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느긋하게 걸어온 결과는 지각이었다. 사실 준비위원회인 우리가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짐을 옮기는 것뿐이라 우리 늦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일찍 온 수정이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며 옆에서 투덜댔다. 전정국은 남자 선배들을 따라 꽤 무거운 상자들을 버스 아래칸에 실고 있었다. 윤기 오빠는 괜히 일찍 왔다며 투정을 부리면서도 열심이었다. 준비위원회라 일찍 오긴 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쓸모가 없어진 바람에 버스가 세워져 있는 중앙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선선한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를 옮기는 선배들을 쳐다보았다.
하나둘씩 동기들과 선배들이 모이면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누가 단대에서 제일 시끄러운 과 아니랄까 봐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리고 그 중에는 과대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놀고 있는 태형이가 있었다. 즐겁게 놀아 보자며 과 분위기를 살리기에는 한 몫 하는 애가 제 위 선배들이 상자를 옮기고 있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등교하는 동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선배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어쩔 수 없는 밉상이라며 혀를 차던 수정이가 이내 다가가 태형이의 뒤통수를 치는 것까지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건 지긋지긋하다.
수정이, 태형이, 윤기 오빠, 그리고 더 가자면 전정국까지, 내 친목은 딱 그 네 명이 있을 때만 다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동기들, 선배들과는 마주치면 인사만 할 정도로 별 얘기도 해 본 적이 없으니 그 네 명이 주변에 없는 지금,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있다면 폰을 만지는 것 정도? 연락 오는 사람도 딱히 없어서 카톡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염없이 반복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한숨을 푹 쉬며 내 옆에 앉는다. 고개를 돌려 보니.
" 와, 진짜 힘들다. "
윤기 오빠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내 손으로 땀을 닦아 주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여성스러운 성격도 아닌지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눈치 챈 건지 괜찮다며 손사레를 친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휴지라도 꺼내려고 매고 있던 가방을 돌려 지퍼를 여는데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이다. 낯선 검은색의 옷들에 내가 이상한 걸 넣었나 싶어 옷을 꺼내 늘어놓는데 웬.
" 이거 뭐냐? "
" 어…… 그…… "
" 네 가방에서 왜 남자 팬티가 나와? "
" 아니, 저…… "
윤기 오빠가 놀란 눈치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 분명 우리를 제외하고는 다들 시끄러웠는데, 윤기 오빠 목소리가 커봤자 얼마나 컸다고 주변이 금세 조용해진다. 등을 지고 있었지만 다들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그게. 나도 정말 처음 보는 팬티였다. 그러니까 그, 검은색이었다. 절대 변태라든지, 아무튼 그런 게 아닌데. 아마 얼굴만이 아니라 귀, 목까지 빨개졌을 게 분명하다.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윤기 오빠의 손에 쥐어진 그것을 보는데 분명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님에도 부끄러웠다. 나를 보는 윤기 오빠의 시선 하며, 동기들과 선배들의 시선 하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데 다급한 손이 튀어나와 윤기 오빠의 손이 꼭 쥐고 있던 그것을 낚아챈다.
" 가방이 바껴서요. "
참. 가방이 바꼈었지. 그제서야 등굣길에 가방을 바꾼 걸 깨닫고는 늘어놓았던 검정색의 옷들을 다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전정국의 손에 쥐어진 검은색 팬티를 힐끔 보았다. 그러게 왜 가방을 바꿔서는. 남자다운 배려에 설렌 게 불과 한 시간 전인 것 같은데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주변의 눈길에 애꿎은 전정국을 원망한다. 이제 그만 시선을 거둬줬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날 보고 있는 것 같다. 차마 뒤를 돌아보지는 못하고 팬티까지 집어넣고는 가방 지퍼를 잠그는 전정국을 보았다, 고개를 숙여 발을 동동 구르다, 쓸데없는 행동만 반복하는데 전정국이 얼굴을 찡그리며 내 뒤를 본다.
" 그만 봐요. "
" 오. "
" 뭐야, 둘이 가방 왜 바꿔? "
" 혹시 아미 가방이 무거워서 정국이가 들어줬다든지~ "
" 둘이 등교를 같이 했다든지~ "
" 둘이 사귄다든지~ "
전정국의 한 마디에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입을 여는데 다시 시끄러워졌다. 중요한 건 그게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전정국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괜히 민망해져 두 손으로 벤치의 끝을 꼭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전정국처럼 당당하게 뒤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부끄러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전정국이 그런 거 아니라며 애써 해명하고 있는데, 해명을 잠재워 준 건 다름 아닌 윤기 오빠였다. 전정국과 나, 그리고 윤기 오빠가 함께 등교한 사실을 침착하게 알렸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 되는 것 같더니.
" 너네 주말에도 데이트했잖아. 내가 봤는데? "
심장이 다시 쿵. 대체 눈이 없는 곳이 어딘지 의문일 정도로 우리를 감시하는 눈은 참 많았다. 만약 전정국과 내가 정말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이제 곧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관계라면 모를까, 나는 전정국을 좋아해도 아직 전정국의 마음을 확인도 못한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기분이 나빴다. 씨씨가 얼마나 위험한 건진 이미 입학 전에도 귀가 아프도록 들었고. 물론 상대가 전정국이라는 전제가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분위기 타는 건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전정국도 그걸 느낀 건지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 그건 준비위원회 일이라서 장 본 거고. "
"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
" 아, 좀. "
전정국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미간에 주름을 팍 잡고는 눈을 내리까는데 그게 얼마나 무섭던지, 짜증을 받는 상대가 나였다면 오금이 저릴 게 분명했다. 역시나였던 건지 깐족거리던 동기 한 명의 입이 다물어졌다. 전정국이 가방을 내 품에 던지듯 놓고 다시 상자를 옮기러 갔다. 아까와 같이 시끄러워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말이 오가긴 했다. 그 이야기의 주제가 나와 전정국일지는 들리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조용조용 말하는 걸 보면 우리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윤기 오빠도 느낀 건지 이제 겨우 마른 분홍색 머리를 헝클어뜨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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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왕따시키지 말라고. "
" 야. 이게 무슨 왕따야. 넌 네 친구랑 앉으라니까? "
" 내 친구가 너네잖아. 어? 왕따시키지 말라고! "
버스 자리가 문제였다. 평소 우리와 어울리던 태형이가 우리가 같이 앉자 들고 일어났다. 같이 뒷자리로 가자는데 수정이는 뒷자리는 죽어도 싫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댄다. 난감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고 있으면 뒷자리 창가에 전정국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 전정국에게 가방을 건넨 것 말고는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하는 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내가 전정국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신경 쓰였는지 뒷자리는 죽어도 싫다며 고개를 저어대던 수정이가 한숨을 쉬더니 뒷자리로 가자며 나를 일으킨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좋다며 실실 웃어대는 김태형이 냉큼 달려가 전정국 옆자리를 차지한다. 수정이가 한 번 더 한숨을 쉰다. 아마 내가 전정국과 같이 앉고 싶은 걸로 보였나 보다. 이럴 것까진 없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수정이 어깨를 쳤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어디 앉겠냐며 수정이가 선택권을 양보해 주었고 전정국과 가장 떨어진 창가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꼈다. 수정이가 바로 내 옆에 앉으려고 하는데 마침 버스에 발을 디딘 윤기 오빠가 수정이 이름을 짧게 부르더니 내 옆에 잽싸게 앉는다. 놀란 마음에 이어폰 한쪽을 빼고 옆자리에 앉아 윤기 오빠를 보는데, 하얀 얼굴이 살짝 웃더니 방금 빼낸 내 이어폰을 가져가 제 귀에 꼽는다.
" 무…… "
윤기 오빠가 조용하라는 듯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톡톡 친다. 강제로 입을 잡아 다물게 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입이 다물려졌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을 접어 웃는 윤기 오빠의 얼굴이 하얬다. 늘 하얬지만 유난히 더 하얬다. 노래가 참 잘 어울렸다. 지금 내 마음과.
윤기 오빠는 가만히 있었다. 너무 가만히 있어서 옆에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가만히 노래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폰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힐끔 본 수정이는 잠든 것 같았다. 조용한 걸 보니 태형이도 잠든 것 같았고 시선이 끝까지 닿지 않는 탓에 전정국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고 있지 않을까. 다시 떠오른 전정국의 얼굴에 가슴이 설렜다. 오갈 데 없는 시선이 윤기 오빠의 손에 닿았다.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있는 손도 하얬다. 기분이 이상했다.
남의 손을 훔쳐보는 게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변태가 된 기분에 혼자 얼굴이 화끈거려 눈을 잠시 감았다 뜨는데 어깨에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게 툭 내려앉는다.
아.
분홍 머리다.
마음이 분홍색이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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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아미? "
나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는 목소리. 뒤를 돌아 나를 부른 목소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그 얼굴을 찾아냈다. 동기도 아니었고, 선배도 아니었다. 그냥.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은 얼굴임은 분명했다. 열아홉, 그때의 내게 다가왔던 그 얼굴들 중 하나.
" 와,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번호는 왜 바꿨어? 일단 나 번호 좀. "
엠티는 술 마시고 놀러 가는 줄인 곳만 알았는데 수학 여행과 별반 다를 것이 없구나, 하고 느낄즈음이었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시청에 들렀다 숙소에 가서 본격적으로 놀아보자는 회장 선배의 말에 마음 속으로는 여느 동기들과 다름없이 야유를 보냈던 것 같다. 내 어깨에 잠시 머물렀다 떠난 분홍 머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청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무리에 섞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나를 부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전정국이 떠나고 나서 겨우 친해지게 된 친구였다. 전정국에게 관심이 많은 애였고, 전정국이 그렇게 전학이 가고 나서도 내게 전정국에 관해 수없이도 물었던 애였다. 전정국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했었는데,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얼핏 듣기에는 전정국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여자애들 중 하나인 것도 같다. 나는 아는 게 없었지만 내가 아는 모든 것에 과장을 더해 이 애에게 전정국에 관해 말해 주었던 것 같다. 여전히 전정국을 보면 미안한 과거 중 하나의 주제와 같은 앤데 이 애가 내 앞에 나타난 게 반가울 리가 없었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번호를 줘버리자, 싶어 번호를 대충 찍어 주고는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 나를 붙잡은 건 그 애였고. 전정국과 마주치면 곤란했다. 전정국이 곤란해할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싫었다. 미안한 과거를 천천히 사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과거를 들추고 싶지 않았다. 전정국이 부디 이쪽으로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 어? 전정국? "
이 애가 전정국을 잊어버렸을 리가 없었다.
전정국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큰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몸이 돌려졌고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전정국이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그 눈을 움직여 내 앞에서 동경하던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그 애를 보았다. 여전히 무심한 눈빛이었지만 어딘가 날카로웠다.
" 대박. 야, 김아미 너 전정국이랑 같은 학교야? 같은 과? "
난감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로 싫은 티를 냈으면 가 주는 게 정상일 텐데 전정국을 본 그 순간부터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했다. 전정국이 이 애를 기억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아마 기억하지 않을까, 전정국에게 고백까지 할 정도였으면.
" 얘 뭔데. "
전정국은 전정국이었다. 무심한 눈빛과 다르지 않게 아주 무심한 말투로 그 애를 턱짓으로 가리킨 전정국이 내게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줄 수 있는 답이 없었다. 나라고 이 애에 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을 해, 내가. 열아홉의 너를 떠나보낸 후 나와 친해진 사이? 아니, 처음부터 이 애와 나는 친하지 않았는걸. 이 애도 그걸 알고,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 전정국 김아미 또 연애질 하냐! "
무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게 보였다. 그리고 이미 퍼질 대로 퍼져버린 소문은 지금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장난스레 던진 동기의 말에 그 애의 얼굴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웃고 있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살짝 날카로워진 표정에 전정국을 보았다. 전정국은 여전히 무심했다. 내가 가라면, 정말 갈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에 가라고 할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럼에도 전정국을 보낼 수 없었던 건.
" 너네 사귀니? "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우리에게 멀어졌던 무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몇몇 동기들과 태형이, 수정이, 그리고 윤기 오빠까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내 부정이 부정 같아 보이지 않았는지, 이제는 나를 보지도 않고 전정국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내가 들러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전정국이 나를 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와, 대박. 진짜 사귀는구나? "
" 그런 거 아니야. "
" 그런 게 아니면 뭐야. 사귀네. 딱 봐도. "
" 아니라니까… "
" 그래, 뭐. 취향은 바뀔 수도 있는 거지. 그치? "
머리가 아팠다. 가까워진 무리들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금방이라도 이 애의 입을 막고 있었다. 어렴풋이 고등학교 동창이라고는 생각했던 건지 전정국은 의외로 침착했다. 아니, 침착했다기 보다는 그냥 아무 표정이 없었다. 화가 나는 표정도 아니었고, 놀란 표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됐다. 이제 겨우 좁혀놓은 우리 관계가 다시 벌어질까 봐. 무서웠다.
" 그래서. "
" ……. "
" 전정국, 이제 남자는 안 좋아해? "
주변이 웅성거렸다. 내 어깨에 올려져 있던 전정국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순전히 내 느낌일 뿐이었지만 전정국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전정국의 손을 잡아 내렸다. 꼭 잡은 손이 따뜻했다. 주변은 여전히 웅성거렸다. 차라리 시끄러운 거였다면 덜 거슬렸을까, 이미 들을대로 들은 것 같은 동기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얘긴지 정도는 전정국도,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물론 알고 있었다.
" 왜 대답을 못해? "
" ……. "
" 뭐야. 아미 슬프겠다. "
" ……. "
" 아직 남자 좋… "
" 그만하죠. 이 정도면 충분히 한 거 같은데. "
그 애의 말을 끊은 건 나도, 전정국도 아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분홍 머리가 내 남은 손을 잡아 뒤로 끌었다. 왼손은 윤기 오빠의 손에 잡혔고, 오른손은 전정국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제 3자인 윤기 오빠는 이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도 마치 자기 일처럼 화내고 있었다. 직접적으로는 아니었지만 그게 느껴졌다. 평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평소에도 눈이 날카로웠지만 여유가 있었던 반면 지금은 아니었다. 여유가 없었다. 꽁꽁 싸매고는 절대 너따위에게는 지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침착해 보였지만 또 그게 아니었다. 머리끝까지 있는 분노 게이지가 꽉 찬 사람처럼 무서운 눈빛으로 보는 윤기 오빠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건지 그 애는 끝까지 할 말은 꼭 하고 돌아선다.
" 동창회 한번 해야지. "
" ……. "
" 연락할게. "
힘이 탁, 하고 풀렸다. 힘이 풀리는 순간, 전정국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런 나를 다시 붙잡은 건 전정국이었다. 윤기 오빠는 여전히 꼭 잡은 내 왼손을 놓지 않았다. 전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오른손을 놓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당황한 눈빛을 하고 있으면 수정이가 윤기 오빠와 전정국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여전히 웅성이는 무리들을 몰고 간다. 멀뚱히 서 있었다. 윤기 오빠는 남은 손을 허리춤에 갖다 대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고, 전정국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전정국의 이마가 내 어깨에 닿았다.
" 잠깐만 기댈게. "
힘들구나.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를 잡아먹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어깨에 기대어 있는 전정국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붙잡혀 움직이지 않는 왼손을 꿈틀대자 윤기 오빠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눈이 마주쳤고, 어느새 조용해진 윤기 오빠의 눈이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아무래도 전정국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뱉을 것 같지 않던 입이 어렵게 얼렸다.
그리고 곧 윤기 오빠는 내 손을 놓고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 천천히 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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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한 건 다섯시쯤이었다. 예상 플랜대로라면 숙소 도착은 일곱 시쯤이어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아직 다섯 시였고, 우리는 이미 숙소였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도 겨우 다섯 시 반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여덟 시, 레크리에이션이 열 시인 걸로 봤을 때, 시간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전정국이 떠올랐다. 전정국은 뭐 하고 있을까. 나처럼 머리가 복잡할까. 아니, 나보다도 더 복잡할까.
수정이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숙소 밖으로 나왔다. 전정국이 복잡한 머리를 식히러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숙소 앞에 농구 코트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데, 있을 건 다 있었다. 농구 코트를 한 바퀴, 두 바퀴 돌다 보니 숙소를 나서는 전정국이 보였다. 숙소 뒷쪽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기는데, 민폐가 될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발을 따라 움직였다.
전정국은 숙소 옆쪽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었다.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무는데, 내가 담배를 끊으라 했던 말 때문인 건지, 감동이 밀려왔다. 뒤에서 전정국을 보는 것도 잠시,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그리고 전정국 옆에서 쪼그려 앉으면, 전정국은 모른 척을 하는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가 복잡한 게 분명했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네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5분이 흘렀을까, 옆에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남자 안 좋아해. "
" …알아. "
알다마다. 박지민이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다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전정국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게 꽤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까. 전정국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꼭 토끼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차분한 내 눈에서 거짓이 아님을 읽었는지 얼굴이 빨개진 전정국이 고개를 홱 돌렸다.
분위기가 좋았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을.
" 있잖아.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머릿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했던 말인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단 말만 몇 번이고 되뇌이는데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쿵, 쿵 뛰는 게 아니라 쿵쿵쿵쿵, 정말 세차게도 뛰는데 전정국 귀에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하다는 눈이 부담스러웠다. 그런 눈으로 보면. 한숨을 쉬었다. 나를 재촉하지 않았지만 궁금해하는 그 눈이 꼭 나를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입을 여는 순간 저 눈이 어떻게 변할까, 무서웠다. 저 눈이 더는 나를 보지 않을까, 그게 또 무서웠다.
있잖아.
" 나… "
결심하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농구공이 통통통 튀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정국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농구공이 전정국의 등을 치고 달아났다. 그리고 농구공을 익숙하게 손에 쥔 건.
윤기 오빠였다.
방해 받았지만 어쩐지 고마웠다. 나에게 가장 설레는 순간이면서도 가장 두려운 순간인 지금을 벗어나게 해 줘서. 고마웠다.
" 치킨 내기 한대. "
" ……. "
" 신입생 대 재학생. "
" ……. "
" 농구로. "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안녕하세요...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말을 아낄게요 8ㅅ8
제가 앞부분 글 분위기를 다시 살려보겠다고 열심히 쓰다 보니까 글이 너무 아련해진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에요 설레는 요소가 1도 없다는 것도 무척 걱정... 아, 물론 마지막 농구는 제 사심이 맞슴다! 저 농구하는 윤기 보고 싶어요! 아육대! 그날만큼은 사랑했지만 크리스마스 특집은 다메요! 다메다메!
앗 그리고 저 암호닉 이제 안 받는데 신청해 주신 분들이 계세요 8ㅅ8... 나중에 완결이 두구두구 다가올 때 한 번에 받을게요! 그땐 글을 세로 세우도록 하겠슴다! 신청하실 분이 계시다면 그때 신청해 주세요! 일단은 13편에서 신청해 주신 분들 추가해놓겠슴다! 암호닉 사랑해요♡ 아 물론 신알신도♡ 아 물론 댓글 모두♡ 아니다 조회해 주신 분들 모두♡
중간 BGM은 소심한 오빠들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임다!
<암호닉>
〈!--[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
현지 카누 낭자 정국이최소내남자 그리 솜니움
연 목단 가온 계피
윤아얌
망고 샤축구 또또 꾸꾸 눈부신 멜로우 알라 소녀 과탑 들국화
뾰로롱 곰씨 충전기 메로나 너나사 태태한침침이 쿠키
하늘하늘해들레 시레 오하요곰방와윤기야 나랑 살자뻐꾸기헤롱쿠쿠호빗 총총작가님하트 과자박스 콩구기꾸기♥ 츄파춥스 골룸 플랑크톤회장 밤열한시효인상상
김데일리 민트 진달래 국쓰 침침맘
마카롱 둥둥 츄뽀 전정국 열아 김태태 설렘 미늉기 여기봐전정꾸 핑크보이 엽서 밥밥 젤리 감자깡 탱탱 오전한시 푸딩 인사이드아웃 정국아뭐해 태태
호독 그로밋 달걀 도망 곰윤기 모찌 꿀떡 밍뿌 샤파 1600 [] 24 구월 깐깐징어 종국 변탄소 꺄룰 븅븅딱딱 전씨걸새우깡 꽃님 봄 0915 핑슙 전정국뿡뿡 미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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