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w. 채셔
"말하고 왔어?"
나는 익숙하게 고백을 걷어차고 교실에 들어와 앉았다. 정국은 내가 돌아오자마자 불안한 투로 물어왔다. 응, 별 얘기 안 했어. 이렇게 둘러댔다. 그러나 대충 알고 있을 듯한 애매한 표정으로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푸흐, 웃으며 정국의 큰 손을 잡았다. 어른 전정국은 점점 어려지고 있다, 제 나이로. 정국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정국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민윤기에게 흔들리는 것이 속죄가 될 수는 없다고. 민윤기의 정체보다 소중한 것은 세경이 꼭꼭 눌러썼을 편지의 말들이니까.
"정국아, 나 좋아하지…."
좋아하냐는 물음이 아닌 좋아한다는 확신이었다. 이쯤 되면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까 하고 남긴 확신. 정국이는 나를 쳐다보다가, 좋아해, 하고 픽 웃었다. 웃을 때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가 예쁘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그 보조개를 쓰다듬었다. 정국아, 사귀자, 나랑…. 나는 정국이의 입술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지금 정국에게 키스를 해주고 싶었다. 방금, 내 입술 김태형이 가졌으니까 네가 내 입술 정화해줘, 뭐 그런 어린 마음. 종이 쳤지만 선생님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태형이 또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정국이의 손을 잡고 복도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하고 잠시 생각을 했다가 실험실을 생각해냈다. 아무도 없는 곳. 민윤기에게 상처를 받았던 곳. 정국이와 거기에 있으면, 왠지 정국이가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줄 것만 같았다.
"너 요즘 자주 땡땡이 친다."
"너만큼?"
"야, 나 땡땡이 친 적은 없어."
실험실로 향하면서 정국은 제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콩 때리며 말했다. 거기에 맞받아치자 억울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내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오늘은 실험실에 실험이 없는 모양이었다. 6인용의 넓은 책상도 깔끔하고, 화학 용품 냄새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정국을 실험실에 집어넣고 들어와 문을 잠갔다. 정국이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고는 선생님이 앉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나는 익숙하게 교탁 위에 앉았다. 정국은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받치고 나를 나른하게 올려다보았다. 나는 교탁에서 껑충 뛰어내려 허리를 낮추고 정국에게 그대로 키스했다. 정국은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민윤기과는 다르게 너무 순하고 유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키스.
"나랑 사귀는 동안 한 눈 팔면 안 돼."
"…응, 정국아."
"………제발."
"…으응. 약속."
입술을 뗀 정국은 침 범벅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타액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듯이 정국은 다시 내 고개를 제 쪽으로 끌어와 입술을 물었다. 나는 정국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의 마지막 구원, 정국아.
세경이의 편지에는 분명히 나를 해치려는 사람을 버리라고 적혀있었다. 민윤기. 민윤기를 버려야 해. 그것이 세경에게 소중한 민윤기가 다치지 않는 길일 테니까. 내 사랑을 잔인하게 묻어버려야 민윤기가 상처 받지 않는 길…일 테니까. 내 첫사랑은 그렇게 멈춰져야 했다. 죽을 듯이 아플 걸 알지만, 세경이를 위해서도 민윤기를 위해서도, 그리고 정국이를 위해서도 그렇게 흘러가야 했다.
난 전부 버렸어, 정국아.
그러니까 너는 나를 버리면 안 돼….
키스를 끝내고 나는 다시 교탁에 앉았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계속했다. 정국의 집안 얘기, 정국의 강아지 얘기와 같은. 아주 쓸모없지만, 가치있는 이야기들. 나는 때때로 웃었고, 정국이는 웃는 나에게 손을 뻗어 내 손을 꽉 잡아왔다. 곧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지이잉, 하고 울렸고, 나는 그것을 들어 확인했다. 민윤기. 이 시간이면 분명히 수업을 할 시간인데. 갑자기 등 뒤로 소름이 주욱 끼쳤다. 불길한 기운. 나는 빠르게 민윤기의 문자를 확인했다. [급해, 지금 빨리 양호실로 와.] 무슨 일이지. 정국은 불안해 하는 나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답을 하지 않자 한 번 더 핸드폰이 울렸다. [제발, 지금 와줘.] [제발, 부탁이야.] 제발이라는 말은 민윤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었고, 나는 교탁에서 뛰어내렸다. 정국아, 나, 나 잠깐만. 나가려는 내 손을, 정국은 강하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이면 돼."
"…너 나랑 사귀는 사이야. 잊었어?"
"세경이 문제야…. 갔다 올게, 응?"
세경이, 라는 말에 정국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나는 정국의 입술에 급하게 입술을 맞댔다가 떨어뜨렸다. 갔다 올게, 정국아. 나는 정국의 손을 꽉 잡았다가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설마 민윤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허무맹랑한 생각임은 알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 스멀스멀 기어 들어왔다. 나는 뛰듯이 양호실을 찾았고,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민윤기는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선생님. 고요한 몸을 흔들었고, 민윤기는 서서히 눈을 떴다. …아무 이상 없잖아. 곧 쪼그라들 것만 같았던 심장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보아도 민윤기는 나를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민윤기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한 번만… 자."
"……싫어요."
"너 세경이 편지 받은 거 다 알고 있어."
"……."
"다 그만둘 테니까 제발."
민윤기의 표정이 금방 스러져갈 별처럼 위태로웠다. 나는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민윤기의 손을 꽉 잡았다. 이게 내가 세경이와 민윤기에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면…. 정국아, 나 한 눈 한 번만 팔게…. 마르는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민윤기는 그런 나를 쳐다보다 몸을 일으켰고. …세경이와 닮은 아픈 표정이 나를 쿡쿡 찔러온다. 나는 이겨내지 못하고, 민윤기의 입술에 내 입술을 익숙하게 맞췄다.
익숙한 손길과 익숙한 탐닉과 그것에 대한 열광. 민윤기는 내 목 부근을 급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나 우리 둘 다,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체념이었고, 민윤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표정에 이끌려 나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민윤기와의 스킨십에서 나는, 항상 민윤기밖에는 없었다. 어떤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쿵.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놀라 민윤기와 나는 행동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침대 앞으로 콜라가 액체를 콸콸 쏟아내며 굴러왔다. 나는 천천히 콜라에 멈춰진 시선을 올렸다. 거기에는 잔뜩 굳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태형이가, 있었다.
…………나는 이제… 끝이야.
그리고 민윤기에게 시선을 옮겼을 때, 민윤기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프게, 눈물이 고인 눈을 하고서.
야누스
"태형아…."
나는 재빨리 민윤기에게서 벗어나 바닥에 발을 대고 섰다. 태형이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고, 나는 태형이에게 똑바로 다가갔다. 이렇게, 정말 끝일까…. 민윤기는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민윤기는 세경이의 오빠고, 진짜 같은 건 없었다. 문득 민윤기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나는 잔뜩 굳은 태형에게 변명을 늘어뜨려놓아야 했다. 양호실에서 나와 문을 닫고 뒷걸음질 치는 태형의 손목을 잡았다. 태형아…. 태형은 방금 본 장면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 같아도 그러겠다. 항상 웃고 다니는 범생이 반장과 우리 학교의 제일 인기 많은 선생님이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태형의 손목을 꽉 쥐었고, 태형은 뿌리치지 않았다.
"민윤기 때문이었어…? 전정국이 아니라."
"…태형아."
하, 씨발…. 태형은 거듭 욕을 내뱉었다. 나는 태형의 볼을 쓰다듬었고, 태형은 내 손이 더럽다는 듯이 뿌리쳤다. 나는 내쳐진 손을 끝없이 보다가, 태형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태형아, 미안해…. 새 출발은 보란듯이 민윤기에 의해 짓이겨진다. 그래, 내게 애초에 출발이라는 게 있었을까. 나는 태형에게 조용히 안겼다. 태형이는 나를 밀어내지 못할 테니까. 너무 많이 흘려서 이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기어나왔다. 태형의 하얀 와이셔츠에 곧 눈물이 묻어 투명해졌다. 코너만 돌면, 저기 있는 코너만 돌면 정국이 있는 실험실이 나온다. 정국이 나오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괜히 불안해져 나는 목소리를 한참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태형아, 비밀로 해줘……. 해줄 거지…?
"아니, 말할 거야. 다 퍼뜨릴 거야, 나."
"못할 거잖아, 으응?"
"왜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
"너는 나 좋아하니까…."
태형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입술을 꾹 깨무는 걸 본 이후에야 나는 태형의 품에서 떨어졌다. 태형은 나를 짙은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웃어주었다. 애초부터 미안함이라는 게 있었던가 의문이었지만. 태형은 긴 한숨을 내뱉고, 미련없이 뒤돌아 복도를 휘적휘적 걸으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아이들에게 말하지는… 않겠지. 이제 태형의 짝사랑은 증오가 될 테다. 나는 그걸 참아낼 수 있을까. 정말 까마득하게 눈을 감고 빌었다, 믿지도 않는 하늘의 누군가에게. 제발, 제발, 여기가 끝이 아니게 해달라고…….
야누스
"정국아…."
뛰듯 실험실로 찾아갔을 때, 정국이는 그곳에 없었다. 서둘러 교실에 뛰어가듯 걸었다. 이내 내가 교실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나를 보고 쑥덕대며. 불안한 눈길이 정처없이 떠돌다 정국에게 고정되었다. 정국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모두들 나를 피했다. 내가 지나가는 길마다, '반장-' 하고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형이 자리는 비어있는데……. 태형이 오지 않았으면 몰랐어야 할 사실을…. 누가 알린 거지….
"너 어디 갔다왔어?"
"…응?"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 그냥…,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소근거리는 소리들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국이 거칠게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쿵- 하고 밀려날 정도로. 그리고 내 손목을 잡고 교실을 나선다. 나는 무서워졌다. 나를 버리는 게 아닐까.
"…지갑 가지러 왔는데."
"……."
"저 새끼들이 너 욕하잖아. 민윤기랑 놀아났네, 뭐네."
"……정국아."
"씨발, 빡쳐서."
정국이는 곧 나를 제 품에 안았다. 맞다, 너 내 기사 해준다고 했지…. 나에게 남은 것은 정국이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이 그랬다. 나 가면도 잃어버렸어, 정국아. 정말, 정말 다 버려졌어. 정국은 나를 한참동안 안아주었다. 소문의 근원지는 어딜까. 그리고… 양호실에 누워있던 민윤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주 느리고 따뜻한 손길로 정국은 내 등을 토닥였다.
"나 너 믿어."
"…응, 정국아."
뒤이어 정국이는 말했다. …그래서 나 너한테 집착할 것 같아, 어떡하지.
나는 아무렴 괜찮다. 집착을 하든,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덧붙임
고자령이니까 뭔가 힘드네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