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이 영락없이 우리 방송국 앵커님인 것을 캐치한 나는 빠른 판단력 아래 혹시, 설마 하는 마음을 놓지 않은 채로 바로 생활용품 켠에 가 얼굴을 가릴 용도로 수술 집도하는 사람이나 쓸것 같은 마스크를 썼다. 그리곤 한눈에 봐도 오버스러움이 가득 묻은 기침을 해가며 계산대에 갔다.
"...어 마스크"
"콜록콜록- 에취, 어후. 제가 요즘 감기가, 콜록, 5700원이요."
"아하- 어떠케 기침 심하게 하신다... 여기여"
"쿨럭- 네네. 영수증은"
"버려주시구여. 그리고..."
"...네?"
그리고라니? 무슨말을 하려고. 나 들켰어? 그럼 지금까지 오바스러운 기침은 왜 한거야. 그냥 들키지. 왜 숨었니, 게다가. 아 흑역사, 어떡할거야.
"완쾌하세여! 힘!"
"아아... 예, 안녕하가세요."
안들켰네...
*
"여주씨 이것 좀 해줘."
"네!"
"어머, 이거 혹시 오늘 여주씨가 다 해야되는거야?"
"네..."
"힘들겠다. 내것까지 부탁해도 되는건가."
"아 괜찮습니다!"
"그래요. 나 먼저 퇴근할게, 대신 내일- 아 아니다. 내일봐요"
"네! 들어가세요!"
저 분을 보고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다 할 정도로 대 선배님의 퇴근을 뒤로하고 다시 밀린 업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곤 타자를 치기 시작할 때였다. 옆에서 낑낑대며 보란듯이 크게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전정국, 아니 전선배님이 퇴근한다고 나를 놀려대는게
"아, 후배님 힘들어서 어떡해. 그러게 빠릿빠릿하게 좀 안되겠습니까?"
"...애초에 업무량부터 달랐습니다."
"그래요? 근데 그건 후배님 사정이고-"
"...들어가십쇼"
"어어? 이거 지금 나 일부러 보내는것 같은데? 이것 참. 기분 안 좋아."
"아닙니다."
"일부러 보내는 거래도 어쩌겠어. 들어가봐야지 칼퇴근인데, 들어갈게 김후배"
"예에-"
야근도 이런 야근이 없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일반 회사원과 다른 점이라면 방송이 있는 앵커분들 외에는 칼퇴가 가능하다는 점이였는데, 그것도 불가능한 직업은 신입. 그래 나 뿐이었다. 내가 방송국에서 야근을 하면서 뉴스를 본다니. 스스로의 처지를 자책이라도 하는 듯 마셔댔던 쓴 커피를 뒤로하고 이내 출출한 속을 달래려 간단하게 컵라면이라도 먹을까 싶어 커피포트를 켰다. 그리고 모니터링을 하기위해 사무실에도 이시간대면 어김없이 켜지는 방송국 텔레비전이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채널V 박지민입니다."
내게 벌써 9시나 됐어. 넌 뭐하니? 하고 알려주는 알람이라도 되는 것은 저 뉴스뿐이다. 아 입맛이 뚝 떨어진다. 도대체 몇일이 더 지나야 이놈의 야근수당을 받지 않을수 있을까. 내 개인적인 여가시간을 보낼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놀랍게도 급속도로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로인해 컵라면에 물을 부어넣고는 퉁퉁불어가는 라면쪽은 쳐다도 보지않고 속도를 조금 더 내 유일하게 남은 대선배님이 주고가신 자료의 복사본을 뜨고있을 때였다.
예 지난해 많은 사람들이 얼음이 가득 든 양동이를 뒤집어썼습니다. SNS를 타고 전 세계에 유행처럼 번진 아이스버킷 챌린지. 얼음물샤워. 기억하시죠
루게릭 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서 시작된 연속 캠페인인데 루게릭 병 환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국내에서만 두달새 삼만명이 참여했고 한달만에 기부금은 십억 원 이 모이는 등 기부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열풍은 오래가지 못햇습니다.
작년 연말부터 기부금은 크게 줄었고 환자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입법화되거나 제도화 된 사례는 단 한건도 없습니다. 또 환자를 돌 볼 수 있는 병원이나 시설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년부터는 지금 무료로 이용하는 치료도 돈을 내야한다고 합니다. 더 악화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희경 기자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환자들을 만나봤습니다.
네, 이희경 기자입니다. 어제 오후-,
"아니, 사람이 어떻게 발음을 저렇게 정확하게 해."
그보다 원래가 저렇게 잘하는 거면 말을 안해. 어떻게 사적인 자리에선 그렇게 달라지냐고.
그날 엄마가게에서 본 모습은? 어? 누구는 직업병 생겨서 지나가는 개 발성연습도 시켜줄 판인데
"22일 오후 5시경에 일어난 일은, 아아."
"22일 오후 5시경에 일어난 일은, 취객 민씨가,"
덕분에 자극받아서 발음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멀티태스킹으로, 이게 벌써 몇 장째야. 산처럼 쌓여가는 종이들을 가장 가까운 책상에 차례차례 올려두고 파일 철에 하나씩 정리를 하고 있었을까.
"후배. 뒤에 그렇게 어물거리면 못써"
"어... 방송 끝나셨습니까?"
"응, 그럼. 열심히 해요."
"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니, 어떻게 저 사람이랑 그 편의점 초코우유남이랑 동일인물이겠냐고.
말도 안된다. 잘못 본 걸거야.
*
별로 큰 비중이 없는 잔 종이들로 가득 찬 책상에 사실상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그래서 쓸모없어 보였던 내 책상에 자리해있던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그런 전화기가 울리는 모습이 낯설고 또 생소해 몇 초간 멀뚱히 지켜보다 이내 수화기를 들었다.
"어, 받았네. 여주씨. 지금 국장실로 좀 와봐."
"예? 국,국장실이요?"
"응, 국장실"
"예, 알겠습니다!"
어제 그 대선배님이셨다. 근데 처음 방송국에 입사하고 인사드리러 갔을 때에만 가보았던 국장실에 왜 다시, 나 무슨 사고라도 쳤나. 싶었다. 아, 어제 선배님이 뜨라던 복사본을 제대로 못떴나. 아니 그건 말그대로 잔 업무라 못뜨고 말고 할 게 없는건데, 불안한 마음에 차마 가만있지 못하고 발을 동동굴리며 방송국 복도를 가로질렀다. 만약 잘못해서 소환된거라면 늦게 가면 더 미운털 박힐테니까 그렇게 엘레베이터 탈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바로 윗층에 있는 국장실에 도착해서 문을 똑똑 두드리자 국장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 여주씨?"
"네! 안녕하세요."
"아아, 오랜만이에요."
"국장님. 얘가 싹싹하고 좋아요. 얘로 해줘요. 응?"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니까 스텝분들 하고도 충분히 상의를,"
"십만원짜리 라디오하는데 상의는,"
"어허,"
"아 얘로 해요. 안하면 나 부장님한테가? 응?"
"너는 말을 해도 꼭! 아, 알겠어, 너 알아서해"
"와-, 여주야 잘됐다. 그치?"
"네? 아... 그게, 지금 무슨상황인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싶어 오가는 대화를 경청하고 듣고 있었는데,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의 맥락도, 차마 판단하지 못하고 대화가 끝나버렸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아, 나 10년째 하던 라디오. 출산휴가 때문에 같이 못하게 됐거든. 그거, 너가 해달라고,"
"네에?"
"왜, 그 시간에 방송 뭐 있어?"
"ㅇ,아니, 아니요. 없기는 한데, 저는 아직 부족하고"
"에이, 딱 너만할 때가 제일 열심히 할때인 거 내가 아는데! 그래서 내가,"
"아..."
"왜? 싫어?"
"아뇨! 아닙니다. 싫을리가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꾸벅. 또 꾸벅 총 두번의 90도인사를 끝내니 대 선배님이 호탕하게 웃으시는 걸로 나는 다시 아나운서실로 옮겨졌다.
으으, 감사하기도, 좋기도 한데 이 말 못 이룰 부담감은 뭐냐고. 아냐 그래도 좋다. 그래 사실 너무 좋다.
"후배! 김후배! 빨리 이리와봐"
"예?"
"빨리!"
"네!"
또 저 전또라이가 내가 아나운서실로 돌아오자마자 저렇게 제 자리로 밀매업자 마냥 불러대는 것 빼면, 나는 더 없이 좋을 것 같지만,
"뭐래? 왜 간거야?"
"예? 뭐가요."
"아니, 국장실. 왜 간거냐고"
"아... 그거, 김선배님이. 어? 근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이씨, 지금 그게 중요해요? 왜 간거냐니까?"
"그게 김선배님이 라디오, ...꽂아주셨습니다."
"뭐라고? 경란선배? 아. 진짜."
"왜 그러세요?"
"아, 씨."
"아니, 왜 그러시..."
"아니, 날 꽂아달랬는데 후배를 꽂았어"
"예?"
"됐어요, 나 지금 배신감 들어서 되게 짜증 나거든? 그니까 후배님은 후배님 자리로 좀 가줘요. 아니다, 내 하소연 좀 들어줄래요? 내가 경란 선배한테 먹을 걸 얼마나 사다 바쳤냐면,"
염병
"아, 할 일이 생각나서요. 다음에 듣겠습니다."
작가의말 |
+ 루게릭병 환자의 대한 속보는 JTBC뉴스룸의 속보를 발췌해왔습니다.
나 지금 폭군 민윤기 7화 찌고 있는데 너무 재미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앜ㅋㅋㅋㅋㅋ댓글ㅋㅋㅋㅋㅋㅋ 나 지금 갱장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댓글 너무 사랑스러워여 알죠? 일부러 두세번씩 들어가서 읽어... 조회수 높이긴가? 아냐 내글 내가 들어가면 조회수 상관없을거에요. 암튼 독자님들 고맙다구~! 다음화 내가 분량 짱짱하게 해서 가져와야찌!
아... 그리구...대체 박지민과 언제쯤 8마디 이상의 대화가 가능해질까 궁예해봐여 언제쯤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