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p de Foudre 16
(부제: Happily ever after)
갑자기 술이 확 깼다. 아냐, 설마.... 너일 리가 없잖아? 고개를 들어 보니, 세상에서 가장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찬이가 보였다.
야무지게 맨 배낭끈을 꽉 쥔 손이 참 살벌했다. 아, 나 진짜 제대로 망한 것 같다. 회복 불가능한 흑역사를 제대로 만든 기분이랄까?
벙 찐 표정의 전원우도, 전원우를 매섭게 노려보는 찬이도. 정말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설명 좀 해 봐."
".......하하."
"당신 뭐야? 왜 우리 누나랑 그러고 있어?"
"......."
왜 그러고 있겠니, 찬아. 근데 이 시간에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알 수가 없네.
찬이의 무게 있는 한 마디에 전원우는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고개를 떨구며 우물쭈물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렇게 머리를 몇 번 쓸던 찬이가 당당하게 도어락 비밀 번호를 눌렀다.
"누나 비밀번호 맨날 0000으로 해 놨었잖아."
"......그, 그랬지."
"이젠 기억력도 많이 좋아지셨나 봐요?"
"......."
"그리고 굉장히 방탕하게 살고."
의도치 않게 집 안에 세 명이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 아, 집 좀 치워 둘 걸.
예전에 전원우가 두고 갔던 후드티가 바닥에 떨궈져 있었다. 그걸 본 찬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나는 이유 모를 죄책감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이름은?"
"......나...요?"
"......."
"나는...전, 원운데."
"몇 살?"
"너희 누나랑 동갑....."
살다 살다 전원우 기가 눌려 보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싸가지 없는 부잣집 도련님 말투로 호구 조사를 시작하는 찬이였다.
내가 전원우였으면 한 마디 했을 법도 한데, 거기에 또 잔뜩 긴장해서 해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원우다.
"물론 형이 누나보다 훨-씬 아깝지만."
"야. 너 진짜."
"그래도 이렇게 밤에.... 그러면 됩니까? 네?"
"......."
"......근데 너는 왜 지금 여기 있는데?"
참다 못해 찬이에게 물었다. 무슨 심문 당하는 느낌이야.... 부끄러움이 밀려오면서 미칠 것 같이 달아오른 볼을 숨기고 싶었다.
왜 여기 있냐는 말에, 찬이는 간단 명료하게 친구랑 놀다가 늦어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려고 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친히 엄마가 주소를 알려 줬다고도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예고 없이 오는 건 곤란해!
"아직 고등학생이야?"
"곧 있으면 스무 살이거든요."
"아무튼 아직 고등학생이네."
"근데요?"
"공부하느라 힘들겠다."
심호흡을 몇 번 하던 원우가 내놓는 말이라고는.... 정말 삼촌 마인드의 멘트였다.
찬이 공부 더럽게 못 하는데.... 몰랐구나. 하긴 알 리가 없지. 근데, 힘들겠다라는 말이 꽤나 깊숙히 들어왔는지,
좀 유해진 눈빛으로 전원우를 바라보는 찬이였다.
"......네."
"그래도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겠네. 그치?"
"........"
"나중에 오다 가다 필요하면 써."
"......돈으로 때우려는 거에요?"
전원우가 지갑에서 신사임당 두 장을 꺼냈다. 난 보았지. 흔들리는 찬이의 눈빛을.
굉장히 벅차오르는 눈빛을. 워낙에 용돈을 조금 받고 조금 쓰는 찬이라 돈에 욕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차갑게 내뱉어진 말과는 달리 찬이는 거의 감동에 겨워 울고 있었다.
너도 똑같은 속물 새끼야.
"아니. 진짜 응원 차원에서."
"그러면 뭐 좋아할 줄 알았어요? 좋아할 줄 알았다면 크나 큰 오예!"
"......."
"매형."
"........"
"우리 누나가 좀 많이 모자라도 잘 부탁해요. 사랑해요."
*
나는 지금 굉장히 속상하고 속상하고 또 속상하다. 누가 봐도 지금 전원우는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보면 딱 알지, 너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거 말야.
"아, 진짜 미안해. 나 오늘은 진짜 일이 있어서. 오래 전부터 약속 잡혀 있었던 거라...."
".....그래. 그럼 빨리 가서 일 봐."
거짓말. 정말 새빨간 거짓말이다. 며칠 전부터 오늘은 일찍 가서 영화 보자고 했었으면서, 무슨 오래 된 약속이야.
전원우한테 실망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나한테 다 티나는 표정으로 거짓말을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겠거니, 하는 마음에 가만히 눈 감아 주었다.
전원우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괘씸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전원우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슬슬 피어오르는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내며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렸지만 전혀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깜빡이는 커서가 얄미워 창을 닫아 버리고 책상 위에 한숨을 쉬며 엎드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세봉 씨 무슨 일 있어요? 맨날 방실 방실 웃고 다녔었던 거 같은데."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닌 거 같은데.... 오늘 보니까 전 팀장님 하고도...."
"아니, 형은 눈치라는 게 존재하질 않나 봐요?"
"결혼한다잖냐. 좋을 만도 하지. 저 새끼 저거.... 마음에 안 들어."
누가 날 또 건드리나 했더니 역시나 이석민이었다. 진짜 죽여야 돼. 저거는.
지 딴에는 걱정을 해준다고 한 거겠지만 나한텐 거의 방화범 수준의 행위였을 뿐이다.
결국 나의 구세주 승관이가 저지를 했고, 권순영 씨가 한 술 더 떠 줬다. 아, 근데 결혼해요?
"결혼...하세요?"
"아, 아직 사람들한테 다 말은 안 해 놨는데.... 곧 말씀들 드리려구요."
"와, 정말요? 식은 언제쯤 올려요?"
"올 가을 쯤...? 아니면 늦여름이요."
"축하해요.... 그럼 조금 있으면 애 아빠 되시겠네요.... 와...."
갑자기 생각이 난 건데, 이석민이 아들을 낳는다면 정말 볼만 할 거 같다.
아빠를 똑 닮은 아들.... 세상에 이석민이 두 명이나 존재한다면 그건 재앙이 아닐까 싶었다.
난 나름 축하를 해준다고 해 줬지만 저 부석순 세 명의 표정이 참.... 애매모호했다. 왜들 그래요, 왜!
"오늘 정말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요."
"......."
"설마 뭐.... 갑자기 전 팀장님이 약속을 깼다던가 그래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우리가 이런 거 막 말해도 되나. 아.... 좀 그런가?"
"뭔데요."
뭔갈 알고 있다는 듯한 세 명이었다. 계속 이거 말해도 돼? 라고 말하는 게, 심상치 않은 거 같았다.
무슨 일을 보러 갔든 신경 안 쓸 거라고 다짐했지만,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무 것도 아닐 거야,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회장님께서 원래 미국에 계셨거든요."
"......."
"오늘 오셨대요. 팀장님 보러."
"......."
"이렇게 막 말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경영권 때문에 온 건 아니라고 모두 알고는 있어요."
"......."
"아무튼, 그래서 하루종일 전 팀장님이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
마냥 기다린다는 거.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언제 올 지도, 오는 게 맞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는 나다.
혹시 불편해 할까봐,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올까봐 아파트 주변만 맴맴 도는 나였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을까, 아버지 만난다는 거. 굳이 말할 것도 아니었나.
전원우가 아버지를 불편해 한다는 것. 가족 얘기를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난 전원우가 가족 얘기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학생 때도.
그래서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었는데.... 오늘 아버지가 한국에 오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꽤나 지났을까, 전원우와 전원우 아버지로 보이는 분의 인영이 보였다.
분명히 아무도 없던 로비에 사람이 두 명이나 들어왔는데, 전보다 더 조용해 지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두 부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전원우 표정도 딱딱했다.
아, 어떡해. 내가 무슨 깡으로 여길 온 거야, 대체. 그냥 빨리 가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
이럴 때는 꼭 느린 전원우가 제일 빠르다. 그 사이에 나를 어떻게 봤는지. 내 손목을 붙들은 손이 참 차가웠다.
그리고 전원우의 표정은, 내가 싫어했던 그 때의 그 애처럼 똑같이 차가웠다. 괜한 일을 저지른 걸까.
뜬금 없이 나타난 것도, 눈치 없이 기다린 것도 다 내 잘못인데, 그냥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원우야."
"......네, 아버지."
"누구니?"
원우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은은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
그와는 달리 딱딱한 원우였다. 아버지의 물음에, 원우는 내 손을 놓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아버지한테는 한번도 말씀 안 드렸었던 거 같은데."
"......3년 동안 너가 살아 있는 줄도 몰랐는데 새삼스레."
"여자친구에요. 김세봉."
그리고 전원우는 한 술 더 떴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라고 하셨었잖아요."
"........"
"아버지처럼 살고 싶어도, 못 살아요."
"......."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
지금, 엄청난 적막이 흐르고 있다. 시계를 보니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10시간은 지난 기분이었다.
말이 없는 원우는 여전히 매서웠다. 왜 너가 우리 집 앞에 있냐며 차라리 다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원우가 숨기고 싶은 모습을 들춘 것만 같아서, 계속 마음이 아팠다.
"아까 거짓말 한 거 미안해."
"......."
"아버지, 만나러 간다는 거 말 못 해서 미안해."
"......그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
"너 나한테 한번도 가족 보여준 적 없잖아."
"......"
"무, 물론.... 내가 함부로 뵈고 싶다고 해서 뵐 수 있는 분들도 아니시지만.... 그래도."
원우가 내 손을 잡았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따뜻한 느낌이다. 깍지까지 끼더니, 원우가 한숨을 쉬곤 운을 띄웠다.
얘기할 만한 가족이 아니었어서.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어."
"......."
"태어나자마자, 난 도우미 아주머니가 맡아 키우셨어. 그러다 언젠가부터 혼자 계속 있었고."
"......."
"엄만,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웠고 아버진 그걸 알면서도 엄마를 내치지 못했어."
"......."
"엄마를 사랑했으니까."
"......."
"난 한번도 사랑받았다고 느껴본 적 없어. 엄마가 나한테 하는 말은 다, 너 혼자 알아서 하라는 거였어."
"......."
"어리광 부리지 말고, 내가 알아서 다 하라고. 실수하지도 말고, 도와달라고 하지도 말라고. 성가시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기 미안한 이야기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옛날 이야기들을 꺼내는 원우가, 슬퍼 보였다.
사랑 받은 적 없다는 말이, 그렇게 가슴을 푹 찌를 줄 몰랐다. 그렇게 원우는 나에게 생채기들을 보여줬다.
"엄마가 안 미웠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미웠어. 어렸을 땐데, 난 돈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어."
"......."
"남들이 누구 좋아한다는 거라던가. 그런 거 다 우습다고 생각했어. 그런 건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
"그래서 엄마랑 결혼한 아버지가 불쌍했어. 아버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왜 사랑을 믿냐고."
사랑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말도.
남들 눈엔 완벽해 보였을 지 모르는 전원우의 모든 게 다 나에게는 아파 보였다.
동정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원우를 안아주고 싶었다. 덤덤하게 늘어놓았던 말들이 주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원우의 목소리도.
"너는 나를 사랑해 줄거지?"
"......원우야."
"떠나지 않을 거지?"
"........"
"행복하자, 계속 둘이서."
"......."
"너가 나한테 너무 큰가봐."
그냥, 말 없이 원우를 안았다.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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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게 얼마만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
넘 반가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다리느라... 저를 잊으셨을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8ㅁ8
작가를 매우 쳐라... 이제 쿱데 포드레도 1화! 밖에 남지 않았네요.
그에 반해 너무 기다리게 한 시간이 긴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ㅠㅠ
원우야,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해 ! 복덩어리 ♥
암호닉 |
일공공사 딸기찹쌀떡 여남 봉구 달마시안 흰색 봄나무 |
그럼 다음 이 시간에 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