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겨울. 김여주, 고등학교 1학년.
태일 오빠와 데이트라는 것을 하는 중이다.(감격) 커플의 기본 코스라는 공포영화를 보고 나왔다. 평생 코미디 길만 걷던 나에게 공포영화는 역시 무리였다. 그러게 왜 남들 다 하는 거(=엄맛! 무서워T.T / 괜찮아 내가 있잖아) 해보자고 겁 없이 덤벼서는... 사실 영화의 반을 눈 감고 귀 막은 채 봐서 내용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그건 문태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놀랄 때 같이 놀라더라. 움찔도 아니고 화들짝 놀라서 기대하던 상황을 집어치우고 그냥 같이 무서워 했다. 오빠가 무서운 걸 잘 못 본다는 사실을 알았다. 참 보람찬 하루야.
“오빠,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응 갔다와. 여기 있을게.”
남은 팝콘을 오빠 손에 쥐어준 후 다녀오라며 손짓하는 오빠를 뒤로 한 채 화장실로 급하게 향했다. 아무리 무서워도 문태일과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참았기 때문에 얼른 가야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너무 빨리 걸어가면 좀 그러니까 최대한 안 급한 척 걸었다. 정재현이 봤다면 기가 찼겠지. 걔랑 있을 땐 그냥 항상 뛰었는데..(먼산)
변기 물이 내려가는 상쾌한 소리와 함께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홀가분한 몸으로 거울 앞에 서 얼굴을 체크했다. 화장 아직 괜찮고, 옷도 흐트러진 거 없고. 머리만 대충 만지작 거린 후 화장실을 나왔다. 오빠를 찾으려 두리번 거리는데 저 멀리 여자와 함께 있는 문태일이 보였다.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해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니 오빠와 같은 학년인 노는 선배였다. 황급히 옆에 있던 큰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왜 숨는진 모르겠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모습을 감췄다. 뭔가 내가 저 옆에 서면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 기둥 뒤에서 가만히 대화의 끝을 기다리기로 했다.
“문태일, 너 그 1학년이랑 사귄다며?”
눈만 빼꼼히 내밀고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귀를 쫑긋 세우니 대화 소리도 들려 모든 신경을 귀에 모았다. 1학년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내 얘기를 시작하려나 보다.
“어. 왜?”
“그냥~ 너가 아깝다~!”
“아까운게 어딨어, 좋아하는데.”
“그런가~ 그래도~”
뭐야 저 여우는..(바득) 도대체 왜 저런 말을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문태일한테 지껄이고 있는건지 모를 상황에 절로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같아선 당장 저 사이를 파고 들어 오빠를 데리고 튀고 싶지만 상대는 환불 화장을 하고 있는 무서운 선배라 화를 억누르며 계속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 분해. 콧바람을 씩 내뿜었다. 시야에 든 태일 오빠는 등을 보이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지만 얼핏 들리는 목소리가 굉장히 딱딱했다. 굳이 확인을 안 해도 짜증이 난게 분명했다. 짜란다 짜란다 내 애인~! 소심하게 박수를 치며 계속 두 사람을 바라봤다.
“누가 더 아깝냐 굳이 따지면 여주가 아깝지.”
그러던 그때 문태일이 말했다. 내가 들은게 뭔가 싶어 당황한 마음에 눈만 깜빡였다. 내가 뭐가 아까워. 오빠가 아까운 건 지극히 맞는 소린데..! 선배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건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왜? 라며 말꼬리를 늘린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하거든.”
“..어?”
“그러니까 어디가서 그런 소리 하지마.”
순간 사고가 정지되듯 모든 행동을 멈췄다. 하다못해 숨을 쉬는 것도 잠시 멈추곤 문태일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한껏 당황한 선배는 오빠의 말에 대충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떠났지만 나는 기둥 뒤에서 나가질 못했다. 자기가 더 좋아한다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온걸까...(입틀막) 너무 떨리는 나머지 왼쪽 가슴께를 움켜쥐며 숨을 내쉬었다. 내가 듣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르고 한 말이겠지. 아 진짜 문태일을 어쩌면 좋지. 당장이라도 뛰어가 저 듬직한 뒷모습을 와락 안아버리고 싶었다.
“오빠!!!!”
더 이상의 생각을 중단했다. 이제 여우같은 선배도 없겠다 굴뚝같은 마음을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여기저기 튈대로 튄 감정을 주체를 못하고 기둥에서 한발짝 벗어났을 때, 나는 이미 문태일을 품에 안고 있었다. 오빠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감싸 안았다. 도대체 그런 예쁜 말은 어디서 배워온거야!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뻔한 말을 꾹 삼키며 문태일이 좋은만큼 꽉 안았다.
“..”
내 행동에 오빠는 잠시 움짤하더니 아무 미동이 없었다. 분명 이때쯤 내 손 위로 큰 손 하나가 올라와야 하는 거 아닌가...?(당황) 나의 애정 넘치는 스킨쉽에도 오빠는 말은 커녕 조금의 반응도 없었다. 팔에 닿은 오빠의 몸은 잔뜩 경직돼 있기만 할 뿐이다. 내가 무언가 잘못을 한건가 하는 생각에 덩달아 굳어버렸다. 생각해보니 여기 영화관 한복판인데.. 원하던대로 안기는 안았는데 놓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그렇게 가만히 문태일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로 서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귓가에 아른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있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신경을 쏟으려던 그때 문태일이 제 허리춤에 있던 내 손을 잡았다. 날 저에게서 떼어내는 행동이 상당히 조심스럽다. 느릿하게 몸이 떨어졌다. 그제서야 얼굴을 마주한 오빠를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오빠는 그런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꿎은 내 신발코에 시선을 박는다.
“여주야 너 갑자기 그러면..”
“..”
“내가 많이 곤란해..”
문태일은 그런 말을 하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과 맞물린 눈이 옅게 흔들린다. 조금 밑에 자리잡은 입은 혀로 입술을 축인다. 그게 무슨말이냐 묻기도 전에 오빠는 위로 겹쳐있던 손을 바로 잡으며 날 이끌었다. 가자. 나긋한 음성과 함께 앞서는 모습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오늘 급식 진짜 심하지 않냐?”
“살기 위해 먹었다..”
우리학교 급식업체 주주 나와..(주먹) 꾸준히 맛 없던 급식이지만 오늘은 정말 최고로 맛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꾸역꾸역 먹기는 했다만, 진짜 그걸 먹으라고 만드신건지..^^ 식판을 정리하고 나오는 길에 슬쩍 훑어보니 저 끝쪽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던 정재현과 김동영도 평소와 다르게 젓가락만 깨작거리고 있었다. 아오 진짜 의견 모아서 급식업체 바꿔달라고 항의라도 할까. 찝찝한 입 안을 물로 한번 헹군 후 같이 짜증이 난 정수정과 함께 급식실을 나가려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순간 놀라며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찰나에 기대했던 문태일이 보였다.
“아, 놀래라~!”
“밥 맛있게 먹었어?”
애교 섞인 말투와 함께 오빠를 툭 치니 오빠의 입꼬리가 상승한다. 그에 반해 뒤에 있던 정수정이 작게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ㅎ.. 먼저 간다는 정수정에게 손인사를 한 후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니, 오늘 진짜 역대급이야. 아직 안 먹었으면 먹지마 오빠. 심각한 어조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오빠한테 쓰레기를 먹일 순 없어..! 진지하게 경고한건데, 문태일은 으이그 중얼거리며 그런 내 머리를 헤집기만 한다.
“아아, 오빠아!”
“밖에 추우니까 이거 쥐고 가.”
헝클어진 머리에 울상을 지었다. 내가 한 손으로 머리를 정리할 때, 오빤 교복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곧 잡고있던 손 위로 따뜻한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앙증맞은 사이즈의 핫팩이였다. 한 손에 하나씩 쥐고 있으라고 두개를 준건가. 두 손을 모아 핫팩을 꾹 감싸자 추위에 시려웠던 손에 온기가 돌았다. 얼어있던 손과 함께 맛 없는 급식으로 잔뜩 오른 짜증도 같이 녹아내리는 듯 했다.
“난 진짜 오빠밖에 없다?”
핫팩을 쥔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결국엔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래서 제 앞에 이 다정킹이 누구 남자라구요?(파워답정너) 센스쟁이 문태일의 애정 담긴 핫팩에 신이 오른 나에 반해 오빠는 입술을 살짝 깨문다. 잠시 머뭇거리던 입술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응? 정신 없이 핫팩을 흔들어대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자, 문태일이 제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며 조심히 말을 꺼낸다.
“난 너가 갑자기 그런 말 하면 여기가 막 아파.”
“..왜..?”
“지한솔이, 이게 심쿵이라는 거래.”
엉...? 문태일의 말에 도리어 벙찐 건 나였다.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가 했던 오빠는 진심인지 그 말을 끝으로 예쁜 입술을 앙 다물더라. 그래서 문태일한테 심쿵 가르쳐 준 은혜로운 한솔 오빠 지금 어디쪽에 계시는지..? 나 절 좀 하게..(오열)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자, 오빠는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오빠.”
“응?”
“난 오빠가 나를 막 그렇게 쳐다보면..”
까치발을 들어 문태일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뽀뽀하고 싶어!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는 오빠의 저 멜로눈깔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역대 최고 수위의 스킨쉽이기 때문에 먼저 냅다 뽀뽀를 해버린 내가 더 당황하며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나도 어버버, 오빠도 어버버. 아니 내가 지금 고결한 문태일한테 무슨 짓을..(입틀막) 뜨겁게 고인 침을 꿀꺽 삼킨 후 오빠가 쥐어준 핫팩으로 얼굴을 가리며 결국 급식실을 뛰쳐나갔다.
“으아아아악!!!”
부끄러운 마음에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등 뒤로 뒤늦게 내 이름을 부르는 문태일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차마 오빠 얼굴을 볼 수 없어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교실까지 달려갔다. 순식간에 도착한 교실 뒷문을 닫고 숨을 고를 때엔, 온 몸에 오른 열 때문에 핫팩을 쥐고 있는 손이 더웠다.
2013년 봄. 김여주, 고등학교 2학년.
“아 또 비와?!”
어제도 비가 왔는데 오늘도 비가 온다. 왜 항상 하교 시간에 맞춰서 저렇게 세차게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우울한 날씨를 따라 푹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챙겼다. 아, 우산 없는데. 어제도 우산이 없어서 정재현과 원치 않게 한 우산을 쓰고 갔더랬다. 태일 오빠는 오늘도 밴드 연습 때문에 학교 남는다고 했고, 김동영이랑 정수정은 집 방향이 다르고.. 그럼 또 정재현이랑 같이 가야돼?! 어제 왜 우산을 안 챙겼냐며 한바탕 잔소리를 시전한 정재현이 떠올라 미간을 좁혔다.
“야, 너 우산 없다며.”
“정재현이랑 또 같이 쓰고 가야지 뭐.”
먼저 간다, 내일 봐. 정수정에게 인사를 한 후 급히 교실 문을 열었다. 정재현이 먼저 하교 하기 전에 녀석을 잡아야하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교실을 나갔을 때 눈에 보인 건, 생각지도 못한 문태일이였다. 밴드부실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깄어! 잠시 눈을 크게 떠보이다 빠른 걸음으로 오빠를 향해 걸어갔다.
“오빠 뭐야~, 온다고 연락도 안하고.”
오늘 하루종일 못봐서 나 보러 왔구나? 환하게 웃어보이며 문태일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오빠가 이상했다. 웃지도 않고, 내 손을 잡지도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내게 진득히 시선을 둘 뿐.
“..왜 그래..?”
“우산 없지?”
“..응.”
“쓰고 가.”
조금은 의아해진 내가 슬쩍 눈치를 보며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풀자, 문태일은 들고있던 우산을 내 손에 쥐어주며 그 한마디만 짧게 내뱉었다. 복도 바닥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갑다. 뭐지..나 뭐 잘못한 거 있나...(동공지진) 낯선 오빠의 모습에 나는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오빠가 왜 화가 났을까 생각해봐도 딱히 짚히는게 없다. 조심히 이유를 물어보려 고개를 들었을 때, 문태일이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애들이 너랑 정재현 무슨 사이녜.”
“..”
“왜 둘이 같이 우산을 쓰고 가녜.”
네 남자친구..나잖아 여주야. 문태일의 말에 머리가 띵해졌다. 오빠와 마주한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아, 하는 탄식만 멍청히 내뱉을 뿐이었다.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정재현은. 어제 정재현과 우산을 잡고 하교를 하던게 뇌리에 스쳤다. 그리고 난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녀석과 하교를 하려 했는데..
“..재현이랑 같이 가지 마. 내가 준 거, 이거 쓰고 가.”
정재현과의 하교에 대한 정확한 문제점을 찾기 전에 일단 사과부터 해야하는 걸까. 문태일이 주위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문태일과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 더 그랬다. 오빠는 정말 화가 많이 난 건지 그 말을 끝으로 내게 등을 보였다. 날 바라보던 눈은 끝까지 냉랭했다.
“오빠..”
복도에 내 소리가 울렸지만 문태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추적추적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그제서야 들려왔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마냥 보고있자니, 울컥 울음이 차올랐다.
눈물이 찔끔 나오는 걸 벅벅 문지른 내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밴드부실 앞이었다. 밴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문태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연습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우리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내일까지 이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태일이 내게 준 우산은, 딱 봐도 자기가 쓰려고 챙겨 온 우산이었다. 때문에 나는 이 우산을 쓰고 하교할 수 없었다. 그럼 문태일이 비를 맞고 가야하니까.
서서 기다릴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바닥에 앉기로 했다. 바닥이 아까의 문태일처럼 굉장히 차가웠다. 아, 아까 생각하니까 또 눈물 나올라 그래..(울컥) 하지만 지금 바닥이 찬게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상황의 요점이지. 문태일이 화가 난 이유. 그러니까, 내가 정재현과 함께 우산을 쓰고 하교를 한 것의 문제점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단 나와 정재현은 옹알이 시절부터 붙어다닌 친구고, 문태일도 그 사실을 안다. 같은 학년이 아닌 자기가 못 챙겨주는 부분을 정재현이 챙겨주는게 고맙다고도 한 적 있다. 워낙에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우산을 같이 쓰거나 단 둘이 밥을 먹는 것 등의 일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정재현은 그만큼 내게 가족 같은 친구니까. 딱 거기까지 생각하면 문제라고 생각 되는 것이 없었다. 오빠가 당연히 이해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의 전환이라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나를 문태일에 대입해 보는 거다. 누군가 내게 문태일과 그의 여자 사람 친구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 물었다고 가정했다. 여주야, 태일 선배랑 그 여자 선배 무슨 사이야? 둘이 같이 우산 쓰고 가던데? 라는 말을 들었다고 치자. 그 여자 선배라는 사람을 문태일의 오랜 친구라고 하면….
“시바알..?”
빡치잖아..! 친구랍시고 다른 여자랑 붙어다니는 문태일이라니. 그걸 어떻게 이해해 김여주 등신아. 더 이상의 상상은 정신 건강에 해로울 것 같아 중단했다. 와 나 진짜 답 없는 행동을 하고 다녔구나.. 오늘에서야 내게 화 아닌 화를 낸 문태일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동안 정재현이랑 같이 있는 날 보면서 얼마나 속이 탔을까. 나는 생각만 해도 이렇게 열이 나는데, 문태일은 직접 그 열불나는 상황을 보고 들었다고 생각하자 또 울컥 눈물이 나오려한다. 이건 진짜 무조건 내 잘못이야. 문태일이 날 혼내도 할 말이 없다.
“벌 받자 여주야..”
양반다리를 풀고 무릎을 꿇어 앉았다. 무릎 꿇고 그동안의 행동들을 반성해. 셀프로 처벌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 다시 하자.”
그때, 반주와 함께 문태일의 노래 소리가 멈췄다. 마이크에 대고 말 한 건지 오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복도까지 울려퍼졌다.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밴드부실 문만 바라봤다. 목소리가 아직까지 딱딱하다. 모두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 뒤로 문태일은 몇 번이나 노래를 중단하고 시작하길 반복했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내 한숨도 늘어갔다. 그저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때문에 치마자락을 꾹 쥐며 오빠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 깜짝이야 미친 진짜!!!!!!”
눈을 떴다.
“놀랬잖아!!! 뭐해 여기서!!!”
밴드부실 문을 잡은 채 나를 향해 소리를 빽 지르는 한솔 오빠가 보였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들다니..나 진짜..노답..(말잇못) 잠에서 깨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목덜미를 쓸어넘기며 문태일의 행방을 물었다. 내 물음에 한솔 오빠는 이 커퀴새끼들.. 하며 작게 주먹을 쥐더니 곧 동아리실을 향해 소리쳤다.
“야 문태일! 빨리 나와!!!!”
그 소리에 먼저 밖으로 나온 건 문태일이 아닌 유타 오빠와 영호 오빠. 둘 다 나를 한번, 동아리실 안에 있을 문태일을 한번 쳐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절레 젓는다. 나는 울상을 지었다. 태일 오빠는 왜 안 나오냐는 눈치로 오빠들을 바라보자, 영호 오빠가 작게 손짓하며 뒷정리 중이라 말했다. 문태일을 마주하면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할까. 또 그 냉랭한 모습을 마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렸다.
“근데 김여주 너 왜 그러고 앉아 있냐..?”
“응..?”
날 위에서부터 쓱 훑어 본 유타 오빠가 슬쩍 내 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맞다. 나 무릎 꿇고 있었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세상에,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거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로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오, 갓뎀ㅎ..
“야 뭐야 왜 그래?!”
“아아..다리..”
갑작스런 상황에 날 보고 있던 오빠들 모두가 나를 따라 몸을 아래로 내려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괜찮다고 그들을 진정시키며 다시 일어날 순 없었다. 왜냐면 정말 괜찮지 않기 때문이지..(말잇못) 장시간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막혔던 혈액순환이 다시 시작된 건지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급한대로 엄지에 침을 발라 코에 찍었다.
“왜, 무슨 일인..”
그러던 그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태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습실 불을 끈 후 문을 닫고 나오던 중 나를 발견한 문태일은 바닥에 앉아있는 나를 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 문태일을 보며 코에 침을 묻히던 걸 멈추고 다시끔 땅을 짚고 일어섰다. 아아, 하고 앓는 소리가 입술 새로 튀어나왔다. 옆에 서있던 한솔 오빠가 그런 내 팔을 잡아 지탱을 도와줬다.
“왜 김여주가 여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얘 못 서는 것 같아. 아까까지 무릎,”
“오빠..!”
“왜, 말하면 안되는거야?”
괜히 걱정이나 시킬 말을 내뱉으려는 유타 오빠를 말리는 사이 문태일이 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더니 한솔오빠가 잡고 있던 내 팔을 가져가며 먼저 가라 한마디 한다. 한솔 오빠를 포함한 다른 오빠들의 미간이 좁혀졌다. 간다 가, 문태일 징그러운 새끼야. 커플 진짜 망했으면!!!! 오빠들은 그렇게 복도를 울리고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단숨에 나와 문태일, 두명만 이 넓은 복도에 남아버렸다. 잔뜩 긴장한 나와 달리 오빠는 아무 말 없이 한손으로 나를 단단히 잡은 채 입고있던 가디건을 벗었다. 그리곤 어정쩡히 서 있는 내 허리춤에 벗은 가디건을 둘러 꽉 묶는다. 그런 오빠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반성한다고 한게 문태일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다. 속이 상했다.
“오빠 있잖아..”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속으로 몇 번을 고치고 고민했던 말을 꺼내려던 순간, 줄곧 단단히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오빠가 등을 보이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업혀.”
“..어?”
“얼른.”
오빠 우리 아까 싸웠는데...( о゚д゚о) 아니 정확히는 싸운게 아니고 나 때문에 오빠가 화가 났었지.. 평소라면 바로 업히고도 남았을 넓은 등판에 쉽사리 몸을 맡기지 못했다. 가만히 내가 업히길 기다리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문태일은 바보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항상 자기보다 나를 먼저 생각한다. 지금도 봐, 아직 화도 다 안풀렸는데 내가 걷지 못하니까 바로 등을 내주려 하잖아. 나는 오빠 속만 썩이는데, 이런 내가 뭐가 예쁘다고.
“..괜찮으니까 업혀도 돼.”
여전히 내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있는 문태일의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오빠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건가 싶었다. 결국 한참을 머뭇거리다 오빠의 목에 손을 둘렀다. 미안해서라도 업힐 수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찌릿찌릿 쥐가 나버린 다리 탓이었다.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저 문태일의 따뜻한 품이 고파 덥석 업힌 철부지가 아니고 싶었다.
언제 그친 건지 사납게 내리던 비는 온데간데 없었다. 습기만 가득 찬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정문을 나갈 때까지 문태일과 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물론 내가 생각하던 상황이 아니었다. 난 오빠를 보자마자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막상 오빠와 붙어있게 되자 입도 붙어버렸는지 영 쉬운게 아니었다. 속으론 한숨을 백번도 더 쉬었다. 나는 바보인가에 대해 고민할 차례인가.(진지) 이런 내 사정을 아는지 오빠의 동그란 뒷통수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왜 집에 안 가서 이 난리냐고 화라도 내주면 좋을텐데.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문태일은 그렇게 나를 업은 채로 묵묵히 걸었다. 이 숨 막히는 침묵을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얼른 사과를 해야했다. 문태일의 어깨춤에서 떨어지는 교복자락을 손으로 꾹 쥐었다. 오빠. 공중에 첫마디가 나갔다. 문태일의 걷는 속도가 조금은 느려진 것도 같다.
“미안해….”
“..”
“오빠 그러고 간 후에 혼자 생각해봤는데..그냥 너무 미안해..”
한마디 한마디 내보낼수록 오빠의 교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꺼내보니 저게 다였다. 하긴 내가 미안하단 말 말고는 무슨 할 말이 더 있어. 그저 저 짧은 몇마디에 꾹꾹 눌러담은 내 마음을 오빠가 알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슬쩍 오빠의 반응을 살폈다. 잠자코 내 말을 듣기만 하던 문태일의 머리카락이 저녁 바람에 흐트려질 때 즈음, 긴장했던 마음을 녹이는 소리가 귓가에 다가왔다.
“나는 여주야, 진짜 안 그럴려고 했거든.”
“..”
“내가 오빠고, 너랑 재현이랑 소꿉친구인거 뻔히 아니까 재현이만큼은 질투하지 말자 엄청 다짐 했었어.”
교복을 쥐고있던 손을 풀고 문태일의 목을 느슨히 감싸 안았다. 아까의 냉랭함이라곤 전혀 없는 목소리. 오빠는 그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코끝이 찡 달아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그 다짐보다,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큰가봐.”
“..”
“어떡하지 여주야.”
느리게 걸음을 내딛는 오빠가 허공에 내뱉은 말은 결국 나를 울리고 말았다.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 나는 오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말을 끝낸 문태일은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잔뜩 당황하며 발을 멈췄다. 왜 그래 여주야, 왜 울어. 그 걱정어린 말 사이로 나는 울음 섞인 소리를 내보냈다.
오빠 잘못 하나도 없어. 내가 바보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런 말을 했다.
2014년 겨울. 김여주, 고등학교 3학년 입학 전.
문태일이 졸업을 했다.
“안 믿겨..”
-너 그 말 지금 열다섯 번째야.
“오빠를 어떻게 대학교로 보내..!”
-그 말은 열일곱 번째.
나는 고3이라는 헬게이트 앞에 서 있었고, 오빠는 대학교 새내기라는 타이틀 보유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태일은 수시로 H대를 합격했다. 평소 간절히 원했던 보컬과였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은 문태일이 합격 소식을 알리며 다짜고짜 나를 안았을 때. 그때가 기억이 난다. 우리 오빠 H대 간다고 마냥 기뻐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제 이 지긋지긋한 학교에 문태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럼 나 이제 무슨 맛으로 학교 다녀...(말잇못)
그럼에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졸업식에 참석했다. 새벽 감성으로 꽉꽉 채운 편지, 얼굴만한 꽃다발과 함께 졸업 선물로 사둔 시계를 고이 모시고 졸업식장에 들어갔을 땐, 환하게 웃고있는 문태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오빠에게 걸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었지. 저 사람이 어떻게 스무살이야. 어떻게 성인이야..!
“문태일, 졸업 축하해!”
그런 축하말과 함께 가져온 선물을 한아름 문태일의 품에 안겨준 그 찰나의 순간을 다시 떠올리며 수화기 너머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정수정에게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오빠가 졸업을 했다구…. 내 말에 정수정은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 화면이 깜빡이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미안, 나도 이런 찌질한 내가 싫다 친구야..☆
전화도 끊김 당했겠다, 침대 위로 던지려 한 핸드폰이 별안간 진동했다. 다시끔 밝게 빛난 화면에 정갈하게 적힌 이름 석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문태일. 오빠가 보낸 문자다.
[집 앞인데.]
[잠깐 나올래?]
연달아 온 두개의 문자를 한번 읽고 또 읽은 나는 상황 파악을 한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질끈 묶고있던 머리를 풀었다. 색이 없던 입술에 틴트도 한번 바르고, 윗옷을 대충 걸쳐 입고는 바로 집을 나갔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러 갔던 문태일의 첫 연락이었다. 잘 들어왔다 문자 한 통만 보내줘도 되는데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로..(의심미)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몇 발자국 걸어가자 현관 앞에 서 있는 문태일이 보였다. 오빠! 그를 불렀다. 내 소리에 몸을 돌린다. 씩 올라가는 저 입꼬리는 언제 봐도 참....좋다.....^^
“가족들이랑 좋은 시간 보냈어?”
“응. 너는 밥 먹었어?”
“먹었지~ 근데 이 시간에 왜 바로 집 안가고..안 피곤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옅게 떨자, 문태일이 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팔을 벌려 날 안아왔다. 그 품에 안겨 고개를 슬쩍 들었다. 바로 위에서 날 내려다보던 문태일과 눈이 마주쳤다. 오빠는 말 없이 고개를 젓는다.
“오빠 완전 따뜻하다.”
겨울의 밤은 추웠다. 나도 모르게 더 깊숙히 품을 파고들었다. 냉기를 한가득 담은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문태일은 그런 날 가만히 보기만 한다. 그러고보니 술 냄새 같은 알콜향이 맡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졸업했다고 어른들이 술 한잔씩 주신거 받아 마신 건가? 문태일의 가슴팍에 코를 대고 잠시 킁킁 후각을 곤두세우며 말했다. 오빠 술 마셨지! 꽤나 예리했을 내 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갑자기 왜 아무 말도 안 하나,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 앞에 놓여진 얼굴이 다가와 입을 맞췄다. 그 동안 했던 짧은 뽀뽀와는 다른 입맞춤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문태일의 옷자락을 꾹 잡았다. 놀란 마음에 두어번 깜빡였던 눈을 조심히 감았다.
문태일과 연애한지 일 년.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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