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징계 위원회가 열리는 날이 되어서야 태형은 정국을 마주보고 설 수 있었다. 살살 웃어대며 얼마 전에 새로 산 건데 부모님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파는 거라고 거짓말을 늘여놓던 정국은 피해자의 신분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얼굴에 욕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참고 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절차대로 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무원 몇명과 학교 교직원 열댓명 앞에서의 간단한 사건 소개가 시작되었다. 쌍방과실로 판결이 났다는 내용은 쏙 빼둔 채 같은 학교 동급생 여자아이의 부모님이 사고로 죽었고, 그 여자아이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만 강조하듯 늘여놓았다. 태형의 옆에서 잠자코 있던 석진이 손이 빨개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풀었다. 태형은 괜찮다는 듯이 그의 옷 위를 툭툭 쳤다.
"게다가 경찰 조사 때에 김태형 학생이 오토바이를 옆 학교에 재학중인 전정국 학생에게 산 것이라고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해당 학생을 조사한 결과 거래한 적이 있기는 커녕 서로 알지도 못 하는 사이더군요. 따라서 전정국 학생을 피해자로 보고 오늘 이렇게 증인으로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학생주임 교사가 자리에 앉자 가해자 증언이 이어졌다. 태형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떼었다.
"…전정국에게 170만원을 주고 산 게 맞습니다."
단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감사 목적으로 내려온 공무원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흰 종이 위에 뭘 그렇게 써갈겨대는지 되려 부담감만 늘었다.
"전정국 학생, 사실입니까?"
학생주임 교사가 의심쩍은 투로 정국에게 되묻자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태형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꼭 간사한 뱀만 같았다. 이어 정국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오늘 처음 본 형들입니다."
"그렇다면 김태형 학생, 거래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세미나실에 있는 모두가 태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머리가 점점 아파왔다.
현금으로 주세요, 통장으로 들어오면 부모님이 아셔서. 대신 당일날 바로 드릴게요.
정국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속이 너무 답답한 나머지 말을 내뱉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씨발. 석진이 태형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말했다. 어떻게 하나같이 다 저 새끼 편이야.
"…없습니다…."
더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학생주임 교사가 서류 파일을 소리내어 닫았다. 다른 교직원들도 일제히 끝마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태형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대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퓨타
천공의 성
전정국이 제 멋대로 와서 또 제 멋대로 가버린 후 테이블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김태형은 더이상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김남준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숙소로 가봐야한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전정국이 두고 가버린 요플레만 바라보면서 조심스레 김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아는 사이야?"
그의 표정은 차게 식어있었다. 내가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묻는 김태형을 향해 급히 고개를 젓자 삭막하던 분위기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처럼 능글맞은 농담을 건네진 않았다.
"친해지지 마."
"……."
딱히 대답 할 필요를 못 느껴 침묵을 지킨 건데 그는 내딴에는 전정국을 좋은 애라 생각하는 걸로 받아들였는지 말을 보태었다.
"싸이코 새끼야. 김석진보다."
그리고선 김태형은 그제서야 내게 살풋 웃어보였다.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더이상 눈치를 안봐도 되겠단 생각에 긴장이 풀렸다.
김석진도, 김남준도 먼저 가버려 나는 하는 수 없이 김태형과 교실로 돌아가야 했다. 보통 때 같았음 아이들 시선 때문에라도 혼자 가겠다고 했을 텐데 오늘은 주변 아이들보다 김태형이 더 신경쓰였다.
복도로 이어지는 계단을 그와 말없이 내려가는 도중에 누군가 뒤돌더니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머리가 긴 걸 보니 여자였지만 손 힘이 셌다. 나는 놀란 속을 달래기도 전에 그 상대의 얼굴을 보고 한번 더 놀라야했다.
"정국이 여자친구네?"
이제는 익숙해진 담배냄새. 김유빈이었다. 내 뺨을 피가 고일정도로 때리던 모습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몸이 떨렸다. 오기가 생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으나 그녀는 내 팔을 붙잡은 제 손으로 내 시선이 옮겨감을 보았으면서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더 세게 잡았다.
"손. 놔, 그거."
나보다 먼저 내려가고 있던 김태형이 왜 안오나 싶었는지 계단 밑에서 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껏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김유빈은 그를 쳐다도보지 않은 채 내 눈만 빤히 응시하며 소리내어 웃었다.
"석진이한테 친한 척 하지 말랬다고 금세 또 갈아탔나봐."
"……."
그 갈아탄 대상이 김태형을 말하는 것이든, 전정국을 말하는 것이든간에 김유빈은 내가 중범죄자라도 된다는 듯이 혐오가 가득한 눈길을 보내왔다. 교실로 돌아가려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아이들도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나의 사이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적당히 해라."
일순간에 정적이 흐른 계단 위에서 처음으로 들린 목소리는 김태형의 것이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내가 서있는 쪽으로 도로 올라와 내 다른쪽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김유빈은 나를 힘껏 밀어버리듯 쳐내며 놓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계단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잃고 구를 뻔 했다.
"이상하네. 김태형이 전정국 여자친구를 다 챙겨주고."
김태형은 뒤에서 비웃듯이 조롱하는 김유빈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잡은 채 길을 막고 서있는 아이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나를 에워싸고 쑥덕대는 게 느껴졌다.
정면으로 보이는 게 김태형의 뒷모습 뿐이라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역시 체육관에서 전정국을 대할 때 지었던 그 어두운 표정일 것이라고.
김태형은 교실에 다다르자마자 내게 앞문을 열어주곤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여자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조용히 입을 닫고선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말할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땅바닥만 보며 내 자리로 가 앉았다.
내가 오자마자 하던 이야기를 멈췄다는 건 내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난처한 상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더욱 더 숨을 죄여오는 사실은 이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엎드려 잠을 청한 후 눈을 떴을 땐 5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칠 쯤이었다. 앞자리엔 김석진이 휴대폰을 매만지며 잠자코 앉아있었고 그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김태형은 어디갔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주제 넘은 질문인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김석진이 대답해줄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담당 과목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난 후에도 김석진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었다. 선생님이 미처 발견하질 못한 건지 아님 보고도 모르는 척 해주는 건지 아무도 김석진에게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김석진이 제 앞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화를 삭히려는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무언가 그의 분에 풀리질 않는지 그는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도 그대로 둔 채 뒷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거기 뭐냐는 선생님의 물음이 이어졌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교실 밖으로 나갔다.
분량이 적어서 죄송합니다 .........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