨도 빵빵하게 켜놓고 자고 그러진 않죠, 다들? 진짜 아프면 안 돼요. 여름이라고 감기 안 걸릴 거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건강 챙기셔요, 다들!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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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분명 15화에 암호닉 생존신고or신청을 했는데 누락됐다, 하시는 분들 계시다면 꼭 말해주세요 :)
당분간 암호닉 신청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