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은 돈을 쥔 손을 그대로 제 츄리닝 바지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어두워진 주위를 둘러보며 저 끝 편에 위치한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대충 신고 나온 검정색 슬리퍼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질질 끌려 고요한 밤하늘을 작게 울리곤 했다. 이따끔씩 헤드라이트를 킨 자동차가 재현의 앞을 지나갈 때야 잠시 숨을 돌렸다.
빨리 갔다와야지. 재현은 제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생각 했다. 여주를 그 술판에 혼자 놔두고 나왔으니 마음이 급할 수 밖에 없었다. 저가 없을 때 어른들이 주시는 술을 다 받아마시고 또 취하면 어떡하나 그 걱정이 제일 컸다. 취하기만 하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왜 우는 건지 잘 아니까.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한 건데 항상 제 속을 몰라주는 여주를 떠올리며 걸음을 빨리 했다.
24시간 문구가 크게 적혀있는 편의점 간판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여주가 과외를 시작하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던 편의점이었다. 주위에 편의점 말고는 우중충한 건물들 밖에 없어서 밤 늦게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여주를 종종 데리러 왔던 그 곳. 술 사러 왔다, 과자 사러 왔다 온갖 핑계란 핑계는 다 대면서 데리러 왔었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환하게 불이 켜진 편의점으로 계속 걸어가던 재현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
“….”
편의점 앞 쪽에 놓인 야외벤치에 앉아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테이블엔 빈 것으로 보이는 맥주캔이 두 캔이나 올려져있는데 세 번째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가는 사람. 흔한 땅콩 안주 하나도 없이 혼자 쓸쓸히 앉아있는,
문태일.
재현은 곧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모르는 사람처럼 태일을 지나쳐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여주의 뒷타임이었던 남자가 카운터에서 인사했다. 그를 알아본 재현은 짧게 목인사를 한 후 바로 음료코너로 걸어갔다. 받아온 돈이 꽤 큰 돈이라 몇 병을 사가야하나 잠시 고민한 재현은 소주 네 병에 맥주 세 병, 그리고 여주가 좋아하는 음료수까지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카운터 옆 통유리 너머로 태일이 앉아있었다. 왜 저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재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세요.”
계산을 마친 재현이 묵직한 비닐봉지를 손에 쥐었다. 문을 미는 순간 에어컨 바람이 빠지고 무더운 열기만 재현을 감쌌다.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맥주를 한 모금 넘기던 태일이 재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닐봉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현아.”
“..”
“잠깐 앉았다 가.”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부른다. 얼마 가지 않아 슬리퍼 끄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태일은 마시던 맥주캔을 만지작 거리며 제 맞은 편에 앉는 재현을 바라봤다. 미간을 좁힌 채 태일이 마셨던 빈 캔들을 훑어보더니 곧 고개를 들어 시선을 교차했다. 옅게 부는 여름 바람에 재현이 바닥에 내려놓은 비닐봉지가 바스락 구겨지는 소리를 낸다. 그 위로 재현이 태일을 불렀다. 형, 하고 내뱉는 소리가 제법 단단하다.
“이번엔 전화하지 마세요.”
테이블 밑에 둔 손을 말아쥔지는 오래였다. 그 손을 아는 건지, 태일이 바람 빠진 웃음을 작게 내보냈다. 그 모습에 재현이 더욱 표정을 구겼다. 아직도 여주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서 내리던 태일을 잊지 못한다. 재현 저가 그 시간에 왜 밖에 나갔는지 목적도 잊은 채 곧장 그 쪽으로 걸어갔던 그 날. 여주에게서 망설임도 없이 태일을 떼어놓은 그 순간을 기억할 때면 아직도 화가 치민다. 김여주가 술 취해서 하염없이 부르고 찾을 땐, 한 번도 옆에 없었으면서.
“걱정하지마, 여주 번호 지웠어.”
태일이 시선을 내린다. 맥주캔을 두드리던 손도 힘 없이 떨어진다.
“..”
“카페 알바도 그만뒀고.”
힘을 주고있던 재현의 눈이 옅게 흔들렸다. 몇 주 전만해도 두 번은 안 뺏기겠다는 저를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태일이었다. 근데 지금은 꼭, 영영 떠날 사람처럼 말을 하니 당황한 것은 재현 쪽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날은 신세 많았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야. 태일이 쓰게 웃었다. 묵묵히 꺼낸 말이 바닥에 가라앉았다. 잊으라는 문자 하나만 덜컥 보낸 채 멀리 떠났다. 그렇게 사라져놓고 보고싶다는 이유만으로 뒤늦게 이기적이었다. 다 알면서 계속 흔들어 또 울렸다. 그랬다.
태일은 여주의 쪽지를 받고 난 후 많은 생각을 했다. 수십 번을 읽고 읽은 작은 쪽지는 너덜해진지 오래였다. 모든 잘못은 저가 했는데 마지막까지 미안하다는 여주의 글씨를 볼 때면 숨이 그렇게 막히더라. 그때 정말 알았다. 한참 늦은 후회를 몇 번이나 한다고 해도 늦은 건 늦은 거라는 걸. 제 알량한 미련이 곧 여주의 눈물이라는 걸. 그러니까 결국엔 놓아야 한다는 걸.
“형.”
“응.”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에요.”
재현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저가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걸까.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은 어느새 테이블 위로 올라가 있었다.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태일은 조용히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저기 골목은 아직도 어둡더라.”
밤마다 여주를 데려다주던 골목이었다. 혼자 다니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던.
“형.”
“내가 뭐.. 잘 부탁한다 그런 말 할 자격은 없고.”
“..”
“그래도 그냥 너라서 다행이다.”
“..”
“너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은 들더라.”
말을 끝낸 태일이 한 번 더 맥주를 들이켰다. 그때까지 재현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결국 세 번째 캔까지 비워낸 태일은 가벼워진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재현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거 여주 좀 전해줘.”
“뭔데요.”
“답장이라고 하면 아마 알 거야.”
잠시 뒤 재현에게 내밀어진 건 작은 흰 봉투였다. 손으로 받자 얇게 접힌 무언가가 느껴졌다. 잠시 그것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든 재현이 다시 한 번 태일을 불렀다. 형. 그제서야 태일은 재현을 바라봤다. 진득히 서로를 바라보는게 퍽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이렇게 마주본 이유가 모두 김여주라니.
“전 진짜 안 울릴거에요.”
“..그래. 제발 그래라.”
어쩐지 바람 섞인 실소가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내내 끌고다니던 슬리퍼를 현관에 벗어둔 재현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왜이렇게 늦은 거냐 묻는 말에 어색하게 웃어보인 재현이 죄송하다며 사온 술부터 꺼냈다. 하얀 봉지에 여주에게 주려고 산 음료수만 남았을 때, 재현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여주를 찾았다.
“김여주는?”
“여주 아까 네 방에 들어가는 것 같더라. 가봐.”
재현이 제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을 마신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현은 가벼워진 편의점 봉지를 손목에 건 채 방으로 향했다. 뭐 하는데 안 나와. 작게 툴툴 거리며 방 문을 벌컥 열었다.
“야 김여..,”
여주의 이름을 부르던 소리가 끝을 맺지 못한 채 멈췄다. 불이 켜진 방 안에서 뭘 하나 했더니 제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있다. 재현은 비닐봉지를 조심히 내려놓은 후 방 문을 닫았다. 거실에서부터 들리던 말소리가 작아졌다.
“..자냐?”
재현이 한 걸음 내딛으며 물었다. 조용한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에 재현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이 갈 수록 곤히 자고 있는 여주의 얼굴이 선명히 두눈에 차올랐다. 가만히 자는 여주를 내려다보던 재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은 지우고 자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곤했는지 옆으로 누워 깊게 잠에 든 여주는 침대 한 쪽에 무게가 쏠린 것도 모르고 고르게 호흡 할 뿐이었다.
“야 김여주, 일어나.”
“..”
“화장 지워야지.”
또 내일 일어나서 후회하지 말고. 슬쩍 흔든 여주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깨우려고 흔든 건데 오히려 더 깊게 몸을 웅크리더라. 그 모습에 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따가 깨워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침대 위에 올려둔 재현의 손가락을 무의식 적으로 잡는 손이 있다. 우음, 따위의 소리를 내며 뒤척이는 여주의 손이었다.
“..”
일어나려던 재현이 한껏 당황하며 여주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여주를 바라봤다. 아. 또 여주는 함부로 못 내치는 재현이라 붙들린 채 퍽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축였다. 잠결에 무언가를 잡는 건 여주의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입 안에서 뜨거워진 침을 넘긴 재현이 여주의 옆에 누웠다. 제 한 쪽 팔로 머리를 벤 채 여주 쪽으로 몸을 향하게 누운 재현은 손을 뻗어 흘러내린 여주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그 짧은 행동을 하는데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재현의 손 끝으로 옅은 떨림이 새어나간다. 제 침대에서 자는 여주는 오랜만이었다. 학생 때만 해도 툭하면 제 침대를 차지하던 여주였는데, 성인이 된 후에는 한 번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재현은 절대 여주의 침대에 눕지 못했다. 바닥에 누우면 누웠지, 제 마음을 알고 난 후부터는 한 번도 여주의 침대에 누워서 자 본 적이 없다. 누우면 기분이 이상했다. 여주의 향이 온 몸을 감싸 정신이 없었다. 때문에 자고 싶어도 절대 못 자는 곳이 여주의 침대인데, 여주는 아직도 제 침대에 누워 잘만 자고 있으니 괜히 속이 아린 기분이었다. 여주에게 재현 저는 정말 친구일 뿐이니까. 그래서 떨리고 설레고 이상한 거 하나도 없이 저렇게 잘 자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여주를 바라봤다.
“내가 결심을 했거든.”
재현이 잔잔하게 공기를 흩트렸다.
“조금 이상하고 놀래도, 내가 이렇게 손을 뻗으면..”
하얀 손가락이 얼굴선을 따라 내려와 여주의 볼을 쓸었다.
“손 끝이라도 닿을 거리에 있어줘.”
가느다란 소리선이 얕게 요동쳤다.
“뒤로만 가지 말고.. 응?”
온통 하얗던 방 안이 붉게 물들어갔다.
“..에..?”
눈을 떴는데 바로 앞에 정재현 얼굴이 떡 하니 있는 건 무슨 상황이지요?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정재현의 방인 것 같았다. 정재현은.. 내 옆에서 자고 있고. 뭐야, 나 왜 얘랑 이러고 있어(불쾌)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방 안은 정재현의 숨소리만 작게 맴돌았다. 나는 무의식 적으로 볼을 만지며 그런 정재현을 깨우려 야 정재현, 까지 말을 내뱉었다.
“..”
그리고 곧 작게 욕을 중얼거렸지. 볼을 만진 손에 기름진 파운데이션이 잔뜩 묻어난 걸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아 미친, 어쩐지 얼굴이 좀 무겁더라. 한 세시간 정도 잤나 했는데 이제서야 햇빛이 쏟아져내리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세시간이 아니라 거의 열 세시간을 잔 것 같았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태평하게 자고있는 정재현의 등짝에 그대로 손바닥을 날렸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정재현이 눈을 떴다. 미간을 좁힌 녀석이 부스스한 머리를 들더니 곧 나를 발견했다. 왜 때려. 잠긴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며 내가 때린 자리를 제 손으로 문지른다.
“나 왜 안 깨웠어!!!!!!!!!!!!”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정재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소리를 빽 지르며 방을 나갔다. 어젯밤 요란하던 정재현네 거실이 깨끗히 치워져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이모랑 아저씨까지 어딜 가셨는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와 진짜,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갈 수 있지? 나 진짜 친딸 맞아? 이를 바득 갈며 쇼파 옆에 놔뒀던 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쿵쾅쿵쾅 효과음은 당연했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콧김까지 나올 기세였다.
가방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앞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자는 동안 민형이한테 연락이 왔었으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이도 민형이와의 연락함은 깨끗했다. 나는 곧장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의 히트곡이 5초 정도 흘렀을 때, 수화기 너머로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이 깜짝이야. 왜!
“엄마 지금 어디야? 왜 나 안 깨웠어!!!”
-아니~ 너가 재현이랑 너무 오순도순 잘 자고 있길래 그냥 냅뒀지. 우리는 해장 하러 나왔어~
“와 진짜.. 엄마 어디서 잤어?”
-나? 집에서 잤지.
“..나는?”
-넌 말 했잖아~ 재현이랑 너무 오순도순.., 어 야 밥 나왔다. 재현이랑 아침 챙겨먹어! 끊어!
엄마. 엄마? 엄마! 전화는 순식간에 끊겨졌다. 물론 매정한 엄마의 작품이었다. ..나 엄마 친딸 아니야. 이거 이백퍼야. 나는 짧은 전화음만 들리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홀더키를 눌러 화면을 잠갔다. 아침이고 뭐고 일단 집에 가서 씻어야겠어. 얼굴은 보나마자 개판일 거다. 어차피 바로 앞 동이니 후딱 뛰어가야겠다 생각하며 가방을 드는데, 그 순간 방에서 정재현이 나왔다.
“야, 난 너 깨웠다.”
“말이 돼? 너가 깨웠으면 내가 일어났겠지.”
“근데 놀랍게도 안 일어났지.”
정재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일어나면 물부터 마시는 게 여전하다. 생수병을 통째로 들고 한모금 물을 넘긴 녀석은 가방을 든 채 서있는 나를 보며 어딜 가냐 물었다. 그게 꼭 지금 그 꼴로 밖을 나가겠다는 거냐? 로 들려 괜히 미간을 좁혔다.
“집에 가지 어딜가.”
“아 됐어. 그냥 여기서 씻고 밥 먹고 가.”
“나 옷도 갈아입어야 돼.”
“내꺼 줄게. 세안은 엄마꺼 쓰고. 됐지?”
생수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며 나를 바라보는 정재현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착착 진행되는 말에 순간 홀린 것 같았다. 그래 뭐, 또 나가려니까 귀찮긴 하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로 마주한 얼굴은 그야말로 헬이었다. 파운데이션 다 끼고 눈화장 번지고 입술은 색 없고 눈썹은 다 지워졌네. 약간 사람이 아니네..(착잡)
“김여주, 옷.”
“아, 땡큐.”
이모가 쓰시는 클렌징오일을 솜에 묻혀 눈화장부터 지우던 중에 정재현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내가 옷을 벗고 있는 것도 아닌데 고개는 반대편으로 돌리고 손만 내민다. 뭐야, 저럴 꺼면 노크를 하지 새삼스럽게. 나는 얼른 정재현이 내민 옷가지를 받아들었다. 정재현이 집에서 자주 입는 후드와 츄리닝 바지였다. 내가 옷을 건네받는 순간 정재현은 화장실 문을 닫았다.
“아 대박. 좀 살 것 같다.”
얼굴을 깨끗히 씻어내자 턱 끝까지 차있던 짜증도 다 내려간 느낌이다.후드와 바지가 다 커서 질질 끌리긴 했지만 편한 옷을 입은 것 만으로도 오케이였다. 상쾌한 기분으로 거실을 향했다. 안방에 있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건지 앞머리가 조금 젖어있는 정재현이 쇼파에 누워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먹을래?”
“집에 뭐 있어?”
“몰라. 밥은 있더라.”
그럼 밥이랑 대충 반찬이랑 먹자. 나는 쇼파 구석에 있던 리모콘을 가져와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일요일 아침엔 역시 서프라이즈지~! 마치 내 집인 것 처럼 자연스럽게 티비를 튼 후 채널을 돌렸다. 후드티 소매가 길고 헐렁한 탓에 리모콘을 거의 반 쯤 소매 안으로 넣었다시피 쥔 상태였다. 즐겨보던 티비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멈춘 채널은 광고 중이었다. 요새 한창 인기가 많은 남자 배우의 초콜렛 광고가 나오는데, 진짜 잘생겼네 생각할 쯤이였다.
“김여주. 돌아앉아봐.”
“왜?”
정재현이 내게 말을 했다. 나는 상체를 반 쯤 뒤로, 그러니까 정재현 쪽으로 돌리며 녀석을 바라봤다. 언제 일어난 건지 쇼파에 아빠다리로 앉아 나를 보고있다. 눈이 마주치자 정재현은 제 손을 뻗어 내 양 손목을 잡아 끌었다. 소매가 달랑거리며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뭘 하려는 건가 싶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정재현은 말없이 길게 늘어진 소매를 접기 시작했다.
“옷이 왜이렇게 커.”
“너가 크니까 큰 거지 뭐.”
“너가 작은 거 아니고?”
한 소매 당 네 번씩. 접고 접고 접고 또 접은 후에야 정재현은 내 손목을 놔줬다. 그제서야 손이라는게 눈에 보였다. 두꺼워진 소매는 무겁게 손목을 감쌌고, 나는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정재현 이 놈이 다시 날 잡는 거다.
“이거.”
“뭐야?”
“태일이 형이 너 주래.”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흰 봉투를 내민다. 나는 뒤이어 들리는 이름에 봉투를 잡으려던 손을 허공에 멈췄다.
“..너 오빠 만났어?”
시선을 올려 정재현을 바라봤다. 등 뒤로는 보려고 했던 프로그램의 오프닝 음악이 요란하게 거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정재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어제 편의점 갔다가.
“이게 뭔데..?”
“답장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더라, 형이.”
아…. 나는 그제서야 작게 벌려진 입술을 닫았다. 답장 바라고 적은 거 아닌데. 숙취음료와 같이 줬던 쪽지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오빠 만나면 아는 척 하지마.”
힘 없이 봉투를 손에 쥐었다. 갖고만 있을 생각으로 가방 깊숙히 집어넣었다. 바로 읽을 자신은 없었다. 무슨 말이 적혀있을 줄 알고. 읽어도 혼자 있을 때 읽어야지, 지금은 아니었다. 가방을 저 멀리 밀어버린 내가 고개를 들었다. 또 한 번 정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정재현은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내 말에 대답하는 건지 알았어, 라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말을 하는 표정이 미묘하다.
“정재현.”
“어.”
“나도 이제 길 가다 오빠 만나면 모른 척 할거야.”
“그래.”
“이제 술 취해도 안 울어.”
“그래.”
“오빠 얘기로 술주정 안 할거야.”
“그래.”
“그리고 나 이제 남자 안 만나.”
“그건 안돼.”
맹세하듯 줄줄이 읊던 내게 줄곧 그래, 그래, 대답하던 정재현이 순간 표정을 굳힌다. 그에 나도 덩달아 정색했다. 뭐야, 니가 뭔데! 내가 안 만나겠다는데 저가 안된다며 올곧은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는 정재현을 빤히 쳐다봤다. 아 뭐 노려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아무튼 녀석을 봤다. 정재현은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쇼파에서 내려와 내 옆에 앉는다. 난데없이 눈싸움이 벌어졌다.
“네 미래 남편이 알면 얼마나 속상하겠냐”
“야, 남자를 안 만나는데 미래 남편 같은게 어딨냐?”
“아냐 너 결혼해.”
황당했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맨날 하던 말이 너 그래서 누가 데려가겠냐! 였던 놈이 뭐라는 거야.
“니가 어떻게 알아 그걸.”
“내가 모르는게 어딨어.”
“참나..”
“그, 아마 네 미래 남편은 말이야.”
정재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상승선을 그리니 보조개까지 들어간 얼굴로 계속 나를 쳐다본다. 나는 얘가 또 무슨 말로 나를 놀려먹으려는 건가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녀석이 말을 이어나가길 기다렸다. 아직 안 태어났다.. 뭐 그런 말을 지껄이면 주먹을 날릴 생각으로 말이다.
“너 안 울릴걸.”
“..”
하지만 주먹을 날릴 일은 없었다.
“뭐 알고보니 너를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일 수도 있고.”
“...”
“엄청 잘생겼을 것 같네.”
그 말을 끝으로 아예 씩 웃어보이는 얼굴에 나는 잠시간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어째 녀석이 접어준 소매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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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에 태어난 막내 지성아! 생일 축하해~♡ 컴백도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