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 놀이터에는 항상 그 아이가 있었다. 피아노학원이 끝나면 사금파리로 선을 긋고 팔방을 하고나서 저녁먹기위해 6시엔 집으로 돌아갔을 시절, 빈 페트병으로 하늘을 쳐다보던 그런 아이가. 어린 아이였음에도 머리는 항상 샛노랗게 물들어있었다. 왜인지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니스칠이 벗겨진 벤치에 앉아서는 마른 팔을 쭉 펴고 어스름한 그 하늘에 투명한 페트병을 들이미는 모습에 발걸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페트병앞에 눈을 들이밀고는 너 뭐보는거야? 하고 묻자 그 애는 말이 없었다. 야아, 너 뭐보는 거냐니까! 조르듯 물어보자 그 애는 그때서야 반응을 보이더라. 금붕어라니. 하늘에서 금붕어라니. 어슴푸레한 하늘과 노을의 붉은 색이 만나던 그 지점에 사는 금붕어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 애는 내내 들고있던 팔이 아픈지 페트병을 살짝 내려놓았다. 그 애의 노란 머리칼이 떨어지는 부근에서 조금 눈을 내리면 얇은 목의 끝에는 까만 구정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시선을 위로 올리면 그을린건지 모를 까무잡잡한 얼굴. 좀 씻지. 갑자기 불쾌해진 마음에 나 갈래! 빽 소리를 지르고 나와버렸다. 그러던지 말던지 그 아이는 다시 페트병을 갔다 대었다. 이젠 노을도 없는데. 또 있었다. 페트병을 든 아이는. 그날은 엄마가 피아노학원을 끊어 버린 날이었다. 엉엉 울며 엄마, 잘못했어요. 피아노치게 해주세요. 하고 빌어도 엄마는 차가운 목소리로 안된다며 다그쳤다. 앙앙- 피아노학원 앞에서 드러눕고 목이 째져라 울어도 엄마는 한숨만 쉬고는 그대로 날 지나쳐버렸다. 악에 받쳐 떠나가라 더 악을 쓰며 울어도 무정한 엄마는 그냥 걸어가기만 하더라. 봐주는 이도 없자 멈춰버린 눈물은 그대로 볼에 늘어붙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본것은 그, 꼬질꼬질했던 그 아이. 눈물이 늘어붙은 얼굴에 까맣게 닳아버린 내 옷. 동질감인지 또 한번 그 아이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여전히 그 애의 뒷목은 시커먼 때가 있었고 팔꿈치또한 그랬지만 저번처럼 밉지는 않았다. 인기척이 곁눈질로 날 확인한 다음엔 또 페트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침묵. 쌀쌀한 가을 특유의 바람냄새가 코밑을 스쳤다. "너 또 금붕어 봐?" "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아까 울어서인지 목소리는 꼭 사춘기 남자애같았던 걸로 기억한다. 푹 꺼져버려린 목소리로 금붕어 봐?하고 묻자 남자애는 또 짧게 툭툭 내뱉었다. 그래, 또 금붕어구나. 와아- 금붕어다! 예쁜 색이네. 하는 짧은 탄성에 눈길은 내게 맞물렸다. "너도 금붕어가 보여?" "응. 금붕어잖아. 페트병안에 금붕어." 보이지 않았지만 보인다고 했다. 그 애랑 얘기를 좀더 하고싶었다. 오늘 엄마가 피아노학원을 멋대로 끊어버렸다던가하는 그런 어린애들 특유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다. 남자애는 그런 날 조금 보더니 다시 눈길을 돌려버렸다. 참 못된 애구나. 쌀쌀맞았다는게 못된 거였을까. 그래도 그아이는 저번의 나처럼 꼬질꼬질한 날 보고 가버리진 않았는데. "야, 금붕어."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바람이 조금 매서워진 늦가을에도 그 애는 여전히 얇은 7부옷과 찢어진 청바지만 입고 있었다. 퀘퀘한 오래된 나무 특유의 냄새가 나는 벤치에 그 아이는 또 손을 뻗고 앉아있었다. 참 이상하지. 주변에 나무는 잎들을 떨궈내고 맨가지를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데, 벤치의 갈라진 틈은 점점 더 벗겨지고 까슬까슬 일어나는데 너만은 꼭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건. 너는 변함없이 그 때의 너인 것 같은, 그런기분이 드는 건 말야. "권순영이야." "..." "권순영이라고. 내 이름." "순영아." 내가 네 이름을 불렀을때 내 가슴이 벅찼다면 너는 이해할까. "순영아. 순영아아- 순영순영순영순영순.." "그만해." 금붕어소년 그렇게 7살의 순영이를 지나쳐 꽤 숨가쁘게 달려온 열일곱살의 순영이. 그 순영이는 더 이상 목에 때가 있는 꼬질꼬질한 아이도 아닐뿐더러 그의 교복은 소매끝까지도 늘 깨끗했다. 떨어지지 않았던 우리는 17살이 되어서야 조금 멀어졌다. 함께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었다. 모든 걸 함께 했던 우리는 이제 항상 함께하기엔 둘다 너무 커버렸다. 모두 검은색인 아이들 사이에서 거친 머리로 금발을 하고 있는 너는 항상 눈에 띄었지만. 그래서인지 안심이 됐다. 잘 있었니, 오늘의 순영이도. 순영이는 이제 더 이상 페트병을 꺼내들고 금붕어를 페트병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알고 있어. 순영이 네 남색 책가방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누렇게 바랜 그 페트병. 그야 네가 걸어갈때마다 짜락짜락 빈 페트병소리가 나는 걸.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가다보면 그 끝은 꼬질꼬질한, 일곱살의 순영이. "야, 금붕어." "권순영." "네 금붕어는 무슨 색이냐." 순영이는 풀어진 내 운동화끈을 묶어 주고 있었다. 내가 리본을 못 묶어서인지 항상 신발끈을 묶어줄때면 리본을 두번씩이나 묶어주는 쌀쌀맞지만 못되지 않은 순영이. 뜬금없는 내 물음이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반대쪽으로 손을 옮겨 리본을 한번더 동여매준다. 그 바쁜 손길을 보고 있자 순영이 특유의 나른한 음색으로 중얼거린다. "금붕어가 색이 있냐. 죄다 노란색이지." "..." "'금'붕어잖아." 순영이의 노란 머리칼이 햇빛을 반사한다. 햇빛이 눈을 찔러 눈을 감았다. 금붕어소년 우린 더이상 함께 하지 않는다. 문득문득 순영이 네가 내 눈에 띄지만 난 더이상 아는체하지 않는다. 가끔 상처입은 너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이젠 아는 척 하지 않기로 했다. "여주야." "..." 어느날 네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 물기가 젖어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그만 나 놔주라." 일곱살의 순영이도, 열일곱살의 순영이도 없다. '엄마, 잘못했어요. 피아노치게 해주세요.' 일곱살의 여주만 있을 뿐이다. 금붕어소년 : 당신의 금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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