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전정국과 단 둘이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건 내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전정국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는 마음에 실망하고 콩콩 뛰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할게 분명하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전정국은 후드집업에서 백 원을 꺼내 능숙하게 카트를 뺀다.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카트를 끌고 가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전정국과 결혼하면 이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는 건가,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에 떠올린 상상에 부끄러워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전정국 뒤를 따랐다.
기획부장 선배가 단톡에 올려 준 명단을 보며 전정국에게 읊어 주면 전정국은 정말 많이 와 본 곳인지 잘 아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곳엔 우리가 찾는 물건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어쩐지 대화가 하나도 없는 삭막한 상황에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장을 보러 왔는데 정말 장만 보고 있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든지, 할 말이라든지, 아무튼 그런 게 전혀 없는 건지 묵묵히 카트를 끌고 발만 움직이는 전정국의 모습에 발을 멈췄다.
내가 멈춘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와 같은 속도로 카트를 끌고 가는 모습이 아까와 다르게 얄미워 보였다. 전정국과 단 둘이 장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데이트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어제 밤새 떨려 잠을 뒤척였던 내가 한심했다. 나와는 다른 전정국의 모습에 전정국과 나는 이제 겨우 친구 사이임을 깨우치며 발을 다시 움직이려 할 때였다.
" 누나. "
겨우 내 다리만치 오는 남자애가 내 옷깃을 붙잡고 흔들고 있다. 조그만한 게 옷깃을 야무지게 붙잡고는 누나라고 부르는 모양이 귀여워 남자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 겨우 대여섯 살쯤 됐을까. 피부가 뽀얗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게 꼭 전정국 같았다. 눈을 맞추고는 통통한 볼을 톡톡 건드리는데 하지 말라며 조그마한 손으로 내 검지 손가락을 친다. 그게 또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귀여워서 웃어버렸다.
" 누나 나 엄마 잃어버렸어. "
" 얘 뭐야. "
울지도 않고 다부진 말투로 말하는 게 귀여워서 웃고 있는데 어느새 내가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전정국이 카트를 끌고 와서는 묻는다. 고개를 들어 전정국을 올려다 보았다가 다시 애기 얼굴을 봤는데, 정말 많이 닮았다. 커서 제 2의 전정국이 될 거 같은 얼굴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그냥 이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아니, 그냥. 전정국의 미래의 아들은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 누나 남자 친구야? "
이어서 나오는 애기의 말은 나도 전정국도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나만 당황스러웠나. 아마 빨개졌을 게 분명할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힐끔 본 전정국의 얼굴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랑 오해 받는 사이는 생각도 안 해 본 건지, 지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건지, 민망한 기분에 고개를 푹 숙이는데 어느새 전정국이 내 옆에 나와 똑같이 쪼그려 앉아 애기 볼을 톡톡 건드리고 있다.
" 아직 남자 친구는 아니고. "
" ……. "
" 곧 그렇게 될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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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아까 걔한테 한 말 때문에 그래? "
아까부터 기분이 묘했다. 애기와 전정국의 얼굴이 똑 닮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애기 엄마를 찾아 주고 나서도 기분은 똑같았다. 내 앞에서 카트를 끌고 있던 전정국이 아까부터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발을 맞추고는 묻는데, 정말 그 내용이 원인이었던 건지 묘한 기분이 한층 더 묘해졌다.
곧 그렇게 될 사람.
그러니까 곧 그렇게 될 사람이라는 말은. 곧 내 남자 친구가 될 사람이라는 말인 건데. 전정국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묻고 싶어도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많은 걸 바라는 여자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머뭇대고 있는데 전정국이 알아서 입을 열어 해명한다.
" 그냥. "
" ……. "
" 애기잖아. "
전정국의 입이 다물렸다. 그게 끝? 겨우 애기라서. 그게 이유가 끝? 살짝 들떠 있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혹시나 전정국이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장소는 이상했지만 오늘 이 곳에서 전정국과 내 사이가 진전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전정국의 입이 열리기까지 머리가 전정국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입이 열린 그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래서 착각 같은 거 하면 안 되는 건데. 함부로 착각을 한 내가 잘못한 건지, 착각을 하게 만든 전정국이 잘못한 건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지고 있었다. 내가 착각을 한 것도 잘못이지만 그럴 여지를 남긴 전정국의 잘못이 더 크다, 뭐다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전정국이 보기엔 내가 삐친 걸로 보였나 보다. 카트를 끌면서도 내 얼굴을 너무 자주 본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어 전정국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관이다.
" 삐쳤어? "
" 안 삐쳤거든. "
" 삐쳤는데. "
" 아니라니까. "
실랑이도 짜증이 났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애랑 장을 본다고 잠을 뒤척였던 나도 짜증이 났고, 내 옆에서 깐족대며 내 마음을 콕콕 쑤시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애도 짜증이 났다. 전정국이 뭐길래 설렜다, 식었다 반복하는지, 갑자기 느껴지는 허무함에 얼굴을 팍 찡그리는데 전정국은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리내어 웃는다. 그게 또 잘생겨서 같이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짜증이 났다.
" 사귈래? "
" 어? "
정신을 차려보니 전정국은 내 뒤에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게 만든 건 전정국의 한 마디였다. 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낯선 단어에 발을 우뚝 멈추고는 뒤를 돌았다. 전정국은 카트에 몸을 기대 나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는 모습이 장난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착각을 하지 말자고, 아까처럼 장난일 수 있다고 마음 한 구석에서 외치고 있는데 이게 또 착각이 아니었으면, 장난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서 쿵 하고 멈췄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전정국은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웃고만 있었다. 그 이상의 말도 하지 않고, 또 더 이상 입을 움직이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정국과 마주친 눈에서 곧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아랫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아 꾹 깨무는데 내게서 눈을 거둔 전정국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개구진 웃음으로 다시 카트를 끌며 내쪽으로 다가온다.
" 대답도 못할 거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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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가? "
" 저 준비위원회잖아요. 30분 정도 일찍 가야 해요. "
" 전정국이랑 같이? "
" 아마도? "
" 같이 가. "
오빠 저 늦었는데. 마지막 말이 먹혔다. 들었으면서도 무시하고 화장실로 들어간 것 같았다.
엠티 첫 날. 준비위원회라는 이유로 일반 학생들보다도 30분 정도는 일찍 와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 같지 않은 말에 겨우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서 양말을 신고 있는데 아직 씻지도 않은 것 같은 윤기 오빠가 2층에서 나를 내려다 보았다. 이것저것 묻더니 같이 가자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고 화장실로 쏙 들어가는데 기다려야 하나,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데 지금 출발해도 늦을 지경이었다. 어쩌면 밖에서 전정국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결국엔 윤기 오빠를 버려두고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모양새로 맞은편 대문에 전정국이 서 있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대문에 기대어 폰을 보고 있다가, 내가 나오는 걸 확인하고는 폰을 후드집업에 넣고 내 배낭을 힐끗 본다.
" 짐이 뭐가 그렇게 많아. "
" 별로 없는데…… 옷밖에 없어. "
" 무슨 옷이 그렇게 많아. "
" 남자애들이 빌려달라고 하던데. "
전정국 얼굴이 잠시 새파래졌던 것 같기도 하다.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전정국이 내 가방 위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한 번 들어보더니 내 가방을 강제로 벗기고는 자기 가방을 내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정국을 올려다 보면 내 가방을 매고는 자기 가방을 흔든다.
" 매라고. "
" 나 괜찮은데… "
" 나도 괜찮아. "
배려 받은 기분에 부끄러워, 어색하게 전정국의 보기보다 가벼운 가방을 매고는 가방끈을 꼭 쥐었다. 옆에서 무표정으로 걷고 있는 전정국을 힐끗 보는데 피곤한 듯 하품을 쩍 하더니 내쪽으로 눈을 돌린다. 갑자기 마주친 눈에 피하지도 못하고 발을 멈춰 세우는데 놀란 내 눈이 웃겼는지 그 큰 눈을 접어 웃으며 나보다 조금 앞선 상태에서 발을 멈춘다.
" 왜 몰래 봐. "
" ……. "
" 그냥 봐도 되는데. "
이미 인정한 마음 한 번 더 인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이 순간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는 마음을 한 번 더 강제로 인정 받은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것뿐이면 좋으련만, 어차피 들켜도 상관 없을 마음이지만 들키면 부끄러울 것을 전정국에게 들킨 것 같아 민망함이 밀려왔다. 몰래 봤다고 이미 느낄 정도면 전정국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머릿속에서는 이미 내가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예전에는 전정국 옆에서 걷는다는 것조차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으니 그저 전정국 뒤에서, 또는 저 멀리에서 전정국을 보며 설레기만 하면 됐는데, 점점 전정국과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우기에 급급하다. 이렇게 하면 전정국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렇게 하면 전정국과 너무 멀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참 많았다. 재고 따지던 예전보다도 어쩌면 지금이 더 생각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발을 움직였다. 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이미 지각이라는 걸 알렸지만 걸음이 그리 급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준비위원회라서가 아니라, 전정국과 등굣길을 함께 걷고 싶어서 집을 급히 나온 게 아닐까. 한 번 인정한 순간 부수적으로 인정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버거웠다. 내가 이 정도로 전정국을 좋아하는구나,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 없던 보조개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전정국은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난 전정국 옆에서 걷고 있었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전정국의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전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전정국은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가방에 피로회복제를 챙겼던가. 어제 저녁 싸둔 짐을 찬찬히 생각해 보는데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 김아미! "
윤기 오빠다.
급하게 준비하고 온 건지 신발을 구겨 신고 있었다. 전정국과 내가 걸음이 멈추고 나서야 신발을 고쳐 신은 윤기 오빠의 분홍색 머리가 짙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머리도 안 말리고 나왔는지, 신발코를 땅에 콩콩 두드리는 윤기 오빠의 흐트러진 머리로 손이 올라갔다. 머리카락이 아직 축축했다. 이리저리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전정국과 윤기 오빠의 시선이 내게 닿아 있었다.
윤기 오빠의 귀가 빨갰다. 내가 건드려서 그런 건가, 싶어 급하게 손을 거두고는 사과했다. 미안하다는 말에 어색하게 웃은 윤기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 먼저 가서 미안하단 거지? 알면 됐어. "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은 모양이라 굳이 따지고 들고 싶진 않았다.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이미 지각이었고 옆에는 전정국과 윤기 오빠가 있었다. 그 누구도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시간이 싫지 않았다.
" 윤기 형은 왜 벌써 가요. "
" 내 맘이야, 인마. "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끊는 게 진짜 난감한 것 같아요. 어느 부분에서 끊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면 생각보다 분량이 적을 때도 있고, 또 많을 때도 있어서 끊는 게 제일 힘들어요 8ㅅ8 그래서 글은 어제 다 써 놨는데 어떻게 13편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그걸 종일 생각했던 거 같아요 사실 저도 독자님들과 밀당을 조...조금 하고 싶긴 했지만 빨리 빨리 여주와 정국이 사이를 당기기 위해서 나름...대로 빨리 왔어요! 아 그리고 암호닉 저번 편까지 받기로 했는데 기억하시죠! 08.12.04:46
근데 사실 제가 암호닉을 받는 이유가 의문... 암호닉이 텍파 공유 때 쓰이나요? 앗 근데 저 이거 텍파로 만들어서 공유하는 건가요 앗 그걸 바라는 분이 계시나요...?
사실 제가 댓글에서 암호닉을 놓치는 부분이 많이 생기더라고여 8ㅅ8 그래서 암호닉 게시글을 따로 세울까 했는데... 이미 13편까지 왔고 이제 곧 있으면 완결일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에요... 아무튼! 암호닉 신청해 주시는 모든 분들 thㅏ랑하고 감 thㅏ해요!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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