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H CRUSH !
04
한참을 울다 집으로 돌아왔다. 장시간 울음에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만지며 망했다 중얼거린 내게, 정재현은 가방에서 제 모자를 꺼내 씌워줬다. 어우 야, 너 지금 얼굴 심각해. 이거 쓰고 가. 이모랑 아저씨 걱정하시겠다 하며 말이다. 덕분에 죄 지은 사람처럼 모자를 쓰고 얼굴을 푹 숙인 채 후다닥 방으로 들어왔더랬다. 그래도 조금의 수상함 정도는 느끼실 줄 알았는데 두분 다 드라마를 보시느라 난 안중에도 없었다. (울컥)
“흐아..”
샤워를 한 후 스킨로션을 대충 얼굴에 바른 후 침대에 뛰어들듯 누웠다. 침대 위에 내팽겨쳤던 핸드폰을 켰다. 수많은 전화와 메세지가 와 있었다. 모두 징한 친구들이 보낸 연락이였다. 김동영한테 전화 두통 메세지 두개. 정수정한테 전화 다섯통 메세지 여섯개. 그리고 집에 들어갔냐는 정재현의 메세지. 들어가는 거 봤으면서, 정재현은.
다른 애들도 문태일이 돌아온 걸 다 알고있었나보다. 메세지가 무슨 일이냐 가 아닌 괜찮냐 로 가득 채워진 걸 보니 그랬다. 정재현이랑 같이 있었으니까 내가 카페 간 것도 알거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뭐가 뭔지 모를 일이 지나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걱정하고 있을 애들한테 연락은 해야겠다싶어 김동영에게 짧은 답장을 보낸 후 정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수정은 신호가 두번도 채 가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기다렸나보다.
“여보세요.”
-야! 너 괜찮아?
“어..수정아.”
-코맹맹이 소리. 너 울었어?
“..너도 알고있었지? 태일 오빠 한국 온거..”
-...어. 저번에 김동영이 끊은 전화, 사실 그거 말해주려 전화했던거야. 그때 걸어가다 우연히 봤거든.
정수정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수정인 다시 한번 내게 괜찮냐 물어왔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뺨 때렸어?
“왜 갑자기 또 뺨이 나와.”
-안 때렸어?! 등신아!!!!
곧 원래의 정수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멀리했다. 잔소리가 덩어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수정이는 예전부터 그랬다. 예고 없이 뻥 차여버린 내가 울면서 술을 마시면 그 앞에서 더 열을 내던 친구였다. 문태일 얘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려려니 하며 잔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사실 먼저 오빠를 발견했다는 정수정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 오빠의 뺨을 후려치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웠다. 정수정 성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분명 김동영이 옆에서 뜯어 말렸겠지.
“근데 있잖아.”
-어.
“오빠가 나를 못 쳐다보더라고.”
-그래? 널 볼 염치가 없는 건 아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정재현이 나 끌고 나오는데 잡지도 않았어. 그래도 끝까지 따라와서 뭐라도 말해주겠지 했는데.”
진짜 밉더라 수정아. 고개를 떨구던 문태일을 떠올렸다. 잠시 잠잠했던 속이 다시 쓰라렸다. 이제 슈퍼 한번 나갈 때도 괜히 생각이 날 것 같아 그저 막막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가 내가 어디 사는지 뻔히 알면서도 여기서 일을 하는거냐 버럭 화를 낼까 생각 했지만 곧바로 접었다. 못할게 뻔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오빠에 대한 불만을 내뱉는 정수정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2012년 가을. 김여주, 고등학교 1학년.
“야 어제 진짜 대박!!!!”
“뭐야 오자마자. 뭐가 대박인데?”
“너 문태일이랑 무슨 사이야. 그거부터 정의 내려봐.”
무슨 사이긴 기지배야 그냥 나 혼자 짝사랑하는 사이지..(울컥) 등교를 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옆자리를 차지한 정수정은 내 대답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정이 발언한 문태일은 나보다 한 학년이 높았고, 교장 선생님마저 우리 학교 최고의 자랑거리라 칭하는 밴드부 보컬이였으며 인기가 정말 많은 사람이였다. 그러니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난 오빠의 넘치는 새우젓 중 한명 아닐까?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오빠와의 연결고리라곤 같은 학원밖에 없는 내가 무슨 사이를 논한다고. 이어지는 내 말에 정수정은 또 한번 숨을 내쉬며 제 손으로 가슴 언저리를 툭툭 치더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그 오빠도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뭔 개소리야..”
내 생각엔 넌 정신이 나간 것 같아 수정아.. 난 문태일이랑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굉장히 황당한 발언에 어젯밤 간신히 내린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나야 1학기 운동회날 밴드부 공연에서 노래 부르던 오빠 모습에 반해서 지금까지 좋아하고 있는거지만, 난 특별히 얼굴을 비추는 곳도 없었다. 그리고 나같은 애들이 학교에 얼마나 많은데ㅋ...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간표를 확인했다. 내가 곧바로 관심을 거두자 정수정은 야 김여주! 하며 내 팔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아무것도 안들리고 아무것도 못느끼는 척 무시하려 했지만 점점 강도가 심해지는 손길에 결국 도로 고개를 돌렸다. 뭐! 왜! 뭐!
“아 진짜로! 어제 문태일 오빠가 학원 차 타니까 그 오빠 친구들이..!”
“…”
“문태일 우뜩행~~~ 네 사랑 오늘 학원 안오나봐~~~ 차에 안탔오~~~~”
“….”
“이러면서 막 놀리더라니까???”
정수정의 혼심을 담은 연기에 잠시 말을 잃었다. 만약 방금 정수정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코피 쏟고 기절도 가능했다. 왜냐면 내가 어제 학원 차를 안 탔거든..(입틀막) 들고있던 시간표를 내팽겨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수정의 얇다란 팔을 잡았다. 진짜냐...? 나 지금 손 떨리는데 수정아…?
“어!!! 진짜로!!!! 이런 걸로 장난 치겠어 내가?”
침착하자 여주야. 원래 루머가 다 이렇게 시작하는거야. 오빠들이 그냥 장난친 걸 수도 있잖아. 아니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안 탔을 수도 있지. 아, 근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태일 오빠라니. 상상만해도 찌통일걸..?
“어제…나만 차 안 탔냐..?”
“음..”
“..”
“아, 그건 아니야. 손나은도 안 탔어.”
이런 씨...ㅎ(주먹을 쥔다)
“야 그럼 손나은이네!!!!!!”
“여주야 나 불렀어?”
“어??? 아니아니, 이거 반지 금 아니고 은이라고! 너 부른 거 아니야 하하.”
설마 하고 물어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잔뜩 불이 붙은 내 맘에 찬물을 끼얹었다. 좋다 말았네. 하긴 오빠가 날 왜 좋아해. 손나은도 어제 학원 차를 안 탔으면 당연히 내가 아닌 나은이일 것이다. 봐. 나은이는 갑자기 뒤를 돌아도 예쁘잖아. 여자인 내가 봐도 저렇게 예쁜데 남자들은 오죽하겠어…!
“아니야. 촉이 온다고. 너라니까?”
“그냥 조용히 해 정수정.”
“아 진짠데. 여자의 감이라고 이건!”
더 듣고 있으면 정말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사물함을 열었다. 어제 미리 거둬둔 반 애들의 영어 노트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선생님이 4교시 전까지 교무실에 갖다놓으라고 하셨으니까 그냥 지금 가야지. 정수정 개소리에 휘말리면 안돼. 난 영어 공책을 한아름 안아들곤 교실을 나갔다. 등 뒤로 어디 가냐는 정수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말도 안되는 걸 괜히 솔깃하게 들었어.
“김여주 등신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듣고 있었냐. 아, 괜히 쪽팔리네.”
교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씩 밝으며 후회로 가득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중에 태일 오빠 얼굴 민망해서 어떻게 보지. 아니 물론 나 혼자 몰래 찔끔찔끔 보는거지만^^..(울컥) 짝사랑이 이렇게 무섭다. 사소한 것에 괜히 의미부여를 하고 가슴 졸이게 만든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공책은 또 왜이렇게 무거운지 점점 팔이 저린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교무실이니까 좀만 참자.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계단을 올라 코너를 돌았다.
“아..!”
재수 없게도 역방향으로 걸어오던 누군가와 부딫혔다. 때문에 들고있던 공책들이 와르르 쏟아져버렸다. 안그래도 짜증이 만렙인 상황에 나도 모르게 욕짓거리가 튀어나올 뻔 했지만 꾹 참고 얼른 바닥에 주저앉아 떨어진 공책을 주웠다. 그런 내 위로 미안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없어 대충 괜찮다고 대답을 했는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내 옆으로 무릎을 꿇더니 나를 따라 공책을 줍는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헐.”
“진짜 미안. 안 다쳤어?”
“..”
내 사랑 태일님이 왜 여기서 무릎을 꿇고 계시는지..?(동공지진) 누군지 확인하는 순간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맞춘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입술 새로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문태일은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저 옆쪽까지 떨어진 공책을 주웠다. 나 지금 이거 꿈인가. 한쪽 손으로 슬쩍 종아리를 꼬집었다. ..아프다.
“어디까지 가? 내가 들어줄게.”
“네..?”
“영어 공책인 것 같은데. 영어 교무실까지 가면 돼?”
멍하게 복도 바닥만 보고있던 나 대신 공책을 주운 태일 오빠는 내 손에 들려진 몇 권 역시 슬쩍 가져가며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엔 고운 손 하나가 내밀어져 있었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매일 잘생긴 태일 오빠의 얼굴이..(말잇못) 아니 그러니까 이게 지금 문태일의 손이라 이거지..? 살면서 이렇게 떨리는 순간은 처음이다. 고등학교 첫 등교를 했을 때보다 더 떨리고 있다. 나는 아, 고맙..아니 감사합..으아.. 라는 등신같은 말만 지껄이며 내 손을 살포시 오빠 손에 올렸다. 그와 동시에 몸이 쓩 올라갔다. 나 정말 코피 쏟고 기절해도 되는 부분..?
“아 그, 그거 저 주세요! 제가 들고가면 되는데..”
“아냐, 나 때문에 다 쏟았는데. 무겁기도 하고.”
아니 세상에 제가 지금 문태일이랑 대화를 한다니까요 여러분? 오빠가 졸업할 때까지 한마디 대화라도 할 수 있을까 정수정한테 찡찡댄게 떠올랐다. 평생 쓸 계를 지금 다 쓰는건가. 문태일의 품에 한가득 담겨있는 공책더미를 도로 가져오려 손을 뻗었다. 이런 내 행동에 태일 오빠는 공책을 돌려주긴 커녕 뒤로 한발짝 물러나며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괜찮아~ 하며 말이다. 오빠 그렇게 웃으면....저 죽어요..(울먹)
오빠는 괜찮다며 교무실을 향해 발을 옮겼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허공에 놓은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할 뿐이었다. 학교 아이도루한테 영어 공책을 들게 하다니.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태일 오빠는 잘만 걸어간다. 너무 떨리는 나머지 말을 걸 수가 없어 손만 꼼지락 거리며 오빠 뒤를 졸졸 따라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만 위로 올려 흘끔 오빠를 훔쳐봤다.
“아, 저기.”
“네..?”
“아..그..”
“..”
“..어제 학원 왜 안왔어?”
그러던 그때 치명타가 날라왔다. 대뜸 걸음을 멈춘 오빠가 내게 시선을 주며 물어본 것이였다. 놀란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따라 발을 세웠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게 되더라. 이걸 왜 물어보는 걸까. 생각이 파도 치듯 뇌리를 습격했다.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아…저, 제가 어제 열이 갑자기 나서..”
“열??? 지금은? 괜찮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 상황. 왜 저렇게 놀라는거야. 숨도 제대로 안 쉬어질 정도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 나 진짜 설렘사로 숨질 것 같아. 오빠가 나를 걱정하는게 말이 돼?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오빠는 잠시 당황하더니 다행이네, 중얼거린다.
“어..그래. 다음에 보면 인사하자 여주야.”
“감사..합니다..”
문태일은 그 말을 끝으로 내게 공책을 넘겨줬다. 그제서야 서있던 곳이 교무실 앞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또 한번 멍청한 대답을 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오빠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를 지나쳤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친 것 같았다. 뭐가 뭔지 모를 상황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있었다. 일단 오빠는 내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름도 알았으며, 내가 어제 학원에 가지 않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뭐지..”
이러면 안되는데, 정수정이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문태일 우뜩행~~~ 네 사랑 오늘 학원 안오나봐~~~ 차에 안탔오~~~~ 이러면서 막 놀리더라니까???
공책을 쥔 손에 힘을 꾹 주며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걸어가는 문태일이 보인다. 멀어져가는 오빠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 여주 안녕. 하하.”
“..안녕하세요..”
“와, 밖에서 이렇게 만나네. 신기하다~!”
돌아온 주말. 내가 도대체 어느 순간에 착한 짓을 해서 계를 쌓은건지, 집 앞에서 문태일을 맞닥뜨렸다.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 얼굴로 말이다. 심지어 츄리닝에 슬리퍼…(말잇못) 뭐라도 찍어 발랐어도 당황했을텐데 이 꼴로 오빠를 만났으니 두배로 당황해버렸다. 아니 평소에 제발 좀 마주치게 해주세요 빌 땐 죽어도 안만나더니 왜 하필 이럴 때..!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내 얼굴을 가릴 생각이었다.
“어디가?”
“저 그, 편의점이요..”
“아~.”
“..”
“...”
“오빠는 왜 여기 계세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질문이였다. 여긴 분명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안인데 태일 오빠가 뜬금없이 여기 있는게 이상하잖아? 나는 진득히 오빠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고 땅만 쳐다봤다. 앞에선 잠시간 고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소리마저 나를 잼으로 발라버렸다...(오열) 하지만 내 빠심을 들키지 않기위해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발끝에 힘을 줬다. 이래야 내 자신이 제어가 될 것 같았다.
“아, 나는..운동하러!”
“운동이요..? 여기서요..?”
“어어..그, 친구가 여기 운동기구가 좋다고 해서..하하..하..”
청바지 입구요...? 뒷말은 달게 삼켰다. 거짓말이라는 걸 99.9퍼센트 확신했지만 그것 역시 티를 내지 않았다.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기 때문^^ 나는 오빠의 장단에 맞춰 생전 한번도 써본 적 없는 아파트 운동 기구들을 찬양했다. 조금은 경직되있던 오빠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나는 새삼 내가 마주한 얼굴을 의심했다. 문태일과 이렇게 대면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나만 아는 사이라고 굳게 믿어 왔는데….
그 후로도 여러번, 집 앞에서 문태일을 만났다. 오빠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운동을 하러 왔다고 했고, 나중엔 정말 츄리닝을 입고 오더라. 그러다보니 어색하던 기류가 차츰 사라졌다. 더이상 나만 아는 사이가 아니란 말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 엄마한테 문자가 왔더랬다. [딸~ 재현이네랑 외식하는거 알지? 재현이가 우산 들고 학원 앞으로 갔으니까 만나서 같이 와~^^] 안에서 창문으로 봤을 땐 얇은 빗줄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학원 로비로 나와 밖을 확인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비가 굵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는 나에게 학원 앞으로 날 데리러 올 정재현(이 들고 올 우산) 은 참 반가운 소식이였다!
“야, 간다.”
“어~ 내일 봐.”
“아, 참고로 뒤에 문태일 오빠 온다.”
그리고 정수정이 귓속말로 속삭인 것 또한 참 좋은 소식이지! 고맙다는 말 대신 윙크를 해보이자 정수정은 바로 정색을 하고는 학원을 나가 학원차로 뛰어들어갔다. 매정한 기지배.. 그런 정수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으로 대충 머리를 정리했다. 그러던 중 시야 저 끝에 우산을 쓴 채 학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정재현이 걸렸다. 녀석은 까치발을 하고 얼굴을 기웃거리더니 기어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뒤에 오고있다던 태일 오빠를 기다려볼까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마주친 정재현의 눈빛이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안나오면 그냥 가버린다고..(섬뜩)
“여주야, 차 안타?”
학원을 나서려는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자 시야에 문태일이 가득 찼다. 와씨, 심장. 원래 덕후는 계를 못탄다던데 이렇게 먼저 계를 퍼주면 나는 어떡해요 태일어빠..? 나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가슴 언저리에 놓았다. 이런 오빠의 돌발 행동에 나는 정수정의 말을 한번 더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그 개소리. 그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쩌면 정말 사실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저 오늘 외식해서 차 안타요.”
“아~ 우산은? 있어?”
“네!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손가락을 쭉 펴 정재현을 가리켰다. 색색가지 우산들이 움직이는 틈 사이로 날 바라보던 정재현이 내 행동에 이맛살을 찌푸린다. 태일 오빠는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빗 속에 있던 정재현을 발견한 모양인지 별안간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오빠를 바라봤다.
“우산이 한개....”
“네?”
“아, 아니야. 우산, 내꺼 빌려줄까?”
잠시 무어라 중얼거리던 태일 오빠는 제 손에 쥐고있던 작은 파란색 우산을 내게 내밀었다. 말은 질문형인데 행동은 명령형이다. 금방이라도 무방비하게 놓여진 내 손에 우산을 쥐어줄 기세라 급히 한발짝 물러나며 손사래를 쳤다. 저 괜찮아요! 오빠 쓰세요! 나는 그렇게 외치며 끝까지 우산을 받지 않았다. 내가 비에 젖는 한이 있어도 울오빠는 한방울도 맞으면 안돼(T.T) 문태일은 얼굴로도 모자라 마음씨도 착했다. 끙, 이러니 내가 안 좋아할 수 있나.
“아니, 여주야 나는 괜찮,”
“안돼요! 꼭 오빠 쓰고 가세요. 비 짱 많이 와요.”
먼저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태일 오빠의 입을 봉인하듯 꾸벅 인사한 후 뒤를 돌아 학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금만 늦었다면 문태일의 우산은 분명 내 손에 있었을거다. 노래를 하는 태일 오빠에게 까딱하다 걸릴 수 있는 감기는 독이였다. 때문에 나 하나 좋자고 저 우산을 넙죽 받아올 순 없었다. 그대신 난 정재현이 들고있는 우산 안으로 몸을 넣었다. 좁은 우산을 침범한 나에게 시선을 둔 정재현은 어딘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여주.”
“엉?”
“..너 혼자 좋아하던 거 아니였어? 저 형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
정재현은 들고있던 우산을 더욱 높게 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녀석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추락했다. 굉장히 좋은 질문이었다. 제 3자의 눈에 나와 오빠가 친해 보이나 보다. 하지만 정재현의 질문에 차마 오빠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진 못했다. 그런게 아니라면 평생 놀림감이니 말이다. 나중에 정말 백퍼센트 확실해지면 자랑해야지.
“몰라, 어쩌다보니까..”
“..”
“..근데 나 갑자기 심정지로 사망하면 범인은 문태일이야. 알았지?”
답이 없다 김여주. 정재현의 목소리가 작게 울림과 동시에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환히 불을 빛내던 학원이 빠르게 멀어졌다. 태일 오빠는 차 탔을라나. 비 맞은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재현을 따라 걸었다.
그 후 한달 정도가 지났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 인간관계에 몇가지 변화가 생겼다. 일단 제일 큰 변화는 내가 같은 학원을 다니는 문태일을 포함한 밴드부 멤버 세명과 굉장히 친해졌다는 것이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같이 학원을 다니면서 얘기를 많이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것 같다. 이 말은 즉 새우젓 아주 작은 일부분이였던 내가 초고속 신분상승을 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였다. 내가 바로 이 구역의 성공한 덕후란 말이다.
“야야 김여주. 너 부부가 공에 올라가면 뭔지 알아?”
“...공부..?”
“아닠... 소름돋게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하냐. 1등은 다르다 이건가.”
“뭐래~! 뭔데 그럼.”
“쁑.”
밴드부에서 드럼을 맡고있는 나카모토 유타(18/한국인보다 한국어 잘하는 일본인) 오빠의 아재 개그에 내가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을 때 즈음이였다. 옆에서 물을 마시던 태일 오빠는 그런 날 보더니 진지하게 저게 웃기냐며 나를 걱정했다. 그런 오빠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 오빠는 안웃겨? 진짜 웃긴데. 무려 반말을 한게 포인트였다. 마음같아선 매일 동네를 뛰어다니며 자랑하고 싶다. 나 문태일이랑 말 놓은 사이라고.
그리고 또 한가지 변화. 에이 설마, 하고 넘겼던 문태일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백퍼센트 확신 중이었다. 그냥 평소 오빠의 행동을 보면 스멀스멀 촉이라는게 올라온다. 예를 들면 이런 행동.
“여주야, 이거 마실래?”
“오~ 뭐야?”
“아, 어.. 원장쌤이 주셨어! 난 이거 안 마셔서. 하하.”
거짓말. 아까 매점에서 엄청 고민하다 사는거 다 봤어 오빠. 문태일이 손에 쥐어준 초코우유를 들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기도 했었다. 오빠는 어설픈 거짓말로 내게 호의를 베푼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눈치고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행동에 의심 한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며칠 밤을 뒤척이며 결론 지었다. 오빠도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처럼 오빠도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나는 내 마음대로 그런 결론을 지으며 설레여했다.
시간은 또 빠르게 흘렀다. 붉게 물든 단풍이 찬바람에 스쳐 떨어지는 늦가을이 됐고, 몇 주 전부터 여기저기 홍보했던 학교 축제가 하는 날이었다. 1부로 정신 없던 부스가 끝난 후 2부 장기자랑이 시작됐다. 부스 진행을 할 때 수고하라며 어깨를 두들겨주고 떠난 태일 오빠는 오늘도 눈이 부시더라.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고개를 돌리면서까지 빤히 바라보는게 거슬릴 정도였다. 설상가상 오빠는 이번 무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밴드부 공연으로 말이다. 선곡도 기가 막혔다.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 밴드부가 여학생들을 다 쓰러뜨리려고 작정을 했나보다.
“일단 박수부터 칩시다.”
“박수는 왜요?”
“그린비 입장하시잖아요!!!!!!! 밴드부 공연입니다!!!!!!!! 소리 질뤄~~~~~~!”
수많은 공연이 이어졌다. 정수정과 나란히 앉아 즐겁게 무대를 관람하자 어느덧 막바지였다. 백현과 찬열 이라는 네임택이 붙은 마이크를 하나씩 잡은 엠씨들의 간략한 소개와 함께 오래 기다렸던 밴드부가 입장했다. 모두 흰티에 청바지를 입고 무대 위로 올라온 밴드부 멤버들이 짧게 인사를 한 후 각자 포지션에 자리를 잡았다. 드럼에 유타 오빠, 일렉에 한솔 오빠, 키보드에 영호 오빠. 그리고 단연 제일 돋보이는 정중앙 스탠드 마이크를 잡고 있는 보컬 문태일. 흰티에 청바지를 입어도 멋있는 사람아..(오열) 주위는 이미 나와 같은 여학생들이 앓..밴드부..으악.. 하며 저 완벽한 조합을 앓고있었다. 미안 얘들아. 저 사람은 내꺼란다..^^
“노래 아시면 따라 불러주세요.”
태일 오빠가 처음 내뱉은 말이 마이크를 통해 강당을 울렸다. 씩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 오빠의 말을 끝으로 드럼 비트가 깔렸다. 기타와 키보드가 천천히 박자에 맞춰 들어왔다. 조명이 은은하게 무대를 비추고, 문태일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체육대회 때 들었던 오빠의 목소리가 다시끔 귓가에 번졌다. 내가 문태일을 좋아할 수 있게 해준 목소리. 난 저 목소리를 좋아했고, 저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문태일이 좋았다. 그리고 그런 문태일은, 노래를 부를 때 정말 행복해하는 사람이고.
눈이 마주친 것 같다. 오빠가 웃는다. 아, 또 반했다. 큰일났다.
밴드부는 앵콜 무대까지 끝냈지만 무대 아래로 내려올 수 없었다. 엠씨들이 오빠들을 붙잡고 게임을 시작하겠다 선포했기 때문이다. 서프라이즈 게임 타임이란다. 그 말에 잔뜩 신이 난 건 지켜보던 관객들이었다. 물론 나도 포함이었고. 게임을 하면 또 얼마나 멋있을까 상상을 하며 마음 편히 태일 오빠를 바라봤다. 아직도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는 건 무진장 떨리기 때문에 이럴 때 많이 봐둬야 한다.
“멤버들 각각 여기 쪽지를 하나씩 뽑습니다. 쪽지 안에는 키워드가 적혀있어요. 그 키워드에 해당되는 사람을 무대 위로 데려와서 같이 게임을 하면 되는겁니다. 쉽죠?”
“1등 상품은 요 귀여운~! 복숭아 인형이에요~!”
게임을 설명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강당을 채웠다. 엠씨 중 한명이 들고 흔드는 상품 인형이 꽤나 탐나는 비주얼을 자랑한다. 호응은 엄청났다. 여기저기 이미 손을 들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분명 평범한 키워드를 적었을리 없다. 과연 누가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될까 궁금해하며 한명씩 쪽지를 뽑기 시작하는 무대 위 상황을 바라봤다.
“아, 태일 오빠랑 게임 하는 사람 벌써 부럽다.”
“왜 너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하냐?”
“괜히 막 기대하면 안돼. 나중에 실망이 커져.”
정수정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네명 모두 키워드가 적힌 쪽지를 뽑았다. 키워드를 확인해 달라는 말에 저마다 소심하게 쪽지를 펴본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확인했나요?”
“네.”
“그럼 하나둘셋 하면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 한명씩 데려오는겁니다. 아셨죠?”
하나! 둘! 셋! 출발~! 그 소리와 함께 밴드부 멤버들 모두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성큼성큼 걸어다녔다. 강당은 이미 콘서트장이 되어있었다. 멤버들 몸짓 하나에 으악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이 여학생들이었다. 나는 그 소란 속에서 오직 문태일만 바라봤다. 무대 아래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내 시선을 오빠에게 고정시켰다. 누구 데려가는지 보자. 그런 생각으로 다리도 꼬았다.
그런데 문태일은 오히려 그런 나를 한껏 당황하게 만들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두 눈이 내 시선과 맞물리는 순간 그대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었다. 사람 하나 껌뻑 죽게 만드는 예쁜 미소를 매달고 말이다.
“여주야 미안.”
“에?”
“그냥 너가 제일 먼저 생각나더라.”
단숨에 내가 앉은 자리까지 걸어온 문태일은 무방비하게 무릎 위에 놓여진 내 오른손을 덥석 잡고는 그대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야? 그 짧은 질문조차 할 틈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빠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게 됐다. 무대 위로 올라갈 때까지 오빠는 꽉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따뜻한 손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지만 그것에 온전히 신경을 두진 못했다. 등 뒤로 울리는 큰 함성과 무대 위 조명, 그리고 바로 앞에 놓여진 문태일의 넓은 등판에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아~! 네명 모두 올라왔네요!”
“그럼 이제 한명씩 키워드를 공개해볼까요~?”
여전히 문태일의 손을 잡은 채 무대 위에 올라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이 바싹 타들어갔다. 잔뜩 긴장한 탓에 손에 땀이 차는게 느껴져 급히 맞잡은 손을 빼냈다. 오빠는 내 행동에 슬쩍 고개를 돌려 떨어진 손을 한번 보더니 내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안, 하고 말하는 입모양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키워드는 왼쪽에 서 있는 사람부터 공개했다. 저마다 최대한 키워드에 해당되는 사람을 찾아온 것 같았다. 제일 오른쪽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태일 오빠는 끝끝내 엠씨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멋쩍은 웃음을 내보냈다. 덩달아 나 역시 민망해지더라.
“쪽지 주세요.”
“여기요.”
“오~ 이거 좀 센데? 공개해도 되나?”
문태일의 손에 있던 쪽지가 엠씨의 손으로 넘어갔다. 망설임없이 쪽지를 펴 내용을 확인한 그는 키워드를 보며 굉장히 좋아하더니 나와 태일 오빠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모습에 애가 타는 건 나였다. 도대체 뭔데! 뭐냐고! 뜨거워진 침을 삼키며 엠씨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아니 얼마나 어마어마하길래 말을 못해. 뭐..좋아하는 사람이라거나...뭐...썸타는 사람 뭐.. 그런건가? ( ͡° ͜ʖ ͡°)
“그린비 보컬 문태일 학생 키워드!”
“..”
“예쁜 후배!”
너무 떨리는 탓에 혼자 망상을 시작할 때 즈음 엠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키워드가 공개되자마자 문태일은 제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예쁜 후배라니. 예쁜 후배..(입틀막) 생각지도 못한 키워드에 나 역시 고개를 숙이곤 다시 들지 못했다. 강당은 엄청난 함성으로 흔들거릴 지경이였다. 그 앞에 서 모든 주목을 받는 건 정말 힘든 일이였다. 혼이 나갈 것 같아 애꿎은 볼만 만져댔다. 절대 문태일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눈치만 볼 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죠?”
진행자의 말에 오빠는 민망한듯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곧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오빠는 지그시 날 바라봤다. 지켜보던 관객석은 난리가 났다. 선생님들도 지켜보시는 자리에 뽀뽀해를 외치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었다. 어떤 놈이야.......고맙게.....ㅎ 미친듯이 떨리는 마음에 시선을 내렸다. 머리카락으로 달아오른 온 얼굴을 가리고싶었다. 아니 마이크는 문태일이 쥐고 있는데 누가 보면 내가 대답해야하는 상황인줄 알겠네. 정작 날 위로 데려온 사람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데 말이다.
“..”
“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말을 머뭇거리던 오빠와 또 한번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난 몰라. 눈을 질끔 감으며 다시끔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가늘게 떴다. 오빠는 이런 날 보며 작게 웃더니 마이크를 입에 가져간 후 나즈막히 강당을 울렸다.
“아무리 봐도 예뻐서요.”
축제가 막을 내린 후 문태일과 늦은 저녁 나란히 걷고 있는 중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내 품엔 복숭아 인형이 있었다. 뼛속까지 차오른 민망함을 무릅쓰고 열심히 게임을 해 얻은 것이었다. (그 정도로 갖고 싶었다^^..) 같이 집에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낸 태일 오빠는 자연스럽게 우리 집을 향해 걸었다.
아까 강당에서의 일 때문에 둘이 남겨지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상황이 되자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게임이 끝난 후 무대에서 내려온 내게 주위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저 오빠가 널 좋아하는게 확실하다며 또 바람을 불어넣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라며 말을 얼버무렸었다. 문태일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내가 의심하는 것처럼 정말 날 좋아할까. 올곧게 앞만 보고 있던 고개를 문태일에게 돌렸다. 오빠는 언제부터인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달로 눈을 접는다.
“너 이거 닮았어 여주야.”
“..이거?”
“응. 복숭아.”
“뭐야 그게. 복숭아 닮은게 뭔데?”
“아까 강당에서 말했잖아.”
느닷없는 오빠의 말에 다시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예쁘다는 소리를 몇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문태일은 그렇게 넌지시 제 마음을 비추는 듯한 행동을 꽤 많이 보여 밤마다 잠을 설치게 했다. 먼저 영화를 보러가자고도 했고, 늦은 밤까지 자습실에 남아 같이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떡볶이를 좋아한다는 내 말에 떡볶이를 사주고 나름 손도 잡았다고. 사귀는 거 빼고 다 했어! 그럼 이제 사귀어야 하지 않을까?(뻔뻔)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해왔지만, 오빠는 그렇게 나를 저에게 풍덩 빠지게 만들어놓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난, 이제 확실히 알아야겠다. 깜깜한 하늘과 가로등 불빛이 분위기를 잡아줄 때 용기를 내 먼저 물어봐야겠다.
“오빠.”
“응?”
“근데..오빠한테 난 그냥 예쁜 후배야?”
“..어?”
오빠는 꽤나 당돌한 내 말에 놀란 것인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거의 고백급의 발언이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만약 어색하게 웃어넘기면 다시는 오빠를 안 볼 작정이었다.(구라다. 그럴 수는 없다.) 사실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소리였다. 문태일이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 그렇지 않고서야 나같은 쫄보가 저런 미친 소리를 내뱉겠어요? 오빠는 내 말에 음..어.. 앓는 소리만 내더니 목덜미를 쓸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그냥 선후배 사이인거야?”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떨군 문태일을 쳐다봤다. 오늘은 꼭 이 애매한 사이를 매듭짓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들어간 시선이였다. 내 말을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그 속에서 흐르는 떨림이 나쁘지 않았다. 인생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이런 도키도키는 처음이란 말이야..(울컥) 바닥만 보고있던 오빠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방심한 타이밍에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탓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제서야 눈을 한번 깜빡이며 침을 삼켰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있던 오빠가 말했다.
아니.
온전히 내게 내려앉은 시선이 따사롭다.
“내가 널 좋아하고..”
“..”
“너도 날 좋아하길 바라는 사이야.”
문태일이 웃는다. 꾹 닫고 있던 입술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찌릿찌릿. 답답했던 가슴 언저리가 뻥 뚫리는 기분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동안 잠도 못자고 긴가민가 했던 궁금증이 단번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하길 바라는 사이. 참고로 내가 한 말 아니고 문태일이 한 말 맞다.
“악!!!!!!”
“여주, 여주야?”
“나도 오빠 좋아!!!!!!!!”
긴 말 없이 문태일에게 안겼다. 아니, 안겼다기보단 일방적으로 안았다는 말이 맞지만 갑작스런 내 행동에 잠시 굳어버린 오빠는 허공에 뜬 손을 어쩔 줄 모르더니 끝내 푸흐흐 웃으며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될만큼 마음이 붕 떠있는데, 그런 나를 달래듯 오빠가 속삭였다.
그럼 우리 이제 연애하자 여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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