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겼어?”
“뭘?”
“멘탈.”
고개를 들어 정재현을 바라봤다. 기말이라 무리하게 잠을 줄여서 공부한게 얼굴에서 다 보이나보다. 그래, 그럴만 하지. 사실 무슨 정신으로 강의실까지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시험은 잘 칠 수 있을까 울적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오늘이 시험 마지막 날인데도 멀쩡해 보이는 정재현은 이런 나를 보며 혀를 쯧 차더니 곧 제 가방을 뒤적 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건조한 눈을 비비며 피곤을 내쫓기 급했다. 내일부터 종강, 이 팩트 하나만이 내 멘탈의 지지대였다.
“아 해봐.”
갑작스럽게 들리는 말에 아, 작게 입을 벌리자 정재현이 씩 웃으며 입술 새로 딱딱한 무언가를 넣어준다. 나는 흘러내린 잔머리를 뒤로 넘기며 미간을 좁혔다.
“므으?” (뭐야?)
“초콜렛. 집에 있길래 몇 개 가져왔어.”
아, 난 또 비타민 물려준 줄. 정재현이 쌓아놓은 전적이 좀 많아야지. 내가 쓴 건 죽어도 안 먹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비타민 한 알씩 입에 넣어주던게 정재현이었다. 내가 하도 짜증내니까 단 걸로 루트를 갈아탄 건가. 이거이거, 아주 좋은 초이슨데..?^^
초콜렛이 달았다. 진짜 달았다. 덕분에 온 몸 세포들에 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이 다니던 내가 히죽 웃으며 우물우물 씹는게 영 바보같았는지 으이그, 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한 번 헝클인 정재현이 가방을 고쳐 멨다. 시험 잘 보라며 한 마디 툭 던지고 제 강의실 쪽으로 등을 돌린 정재현에게 너도~! 한 번 소리쳐 준 후 나 역시 발을 옮길 참이었다.
“쟤가 정재현 맞지?”
“아 깜짝이야.”
언제 오신 건지 등 뒤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동그란 안경을 코에 걸친 태용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아 선배 놀랐잖아요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는데, 선배는 제 큰 눈을 저 멀리 걸어가는 정재현의 뒷모습에 고정한 채 쏘리, 건성한 사과를 내밀 뿐이었다.
“너 쟤랑 언제부터 친구였냐?”
그리고 덜컥 그런 질문을 하더라. 초콜렛을 다 먹은 내가 입을 쩝 다시며 수상쩍은 눈초리로 선배를 바라봤다. 정재현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고, 갑자기 저런 질문은 왜 하는 거지. 질문을 했는데도 돌아오는 답이 없는 게 이상했던 건지 줄곧 정재현만 보던 선배가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내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어투와 함께 가지런히 놓인 눈썹이 삐딱하게 움직인다.
“..애기 때부터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지 라는 눈빛이였어요.”
“아, 그냥 좀 짠해서.”
“누가요? 정재현이요? 왜요?”
“너랑 친구잖아.”
“아 선배!!!”
이어지는 대화는 결국 내 큰 소리로 끝났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 나와 선배 쪽을 보는게 느껴져 급히 고개를 가리긴 했지만 입술을 퉁 내밀고 쉬익쉬익 어깨를 들썩이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선배가 하하 웃으면 아 장난이구나~ 하는데, 선배는 웃지도 않고 진지한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으니 이러는 거다. 이 선배 진짜 진심인가봐..시바..(울컥) 속상한 마음이 물 밀리듯 밀려왔다.
“여주야.”
“왜요.”
“모르면 됐어. 괜찮아.”
나를 부르는 선배에 퉁명스럽게 답하자 또 맥락에 안 맞는 말을 던지는 선배에 그냥 입술을 꾹 닫았다. 밑도 끝도 없이 저런 말을 하면 내가 뭐라고 반응해야 하냐고. 나는 아쉬운 대로 세모눈으로 선배를 쳐다봤다. 선배는 그제서야 이 상처받은 영혼을 발견한 건지 어색하게 웃으며 제 손을 올려뒀던 내 어깨를 두 어번 툭툭 두드리더라. 허~! 그래봤자 이미 늦으셨네요(*`⌒´*). 고개를 휙 돌렸다.
“민형이랑은 수업 잘 하고 있지?”
바로 다시 돌리긴 했지만… (민형 이름만 들어도 한없이 작아지는 슈퍼을)
“민형이..”
“..”
“당연히 잘 하구 있죠.. 그쵸..!”
잠시 이민형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이번주 수업 땐 어떻게 얼굴을 봐야할까 걱정이 태산인데 말이다. 저번 일요일에 민형이가 그렇게 웃고 난 후 했던 말이 잊을만 하면 떠올라 퍽 난감했었다. 목적지 없이 달린게 너무 오랜만이라니. 이게 고등학생 입에서 나올 말이냐고..(말잇못) 처음엔 그저 똑똑하고 싸가지 없는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갈수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한 아이, 그래서 보듬어주고 싶다 라는 마음이 커져갔다. 미쳤지. 미친거야.
아, 근데 이 시점에서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 이민형 누나인 척 했잖아. 앞에서 욕도 했잖아. 손도 잡았잖아. ..나 진짜 이민형 어떻게 봐?
“안녕하세요.”
“어어 민형아 안녕~ 어머님 안녕하세요!”
시험이 다 끝났고, 종강을 했고, 토요일이 왔고, 그렇게 걱정했던 이민형이 방금 나한테 꾸벅 인사했다. 옆에 어머님이 계셔서 그런지 세계 최고 미소맨으로 나를 반기는 민형이를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저 얼굴을 보니 그 날 민형이 손을 덥석 잡고 뛰던게 생각나 속으로는 이미 머리를 다 뽑고도 남을 판이었다. 어머님께 한 번 웃어보인 후 제 방 쪽으로 먼저 발을 옮기는 민형이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민형아, 너 먼저 들어가. 나는 화장실 좀..”
손이라도 씻어서 조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가야겠다.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민형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얼른 화장실로 향한 후 냉수에 손을 가져갔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차가운 물을 손으로 받으며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자연스럽게 수업하자. 할 수 있잖아, 그치? 어? 대답해 (멱살)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수도를 잠그는 걸로 생각을 정리했다. 민형이가 먼저 그날 일 꺼내지는 않겠지, 설마.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며 화장실을 나갔다.
“저기, 선생님.”
“아, 네!”
“저희 민형이랑 수업 괜찮으세요?”
그런데 방으로 직행 하려던 나를 잡은 건 민형이의 어머님이셨다. 수업이 괜찮냐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시는 모습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너무 좋아요! 민형이가 똑똑해서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건 구라 아니고 사실이다). 그러자 어머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민형이가 계속 선생님 좋으신 분이라고 하더라구요.”
“..민형이가요?”
“네. 저희 애가 먼저 그러는 일이 없었는데, 선생님이 정말 좋나봐요~”
오늘 수업도 그럼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난 꿀 먹은 벙어리 처럼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또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천천히 민형이의 방으로 걸어갔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문을 열었을 때, 책상에 앉아 샤프를 돌리고 있는 이민형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 수업해요.”
쟤가 왜 그럴까. 저번에도 메세지로 걱정했다고 그러더니.. 막상 단 둘이 있는 공간에서 나를 보는 얼굴은 저렇게 냉랭하기만 한데, 왜 뒤에서는 자꾸 좋다고 하는 거야. 머릿속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진짜로! 지금 표정만 보면 누가 박장대소 했냐는 듯 그냥 전이랑 다른게 없는데?
“선생님. 안 오세요?”
“어? 어어, 가. 가 민형아.”
얼 빠진 표정으로 서있던게 분명하다. 이민형의 미간이 더욱 더 좁혀지는 걸 보면 그랬다. 나는 급히 책상 앞에 앉아 가방에서 문제집부터 꺼냈다.
“저번에 풀어보라고 했던 문제 풀어봤어?”
“네.”
“어땠어? 잘 풀렸어?”
“네.”
그래. 안 풀렸으면 바로 물어봤겠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문제집을 펼쳤다. 저번 수업 때 끝냈던 부분에 붙혀둔 포스트잇을 따라 손을 옮기는데,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잔잔하게 들리던 방 안에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는 이민형의 목소리였다.
“어, 민형아.”
오늘 시작할 페이지를 폈다. 그 후 민형이의 부름에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응..?”
“그날 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눈을 문제집에 박고 그런 말을 내뱉는다. 그날 이라고 하면 분명 ‘그날’ 을 말 하는 거겠지..(먼산) 덕분에 잔뜩 당황하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어, 아냐. 내가 미안하지 괜히 뛰게 하구.. 작게 중얼거렸다. 녀석이 절대 먼저 언급하지 않을거라고 애써 다독였던 마음에 비눗방을이 올라오듯 부글부글 끓는게 느껴졌다. 진짜 이민형 왜 저러지. 나 지금 엄청 낯선데? 문제집 끝자락을 만지작 거리며 앞에 놓인 그 작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도대체 저 머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 거냐. 이런 내 불같은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민형이가 슬쩍 얼굴을 들었다.
.. (°ㅂ° )..? 쟤 지금 또 웃는 거야…? 나 낯설다니까 민형아…??????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세요.”
제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괜히 목구멍이 턱 막히더라. 아니 그렇게 웃으면서 그런 거 물어보면 내가 멘탈이 좀 나가잖아. 저릿한 손을 급히 테이블 밑으로 숨긴 후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아니..그냥..”
“..”
“그냥 좀 이상하구 그래서..”
“..”
“너가 전보다 막..아니 지금도 막 웃고..저번에도...아, 모르겠다.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머릿속에 정리도 안된 상태에서 횡설수설 말을 꺼냈다. 민형이와 마주하던 눈은 이미 요리조리 굴리기 운동에 한창이었다. 나 지금 얼마나 멍청해보일까. 이와중에 그런 생각까지 하며 괜히 머리 한 번 만져보고 나 혼자 아주 난리가 났다.
“적응하세요.”
“..”
“나 이제 선생님 좋으니까.”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어색하게 땅바닥만 보고있던 눈을 다시 녀석에게로 돌렸다. 나 방금 뭐 들은 거야? 눈을 크게 떠보였다. 아마 평소보다 두배는 크게 뜨고 있을 거다. 그렇게 뜬 눈으로 민형이를 바라봤다. 입술도 벌릴 뻔 했는데, 그것까지 하면 너무 경악하는 표정이 될까봐 힘겹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선생님 좋아해요.”
진득히 시선이 맞물린 이민형이 다시 한 번 제 목소리로 방 안을 울렸다. 그때 누가 내 머리에 대고 종을 치는 것 처럼 땡, 하고 머리가 울리기도 했다. 나는 놀란 마음에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녀석을 바라봤다. 내가 살다살다.. (입틀막) 저건 음, 신종 괴롭힘인가 아주 잠시 고민했는데 너무너무 진지한 모습에 곧 생각을 접었다. 민형, 민형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민형을 불러보았다. 저번주까지만 해도 무심하게 나를 보던 놈이었다. 뒤에서만 내가 좋다고 하던 애였다. 뒷목이 서늘했다.
“초반엔 별 생각 없었던 거 사실인데요, 지금은 아니에요.”
“..”
“말 안 해도 다 알아주니까.”
“..”
“그래서 선생님 좋아요.”
이민형은 내가 말도 벙긋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자 말을 이어나갔다. 그 말을 듣는데 그동안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는게 아닌가. 너 내가 만만해보이니? 라고 물었던 첫 만남 (지금 생각해도 미친짓이었다), 최대한 맞춰주려고 울컥..! 해도 참았던 무수한 수업들, 문제를 물어보는 메세지가 오면 최대한 빨리 풀어주려 바등거렸던 새벽, 어쩌다 알게된 담배, 혼내지도 않고 도리어 막대사탕도 쥐어줬었지. 나 그럼 지금까지의 노력 민형피셜로 인정 받은 거지? TAT
“진짜..?”
“..”
“이제 진짜진짜 나 좋아? 나 괜찮아? 나 마음에 들어?”
이민형이 뒤에서 내 칭찬을 하고 다닌 건 그럼, 진짜 진심이라는 소리잖아. 난 금방이라도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 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한 달 넘게 죽어라 버틴 보람이 있다 김여주!!!!! \(ಥ⌣ಥ) / 그동안 이민형 때문에 들이켰던 술을 생각해봐라. 이건 기적이라고. 신나는 마음을 주체를 못하고 광대를 잔뜩 올리고 있는 내가 웃긴 건지 이민형이 허, 하며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낸다.
“진짜로요.”
그러면서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해주는데, 영혼은 이미 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나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수업 하자…!
“저 왔어요~~!”
익숙한 비밀번호 네자리를 틱틱 치고 현관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훑고 지나간다. 현관에는 엄마 아빠의 슬리퍼와 운동화가 한 쪽에 놓여져 있었고, 나는 그 옆에 내 신발을 벗어놓은 후 거실에 발을 들였다.
“여주 왔어~? 얼른 앉아.”
이미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온갖 종류의 음식을 차려놓고 거실에 둘러 앉은 엄마 아빠, 이모와 아저씨, 그리고 정재현이 보였다. 얼른 와서 앉으라며 정재현의 옆 자리를 가리키시는 이모에게 한번 더 인사한 후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정재현은 집에서 입는 흰 티와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엉덩이를 붙여앉았다. 아직 몇 주 남았네, 했던 이모의 생신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매년 같이 외식을 했었는데, 올해는 그냥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이모의 의견이 있어 과외가 끝나자마자 정재현의 집으로 직행한 것이다.
“이모 생신 축하드려요!!!”
“어우 여주야 고마워~ 많이 먹어, 알았지?”
가방을 구석에 밀어놓고 팔을 걷었다. 이모는 많이 먹으라며 고기가 담긴 그릇에 내 앞으로 밀어주셨다. 아 오늘 진짜 기분 최고네. 히죽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를 한 점 집으려는 순간, 옆에 앉아있던 정재현이 갑자기 나를 툭 치는게 아닌가. 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냐?”
“어? 왜?”
“아까 들어올 때부터 기분 엄청 좋아보인다?”
아 세상에. 얼굴에 다 티나나보네^^ 나는 양념이 묻은 젓가락 끝 쪽을 입으로 가져가며 씩 웃었다. 무슨 일이야 당연히 있지. 아까 민형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광대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나는 후, 하고 깊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그때까지 정재현은 내게 제 시선을 고정시킬 뿐이었다.
“민형이가 나 좋대.”
내가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짧게 말했다. 부모님들의 호탕한 대화 소리에 내 말은 아마 정재현에게만 들렸을 거다. 아무렴. 어차피 정재현에게만 조금, 아주 조금 자랑 할 생각으로 신나게 집까지 온 것이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정재현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인상을 쓴다. 미간을 좁히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야, 왜 저래.
“..민형이가 누군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민형이가 누구냐 묻는 말에 이번엔 내 쪽에서 표정을 찡그렸다. 어떻게 우리 민형이를 기억 못하지? [system: 이민형 님이 ‘우리’ 호칭을 획득 하셨습니다.] 내가 술 취해서 욕 한 적 꽤 많을..(말잇못) 새삼 떠오르는 불결한 과거에 고개를 두어번 저으며 작게 대답했다. 내 과외학생. 그제서야 정재현은 아~ 따위의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내며 표정을 풀었다.
“걔가 원래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내가 그랬잖아, 그치? 근데 이제 내가 좋대. 마음에 든대.”
나는 언제 표정을 굳혔나는 듯 다시 히죽 웃어보였다.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좋았다. 뭔가 슈퍼을에서 을로 신분 상승한 느낌이랄까^^.. 정재현은 뒷 목을 만지작 거리며 좋겠네~ 맞장구를 한 번 쳐주더니 곧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친구한테 관심 요만큼도 없겠지 (울컥) 너무 싱겁게 끝나버린 자랑 타임에 입술을 삐쭉 내미는데, 정재현이 테이블 위로 쓱 제 손을 뻗는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이건 김여주랑 준비한 선물.”
“어머머, 이게 뭐야?”
어디에 뒀던 건지 저번에 미리 사둔 선물이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건네는 손이었다. 이모, 그거 목걸이랑 귀걸이에요! 정신을 차린 내가 얼른 외쳤다. 그때 태일 오빠를 피해 들어갔던 악세사리 상점에서 산 목걸이와 그 후 며칠 뒤 백화점에서 사온 귀걸이었다.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 이모는 선물이 마음에 드신 건지 환하게 웃으며 나와 정재현에게로 고개를 돌리셨다.
“이렇게 예쁜 건 분명히 여주가 골랐을거야, 그치?”
“아이 당연하죠 이모~!”
“와 너무한다 엄마. 같이 고른 거야.”
“나는 여주가 내 며느리였으면 좋겠어. 너무 좋아. 그치 여보?”
“어머머, 재현엄마. 저 기집애가 얼마나 말을 안 듣는데~! 나야말로 재현이같은 사위 좀 보고싶네.”
“그럼 우리 애들 결혼 시킬까? 난 너무 좋은데~”
흐음, 얘기가 왜 또 이렇게 흘러가지..? (ಠ⌣ಠ) 나는 씩 웃고있던 입꼬리를 그대로 둔 채 눈만 깜빡였다. 이모와 엄마의 저런 대화는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난 정재현한테 시집 갈 생각이 요오만큼도 없고 그건 정재현도 마찬가지일꺼다. 정재현 뭐, 보나마나 인상 팍 찡그리고 있겠지. 좀 있으면 분명 아 엄마~ 하는 목소리도 들릴꺼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어쩌다 정재현이랑 친구가 돼서..(먼산)분명 지금쯤 한 마디 꺼내야 할 정재현이 잠잠하다. 목구멍이 꾹 막히는 기분에 물도 한 모금 넘기며 정재현을 힐끔 쳐다봤다.
아니 그런데 얘도 이제 해탈 한 건지, 그냥 웃고만 있더라고.
“재현아 나가서 술 좀 사와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신 정재현네 아저씨가 정재현에게 오만원을 건네셨다. 간간히 술 안주로 올려놓은 김을 집어먹으며 핸드폰 게임을 하던 정재현이 기지개를 피고 일어나며 돈을 받아들었다. 그러면서 같이 가자고 제 발로 내 무릎을 툭툭 치는데, 귀찮은 마음에 고개를 저으며 손짓했다. 그냥 빨리 갔다와. 편의점이 먼 것도 아니고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보이는데 굳이 두명이서 갈 필요는 없잖아ㅇㅅaㅇ..
“아 진짜, 치사하게.”
“맞아. 나 원래 치사빵꾸야. 그러니까 혼자 갔다와.”
쇼파에 기대 눈을 끔뻑이며 일어난 정재현을 올려다보자, 녀석이 쳇 하며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다녀오겠습니다. 정재현이 걸어가자 현관 쪽 센서등이 켜졌고, 곧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정재현네 이모 아저씨, 우리 엄마 아빠 모두 취하신지 오래였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재현 방으로 들어갔다. 나 하나 사라져도 아는 사람 아무도 없을게 분명했다. 잠이나 자야지.
정재현 방은 깔끔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하얀 책상과 하얀 침대. 정재현 방이야 뭐 일주일에 한번씩은 들어오기 때문에 별 감흥은 없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아 하품을 크게 한 번 하다 문득 눈에 들어온 정재현의 지갑에 손을 뻗었다. 흰 책상 위에 놓인 검정색 지갑이 눈에 안 띌리가 없었다. 얼마나 들고다니는지 한 번 볼까나~ 항상 정재현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나오던 지갑을 펼쳐 내용물을 슬쩍 확인했다. 오, 좀 들고다니네. 생각보다 두둑한 지갑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후 다시 책상 위에 놓으려는데, 그 순간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고개를 내려 확인하니 그것은 한 장의 작은 사진이었다.
“..미친, 이게 뭐야.”
떨어진 사진을 주운 나는 곧 조용히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와 정재현이 유치원 때 찍은 것이었는데, 내가 정재현 볼에 뽀뽀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재현은 왜 이런 사진을 지갑에 넣어다녀? 나는 미간을 좁히며 사진을 앞뒤로 두어번 확인한 후 신경질 적으로 다시 지갑에 (쑤셔)넣었다. 내가 저런 미친 짓을 하던 시절이 있었구나..(먼산) 괜히 소름이 돋아 팔을 비비며 지갑을 내려놓았다.
“다른 사진 다 놔두고 저런 걸. 분명 나중에 나 놀려먹으려고.”
내가 네 꼼수를 모를 것 같냐 정재현. 이를 바득 갈며 정재현의 큰 침대에 대(大) 자로 누웠다. 그래도 유치원 때 사진을 보니 새삼 정재현도 나도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작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술 사러 가는 나이가 됐네. 지금 누워있는 침대도 몇 번째 침대인지 모르겠다. 점점 키가 자란 정재현 때문에 주기적으로 같이 커진 침대가 벌써 이만큼이나 커졌다니. 나는 이렇게 누우면 침대 끝 부분과 발 사이의 공간이 많이 남는데 정재현은 이것도 발이 끝 부분에 닿는다며 언젠가 짧게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 아, 이런 생각하니까 괜히 이상하잖아. 더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눈을 꾹 감았다. 정재현 침대가 내 침대보다 훨씬 푹신해서 금방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잠에 드는 건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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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에 암호닉 신청해주신 모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