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09
"뭐, 뭐 챙겨야 되지?"
"...컴싸." 머리를 괸 체 여주가 순영을 신기하다는듯 바라보았다. 권순영이 시험도 치는구나. 성공한 인생이다 김여주.
"또?"
"볼펜."
"끝?"
오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주에 순영이 신이 난 듯 삐뚤빼뚤. 글씨가 적혀있는 포스트윗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애를 키우지 애를 키워." 헛웃음과 함께 들려오는 여주의 말도 순영을 말릴 순 없었다.
"자신있나봐 권순영."
"당연하지- 한 달 동안 고생했는데 잘 봐야지."
바라보는 밤 하늘을 배경으로 여태까지 권순영과 함께했던 도서관에서의 추억이 파라노마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고생. 참 아이러니한건, 녀석의 말과는 다르게 난 그 시간속에서 단 한번도 그 순간에 지쳐 있던 적이 없었다. 즐거워 할 시간도 모자랐다면 모자랐지, 그래서 그런가. 고생이라는 녀석의 말이 왠지 섭섭하게 귀 속을 파고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어 아냐, 가자."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차만 줄 지어 서있는 한적한 도로위에 녀석과 나, 둘 중 하나라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길도 이제 마지막인걸까. 정답은 내게 달려 있지 않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
"......"
눈이 마주쳤다. 쪽팔리지도 않는지 우린 뭔가에 홀린듯,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그저 서로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춥지."
"응."
그리고 두 눈이 동시에 예쁘게도 휘었다. 괜히 뱉은 말이 아니였다. 반대편에서 손이 뻗어왔다.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성격 급한 녀석이 헛웃음과 함께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우린 신나게 밤거리를 뛰었다.
"야, 뜨거워 천천히 먹어!"
"으, 데었어 여주야. 호 해줘."
"지랄 마."
단호한 내 말에 녀석은 애 마냥 입을 삐죽거리며 말없이 오뎅국물을 식혔다. 삐졌냐? 팔꿈치로 녀석을 툭툭 쳤다. 국물을 다 마신 녀석이 아주머니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더니 말 없이 포차를 빠져나갔다. ...저 새끼 저거 삐졌네. 따라 허리를 굽히곤 황급히 뒤를 쫓았다.
"...발걸음도 우라지게 빠르네."
"내가 뭐."
날이 섰다기 보단, 퉁명스러운 녀석의 말투에 작게 웃음을 흘리며 빵빵하게 튀어나온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야, 봐바. 어디 데었는데.
"......"
"...뭐."
"......"
"...뭘 봐."
"여주야."
"...너 진짜 예쁘다."
"아니 거기 말고 여길 쏴야지!"
"어디 어디!"
"와, 김여주 진짜 못 해."
"...사람이 한 가지는 못해야 좀 사람 답고 그런거야."
"맞아."
"……"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니 뭘 보냐는듯 영문도 모른체 "응? 왜?" 하는 소리나 내며 해맑게 웃어왔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게임장 안엔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어? 권순영!"
지금처럼 말이다. 남몰래 이마를 짚었다. 녀석에겐 나지 않는 담배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권순영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미간을 찌푸렸다는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마저 대화하란 의미로 턱짓을 했다.
"...어, 오랜만이네."
"와 진짜 오랜만이다. 너 요즘 왜 안 나오냐?"
"그냥 재미도 없고 해서."
단조로운 권순영의 대답에 흥미를 잃은걸까, 마침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리켰다. 쟤는 누구야? 뒤를 돈 권순영과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녀석이 나를 숨기듯 내 앞에 슬그머니 섰다.
"친구."
"저런 애도 있었냐? 처음 보는데."
"……"
"아, 잠깐만 쟤 걔 아니야? 찌질이?"
말 조심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권순영이 답했다. 찌질이, 나를 가리키는 말이였다. …나를 저렇게 말하고 다녔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체 권순영의 뒷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냐?"
"야."
"……"
"맞으면 어떡할래. 너 그때 김민규 나가 떨어진거 못 봤냐?"
"……"
"…아 왜 다들 주댕이를 나불거리고 다니지."
권순영이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살살 털었다. 가끔 남에게 절대 들켜선 안 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권순영이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사귀게 되면 어떨까. …차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할 수 없는 죄 같은 생각을 했었다. 나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였다. 거리낌이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가끔 가다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졌다. 권순영 주위엔 녀석을 원해 갖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난 녀석과 사귄다고 해도, 잃을게 없는 사람이였다. 근데 녀석은 그런 나 때문에 주변사람들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 여전히 권순영은 화가 난 듯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난 나 때문에 제 손으로 모든 걸 놓아 버릴 것 같은 권순영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
정적 속에서 도착한 우리집에 발걸음을 돌려 권순영을 바라보았다. 내일 시험 잘 봐,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새하얀 입김은 더해져 가는데 우린 그 입김만큼의 대화를 놓치고 있었다. 우리 이제 시험 끝나면 끝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입김도 무서워 입 조차 뻥긋하지 못했다.
"여주야."
"…어?"
"나 시험 못 보면 어떻게 돼?"
"…그럼 다음 시험기간때 또 나 만나줄꺼야?"
"…아니."
"……"
"…잘 봐도 만나 줄껀데."
개미 똥꾸멍만한 목소리였다.
"…이런 미친." 작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 다가 온 권순영이 내 몸을 세게 껴안았다. 내 어깨에 턱을 올린 녀석이 깊은 곳에서 부터 내 이름을 불렀다. "여주야."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경직 되 있는 내 몸을 느낀건지, 권순영이 기분 좋은 콧소리를 으흥흥- 내며 웃었다. 나 시험 기똥차게 잘 볼게. 녀석의 등을 감싸 안지도 못한 어쩡쩡한 팔이 아려 올 쯤 녀석이 말했다. 참 녀석 다운 말에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내가 푸스스 웃으며 그 등을 두 팔로 작게 토닥였다. 못 보기만 해봐.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있었을까, 점점 돌아오는 제 정신과 달아오르는 얼굴에 녀석을 밀어내려던 참, 타이밍 좋게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야."
"……"
"고생했어."
"……"
"…진짜 이기적인 말이겠지만, 난 그 시간 동안 지쳐있었던 적이 없었어."
뒷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였다. 녀석의 '고생'의 화살표는 자신이 아닌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탈함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정말로, 나 때문에 제 손으로 모든 걸 놓아 버릴 것 같은 권순영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