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아픈 거야.."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자 차츰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전투, 사방에서 울려퍼지던 비명소리, 적들을 무심하게 베어넘기던 황태자, 무너지는 땅, 불어난 강으로 첨벙 빠진 기억. 아, 알겠군. 이렇게 온몸이 쑤신 이유는 내가 그 난리통 와중에도 살아남은 뜻이렷겠다?
"운이 좋네."
나는 입매를 살짝 끌어올렸다. 내가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강이었던 게 다행이었고, 떨어지면서 단단한 바위같은 곳에 부딪히지 않은 게 다행이었고, 세찬 강물에 쓸려가서 익사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들이쉬는 공기가 이토록 반가운건 처음이려나. 히히, 하고 바보같이 웃음을 흘린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후 일어나기 위해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으으으....."
온몸을 후드려맞은 듯한 통증에 나는 신음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보는 곳이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고, 뒤에는 푸르른 숲이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떠내려온 거야? 멍청하게 절벽을 쳐다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벽을 올라갈 수는 없겠고, 숲으로 가야겠네. 사실, 숲으로 가도 어떻게 될지는 솔직히 모른다. 몰라도 말이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대충 결정한 후, 완전히 일어난 나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다리가 저릿하긴 했지만 걷는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부러진 곳은 없는 듯 했다. 그냥 시퍼런 멍이 든 정도겠지.
일단 숲으로 향하기 전에, 허전한 맨손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봐야겠다. 물살에 잃어버린 내 무기 대신 조금 옆에 떨어져있는 검을 대신 주워 지팡이처럼 땅을 짚어가며 열심히 걷던 나는 혼잣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나만 산 건가?"
물살에 떠밀려 나처럼 뭍가에 닿아 띄엄띄엄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 중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일일히 확인해봤지만 다 싸늘한 시체가 된 후였다.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말이다. 생판 모르는 곳에 나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무서워져 소름이 돋은 팔을 박박 문질렀다. 누구라도 좋으니 살아있는 사람은 없을까.
큰 바위를 넘어 조금 더 뭍이 드러난 곳으로 이동했으나 역시 내가 처음에 눈을 떴던 곳처럼 다 죽은 사람들이었다. 핏기가 다 빠져 창백한 피부. 그래, 내가 산 것만으로도 기적이지. 한참을 돌아다니며 일일히 생사를 확인하다가 결국에는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를 포기하려고 한 그 때,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어?"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놓치지 않은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최대한 빨리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소리를 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전투에서 적들을 무참히 베어넘기던 적(敵)국의 황태자, 전정국이였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그는 의식이 없는 건지 내가 중얼거리는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죽었나, 하고 반사적으로 생사를 확인하던 나는 내가 하고 있던 행동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정신 차려, 성이름, 전정국이야. 적군이라고.'
형형한 눈을 한 채 적들을 무참히 베어버리던 모습이 기억나서 나는 검을 빼들어 그의 목에 겨누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겨눈 검을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상대는 황태자다, 이 애만 없어지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는 거야. 검끝이 움직이며 그의 목에 살짝 생채기를 냈다. 미세한 상처 사이로 피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 애만 죽이면... 전쟁은 끝날지도 몰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애만.....!
"하, 못하겠다.."
결국 황태자의 목에 미세한 상처만을 남긴 채 나는 칼을 옆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풀썩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뱉고 있던 나는 손을 내려 죽은 듯 잠들어있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갓 성인이 되었다고 했었나. 피가 씻겨나가 말끔한 얼굴은 한눈에 봐도 앳되어 보였다. 두 눈을 감고 있으니 악귀와 같았던 잔인한 모습과는 더욱 일치하지 않는 듯한 순수한 모습이었다. 나는 쭈그려앉은 채 슬금슬금 이동해 그의 얼굴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턱을 괸 채 한동안 뚫어지게 보던 내 입에서, 한 단어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귀엽네."
손가락으로 황태자의 볼을 쿡 찌르며 나는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전정국을 죽이지 않기로.
"무방비인 상대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내가 결정내린 일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매일 죽음과 삶을 오가는 전쟁터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살다가, 조금이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누린 탓에 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후회할지 몰라도, 최소한 지금은 후회하지 않으니까.
"그럼 이제 어쩐다?"
계속 여기에 있다고 해서 좋은 방도가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살려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황태자를 여기에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고 말이다. 업고 가 볼까, 해서 그의 몸을 끙차, 하고 일으킨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남자라고 꽤나 무거웠다. 무슨 돌덩이도 아니고..... 아, 어쩌지. 질질 끌고 가 버릴까? 황태자면 뭐해, 어차피 나는 그가 다스리는 적(赤)국의 백성도 아닌데 귀하게 대접해드릴 필요도 없고.
".....으....."
"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나는 앓는 듯한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나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눈썹이 잔뜩 구겨진 채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해서 재빨리 살피니 그의 왼쪽 어깨에 벌어져있는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좀 전에 내가 그를 들어올렸던 것이 상처를 벌어지게 한 모양이었다. 저 정도 상처는 그냥 놔두면 곪아 썩어들어갈 것이 뻔했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씨, 뭐 이렇게 불이 안 붙냐!"
나뭇가지를 한참동안이나 열심히 마찰하고 있어도 연기만 날 뿐, 도저히 불이 붙지 않자 나는 신경질을 내며 나뭇가지를 휙 내던졌다. 발로 나뭇동이를 퍽 차버린 나는 씩씩거리다가 두 손을 양 볼에 가져다댔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벼댔는지 손바닥으로 불을 붙여도 될 만큼 뜨거웠다.
"....그냥 익히지말고 먹을까."
나는 나뭇잎 위에 올려져있는 물고기 세 마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배고파 죽겠는데. 굳이 익혀서 먹지 않아도 죽진 않겠지.... 하지만 어둑어둑해지는 주변에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굳이 생선을 구워먹지 않더라도 어차피 곧 어두워질 테니 불을 꼭 피워야 했다. 들짐승들을 쫓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래도 그 전에 조금만 쉬어야겠다. 이러다가 정말 내 손에서 불나겠어."
뒤로 벌렁 드러누운 채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쉬고 있던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아까 숲에서 구해온 약초가 다행히도 잘 든 모양이었다. 지혈과 상처의 회복을 돕는 데에 효력이 좋다던 약초가 맞나 솔직히 좀 헷갈렸지만, 잘 자고 있는 것을 보아 맞는 듯 했다. 약초나 갈아줄까. 나는 몸을 일으켜 여분으로 더 따온 약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 손에 꼭 쥔 채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상처를 감싸고 있던 약초를 떼어내고 새 약초를 붙여주려고 할 때였다.
"넌 누구냐."
갑작스레 턱 붙잡힌 손목과 살짝 갈라져있는 낮은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날 직시하고 있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니 너무 무서워서 나올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린 후 최대한 떨지 않으려 애쓰며 목소리를 냈다.
"손 좀 놔주지 않겠어?"
"누구냐고 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너무하네. 상처까지 치료해주고 있는데."
덤덤한 척,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나의 모습에 그는 한동안 내 눈을 마주하다가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손이 덜덜 떨릴 뻔 했지만 무사히 약초까지 갈고 난 후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움직임을 따라 황태자의 시선이 이동했다. 나는 조금 전까지 불을 피우기 위해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가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누구냐면, 일단 그쪽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 그 상처, 제때 치료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쯤 고열에 시달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걸."
"적이냐?"
"죽어가는 적군을 애써 살려놓는 멍청이도 있나봐?"
나는 씩, 웃으며 질문에 뻔뻔하게 대답하고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바로 그 멍청이다.
내 대답에 경계심이 누그러진 건지 그는 조금 전보다는 풀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쓰고 있는 건가?"
"누군지 모르는데 뭐 어때. 그쪽이 황태자라도 되는 게 아니면."
"황태자라면?"
그가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하지만 이미 준비해 둔 말이 있었다. 나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가? 그쪽을 황태자라고 생각하고 존칭을 쓰다가, 나중에 신분을 사칭한 것이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저하를 사칭한 죄는 목숨을 내놓아도 모자를걸."
"그-"
"설사 황태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고."
전정국은 황태자가 맞지만, 그렇게 될 일이 생기면 나는 잽싸게 도망치면 될 일이다. 이게 다 내가 전정국이 속한 적(赤)국의 사람이 아니라 적대국인 현(玄)국의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배 째.
당당하게 말을 내뱉은 나를 보고 황태자는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다가 큭큭,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왜 저래? 눈쌀을 찌푸리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점차 웃음소리가 커져 나중에는 사방이 떠나가라 웃어대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 웃기는군, 참 웃겨."
"뭐가 그렇게 웃긴데?"
"몰라도 돼. 그런데, 네 이름은?"
"....이름..."
"뭐라고?"
헙.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대답해주다가 나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화난 척 되물었다.
"그쪽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름을 알려줘야 하지?"
"이름을 알려주더라도 믿지 않을 게 뻔한데, 왜 내가 굳이."
"황태자 행세를 하시겠다?"
빈정거리는 어조에도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나는 흥 소리를 내며 무시했다. 그러자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툭 내뱉었다.
"말하는 건 대범하더니 행동은 꼭 계집애같군."
계집애라는 소리에 순간 흠칫했지만 그는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한 것 같아 보였다.
"예-예- 태자님이 보시기에는 어련하시겠습니까-"
비꼬는 어조로 태자님이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아 고개를 들었더니 전정국은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상처를 확인하고 있었다. 괜히 살려줬나봐. 벌써부터 후회가 되네. 나는 입술을 작게 비죽이며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를 열심히 마찰시켰다. 전정국에게서는 완전히 신경을 끈 채 불을 붙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느라 그가 가까이 다가온줄도 몰랐다.
"그렇게 해가지고 오늘 안에 불이 붙겠어?"
"- 은인."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전정국이 웃음기를 띈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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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명료하게 바꿔버렸습니다ㅠ_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1, 태형오빠, 아침2 로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 감사해요♡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