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엄마한테 다 말 할 거야."
"나중에 내가 다 말 할 테니까 봐주라. 응?"
"그럼 문 얼른 열어."
"금방 찾고 나서 열어줄게. 잠깐만."
방문 사이로 고래고래 소리치던 소진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자 석진은 주방 서랍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외출한 동안 둘이 밥이라도 사먹으라고 소진에게 주고 간 돈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아, 어디다 놨어. 주방은 물론이고 거실까지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놔도 도무지 나오지 않는 돈의 행방에 석진은 점점 짜증이 났다.
"야. 아니, 누나. 진짜 조금만 주면 안될까?"
"엄마가 너 오락하라고 준 돈 아니거든. 문 열으라고 했다."
순순히 넘어오지 않는 소진의 태도에 석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밥 내가 안 먹겠다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는 건지 어린 마음에 그런 그녀가 이해 되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구긴 채 집안을 한번 빙 둘러보다가, 아직 안들여다본 수납장을 발견하고선 아! 짧게 탄식을 내며 제 키보다 큰 수납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구구단도 아직 다 못 뗀 석진에게 수납장은 너무나도 높았다. 그는 누나라면 분명 여기 숨겼을 거란 생각에 화장대 앞에 있던 의자를 질질 끌며 가져왔다. 의자에 발을 디디고 서자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지만 꾹 참고선 수납장 문을 열었다. 조화로 된 화분 서너개와 책 몇 권이 안에 꽂혀져 있었다. 그는 그 중 가장 두꺼운 책을 꺼내어 페이지를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중간쯤 둔탁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찾았다!"
화가 났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의 표정이 일순간에 환하게 바뀌었다. 그는 베시시 웃으며 책 속에서 지폐를 꺼내고는 도로 책장에 꽂았다. 머릿속엔 조금의 죄책감과 함께 얼른 누나를 꺼내줘야겠다는 생각이 꽉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잠시, 어디선가 집안을 감싸는 낮은 소음이 일더니 그의 다리가 미친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심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당황스런 마음에 석진은 수납장에 달린 손잡이부터 찾았다. 그리고선 안정을 되찾기도 전에 그는 진동의 근원지가 제 다리가 아닌 의자, 더 나아가 땅바닥 전체임을 깨달았다. 주방의 그릇들이 모두 찬장에서 튀어나와 깨지고 복도에 두었던 책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석진은 그 사이에서 목에 피가 끓어오를 만큼 힘 주어 소리쳤다. 누나! 누나!…
한국땅에 일어났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대지진이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구조되지 않은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도 수많은 피해를 남겼다. 건물들은 층수 가리지 않고 모두 단번에 무너졌으며 깔려있는 사람들의 살려달라는 비명소리는 점점 사라져갔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친정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충격이었다. 거기 괜찮니? 이번에 지진 엄청 크게 났담서… 애들은 안 다쳤니? 유희는 나중에 다시 전화한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뒤 속도를 최대로 밟았다. 닫힌 슬라이드폰 위로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는 문자가 샘솟았다.
그녀는 제 눈을 의심했다. 이틀도 채 안 된 그 짧은 시간에 남편과 이혼하기 전 신혼 때 함께 설계까지 했던 그 추억 많던 집이 폭삭 무너져 있었다. 집 주변은 구조하러 온 인부들과 지진 후 폐허가 된 마을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로 북적였다. 유희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세상에. 세상에… 저 무거운 돌덩이들 속에, 제 손으로 골라 모양까지 다듬었던 저 쓰레기들 속에 아이들이 갇혀있었다. 죽어가고 있었다.
"집 주인 분 되십니까?"
"……."
옆에서 누군가 물어오는데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노을 다 진 늦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온통 하얬다. 소방관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뒤에 있던 제 팀원들에게 고개짓으로 눈치를 주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골든 타임은 지진의 경우 대략 72시간으로 보고있습니다만… 단독주택이고 하니 구조하는 데에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확신에 가득 차있던 소방관의 말과는 달리 도로 봉쇄로 늦게 도착한 장비 탓에 시간은 반나절이나 지체되었다. 유희는 집 주위에 주차해두었던 차 안으로 들어가 눈을 30분도 채 붙이지 않고선 다시 마당으로 나와 인부들 옆에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섰다. 다들 그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굴착기, 기중기, 포크레인까지 수십대가 동원되어 몇 시간이고 똑같은 자리만 머물었다. 구조 대상이 체구가 작은 아이 둘이다보니 위치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아 시간이 더욱 소요된다고 했다. 그 숨막히는 기다림 속에서 유희는 밥 한번 먹지 못 했다. 처녀 때 잠깐 성당 다닐 적 지녔던 묵주를 꺼내어 기도나 바쳤다. 무사하게 해달라고. 아이 하나라도 좋으니 구해달라고.
어느덧 30여시간 남은 골든 타임에 입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유럽에 머물고 있던 아이 아빠 역시 뒤늦게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안부를 물어왔지만 그녀는 차마 아이 둘이 저 안에 갇혀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치솟는 눈물을 꾹 삼킨 채 그녀는 나지막히 거짓을 고했다. 괜찮다고. 안 다쳤다고.
"찾았습니다!"
땀범벅으로 시멘트 사이에 파묻혀있던 한 소방대원의 외침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유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제치고 나아갔다. 이제는 저가 기쁜지 슬픈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다급할 뿐이었다.
은회색빛의 돌무더기 사이를 뚫고 비집어 나온 건 한 아이의 팔이었다. 쌍둥이인데다가 아직 성별 차이가 뚜렷하지 않은 어린 아이라 팔만 보고선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려 유희가 흙먼지 투성이인 손으로 눈가를 박박 비벼대었다.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것도 그 쯤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다들 기뻐한다기보단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서 계세요? 꺼내주세요, 얼른."
"…그게…"
"꺼내달라니까요?"
"정말 유감스럽지만… 둘 다 구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주위가 한순간에 숙연해졌다. 그녀가 재차 물었다.
"네?"
"나머지 한 아이의 추정 위치가 여기서 5미터 이내. 여길 끌어올리면 주위가 모두 무너져서 구조도 전에… 압사… 될 겁니다."
유희는 한 아이라도 좋으니 구해달라 빌었던 제 모습을 떠올렸다. 신이 모두 듣고 있는 걸까? 기도를 들어준 거라면 신은 선일까 악일까? 선인 척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척 교묘히 벌을 주려는 악은 아닐까? 그러면 여기서 누굴 살리고 말고를 선택하는 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아이를 택하든 저 아이를 택하든 모두 제게 주는 형벌임이 확실한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먼지는 씻겨나갈 생각은 않고 구정물이 되어 그녀에게 더욱 엉겨붙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싸늘하게 답했다. 꺼내주세요… 이 아이…
라퓨타
천공의 성
아슬아슬하게 예비종이 끝날 때 쯤이 되어서야 딱 교실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출석부에 체크 당할까 허겁지겁 뛰어온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김태형은 평소 운동과 거리가 있는지 그런 나보다 더 엄살이 심했다.
"너 진짜… 김남준… 따라서… 육상부 해라…"
내가 그의 말에 수업하러 들어오신 선생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웃자 김태형은 진심이라는 듯이 진짜. 하고 작게 말을 보탰다.
노트북을 키고선 급히 할 일이 있다며 선생님께서 자습시간을 주신 덕에 점심시간에 다 빼놓은 체력을 잠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밥을 안 먹은 탓인지 쪽잠밖에 잘 수가 없었다. 이윽고 느껴지는 무료함에 나는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옆에서 자고 있는 김태형 옆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아침에 나눠준 통신문 위로 시선을 옮겼다.
3월에 수학여행이라니. 3박 4일 씩이나.
대충 여행 코스를 살펴보고 있자니 불현듯 최진리라는 여자가 떠올랐다. 뭐하는 여자일까. 김석진 아플 때 같이 있는 정도면 많이 가까운가. 예전에 김태형이 말한 대로면 김석진은 분명 그 여잘 많이 싫어하고 있을 텐데. 전혀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분 나쁘게 웃는 게 방민아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지던 김석진의 모습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내게 무언가를 들켜서였을 것이다. 그건 최진리일 테고. 나는 그가 늘상 휴대폰을 지니고 사는 이유도,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김남준의 말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리고서?
…….
너 같은 애 잘 알지. 금방이라도 끝내버릴 것처럼 굴다가 나중에 가서는 갑자기 내 탓하며 돌아오는 최악.
그리고 그 날의 그 차디 찬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도, 모두 짐작이 되었다.
또 마주치면 맘 있는 걸로 알 거라고 했던 전정국의 그 말 덕에 나는 괜히 신경 안 쓰는 척 하면서도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아까 김태형이 오늘은 데려다 줄 수 있다면서 졸래졸래 따라왔을 때도 혹시나 전정국 보게 되면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질까 괜찮다 사양했던 건데. 분명 관심은 없는데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 능글맞은 표정이 이따금 떠오르는 것도.
하지만 주위를 잔뜩 경계하면서 집에 들어온 내 노력이 무색해지게, 전정국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방 불을 켜고 가방을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나를 제 손바닥 위에 두고 이리저리 갖고 놀으려는 그의 계획일 수도 있겠다고. 그렇다면 그는 성공일 것이다. 내 신경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게 목표였다면 말이다.
밀었으면 당겨야 한다고 전정국은 다음날 나를 찾아왔다. 타이밍을 어찌나 잘 잡았는지 하필이면 김태형이 가져온 빗자루가 석연찮아 잠시 교실로 올라갔을 때였다. 종례는 끝난 지 한참 지났고 8교시 역시 이미 시작했을 때라 건물 밖엔 학생들도 교사들도 없었다. 학교에서 여자애들 없이 혼자 있는 그의 모습은 아마 처음 본 것 같았다.
"집 안 가?"
이상하게도 그를 마주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어제 하루종일 그가 왜 안 나왔을지 궁금해 했던 게 생각나서. 지금도 혹여 그런 티가 날까봐 초조했다. 전정국은 예상대로라는 듯이 살풋 웃었다.
"어제 왜 안 찾아갔게?"
"……."
"하루종일 내 생각하라고."
했어?
장난스런 투를 보니 확실히 별 생각 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떠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바하고 있는 건 내 쪽이었다. 거짓말을 들키기라도 한 마냥 가슴이 쿡쿡 쑤셔댔다. 나는 김태형이 얼른 오길 바라면서 내 자신을 어르고 달랬다.
"그만해. 너도."
"어떻게 그래. 그럴 마음이 안 드는데."
전정국이 말을 마친 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문득 김태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새끼라고 했던 말. 여느 여자애들과 내 사이에 무언가 다른 점이 있어서 내게 이렇게까지 엉겨붙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나는 충분히 재미없어질 자신이 있었다.
"그럼 오늘 데려다줄래? 집에."
"……."
대답이 없는 게 적잖아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정도면 됐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교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그에게 어느정도 넘어간 척만 하면 시시하게 끝나는 간단한 것이었다. 건물 외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를 때까지, 전정국은 침묵을 지키다 내 뒤에 대고 그래. 기다릴게. 하고 말했다. 이유 모를 승리감이 들어 입꼬리가 씰룩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건물 안쪽에 가만히 서있는 익숙한 인영에 나는 곧 내 표정마저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온몸이 단번에 굳었다. 때 늦은 한기가 가득한 실내엔 남자의 낮은 목소리만이 울렸다. 뭐 해. 김탄소?
김태형이 실소를 흘리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1화부터 쓰고 싶어서 너무 근질근질대던 얘기가 오늘에서야 나왔네요 ㅠ_ㅠ 속이 후련해요 !!!!!
항상 봐주시는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