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이 화보 촬영 때문에 해외로 나가버리는 바람에 나는 며칠동안 사무실에만 출근하고 밀착 취재는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오늘이 한 4일째 된 것 같은데 오랜만에 돌아온 사무실은 전과 다름없었다. 호석 선배는 내가 없는동안 다시 막내 노릇을 하느라 얼굴이 십년은 더 늙어 있었고 팀장님은 나에게 뭐 좀 건진 것 없냐며 닥달했다.
"죄송합니다..."
"너 현장 나간지 2주정도 됐어. 한 달 안으로 끝냈으면 좋겠다."
제보자가 다른 신문사에 제보 해버리기 전에 끝내야 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2주가 됐으니, 나에게 남은 시간도 2주다. 이번 건을 놓치면,
"한 달 안으로 끝내겠습니다!"
나의 기자 생활도 끝나버릴 수도 있다. 팀장님께 꾸벅 인사를 드린 후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 자료집을 재검토했다. 전정국은 내일 한국으로 돌아올거고, 나는 공항에서부터 그를 따라가면 된다. 대충 플랜을 짜고 기지개를 뻗었는데 내 발이 무언가를 건드려 넘어뜨렸다. 팔을 뻗어 그것을 꺼내니 전정국이 내게 빌려줬던 무지티가 담긴 쇼핑백이다. 아, 맞다. 이거 돌려줘야 되는데.
그런데 아무리 대놓고 밀착 취재를 하기로 했다해도, 어떻게 뻔뻔하게 무지티를 주고 쫓아가나. 복잡하다, 복잡해. 사고의 흐름이 실타래처럼 엉키는 느낌이 딱 두통이었다. 나중에 생각하지 뭐.
*****
'찰칵-'
나는 입국하는 전정국의 모습을 대기자들 사이에 파묻혀서 몇 장 찍고 곧바로 공항 밖으로 뛰어 나갔다. 전정국의 벤 근처에 주차한 취재용 차량에 몸을 싣고 앞을 보니 벤은 이미 출발해서 나도 서둘러 시동을 켰다. 한참을 운전했을까, 오늘은 반드시 특종을 잡고 말겠다는 나의 의지와는 달리 전정국은 본가로 향했다. 뭐야, 피곤해서 쉬려는 건가?
지하 1층에 차를 댄 후 지하 2층의 주차장까지 간 벤을 쫓아갔더니 전정국은 벤에서 내린 뒤에 매니저를 보내고 나서도 가만히 서서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여 다른 승용차들 뒤에 몸을 숨긴채 전정국을 지켜봤다.
"정국아!"
유리문이 열리더니 왠 여자가 나와서 전정국에게 달려갔다. 지금이야! 여자의 목소리와 구두소리가 주차장에 울려서 셔터 소리가 들리지 않을거야. 2주동안 수고한 내 자신을 뿌듯해하면서 신나게 줌을 당겨 사진을 찍었다. 이제 드디어 특종이라고!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보고 싶은걸 어떡해?"
"됐고, 얼른 가자."
여자는 전정국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지 조금은 앵앵거리는 것 같은 말투로 전정국에게 앵겼다. 반면에 전정국은 오히려 짜증을 내면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캐리어를 끌면서 여자를 데리고 입구로 향하던 전정국은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여자보고 먼저 올라가라고 한다. 나는 이미 볼 일이 끝났기 때문에 찍힌 사진을 돌려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나 통화 좀 하게. 먼저 올라가 있어."
"그래. 얼른 올라와야 돼!"
전정국을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애인인건 확실했다. 그 둘과 나는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신체적 비율을 보니 연예인인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하게 됐네요, 하필 지금 걸려서. 전정국의 기사가 나갈 때 희생양이 되줄 여자를 안타까워하면서 나는 다시 지하 1층으로 가 아파트를 떠나려 했다.
"거기."
ㅁ,뭐야. 나 부르는거야? 통화한다던 전정국은 통화를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지금 주차장에 나말고 더 있는 사람은 없을텐데. 아니야, 내가 아닐거야. 나는 제발 나를 부르는게 아니길 바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앞에 보이는 계단이 반가워서 뛰다시피 걸은게 잘못일까,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떨어져 나왔다. 케이스를 씌워 놓긴 했지만 주차장은 고요했기 때문에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답 안해요?"
다행히 나는 대형 승용차 뒤에 있었기에 전정국과 정면으로 마주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유리 넘어로 보이는 전정국은 이미 이쪽 방향으로 몸을 틀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인상을 잔뜩 쓰고 있겠지.
"아, 이름을 불러야 대답하려나?"
내 이름도 모르면서 뭐래는거야. 밖으로 내뱉지도 못할 말을 나는 속으로 궁시렁댔다. 무슨 첩보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면서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바닥에 식은 땀이 났다. 왜 전정국에게 몇 번을 들켜도 적응을 못하는 걸까, 난. 이럴거면서 무슨 대놓고 밀착 취재라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득했던 나의 지난 결심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래요, 저 소심해요.
"김여주."
그야말로 헐이다. 내 이름은 언제, 어떻게 안걸까. 전정국은 생각보다 훨씬 더 소름끼치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용히 한 발 자국을 더 내딛었다. 들켰지만 그냥 도망갈래.
"좋은 말로 할 때 나오세요."
좋은 말로 할 때 나가도 안좋은 꼴을 당하는건 면치 못할 것 같으니 저는 그냥 도망가렵니다. 비굴해 보일지 몰라도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고 있었는데 잔뜩 성난 것 같은 발걸음 소리가 주차장을 울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전정국은 내가 몸을 숨긴 차 옆까지 걸어와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서 나의 모습을 찾았다. 나는 이미 차의 뒤에 몸을 완전히 밀착한 상태였다. 숨소리도 최대한 작게 해서 숨 쉬고 있었는데 전정국은 그 소리까지 캐치했는지 내 옆에 와서 물었다.
"숨바꼭질하니까 재밌어?"
노려보는 눈과 낮게 깔린 목소리에 저절로 무릎에 힘이 풀렸다. 나는 주저앉을 뻔한걸 겨우 버텨서 전정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아니요. 새삼스럽게 또 한번 느낀다, 나 정말 찌질하구나. 한숨을 푹 쉰 전정국은 팔짱을 풀더니 내 품에 있던 카메라를 무작정 뺐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나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 서서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금방 정신을 차린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전정국의 뒤를 따랐다. 입구를 통과하게 하면 안돼. 집으로 가버릴 것 같은 전정국의 단호한 뒷모습이 나를 겁나게 했다.
"저! 저번에 빌린 티셔츠!"
"티셔츠 뭐."
"차에 있는데... 돌려 줄게요."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겨우 생각해낸게 이것밖에 안되긴 하지만, 적어도 전정국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으니 그걸로 됐다. 전정국의 표정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괜히 헤헤 웃어 보이면서 후다닥 지하 1층으로 뛰었다. 티셔츠를 주고, 카메라를 돌려 받고, 바이바이하면 되겠지? 아직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카메라만 돌려 받으면 된다.
혹시나 내가 갔다 오는 사이에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쩌나 했던 내 걱정과는 달리 전정국은 유리문 앞을 서성이면서 나를 기다려 줬다. 의외로 말을 잘 듣는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나도 결국엔 기자인데 여태까지 나에게 어떠한 거부 의사를 표한 적 없는 전정국이 새삼 고마워졌다. 원래 기자들에게 호의적인가. 아무리 그래도 까놓고 말하면 스토킹하는 내가 좋게 보일리는 없을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전정국에게 다가갔다.
"잘 입었어요."
"그냥 가져도 되는데."
말투, 또 저러네. 전정국의 말투가 거슬렸지만 내가 따질 상황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 갔다. 전정국은 내가 내미는 쇼핑백을 바라만 보고 받지는 않았다.
"아니에요. 한번 빨았으니까 그냥 입어도 될거에요."
그냥 좀 받고 카메라 돌려줘. 마음의 소리가 입 밖에 나올까봐 입술을 꾹 다물고 전정국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전정국은 뭔가 말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주머니에서 폰이 진동하자 그것을 꺼냈다.
"알았어. 지금 올라가."
이 놈은 원래 말이 짧나? 한참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는 전정국을 기다리다 지쳐 전화한 것 같은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어, 알겠다고 등 단답으로 통화를 대충 마친 전정국은 전화를 끊고 유리문을 열기 전 내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을 가져가고 대신 내 품에 카메라를 안겨줬다. 메라야, 주인한테 오니까 좋지? 카메라와 이별 아닌 이별을 해야 했던 나는 괜히 카메라의 렌즈를 몇 번 쓰다듬어 줬다.
"나중에 카메라 보고 화내지마요."
"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불안해진 마음에 나는 전정국이 분명 '나중에'라고 했지만 그 자리에서 전원을 켰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벌벌 떨리는 엄지 손가락으로 앨범 버튼을 누르자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이 화면에 떴다. 무려 사일 전에 찍은 H&N 행사 사진이었다. 잠시만, 방금 찍은 것들은 다 어디간,
"설마 지웠어요?"
고개를 들자 전정국은 이미 유리문 안에 들어가고 난 후였다. 나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나한테 출입 카드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 방어 조취를 취한 것 같은 모습에 약이 올랐다. 전정국은 유리문에 바짝 붙어서 나를 내려다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조금 전 전정국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말 없이 카메라를 붙들고 씩씩 거리는 내 모습이 볼만한지 전정국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나를 지켜봤다.
나는 너무 분한 나머지 고개를 쳐들어 전정국을 한껏 째려봤다. 전정국은 그런 내가 웃긴지 소리내어 웃다가 유리에 입김을 불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ㅈ,ㅓ,ㅇ,ㄷ,ㅏ, ...'
내가 있는 반대편에서 글자가 잘 보이기 위해서는 뒤집어 적어야 했다. 전정국은 나를 배려해주는 것 같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손가락의 속도는 느렸다. 나는 이미 사라진 파일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괜히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백업할 방법도 없을텐데. 의미 없이 버튼들을 누르고 있자 글씨를 다 쓴 전정국이 유리문을 톡톡 두드려서 나를 불렀다.
"정당방위...?"
"응."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는 전정국을 최대한 재수 없게 노려 봤다. 나는 지금 내가 반박할 수 없는 말들만 골라하는 저 주둥아리를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정당방위는 맞지. 엄연히 스토킹은 불법이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다. 전정국은 '정당방위' 네 글자가 희미해지자 다시 입김을 불어 다른 글씨를 적었다.
'내일 아침 10시. 여기.'
"오라고요?"
"응."
"왜요?"
"왜긴 왜요."
전정국은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내 말투를 따라한다. 이제는 전정국이 저러는 것도 면역이 된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다시 전정국을 올려다 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전정국은 싱글벙글 웃던 얼굴을 감추고 시선을 피했다. 당황한 것처럼 눈동자를 가만히 고정시키지 못하고 괜히 목을 큼큼거리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나는 가만히 전정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안할게 있어서요."
"제안?"
"그냥 좀 오면 안돼?"
내가 자꾸 되묻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전정국은 짜증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왜 저러나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면 또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이 약간 웃겨서 나는 참지 않고 소리내어 웃었다.
"왜 웃어?"
"올게요. 내일."
전정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에게 재차 확인까지 받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나는 자리를 뜨기 전 엘리베이터 쪽을 잠시 봤는데 전정국은 뭐라도 훔쳐 먹다가 걸린 것 마냥 움찔하더니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무시할 수는 없어서 나도 두번정도 손을 흔들어 인사해줬더니 전정국은 갑자기 몸을 휙 돌려 나를 무시했다. 대체 뭐하자는거야. 괜히 무안해진 내 손을 거두고 나도 서둘러 차를 대놓은 지하 1층으로 발을 굴렸다.
사담 |
여러분 글을 올리지 않은 며칠동안 엄청난 일이 있었어요! 지난 화 (3화)가 초록글에 올랐다는ㅠㅠㅠㅠ.. 물론 매우 잠깐이었지만ㅠㅠ 알림을 한참 후에 확인하는 바람에 캡쳐도 못했지만 그래도 좋습니다ㅜㅜㅎ 뻔한 말인거 알지만 전부 다 독자님들 덕분이에요...이런...러버들... 뽀뽀 쪽 이번 화에서 딱히 엄청난 사건은 없었지만 여주는 변함없이 칠칠이고요ㅋㅋㅋㅋ 정국이는 여전히 자기 맘대로ㅇㅅㅇ 현실에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죽빵을 날리고 싶겠지만 이것은 빙의글! 남주는 전정국! 싸가지 없어도 사랑스러워! <<의식의 흐름 군주님의 등장을 바란 독자님들이 많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당분간 윤기는 안나올..것..같...(차마 말할 용기가 없음) 나아아아중에 나오긴 할거에요!! 언젠가...ㅎ 이 글에서 서브남주는 없습니다 오로지 전정국!ㅋㅋㅋ ㄴ,나름대로 많이 적겠다고 적었는데 분량이 좀 는 것 같나여?ㅎ (소심) +암호닉 신청하셨는데 잊고 다시 신청해주는 분들 제가 걸러서 리스트에 추가하긴 하지만 두번 적었을 수도 있어요ㅠㅠㅜ 제가 자주 안와서 잊으신거라 믿고 저는 더 분발하겠습니닷ㅎㅎ |
제게 너무나 큰 힘이 되주는 사랑둥이들(컨트롤+F로 암호닉 찾으면 더 쉬울거에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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