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07
사랑에 단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미동도 없이 그저 저를 쳐다보기만 하는 여주에, 얼굴에 상처를 가득 달은 민규가 멋 쩍은 듯 뒷머리를 탈탈, 털었다. …권순영 때문에 그래.
"……"
"……"
옥상에 앉아 선선한 바람의 냄새만 맡은지 20분이 흘렀을까, 좀처럼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민규에도 여주는 묵묵히 그를 기다려 줄 뿐이였다. 상처 가득한 민규의 얼굴을 보자마자 짐작했다. 권순영이구나. 하아, 옆에서 들려오는 답답함 가득 담은 민규의 한숨에 여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단 미안해." 영문도 모른체 민규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여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웠어. 이어지는 민규의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 학교 가서 수업 꼬박꼬박 듣는 꼴이 너무 오랜만이라."
민규가 손가락을 뻗어 이제 막 교문을 통과하는 노란머리, 순영을 가르켰다. "…10년 됐나, 알고 지낸지." 10년. 나는 몰랐던 권순영의 과거는 김민규는 함께 걸었다. "처음으로 싸웠어." 내가 봤던 녀석의 진짜 순수한 웃음. 김민규는 10년이라는 시간을 걸으면서 몇번, 아니 몇년을 보았을까.
"너 때문에."
…그리고 넌 왜 10년을 함께 했던 김민규와, 이제 말을 튼지 한 달 밖에 안된 나.
왜 나 하나 때문에 김민규 얼굴에 상처까지 내며 싸운걸까.
"아, 널 탓 하겠다는 건 아니야."
"……"
"…아- 솔직히 너 탓하고 싶어."
씨이…. 아이처럼 입을 대빨 내민체 앞머리를 탈탈 터는 민규의 모습에 여주는 작게 웃음을 흐트러뜨렸다. 야, 왜 웃냐? 웃음이 나와? 나름 무서운 목소리를 내며 명령조로 내뱉은 민규의 말도 여주의 앞에선 속수무책이였다. 작게 흘리듯, 계속해서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여주에 민규는 기가 찼다.
"니네가 왜 친구인지 알 것 같아서."
"……"
"똑같네 둘이."
"…당연하지, 몇 년 친군데." 쑥스러운듯 괜히 머리를 만지작 거리는 민규의 모습에 여주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운동장 한 가운데서 하품을 하는 순영을 바라 보았다. 어젯 밤, 순영이 그랬다.
"김민규랑 싸웠어."
"…뭐?"
얼굴에 난 상처, 분명 누구랑 싸워서 난 상처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상대가 김민규라니. 적잖치 않게 놀랐지만 애써 표정관리를 한체 물었다. 아니 왜?
"너 때문에."
"……"
순간적으로 한대 칠 뻔 했다. 이것들이 왜 지네 싸움에 나를 끌어들여.
소중한 사람이 소중한 사람을 건드는데, 그게 그렇게 화나더라, 누가 뒷통수를 딱. 하고 때리는 기분이였어.
도통 이해하지 못 할 만한 얘기를 꺼내놓는 순영에 여주는 그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 짧은 시간동안 생각을 해봤어, 내게서 중요한건, 참을 수 없는 뭘까.
"그리고 결론이 나서."
"……"
"김민규 얼굴을 남자답게 퍽! 하고 쳤지."
자랑이라는 듯, 터진 입술을 웃어 보이며 말하는 순영에 여주는 결국 그를 따라 실 없이 웃음이 터졌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음 그건 나중에 자신이 생기면 말 할꺼야. 뭐야 치사하네, 권순영.
"똑같지는 않아도, 그 사람 바로 밑 단계에 있을때."
"……"
"어느정도 당당해졌을 그때, 말할게."
"왜, 한 단계 위에서 말하지."
"싫어."
"……"
"난 그 사람을 이기고 싶은게 아니야."
알겠냐? 검지 손가락으로 코를 톡, 건드려오는 권순영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 김여주 코 기름 쩐다? 장난스레 검지 손가락을 제 옷에 비비고 도망치는 순영에 여주는 한 밤중임을 망각하고 큰 소리를 내며 순영을 쫓아 달려갔다.
"……"
"……"
생각에서 헤엄쳐 나온 여주와 민규가 말 없이 운동장을 가로 지르는 순영을 바라 보았다. …화해는? 여주가 물었다. …몰라. 심통난 아이 마냥 입을 대빨 내밀은 민규가 고개를 작게 저으며 말했다. 뭘… 어떡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세상에서 가족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존재. 하지만 물거품 마냥 한 순간에 내 곁에서 사라질 수 있는게 친구다. 민규는 그걸 잘 알기에 손을 대는 것 조차 조심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 솔직히, 너랑 권순영 진짜 싫었어."
"뭐?"
"싫기보단 한심했지."
"……"
"나중에 커서 뭐가 될까."
"……"
"난 너네가 고민같은건 할까, 싶었어."
"……"
"근데 최근 들어 보니까."
"너네도 뭐 별거 없구나 하는걸 느껴." 여주가 민규와 눈을 마주한 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얘가 지금 욕을 하는건가, 칭찬을 하는건가. 잔뜩 찌푸려진 민규의 미간을 검지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밀며 여주가 말을 이었다. 너네도 하면 된다고. 뭐든지. 체면 구기게 어벙한 표정을 짓는 민규 뒤로 엉덩이를 탁탁 털며 일어난 여주가 시원한 가을 바람을 뒤로 한체 옥상을 빠져 나왔다.
"……"
한참을 여주가 빠져나간 자리만 바라보던 민규가 헛웃음을 지으며 수평선으로 보이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아, 권순영이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네.
"뭐야. 어디있었어?"
"일찍 왔네?"
"그럼, 당연히 일찍 와야지."
자랑스럽게 두 볼을 씰룩거리는 순영의 말에 여주가 못 말린다는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당연하지, 몇 년 친군데." …여주야? 무슨 생각에 그리 잠겼는지, 제 부름에도 정신을 못차리는 여주를 작게 흔들은 순영이 의아한듯 물었다.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다 아물지 않은, 입가에 새겨진 순영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던 민규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것까지. …너네를 어떡하면 좋을까 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권순영."
"어?"
"…이따 체육시간에 나 좀 봐."
말 끝으로 수업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책만 바라보는 여주에 순영은 수업시간 내내 그저 예전처럼 아무말 없이 머리를 괸체 여주를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김민규가 그래?"
미안! 멀리서 부터 사과하며 달려오는 아이에 순영이 저와 여주가 있는 쪽으로 굴러 들어온 공을 아이 쪽으로 약하게 던졌다. 받은 공을 들고 제자리로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마."
"…내가 언제 또 자존심을 세웠다고."
제 옆에 앉아 다리 사이로 바람 빠진 공을 퉁퉁, 의미없이 튀기는 순영을 바라보았다. …근데 왜 싸운건데. 평점심을 잃고 순영 곁에서 떨어져 멀리 굴러가는 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널 들먹여서. 고개를 돌린 순영과 눈이 마주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순영의 눈동자 속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에 여주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사과했구나, 아까.
"한 두번이겠냐 걔가."
"한 두번이 아니라서 때린거야."
난 경고 했었어. 단호한 음성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체 다시 그 눈을 마주해야 했었다. …내가 뭐라고. 흘리듯 말한건데, 용케 말을 들은 순영의 눈이 한 순간에 날카로워졌다.
"김민규는 널 10년 넘게 봤었데."
"……"
"난 이제 고작 한 달 봤는데."
"……"
"…어떻게 그래?"
언제가 되든, 이유는 꼭 듣고 싶었다. 앞서 작은 한숨을 뱉던 순영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해봤는데, 사람 관계엔 단계라는건 필요 없는 것 같아."
"……"
"내가 이렇게 밑바닥에서 놀아도, 너의 바로 밑단계에 있지 않아도 지금 이렇게 마주보고 얘기하잖아."
"……"
"그래서 내 결론은 그래."
.
.
.
도통 이해하지 못 할 만한 얘기를 꺼내놓는 순영에 여주는 그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 짧은 시간동안 생각을 해봤어, 내게서 중요한건, 참을 수 없는 뭘까.
"그리고 결론이 나서."
"……"
"김민규 얼굴을 남자답게 퍽! 하고 쳤지."
자랑이라는 듯, 터진 입술을 웃어 보이며 말하는 순영에 여주는 결국 그를 따라 실 없이 웃음이 터졌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음 그건 나중에 자신이 생기면 말 할꺼야. 뭐야 치사하네, 권순영.
"똑같지는 않아도, 그 사람 바로 밑 단계에 있을때."
"……"
"어느정도 당당해졌을 그때, 말할게."
"왜, 한 단계 위에서 말하지."
"싫어."
"……"
"난 그 사람을 이기고 싶은게 아니야."
"내게 중요한 건 10년을 걸어 온 김민규가 아니라 한 달을 본 너여서 때렸고"
"……"
"참을 수 없는것도 10년 동안 옆에 있었던 김민규가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너여서 때린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