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행사를 이렇게 일찍하냐고 궁시렁대면서 여의도에 있는 어느 쇼핑몰 주차장에 차를 댔다. 시계를 봤더니 오전 아홉 시다. 행사는 30분 뒤에 시작하기 때문에 나는 푸드코트에 들러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매장이 위치해 있는 4층에 올라가야 겠다고 계획했다.
"불고기 파니니, 치킨 샌드위치, ... "
아아. 다 맛있어 보이잖아! 진열대에서 나를 좀 먹어달라고 아우성치는 비주얼을 무시하지 못하고 나는 혼자 다 먹지도 못할걸 뻔히 알면서 샌드위치를 두 개나 사버렸다. 어차피 여러 조각이 들어 있으니 하나씩만 먹고 버려야지. 나는 월급도 쥐꼬리만큼 받는 신입 주제에 사치를 부렸다.
"엇, 김기자!"
가게의 구석 자리에서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먹던 내게 타 신문사 기자가 인사를 해왔다. 각종 시상식에서 여러 번 마주쳐 그나마 친한 기자이자 선배이기 때문에 나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선배는 나와 마주하는 의자에 앉았고 우리는 각종 잡다한 얘기를 나눴다.
"선배, 저 잠시만 인터뷰 준비 좀 할게요."
김진영 선배님이 인터뷰 질문들을 모두 작성해놨다고 어제 밤 내게 보내준 메일의 출력본을 꺼냈다. 어제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오늘 봐야겠다고 읽지도 않은채 가져온 것이다.
"우와. 선배. 대박."
"왜?"
"민윤기... 민윤기 와요!"
내가 유일하게 덕밍아웃을 한 사람 또한 선배였기 때문에 나는 환희를 감추지 않고 마음껏 뿜어냈다. 데뷔 때부터 응원하고 기자 생활의 원동력(예를 들어 언젠가는 인터뷰 할 날이 오겠지라는 희망)이 되어준 나의 영원한 오빠, 민윤기라니. 가요시상식에서 숱하게 실물 영접을 했지만 인터뷰라는 기회는 내게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샌드위치를 입 안에 우겨 넣었다.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인터뷰 예습 해야 된다고! 그러나 나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때문에 샌드위치에서 케첩인지 뭔지 정체 모를 소스가 흘러나와 셔츠에 스며들었다. 그것도 가슴 위 정중앙,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부분에. 젠장. 급하게 휴지로 닦아봤지만 이미 자국이 남았다. 시계를 보니 포토월 촬영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나는 체념하고 다시 자료집을 손에 쥐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민윤기에게 해야 할 질문들을 여러번 낭독했다. 그러다가 기초 화장만 하고 온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선배의 파우치를 빌려 메이크업 재정비까지 했다.
"가자. 시간 다 됐다."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덧칠하고 나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선배.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사에는 약 서른 명의 셀레브리티들이 참석했다. 나는 그 중 약 다섯 명만 인터뷰하면 되는데 이제 세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민윤기를 영접한다고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포토월은 다 끝났을 때 쯤에야 찍을 수 있었다. 행사는 연예인들을 매장에 자유롭게 풀어놓고 그들이 추천하는 아이템과 쇼핑 스타일 분석을 통해 이번 시즌 H&N의 신상을 홍보하는 방식이다. 어디보자, 다음 순서가... 뭐?
"전정국?"
뭐, 뭐야. 인터뷰지를 잘못 뽑아 왔나? 맨 앞장으로 휘리릭 넘겨 봤지만 날짜도 맞았고 '2016 S/S 컬렉션 행사(인터뷰)'라고 단호하게 적혀 있었다. 울고 싶게 단호한 맑은 고딕체로 적혀 있고 난리야... 한 장을 더 넘기니 민윤기를 위한 인터뷰지가 있었다.
"이름이 김진영?"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장에 보이지 않던 전정국이 내 등 뒤로 다가와 어깨 위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얘는 왜 섬뜩하게 인기척도 내지 않고 오는거야. 끽끽거리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나는 고장난 로봇처럼 몸을 돌렸다. 전정국은 팔짱을 끼고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김기자는 이 얼굴이 아닌데."
당연히 아니겠지, 나는 김탄소인데. 이젠 전정국이 나에 대해 눈치 채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 않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이름, 회사 등 신상이 까발려지는건 한순간인데 더 고생해서 무엇하리. 전정국의 얼굴을 다시 보니 확실해졌다. 이제부터는 대놓고 밀착 취재다! 그런데 거슬리는 것은 딱 하나, 전부터 나에게 대놓고 반말을 시전하는 저 놈의 말투다.
"저기요."
"왜요."
생각보다 불친절한 목소리로 나와서 나도 내 말에 적잖지않게 놀랐는데 전정국은 내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답했다. 이쯤되니 전정국이 또라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전부터 반말하던데 이제부터라도 존댓말로 얘기해주세요. 저희가 무슨 친구에요?"
"이제부터 친구하면 되죠."
"지금 저 장난치는거 아닙니다."
"저도 압니다."
"그럼 앞으로 반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게요."
내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자신을 흘겨봐도 전정국은 개의치 않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내 손에 들린 인터뷰지를 가져가 읽는다. 어차피 순조롭지 못할 인터뷰, 본인이 자문자답 해주려나 싶어서 나는 가만히 전정국이 다 읽길 기다렸다. 두리번거리는 척을 하며 민윤기를 눈으로 찾았다. 민윤기는 전신 거울 앞에서 비니를 써보고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헉, 그 비니가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사줄까요? 당장이라도 내 카드를 쥐어주고 싶은 도른 카와이함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갑시다. 인터뷰하러."
"네?"
전정국은 내 손목을 잡고 매장 안을 누비며 인터뷰 질문에 답해줬다.
"제가 봤을 때 이번 시즌 유행할 것 같은 아이템은 롱코트입니다. 그 중에서도 블랙과 카키 색상이 가장 인기 많을 것 같네요. 제가 한번 입어볼까요?"
애초부터 내 대답은 궁금하지 않았는지 전정국은 내 손에 인터뷰지를 다시 쥐어주고 코트를 입고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조금 전 속사포로 뱉은 말도 정리 못해서 어버버거리며 서 있는 나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짜증난 목소리로 묻는다.
"이거 인터뷰잖아요. 안 찍어요?"
"어, 찍어야죠."
허둥지둥 카메라의 전원을 켜 전정국의 전신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전정국은 코트를 다시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이어서 여러 가지 아이템들을 착용했고 나는 조용히 따라다니면서 전정국이 하는 말을 녹음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제 마지막 질문만 남았어요."
"네."
"제가 좋아하는 여성들의 스타일은, 음."
전정국은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했다. 지금 내 패션을 봐서 뭐 어쩌겠다는거지. 불쾌해지려 하는데 전정국은 다시 눈을 올려 나의 가슴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 어딜 보는 거에요!"
나는 본능적으로 인터뷰지로 가슴 부분을 가렸다. 전정국은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줬다. 저는 박시한 핏에 심플한 스타일을 좋아해요.
"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습니다."
인터뷰의 끝에 항상 하는 인삿말을 하고 나는 뒤돌아 서 민윤기를 찾았다. 매장은 총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1층에는 민윤기가 보이지 않았다. 2층은 여성복밖에 없어서 민윤기가 있을 리가 전무했다.
"어딜 간거야..."
설마 하는 마음에 2층에 올라가려 했는데 전정국이 어슬렁거리다가 나를 따라 올라왔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아니라서 나는 무시하고 넓은 2층 매장을 뛰어다녔다. 안돼, 이 기회를 높치면 언제 또 인터뷰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2층에 도착하자마자 전정국은 나를 따라오지 않고 여성복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매장을 두 바퀴정도 돌았을 때 전정국은 나에게 다가와 누굴 찾냐고 물었다.
"민윤기씨요, 인터뷰 해야 되서."
"민윤기? 한참전에 나갔는데."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청천벽력같은 말에 나는 놀라서 카메라를 떨어트릴 뻔 했다. 망연자실한 내가 안타까웠는지 전정국은 당황해서 설명까지 덧붙여줬다. 민윤기는 스케쥴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
"어떡해..."
내가 좌절하고 있으니 평소 까불고 능글거리는 태도를 고수하던 전정국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가 민윤기랑 아는 사이인데 대신 인터뷰지 전달해줄까요? 제가 인터뷰 더 해드릴게요. 아니면 다음 번에는 민윤기보고 꼭 좀,
"괜찮아요."
나를 신경 써주는게 고맙긴 했지만 괜히 일하고 있는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전정국을 두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민윤기와의 인터뷰는 물 건너 갔네. 우울하다, 우울해. 어쨌든 내가 인터뷰해야 할 사람은 다 했으니 나는 이제 행사를 떠나도 된다. 마지막으로 1층을 한 바퀴 돌면서 다른 연예인들의 쇼핑하는 모습을 몇 장 더 찍고 나는 매장을 떠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고요한 주차장에 나의 터덜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으아아 따위의 이상한 소리도 내면서 차가 주차 되있는 곳으로 걸었다. 눈 앞에 성공한 덕후의 기회를 놓친 내가 미친듯이 한심해졌다. 김탄소 왜 사냐.
'삐빅-'
차문을 열고 차 안에 나의 몸을 담자마자 짐을 조수석에 올려뒀다. 그리고 차 문을 다시 닫아 시동을 거려는데 무언가 걸리적거렸다. 다시 차 밖으로 나와서 보니 사이드미러에 쇼핑백이 걸려있었다. 주차장이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아서 내용물을 꺼냈다. 쇼핑백 안에 들어있던 것은 아무런 프린팅도 없는 검정 무지티였다. 새 옷같지도 않고, 사이즈도 나에겐 크고. 박시하게 입을 수는 있겠네. 티셔츠를 꺼내면서 작은 종이카드 같은 것이 함께 나와 바닥에 떨어졌었는데, 나는 그것도 주워 들었다.
"다 큰 여자가 옷에 뭐 묻히고 다니는거 보기 안좋아. 이걸로 바꿔 입어. 주는건 아니니까 다음에 저 따라올 때 돌려주세요... 뭐?"
그러고보니 전정국은 나와 인터뷰할 때 내 가슴을 잠시 응시했었다. 나는 그때 변태라고 생각했는데 전정국은 내 옷에 묻은 샌드위치 소스 자국을 봤었나보다. 어딜 보냐며 가슴을 가렸던 나의 지난 행동이 떠올라 창피해졌다. 속으로 나를 얼마나 비웃었을까. 나 진짜 왜 살지?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자책했다. 근데 잠시만, 전정국 이 놈,
"또 반말 썼어."
사담 |
너무 오랜만에 왔죠... 저번 화의 내용을 기억하고 계시긴 할지.. 면목이 없네요ㅠㅜ 변명을 하자면 이번 주에 이사를 해서 여러 모로 바빴어요ㅜㅜ 하지만 이제 짐정리도 마무리했고 글 쓸 시간도 생겨서 괜찮아요! 여러분 팬미팅이 시작했네요 하하^^ 저는 못 갔어요. 못 갔으니까 안방에서 글 쓰고 있는거겠죠.. 7시 타임도 있죠? 밤이라서 더 추울텐데 다들 옷 따뜻하게 입고 가세요! 감기 걸리는건 방타니들도 원하지 않을거니까ㅎ 핫팩 등에 붙이세요. 꿀입니다ㅎ 많은 독자님들이 정국이가 어떻게 여주가 따라오는지 알고 있냐 무섭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번 화에는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네요 사실 그닥 중요한건 아니라서 나중에 여주와 전정국이 조금 더 친해...?지고나서 대화하다가 설명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정국이 지금은 까불고 능글거리는 모습 밖에 안보이겠지만 사실 그렇게 밝은 캐릭터도 아니라능... 연재하면서 차차 알게 될게에요ㅎㅎ! 그나저나... 여주 점점 막나가죠?ㅎ 이제 대놓고 밀착 취재 워후~~~~~ 그럼 팬미팅도 못가는 불쌍한 저는 안방에서 프리뷰 기다리고 있을게요헿 |
제가 참 많이 좋아하는 독자님들(컨트롤+F로 암호닉 찾으면 더 쉬울거에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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