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있나요?]
[A.비오는 날 아침....우산을 썼어요]
정신병동 이야기 06
한빈은 비오는 날을 좋아했다. 우산을 쓰고 나가서 빗물이 가득 담겨있는 웅덩이를 풍덩 소리나듯이 밟으면 그보다 더 좋은 놀잇감은 없었다. 하얀색 큰 우산을 쓰고 집 밖을 나와 거리를 서성거릴 때면 빗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같이 걷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적 한빈이의 친구는 자연이었다. 서울로 이사 온 후 한빈은 많은 친구가 생기고 그에 맞추어 옛날 친구였던 비와 바람은 한빈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래도 비오는 날이면 한빈은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창 밖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한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자신 혼자 떨어졌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이 흙인지 아스팔트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밟고 있는 것이 땅이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한빈은 최대한 몸을 수그렸다. 아무런 것도 밟히지 않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심해 어딘가로 떨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하늘로 솟구치는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한빈은 공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몸을 수그리고 웅크려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한빈이의 귀를 때릴 듯이 소리들이 들렸다.
더러운 새끼
더러운 자식
더러운 놈. 온갖 깨끗한 척은 다하더니
니가 아무리 깨끗해도 피가 더러운데 깨끗해지겠어?
가식적인 새끼. 엄마가 그러니 애도 가식이지. 스폰 엄마 어떠냐?
더러운새끼 더러운 새끼 더러운 새끼 더러운 새끼
한빈은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귀를 최대한 손으로 막고 눈을 감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더더욱이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눈을 감고 귀를 막을수록 소리는 점점 선명해져갔다. 한빈 앞 뒤 좌 우 모든 사람들이 한빈을 보며 혀를 찼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욕을 하고 한빈을 밟는 사람들은 점점 커졌고 한빈은 점점 작아졌다. 한빈은 이제 그 사람들의 발밖에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공포감은 점점 심해졌고 한빈은 몸을 심하게 떨었다. 소리를 지르고 비명을 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한빈은 귀를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동시에 한빈의 사고회로는 일시정지가 되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기는 식은 죽 먹기로 보였다.
"으아....흐...."
"환자분!!! 환자분!!! 105호실 김한빈 환자 일어났습니다!!"
"환자분.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으셨어요. 저희 입장에선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환자분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알겠어요?"
한빈의 담당의사가 간호사의 부름을 받고 달려와 말했다. 잠이 아니었구나...꿈이 아니고....자신이 기절을 했다는 것에 믿기지 않은 한빈이었다. 몸이 약했던 시절도 없었다. 마른 축에는 속하지만 감기 한번 심하게 걸려본 적이 없는 한빈이었다. 마음의 병이 커지면서 몸마저 마음의 상처가 지배해버린 것이다.
"네...알겠습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담당의사는 한빈에게 절대 안정을 취하라 말하고 돌아갔다. 차가운 병실. 조금이나마 따뜻해 보이게 하기위해 안간힘을 쓴 듯한 파스텔톤 하늘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천장. 침대에 누워 그 천장을 바라보는 한빈의 눈에는 공허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내가 정말 살고 싶을까? 다시 한번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불렀고 서로 얽히면서 커다란 암흑덩어리로 번져갔다. 덩어리는 한빈을 옭아맸고 블랙홀처럼 한빈을 빨아들였다. 다시 한번 공포가 엄습했다. 한빈은 생각에 자신의 몸을 내주었다. 내주고 나니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내가 '나'가 아닌 것. 나를 분리하는 것. 그것이 한빈에게 더 독이 될지 한빈은 알지 못하고 순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신을 분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