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아저씨
step 1
미국 유학 생활은 나한테 별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에서 공부 잘한다고 상을 주든, 말든.
나와 정말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계속 혼자가 되어 갔었다.
부모님 직장 때문에 억지로 오게 된 미국, 나는 결국 혼자 귀국하게 되었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끄떡 없었다.
내가 괴로운데 어떡해요. 그리고, 혼자 산 지 벌써 반년 째다. 가족은 없지만, 그래도 그 때보단 훨씬 행복했다.
그런데, 요즘 늘 비어 있던 옆집에 누군가 새로 이사를 왔다.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을까.
step. 2
"오늘은 되게 늦게 나가시네요."
"늦잠 자서 그렇지."
"일찍 일찍 좀 자요."
"너나 좀 일찍 자라. 키 언제 클래."
"이제 성장판 닫혔어요."
잘났다, 잘났어. 내 머리를 콩 쥐어박는 아저씨였다.
사실 학교 이렇게 일찍 안 가도 되는데, 출근하는 아저씨 보고 싶어서 일찍 일어나는 거다.
와, 진짜. 더울 텐데 매일 아저씨는 수트 차림이었다. 이러니까 내가 반해요, 안 반해요!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거 알아요?
"뭘 그렇게 자꾸 쳐다봐. 나 어디 이상해?"
"아니, 아니."
"그러면?"
"에이, 알면서 자꾸 그렇게 물어볼 거에요?"
"진짜 모르겠는데?"
"잘생겨서."
조그만 게. 아저씨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 몸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아저씨가 우주에서 제일 잘생겼어요.
원빈 저리 가라야, 내 눈에는.
"또 버스 타고 가야 돼?"
"그렇죠."
"데려다 달라고 그럴 거지, 또."
"늦었는데 데려다 줘도 돼요?"
"안 데려다 주면 또 삐질 거잖아."
흐흐. 역시 아저씨 만한 사람 또 없어.
자연스럽게 지하 주차장으로 뽈뽈뽈 내려가 조수석에 탔다.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아저씨가 나를 보고 또 픽 웃었다. 아저씨는, 매너도 짱이고, 얼굴도 짱이고....
"너 같은 여동생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요?"
"물 떠오라 시키게. 혼자 사니까 심심해."
빈정 상하게 하는 것도 최고로 잘 한다.
step. 3
"내가 여자애 혼자 사는 거 위험하다고 했어."
"그럼 어떡해요. 나 미국 가기 싫단 말이에요."
"허이고, 겁 없는 아가씨를 봤나. 봐봐, 이런 거 집에 남자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살 많이 안 찐 것 같은데.... 침대가 무너져 버렸다.
가구 고를 때, 그냥 제일 싼 거 사면 된다고 말한 게 내 잘못이었다.
손재주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가 조립식 가구를 산 건.... 정말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저씨네 집 문을 두드렸더니, 아저씨가 공구함을 들고 우리집에 왔다.
"애초부터 조립이 잘못 돼 있었어서 그러네. 헐거워서 떨어진 거야."
"오오...."
이것 저것 손보는 아저씨를 보고 순간 이상한 생각을 해 버렸다. 넌 정말 쓰레기 새끼야....
힘...줄이 이렇게 야시시할 줄은 몰랐네. 더워 죽을 것 같다. 아저씨가 제일 위험해요.
"아...아저씨. 근데 있잖아요."
"응?"
"저.... 아저씨 여, 여자친구...있어요?"
"왜?"
"아니, 그냥 있을 거 같아서요...."
으, 또 괜한 거 물어본 거 같다. 피식 웃어 보인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진짜 있나 보네.... 없을 리가 없지, 아저씨한테. 뭘 기대한 거야. 고맙다는 인사로 대충 아저씨를 보내고 문을 닫으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문고리를 잡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자친구 없는데."
"........"
"그런 게 왜 궁금할까, 우리 ##쎄봉이는?"
step 4
아저씨랑 나랑 약속한 게 하나 있었다. 약속이라 하긴 뭐하고, 그냥 내가 일방적으로 요구한 거.
낼 모레 수능인 나에게 동기 부여를 하기 위해서 부탁한 거였다.
"아저씨, 저 수능 잘 보면 소원 하나만 들어 줘요."
"무슨 소원?"
"그거는 비밀이죠!"
"알았어, 들어줄게."
"무르기 없어요."
"응, 대신 진짜 잘 봐야 돼. 내가 기도해줄게."
아저씨한테 오늘 한 번 더 반하고 갑니다. 기도해 주겠다는 말에 왜 그렇게 심장이 뛰었는지 모르겠다.
아저씨는 정말 나를 잘 도와줬다. 나한테 녹용도 사다 줬고(인터넷에 쳐 보니까 엄청 귀한 거였다.),
모르는 게 있으면 척척 알려주기도 했다. 아저씨는 정말 만능인 거 같다. 내 마음 알아채는 것만 빼고.
step 5
"아, 맞다. 근데 너랑 맨날 집 같이 오는 애는 누구야?"
"아, 찬이요?"
"이름이 찬이야?"
"이름이 외자에요. 풀네임 이 찬."
"아. 되게 친한가보네. 성도 떼고 부르고."
오. 꽤나 가시 박힌 말에 입꼬리가 미친듯이 올라갈 뻔했지만 가라앉혔다.
아저씨 오늘따라 되게 귀엽네요. 좀 놀려볼까, 싶어서 엄청엄청 친하죠, 하고 말했다.
"소울메이트 정도?"
"......."
"찬이 없으면 세상을 못 살아갈 지도 몰라요."
사실은 이찬하고 견원지간이지만 애써 포장해 보았다. 나 김세봉이는 오늘부로 뻥쟁이임을 선언합니다.
점점 안 좋아지는 아저씨 표정에 속으로는 아주 나이스를 불렀다. 흐흐흐.
"남자랑 여자 사이에 친구 없다, 알지?"
"있을 수도 있죠. 저랑 찬이처럼."
"아, 그래도 안 돼. 앞으로 같이 독서실 끝나고 오지 마."
"혼자 오면 무섭단 말이에요."
"그럼 나한테 전화해. 데리러 갈게."
"아저씨 귀찮잖아요."
"고3이 공부를 해야지 무슨. 고3 보호 차원이야. 딴짓하지 말라고."
step 6
수능이 끝나고, 아저씨가 보는 가운데서 가채점을 했다. 후하, 후하....
제발 최저만 맞추게 해 주세요. 하느님.... 면접 보러 가는 날에 아저씨가 데려다 주기까지 했는데.
최저 못 맞춰서 광탈하면 앞으로 아저씨 얼굴을 어떻게 봐.
"녹용값 해라."
"네엡."
진짜 긴장되는데. 채점을 해 나가니 내가 있는 곳은 어디든 영원히 비 올 것만 같던 시험지는 눈을 내리고 있었다.
이게 바로 아저씨 효과인가요.... 대박.
"이 정도면 등급컷 볼 필요도 없겠다. 그쵸?"
"수고 많았어."
"그럼 빨리 소원 들어줘요."
"뭔데?"
"12월 31일 날 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약속 잡기 없음."
"그리고?"
"어.... 어, 그니까."
"빨리 말 안 하면 안 들어준다."
"스, 승철오빠라고 부르게 해 줘요."
오늘도 흑역사 제대로 남기나요.... 한번도 못했던 말 한 번만이라도 하게 해 줘요.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피식피식 웃는 아저씨가 보였다. 왜요, 나 진지해요, 정말로!
"오빠?"
"소, 솔직히 8살 차이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
"안 돼요?"
"나 떨려서 안 돼."
step. 7
"오오. 조금 있으면 나 스무 살이에요!"
"그래서 신나?"
"응응. 완전 신나요!"
당연히 신나죠.... 나 이제 어린애라고 못 부를 거 아니야. 싱글벙글 웃자, 아저씨도 피식 웃었다.
왜 만날 그렇게 피식피식 웃어요. 내가 그렇게 웃긴가.
"아저씨는, 왜 그렇게 맨날 피식피식 웃어요. 웃을거면 좀 크게 웃던가."
"왜, 싫어?"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귀여워서 그러는 건데."
"......."
"어, 볼 빨개졌다."
자꾸 그렇게 놀릴 거에요? 내 마음은 하나도 모르면서. 분명히 아저씨 입장에서 나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 정도 될 거다.
나는 아닌데. 동상이몽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내가 아저씨를 생각하는 거의 반 만이라도 아저씨가 날 생각해준다면 좋을 텐데.
12시 되자마자 마실 거라고, 아저씨한테 소주를 사달라고 했는데 남자랑 둘이 술 마시는 거 아니라고 제주사랑 감귤사랑을 사 온 것만 봐도 뻔하다.
"아저씨, 아저씨."
"........"
"승철오빠."
".......풉."
"나 소원 하나만 더 들어주면 안 돼요?"
"뭔데. 말해봐. 듣고 내가 알아서 필터링 할게."
"이거 진짜 진지한, 진지한 거에요!"
술이라도 있었으면 술의 힘을 빌렸겠지만, 맨정신에 그냥 한번 질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티비에서는 제야의 종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중계해 줬고, 곧 있으면 새해가 될 거라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럼 내 소원 먼저 들어줘."
"......뭔데요?"
3,
"아껴줄게."
2.
"계속 이렇게 같이 있자."
1.
입술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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