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엠티가 다가왔다. 예산에 맞춰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장소를 물색해야 하기 때문에 엠티를 준비하는 학생회 선배들이 요즘 날카로워 보였다. 아무래도 전임 교수님의 닥달이 심한 듯 해 보였다. 처음 가는 엠티에 설렜다. 고등학교 수학여행과 비슷한 수준에 술을 더한 것뿐일까, 엠티 공지가 있은 후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서 수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실에서 누구 한 명이 입을 열면 엠티 얘기에서 엠티 얘기로 끝이 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을 벗어나 대학생이 된 아직 어린 애기들이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수학여행이었다. 당연히 설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태형이와 친하다는 이유로 나와 수정이는 엠티 준비위원회를 맡게 되었다. 사실 준비위원회라고 해 봤자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결정권은 3학년 학생회에 있고 어딜 가는지, 버스는 어떻게 빌릴지, 예산은 어떻게 짜야 할지 회의를 하는 건 사실상 학생회 선배들이었다. 준비위원회는 말 그대로 잡일 담당이었다. 수정이는 귀찮은 일을 맡았다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준비위원회마저도 설렐 수밖에 없었다. 이유라고 하면.
전정국이었다. 전정국 역시 준비위원회였다. 선배들과 친한 바람에 어쩔 수 없게 맡게 된 일인 것 같은데 의외로 전정국은 군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선배들이 시킨 일을 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전정국을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겨우 잡일 담당에도 참석해야 하는 회의는 하루도 빠짐 없이 있었고 회의 시간마다 전정국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면 되는 자리라 수정이는 우리가 굳이 필요 없지 않냐며 여전히 투덜댔지만, 나는 좋았다.
" 장은 너네 셋이 보면 되겠다. 장 봐야 할 거 정리해서 단톡에 올려 줄 테니까 그거 보고 적정량으로 장 봐 와. 알았지? "
기획부장 선배의 말에 수정이가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저 셋은 나와 수정이, 그리고 전정국이었다. 계속해서 폰을 매만지던 수정이는 내쪽을 보고는 가기 싫단 표정을 잔뜩 지었다. 웃음이 나왔다. 수정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나는 좋았다.
" 언제 갈래. "
" 난 평일도 주말도 시간 안 되니까 알아서들 하셔~ "
회의가 끝나고 선배들이 떠난 과실에서 남은 셋이 옹기종기 모여 장 볼 시간을 정하고 있었다. 무책임한 수정이의 말에 전정국의 얼굴이 잠깐 찡그려진 것 같았다. 전정국의 눈치를 보며 수정이의 팔을 잡았다. 수정이는 나를 한 번 보더니 전정국을 한 번 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전정국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언제가 괜찮냐는 듯 물어오는 눈에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 평일은 야간 수업도 있고 가기 어려우니까 주말이 낫지 않아? "
전정국이 가만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턱을 괴고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 쳐다보던 수정이는 결정된 거냐며 호탕하게 웃고는 옆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었다.
" 난 못 간다고 미리 말했다. 너네 둘이 알아서 가고 선배들한텐 비밀! 알지? "
수정이가 떠난 자리에 어색함이 맴돌았다. 그러니까 정수정 왜 먼저 가서는. 창문으로 본 밖은 어둑어둑했다. 과실 문을 여는 순간 어둠이 가득할 게 분명했다. 내가 먼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전정국이 나를 따라 가방을 챙겼다. 전정국이 별다른 약속이 없는 이상은 같이 가게 될 게 확실한 상황에서 조금 어색한 분위기에 가방을 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뭐라도 말해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입을 열지.
" 아까부터 왜 눈치를 봐. "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준 건 전정국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어떤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터라 갑자기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정국을 보았다. 전정국이 웃고 있었다. 다정한 눈빛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치를 봤다. 호석이와 영화를 보았던 그날 저녁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내가 답답했던 건지 전정국이 나를 돌려 밀고는 과실 문을 열었다. 역시나 캄캄한 어둠에 지레 겁을 먹었다. 전정국은 불을 끄고 문을 닫고는 내 손목을 잡고 앞서 나갔다. 전정국 손이 닿은 손목이 뜨거웠다.
내 손목을 잡고 걸어가는 전정국의 옆모습을 보았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네 손이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두근거리는데 너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어쩐지 전정국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전정국의 얼굴에서 내 손목을 잡은 전정국의 손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전정국과 내 어느 부분이 닿아 있다. 손을 잡은 것도, 입을 맞춘 것도 아님에도 부끄러웠다.
한동안 전정국의 다부진 손을 보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다시 전정국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올렸고,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전정국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내려다 보았다. 갑자기 마주친 탓에 눈을 피했다. 위에서 낯설지 않은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러웠다. 그냥 다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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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하숙집까지의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걸어오면서 전정국은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전정국에게 손목을 놓아달라 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행동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놓아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했다. 마음이 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그 곳엔 답이 있었다.
" 들어가. "
" 먼저 들어가. "
전정국의 등을 보는 건 싫었다. 며칠 전, 호석이와 영화를 보았던 그날까지만 해도 그랬다. 몇 개월 간 쉴 새 없이 보았던 전정국의 뒷모습은 차가웠고 단호했다. 그래서 다가가지 못했던 등이 어느 순간부터 따뜻해졌다. 그래서 전정국의 등을 보고 싶었다. 그 따뜻한 등을 보고 싶었고, 또 안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들어가라는 전정국의 말에도 고개를 젓고 먼저 들어가라, 말한 것은.
" 들어가라니까. "
" 아니야. 먼저 들어가. "
실랑이 같지 않은 실랑이였다. 이게 뭘까. 겨우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는 먼저 들어가라 말하는 모양새가 꽤 웃겼다. 먼저 끊으라며 실랑이를 벌이는 커플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간질거렸다. 작은 새가 내 안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전정국이 내 앞에 있으면 어김없이 그 작은 새는 부리로 내 안을 콕콕 쪼았다. 근데 그게 아픈 게 아니라, 작은 새라서, 아주 작은 새라서 간지러웠다. 긁을 수 없는 부분이 긁고 싶지 않을 만큼 간질거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 말 더럽게 안 듣지. "
" 너도 그렇잖아. "
전정국이 웃었다. 두 눈을 끔뻑이며 그런 전정국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 눈에 전정국을 담고 싶었다. 예전처럼 환히 웃는 그 모습을 아주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전정국에게 달려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을만큼 정말이지 예쁜 웃음이었다.
전정국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잠깐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나를 향해 보여 주고는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 이거 피우고 들어갈 거야. 먼저 들어가. "
평소의 나였다면. 아니, 나라면 지금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련을 가득 남기고 어렵게 등을 돌려 들어갔을 게 뻔했다. 그게 나에게 잘 어울렸고, 또 전정국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전정국이 지금 담배를 피울지, 안 피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나를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고 싶어서 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괜히 오기가 생겼다. 내가 네 등을 너무도 보고 싶었다. 끌어안고 싶은 그 등을 오늘 꼭 봐야겠다.
" 끊으면 안 돼? "
익숙하게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낸 전정국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전정국의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일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내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을 지금 내가 그려내고 있으니까.
전정국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운 상태에서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정말 내가 뚫어져라 보았다. 한 치의 시선도 어긋나지 않게 오롯이 내 눈을 보고 있었다. 마주친 두 눈이 그날과 똑같아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이럴 때면 전정국은 내가 예상도 못할 말들을 뱉곤 했다. 내 안의 작은 새가 나를 다시 콕콕 쪼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기분 좋은 설렘은 다시 다가왔다.
전정국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담배를 버렸다. 담배갑을 볼품없이 구겨버렸다. 버린 장초가 아깝지도 않은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게 곧장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리가 너무 커서 네게 들리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심장 소리가 더 커져서 네게 들렸으면 했다. 그럼 네가 내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알아 주지 않을까. 곧 내 앞에 선 전정국은 내게서 내 오른손을 잡아 올려 펼쳤다. 힘없이 들어올려진 손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너를 올려다 보았다.
왜?
어리둥절한 눈으로 너를 보는 게 꽤나 웃겼던 건지 전정국이 살짝 웃더니 구겨진 담배갑을 내 손 위에 올린다. 왜 이걸 내 손에 올리지. 손 위에 올려진 낯선 담배갑을 보다가 다시 너를 보았더니 너는 여전히 웃고 있다.
" 네가 버려 줘. "
" ……. "
" 네가 끊으라며. "
아마 이건 평생 버리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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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은 금방이었다. 전정국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좋아할까 고민을 한 지가 벌써 삼 일째였고, 결국엔 간단한 옷을 골라 입었다. 매일 보는 전정국인데도 뭐가 그렇게 떨리는지 거울 앞에서 얼굴 비춰보기만 벌써 열 번째였다. 평소 화장이라 하면 겨우 아이라인만 그리던 내가 과감하게 섀도우를 도전했다. 그리고 다시 지웠다.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섀도우 같은 건. 평소에 화장을 좀 하고 다닐걸. 아님 수정이에게라도 부탁해 볼걸. 지금 이 순간 화장을 지지리도 못하는 나를 탓하며 다가오는 시간에 평소에는 잘 매지 않던 크로스백을 매고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보았다. 눈가에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섀도우가 반짝거렸다.
겨우 집 앞이었지만 그래도 약속 시간에는 5분 정도 일찍 나가는 게 예의가 아닐까 생각해 약속 시간보다 5분 일찍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 일찍 나왔네. "
나보다도 일찍 나온 전정국이 맞은편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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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좀 빨리 오긴 했는데 저기... 그... 삼각관계 너무 어려운 거 같아여 ㅠㅠ 정국이와 여주 사이를 가깝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거기에 삼각관계까지 끼면 너무... 너무...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 물론 그렇다고 삼각관계를 안 넣을 순 없고여! 윤기가 있으니 당연히 넣어야죠! 암! 그치만 오늘 정국이 분량이 몹시 많은 걸ㄹ 봐서는 앞으로도 윤기가 그리 위협적인 존재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을... 해볼게요 ㅠㅠ 역시 본격적인 로맨스는 엠티부터죠! 엠티에서 사랑이 싹트죠! 과씨씨는 역시 엠티! 엠티! 엠티! 엠티! 예아! 엠티! 엠티! 엠티! 아니... 이게 아니라 8ㅅ8 저 진짜 타이밍도 잘 잡았지만 초록글 1페이지 정말 감사드려요 8ㅅ8... 항상 좋아해 주시는 독자님들 너므너므너므 사랑해요 알라뷰 쏘머치 아 그리고 저 독방에서도 막 반응 보고 그러는데 전 11편 쓰고 나서 분위기 많이 달라진 거 같아서 많이 고민했었거든요 1편이랑 11편 비교하면 분위기가 엄청나게 달라요... 비교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달달한 부분은 역시 로맨스의 필수 코스라 정말 백주부님께서 설탕을 투척하듯 많이 넣어 보긴 했는데 이게 달달한지도 모르겠고 또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많이 달라진 게 아닐까 고민도 되고 8ㅅ8... 그럼에도 꾸준히 읽어 주시고, 댓글도 달아 주시고, 암호닉도 신청해 주시고, 추천도 눌러 주시고, 신알신도 해 주시고, 아무튼 독자님들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정말 많이 사랑해여 하잇! 아, 그리고 저 항상 글 적는 것보다 암호닉 적고 색칠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ㅎㅎ 그래서 이제 암호닉을 다음 편...? 까지 받고 그만 받으려고 해요 8ㅅ8... 못난 작가라서 죄송함다 ㅠ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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