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갈거임?]
[김연지가 안 오면 과사 턴다는대]
“미친 거 아냐?”
일어나자마자 정수정에게서 온 메세지를 확인했고, 나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욕짓거리부터 내뱉었다. 김연지가 누군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 할 때까지 같은 반이었던 전설의 김반장이라고..!(= 고등학교 흑역사란 흑역사는 모두 갖고있는 사람) 일주일 전 25회 졸업생들끼리 모이기로 했다며 연락을 받았는데, 난 당연히 안 갈 생각으로 넘겼었다. 장소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나한테 닥칠 시련들이 훤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친했던 애들끼리 모여서 논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소위 말하는 동창회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진짜.. 안 가려고 했는데..(주먹) 김연지는 한다면 하는 애였다. 안 가면 #김여주_과사 #여주_와우^^ 로 얼굴책이 폭발 할게 분명하다.
[너 갈거야?]
한숨을 푹 내쉰 후 정수정에게 답장했다. 그러자 30초도 안돼서 답장이 오더라. [ 엉. 과사 털릴 바에 그냥 가려고. 애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 하, 하고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입을 옷도 없는데 뭘 입고 가야하나 벌써부터 고민이었다. 정수정에게 알았다는 식으로 대충 답장을 보낸 뒤 거실로 나갔다. 엄마가 쇼파에 앉아 아침 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엄마. 나 오늘 저녁 밖에서 먹어.”
“누구랑? 재현이?”
“아, 정재현도 가나 물어봐야겠다. 오늘 고등학교때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
“알았어~”
뒷머리를 헤집으며 잠시 정재현을 떠올렸다. 정재현은 가나 모르겠네.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곧 생각을 접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밥부터 먹어야 했다. 밥 먹고 옷이나 사러 가야겠다.
정수정에게 같이 옷 가러 갈래? 라고 물어봤다가 단칼에 까였다. 이미 엄마와 쇼핑 중이란다. 그래서 나도 엄마한테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엄마한테도 거절당했다. 결국 아주 오랜만에 혼자 시내에 나왔다. 몇 년 전 정재현 생일 선물을 사러 혼자 돌아다닌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독립심이 없는 사람인지 아주 조금 깨닫는 중이었다. 혼자 다니는게 이렇게 어색하다니.
“옷만 후딱 사고 가야지.”
가방을 고쳐 멘 후 걸음을 옮겼다. 양 옆으로 옷가게는 물론이고 먹거리와 화장품 가게까지 즐비하게 이어져있었다. 대충 둘러보며 한 곳 한 곳 들어가 확인하고 입어보고 고민하고를 반복하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런데도 내 손은 텅 비어있었다. 마음에 쏙 드는게 없어. 입술을 퉁 내밀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냥 집에 있는 옷 아무거나 입고 갈까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미쳤냐! 하고 바로 셀프자책을 날렸다. 이왕 가는 거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하고 갈꺼야 (뻔뻔)
“저기 뭔가 괜찮을 삘인데..”
그렇게 또 몇 십 분 걸어다니다 저 멀리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꽤 안쪽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처음에 도착했을 때보다 주위에 사람(X, 커플O) 이 많이 없었다. 괜히 신나는 마음에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음을 빨리 했다. 정재현이랑 다섯시쯤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옷을 산 후 집에 가서 다시 꾸미고…^^ 나가면 딱 되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할 때 쯤이었다.
“..으에?”
문득 고개를 돌리다 오른편에 놓인 좁은 골목길을 보게 됐는데, 그 골목길에 이민형이 서 있는 거다. 웬 양아치 두 명과 함께..(당황) 끽, 하고 발을 멈춰세웠다. 저거 딱 봐도 삥 뜯기는 상황인데.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그 쪽만 쳐다보다 정신을 차린 후 천천히 골목길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 수록 말소리가 들렸다. 돈 있잖아~ 형들이 돈이 없어서 그래ㅎㅎ 따위의 죽빵 맞을 소리였다. 아니 도대체 이민형은 왜 저기서 저런 애들한테 붙잡혀 있는 거야? 지금쯤 집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더 걸어가다, 민형이의 어깨를 밀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저기요!!!!!”
그리고 바로 후회했지. 총 여섯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를 발견한 이민형이 크게 눈을 뜨는게 보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무슨 드라마냐고. 껄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불량배들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당당한 척 터벅터벅 걸어갔다. 거의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수준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그냥 가던 길 가세요~”
“삥 뜯는 현장을 다이렉트로 봤는데 어떻게 그냥 가요?”
“아 시발, 누군데 참견질이냐고요. 너도 뜯기고 싶으세요?”
이 새끼 말하는 거 봐. 아직 옷도 못 샀는데 뜯기긴 뭘 뜯겨..(울컥) 순간 치밀어오는 짜증에 표정을 구기며 민형이 앞에 섰다. 내 과외 학생 건드리면 죽어, 라는 표정으로 양아치 두 명을 노려보자 양아치들은 여자 한 명이 덤비는게 어이가 없는 건지 헛웃음을 내뱉는다.
“뜯길 일 없고요. 얘 누난데요.”
나는 그런 말을 하며 뒤에 있는 민형이의 손목을 꾹 잡았다. 잡은 손목이 뜨겁다. 민형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게 우선이었다.
“하, 나 진짜 별..”
“야 이민혁, 너 없어져서 찾고 있었는데 이런 놈들한테 잡혀있으면 어떡해!”
“선생.., 진짜 미쳤어요..?”
“야 너 진짜 죽고싶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러 이름까지 바꿔서 누나인 척 소리치자 뒤에서 민형이가 작게 속삭인다. 앞에서는 죽고싶냐며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나를 무섭게 내려다보는데, 그 순간 이러다가 진짜 맞는 거 아닌가 걱정이 앞서 입을 꾹 다물었다. 살려면 튀어야했다. 타이밍을 노려야돼. 뒤로 민형이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꼼지락 거리며 아래로 내렸다. 가늘게 뻗은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내 손에 닿은게 느껴지자 생각 할 것도 없이 이민형의 손을 꽉 잡았다.
“왜 반말이세요 양아치 새끼야.”
“뭐? 진짜 정신이..”
“뛰어!!!!!!!”
나는 과감하게 한마디 내뱉은 후 양아치들이 나를 때리려 손을 드는 순간 뛰었다. 민형이의 손을 꾹 잡은 채 왔던 길을 도로 달렸다. 방심한 사이 나와 이민형을 눈 앞에서 놓쳐버린 양아치들은 무섭게 우릴 쫓아왔다. 워 시발, 잡힐 것 같아. 사람이 많은 거리까지 나왔는데도 전력으로 쫓아오는 모습에 입술을 꾹 깨무는데, 내 손에 이끌려 뛰던 민형이가 갑자기 나를 추월하더니 자기가 나를 당기듯이 뛰기 시작했다.
“야!! 너네 거기 안 서?!”
내가 잡았던 것보다 더욱 더 세게 내 손을 쥐며 달리는 이민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정한 옷차림에 가방을 메고 있다. 민형이가 앞에서 뛰자, 금방 잡힐 것 같던 양아치들과 우리의 거리가 많이 멀어졌다. 뒤로 슬쩍 고개를 돌리자 체력에 한계가 온 건지 점점 달리기가 느려지는게 눈에 들어왔다. 민형이는 역시 어려서 그런지 한참을 더 달리다 이제 안 보여! 라고 외친 내 말을 듣고나서야 천천히 달리던 걸 멈췄다.
“하.. 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는데, 똑같이 숨을 내쉬던 민형이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 순간 나는 힘이 든 것도 잊은 채 잡고있던 손을 놓았다.
“민형아 미안.. 아니 나는 옷을 사려고 가는 중이었는데 너가 돈을 뜯기고 있길래 그냥 너를 구해야겠다 이 생각만 들..”
“..풉.”
예민하고 까칠하신 민형님이기 때문에, 나는 두 손을 맞잡은 채 구구절절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근데 이민형 이 놈이 갑자기 웃는게 아닌가. .... (о゚д゚о)..? 전력으로 달린 나머지 너무 힘들어서 살짝 미쳐버린 건가 싶었다. 아니면 감히 자기에게서 돈을 뺏으려 덤비던 양아치들이 너무 충격 적이었거나. 내가 하던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자, 이제는 아예 크핰하 따위의 소리를 내며 박장대소를 한다. 얘가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구나...그렇구나..(먼산)
“민형아..너 괜찮아..?”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물었다. 얘가 진짜 이럴 애가 아니라고..!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걱정스럽게 민형이를 바라보는데, 크게 웃던 걸 멈춘 이민형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나와 눈을 마주한다.
“저기 뒤 쪽에 있는 서점 가는 중에 잡힌 거였어요.”
“아..그렇구나..”
“근데 저 이렇게 목적지 없이 달린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
“기분 진짜 좋다.”
만나기로 했던 다섯시 정각에 맞춰 집 앞으로 나가자 이미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정재현이 보였다.
“언제 왔어?”
“방금.”
내 물음에 정재현은 제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정재현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일부러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리며 말이다. 잠시 뭐냐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정재현이 곧 작게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는다. 나는 눈빛으로 물었다. 어때? 라고. 저번에 정재현이 사준 머리핀을 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예쁘네.”
“또 이모가 예쁘신 건가?”
그때 정재현이 했던 말실수를 떠올리며 키득키득 녀석을 놀려먹는데, 분명 팔짝 뛰며 죽을래?! 를 외쳐야하는 정재현이 보조개가 움푹 패일 만큼 미소를 짓더라. 나보다 한참 키가 큰 녀석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아주 조금 당황한 나와 지그시 눈을 맞췄다.
“오늘은 너.”
“..엉?”
“너 예쁘다고.”
잘 어울리네. 능글맞게 그런 말을 하며 도로 고개를 든 정재현은 벙찐 나를 놔두고 먼저 발을 옮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그 뒤를 쫓았다. 왜 저래, 소름 돋게. 괜히 팔을 비비며 가늘게 뜬 눈으로 정재현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야, 너 뭐 잘못한 거 있지.”
“뭐래.”
“예쁘다 해줬다고 내가 용서 해 줄 것 같아?”
아니면 뭐, 부탁 할 거 있어? 정재현의 기습 칭찬을 합리화 할 수 있는 온갖 상황을 꺼내며 걸어가자, 앞에서 걷던 정재현이 걸음을 멈추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린다.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말고 빨리 와. 곧 버스 도착해.”
어휴, 하고 한숨을 푹 쉬며 그런 말을 한다. 이상한 소리는 너가 하지! 그렇게 반박하려고 했지만 손목을 이끄는 손길에 결국 입술을 꾹 닫은 채 걸음을 옮겨야했다.
“워우~ 김여주~~!”
“야 너네 둘은 아직도 붙어다니냐?”
아, 드디어 전투장에 발을 들였다.(비장) 지금부터 나한테 날라오는 모든 질문을 피해 살아남아야 한다. 고등학교 때 매일 보던 익숙한 얼굴들이 나와 정재현을 반겼다. 나는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밝게 인사하며 정재현과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길게 이어진 테이블엔 이미 술과 음식들이 잔뜩 이었다.
“다 잘 지냈냐?”
내가 앉은 테이블 주위에 있던 친구들과 안부를 물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했다. 정수정과 김동영은 우리보다 훨씬 먼저 온 건지 꽤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내 바로 맞은 편에 앉은 친구가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으로 술 병을 까더니 곧 비어있던 내 잔에 콸콸 술을 따라줬다. 야, 그만.. 그만 줘...(;◔д◔)
“이제 다 온 것 같은데, 일단 다 같이 건배부터 할까?”
이 모임을 주최한 김연지가 저어어기 끝 쪽에서 잔을 들고 일어났다. 와, 쟤 많이 예뻐졌네. 나는 앞에 놓여있던 새우과자를 집어먹으며 술이 가득 찬 잔을 들었다. 곧 건배~! 하는 소리가 식당 안을 울렸고, 그 후 부터 온갖 대화가 오갔다. 대학부터 시작해서 아르바이트, 연애, 돈, 취업…. 그냥 대학생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얘기란 얘기는 다 한 것 같다. 나는 술에 취하면 무슨 말을 지껄일지 몰라 최대한 술에는 입을 대지 않은 채 안주만 집어먹으며 대화에 동참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정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아 근데 여주야.”
“어?”
“너 태일오빠랑은.. 아직도 만나?”
거의 바닥을 보이는 안주 그릇에 또 손을 뻗던 참이었다. 걱정했던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한 친구의 물음에 근방에 앉아있는 애들의 눈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나는 뻗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눈동자를 굴렸다.
“아.. 얼마 전에 완전히 헤어졌어.”
“헐, 진짜?”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대답 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생각 없이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넘기는 순간 쓴 맛에 미간을 좁혔다. 아, 이거 술이지 참. 헤어졌다는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애들은 곧 왜? 누가 찼는데? 난 진짜 둘이 결혼하는 줄 알았어~! 등의 미친 소리를 꺼내며 나를 괴롭혔다. 제발 그만 해주라 친구들아..(주먹) 짜증이 확 올라 한 모금 마신 술을 결국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금방 비운 잔을 테이블 위에 쾅 내려놓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깝다..”
“그니까.”
그제서야 내 말소리를 줄이며 내 눈치를 본다. 술 맛 때문인지 입 안이 씁쓸했다. 그러고보니 오빠에게 편지를 쓴 후 부터 만난 적도, 연락을 받은 적도 없었다. 진짜 헤어졌지 우리. 내가 끝냈지. 입술이 바싹 마른듯한 느낌이 들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빈 잔을 다시 술로 채웠다. 마시고, 채우고. 또 마시고, 채우고. 그렇게 얘기 주제가 바뀌고, 내가 다시 술로 가득 찬 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갑자기 희고 긴 손이 잔을 쥐더니 가져가버린다.
“야..”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내게서 뺏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버리는 정재현이 보였다. 말릴 새도 없이 잔을 비운 정재현이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빈 잔을 아무 말도 없이 꾹 쥐고 있더니 곧 손을 떼며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술을 마셔서 취기가 올라오는 건지, 코 끝에 열이 올랐다. 이 주위에 그래도 내 생각 해주는 놈은 얘 밖에 없구나. 정재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게 정재현이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집에 가자.”
나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더 앉아있다가는 분명 또 잔뜩 취해서 집에 들어갈 게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저 멀리 앉아있는 정수정과 김동영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안주만 집어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쟤들도 데리고 나갈까 싶었는데, 나보다 정재현이 빨랐다.
“나랑 김여주 먼저 갈게.”
“뭐야, 왜? 아직 우리 만난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방금 엄마한테 문자 받았는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얘랑 나랑 세트잖냐.”
눈 하나 깜짝 않고 술술 말을 내뱉는 정재현이 미안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시끄러웠던 식당 내가 일순 조용해지고, 모두 나와 정재현을 바라봤다. 그 중에서도 정수정과 김동영은 눈을 크게 뜨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치사하게 너네만 빠져나가냐?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둘을 향해 미안, 하고 입모양을 벙긋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쉽다 야.”
“그러게. 조만간 또 모이자.”
“여주 잘가. 연락할게!”
“어어, 톡 해. 내 번호 있지?”
나는 의자에 걸어둔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가라며 인사하는 애들에게 짧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등 뒤로 정재현의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며 몸을 돌렸다. 취한 건 아니지만 조금은 알딸딸한 상태로 정재현을 올려다봤다.
“고맙다 정재현.”
“테이블을 엎지, 그걸 왜 듣고만 있어.”
“아 몰라. 다 예상하고 온 거야.”
가방끈을 꾹 쥐며 입술을 삐쭉이다 도로 몸을 앞으로 돌렸다. 아, 빨리 집 가서 샤워하고 싶다. 아까부터 자꾸 문태일 얼굴이 떠올래 냉수라도 얼굴에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고보니 나한테 제일 먼저 문태일 얘기 꺼냈던 그 여자애, 예전에 문태일 좋아했었는데! 헤어진 거 알면서 일부러 물어본 거 아니야? ლ(ಠ_ಠლ) 문득 든 생각에 이를 바득 갈며 쿵쾅쿵쾅 걸어가는데, 정재현이 그런 내 어깨를 잡아세운다.
“신발 다 닳겠다.”
그래, 여기서 정재현 잔소리가 안 나오면 이상하지. 내가 세모눈으로 정재현을 보자, 녀석은 곧 넉살 좋은 미소를 짓더니 아 김여주 기분 풀어라~ 우리끼리 치타폰 갈까? 응? 하며 내게 어깨동무를 해온다.
“정재현.”
“응?”
“너는 좋겠다. 전여친 같은 거 없어서.”
“..”
“넌 여자 안 만나?”
진심으로 부러운 마음에 하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정재현은 유치원 때 부터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다. 남자애들이 누군가를 예쁘다고 찬양하면 맞아, 하고 동의하곤 했지만 막상 그렇게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솔직히 학교 다닐 때 인기도 많고 고백도 많이 받았는데, 얘. 설마 나처럼 이런 뭐같은 상황이 생길 껄 알고 미리 예방 한 정재현의 빅픽쳐인가.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입을 쩝 다시는데, 정재현은 말이 없다.
“아니 사실, 우리 과에 너 소개 시켜 달라는 여자 동기들 많았거든.”
“근데 왜 말 안했어?”
“너 그런 거 싫어하니까. 예전부터 누가 여소 해준다고 하면 됐다 그랬잖아.”
“..”
“싫어하는 거 아니야? 해줄까? 우리 과에 엄청 예쁜 애 있는데.”
어딘가 묘한 표정을 짓는 정재현을 보며 같은 과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를 떠올렸다. 걔도 저번에 너랑 맨날 같이 다니는 남자애 어떻냐고 나한테 물어봤었거든. 애들은 다 정재현이 잘생겼다는데, 나는 그걸 잘 모르겠다.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매일 본 얼굴이라 그런지 아무 생각이 없다. 눈을 끔뻑이며 정재현을 바라보는데, 정재현이 김여주, 하고 나를 부른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순간 나는 끔뻑이던 눈을 부릅 뜨며 뭐?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누군데. 우리 학교야? 나 아는 여자애야?”
지금까지 정재현과 붙어다니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장난으로라도 저런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놈이었다. 근데 이게 무슨 소리냐고. 갑자기 훅 들어온 파격적인 한 마디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정재현의 어깨를 가볍게 찰싹 쳤다. 아, 쉐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누나한테 제일 먼저 말을..,
“사람이라고 했지 여자라고는 안 했다.”
...했어야지..?( ゚Д゚)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아니 잠깐만..”
“….”
“너.. 아냐, 난 이해해. 그러니까 너.. 그동안 여자를 안 만났던 이유가..”
한껏 들떴던 마음이 놀라서 다섯배로 펌핑하는 그 기분 아시냐고요.. 나 방금 커밍아웃 들은 건가. 인터넷에서만 봤던 일이라 손이 덜덜 떨려 일단 정재현을 다독였다. 괜찮아, 알지? 나는 편견 없다? 그런 말을 하는데 집에 계실 정재현네 이모와 아저씨가 떠올라 잠시 말을 멈추긴 했다..(쭈굴) 이제서야 그동안의 정재현이 다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상관 없지. 나는 상관 없는데 아직 세상이..!
“농담이야 인마.”
“..”
“...”
“..죽을래?”
오른쪽 뺨이 더 아플까 왼쪽 뺨이 더 아플까^^? 제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작게 튕긴 후 이미 저만치 뛰어간 정재현을 바라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이런 걸로 장난을 쳐? 나 방금 진짜 진지했는데? 입술을 꽉 깨물며 녀석을 잡기 위해 달렸다. 야! 거기 안 서? 아까 낮에 양아치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소리치며 전력으로 뛰었다.
“아 어디까지가 구란데!!!!!!!!!!”
“안 알려주~~지~~~!”
“잡히면 뒤졌다 진짜!!!!!!!”
정재현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열심히 뛰던 정재현은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보더니 곧 달리던 걸 멈췄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그 앞까지 뛰어가 짧은 시간에 나를 두 번이나 놀래킨 정재현을 응징하려 주먹을 들고 달려들었다.
“넌 진짜 나 없으면 놀릴 사람 없어서 어떻게 사냐? 어?”
“못 살지~”
“아 진짜!”
“난 김여주 없으면 못 살아.”
열이 오를대로 오른 내가 때리는 걸 다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씩 웃는 얼굴이 그렇게 약 오를 수 없었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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