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_00
w.피자피자
밤 9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 쯤 난 내 직장인 방송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어 단어장을 손에 꼭 쥔 채 꾸벅꾸벅 조는 학생, '어어, 딸 아빠 금방 가-' 하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계시는 한 가정의 아버지, 사람들이 내리실 때 마다 '안녕히 가세요.' 하며 돌아오지 않는 인사를 건네는 기사 아저씨, 이어폰을 낀 채 어둑한 창 밖을 바라보는 내 또래의 남자까지. 버스 안엔 적지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삶이 녹아 들어있었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 그들에 내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번 정류장은-"
익숙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흘러내린 크로스백을 고쳐 메고 일어나 앞 쪽의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내 손가락 위로 길게 뻗은 손이 겹쳐졌다. 갑작스런 느낌에 놀라 고개를 들자 그 손의 주인인 남자도 꽤나 놀란 듯 손을 떼지도 않은 채 큰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네? 괜찮아요. 먼저 내리세요."
당황하기도 잠시 문이 열리는 소리와 미소를 띤 내 대답에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버스에서 내렸다. 이어 나 또한 내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횡단보도로 향했다. 잔잔한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걷는 남자에게로 꽂혔다. 청바지에 패딩과 백팩이 전형적인 대학생들의 스타일이었다. 잠깐 마주친 거지만 얼굴도 꽤 어려보이던데, 대학생인가. 좋을 때다-
잠깐의 딴 생각도 잠시,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에 음악 소리를 키우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
"저 왔습, 어.."
익숙하게 라디오국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가 공간을 메꾸었다.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 앉은 작가들, 스탭들, 그리고 한 남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빈 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눈치를 보며 옆에 앉아있던 도영 선배를 툭툭 치자 선배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이를 앙 물고 답 했다.
"내가 피디 새로 은다그 일찍 오라그 했지-"
"헐. 맞다."
그제야 생각났다. 어제 새벽이었나, 잠에 막 들려고 할 때쯤 울린 카톡이. 잠결에 봤던 터라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읽지도 않고 네네 하며 답 했는데 그게 이렇게 중요한 내용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덕분에 스탭들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난 변명할 거리는 찾을 수 조차 없었다. 이에 연신 죄송합니다만 반복하던 내 목소리를 멈추게 한 건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좀 늦을 수 도 있죠. 원래 출근 시간보다 늦은 것도 아닌데요, 뭐. 괜찮아요. 저 권피디님처럼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니에요!"
"그래도.."
"진짜 괜찮아요. 작가님까지 오셨으니까 제 소개 다시 하겠습니다."
"..."
미성의 밝은 목소리와 예쁜 미소가 나로 인해 축 쳐져 있던 회의실의 분위기를 금세 밝혀냈다. 그제야 하나 둘 씩 풀어지는 스탭들의 표정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인지 내 맞은 편에 앉아있는 그 남자와 단번에 눈이 마주쳤고 남자는 한 쪽 눈을 찡긋 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근데 저 남자..
"반갑습니다. 라디오국으로 발령 받은 이동혁 PD라고 합니다. 중대 출신이고 올해 25살이고 어..라디오는 처음이라 미숙한 게 많으니 열심히 배워갈게요. 잘 해 봅시다-"
우리 학교 출신이라니, 갑작스레 생긴 교집합에 왠지 모를 친밀감이 형성되었다. 우리학교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짧고도 요점만 콕콕 집어서 이야기 하는 남자의 화법은 이 프로그램의 전 피디인 권피디와는 상반된 방법이었다. 스탭들 대부분이 흡족해하는 눈치였고 나 또한 남자에 대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던 편에 속했다. 내 이름이 불리기 전까진.
"나머지 분들은 스튜디오 가셔서 준비 해주시고 ㅇ작가님은 잠시 저 좀 보고 가세요."
"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자기 짐을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내 어깨를 툭툭쳤고 난 억지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아오, 왜 하필 첫날부터 찍혀갖고. 등신이지.
"작가님?"
"네?아, 네. 아니에요. 하실 말씀이라도..?"
"왜 이렇게 굳어 있어요. 긴장 푸세요, 저 진짜 권피디님 같은 스타일 아니에요."
남자는 잔뜩 굳은 내 표정에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
"아까 버스, 맞죠?"
버스? 뜬금 없는 질문에 내 머릿속은 몇 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억의 테이프를 두 어 번 감았을까, 버스 안에서 내리기 직전의 장면이 재생되었다.
"아, 벨."
"맞죠? 난 또 기억 못 하는 줄 알고 삐질 뻔 했네."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왜 제가 삐질 일 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갑인 상사가 그렇다는데 말단 직원이 뭘 어쩌겠나.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남자는 한참을 웃다 내 앞으로 불쑥 큰 손을 내밀었다.
"잘 해 봐요. 김작가님도 개편 때 옮겨 가실 것 같던데, 저희 둘이 잘 맞아야죠."
"네."
내민 손이 민망하지 않게 덥썩 잡아 위아래로 흔들자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잠시나마 잡은 그 큰 손은 꽤나 따뜻해 쌀쌀한 복도에서도 온기가 떠나가지 않았다.
***
"생방송 시작 1분 전입니다-"
"..."
"스탠 바이- 큐."
"지친 하루를 돌아 볼, 예스터데이의 정재현입니다."
잔잔한 오프닝 송이 끝나고 새 피디님의 큐 사인에 나긋나긋한 디제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언제 들어도 참 밤에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라디오는 여태 해왔던 것 처럼 별 이상 없이 잔잔히 흘러갔고 어느덧 방송은 마지막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광고 몇 개가 끝나자마자 들어가야 할 음악 LP판이 보이지 않았다.
"감독님, 어디다 두셨는지 기억 안 나세요?"
"아까 분명히 저 의자 위에 뒀는데, 아 어디갔지. 피디님 죄송해요. 금방 찾을게요."
피디님의 물음에 음향 감독님은 물론 전 스탭들이 스튜디오 곳곳을 뒤져보았지만 LP판은 끝내 보이지 않았고 15초짜리 광고는 네 개 정도 뿐이 남지 않았다. 60초에 삽입곡과 클로징 멘트까지 합치면 많아봤자 3분일텐데.
프로그램이 생긴 이후로 항상 마지막 곡은 아날로그 감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 LP판으로 보내드렸고 그것이 어찌보면 우리 프로그램의 가장 대표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스트리밍으로 틀었다가 게시판이 난리가 난 적이 있어 그 뒤론 더욱 열을 가하는 코너인지라 다들 안절부절 하는 상태였다. 하필 피디가 새로 온 날 이러다니. 그 순간 모두의 머릿 속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때, 피디님이 박스 안과 연결되는 버튼을 꾹 누르곤 마이크에 입을 댔다.
"재현 씨, 클로징 멘트 몇 분 정도 끌 수 있어요?"
"최대론 3분?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엘피판 어떡해요.."
"조금만 더 끌어주세요. 빨리 찾아올테니까."
"..피디님 설마 지금 가시게요?"
길어봤자 3분인 시간 내에 자료실까지 언제 가서 언제 노래를 골라오나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스탭들의 생각이 이번에도 같았고 하나같이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피디님, 그냥 스트리밍으로 트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거기까지 언제 다녀 오시려고.."
"피디님 힘드세요. 청취자 분들께 양해 구하고.."
"저 하나 힘든 게 나아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붙잡을 새도 없이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우린 쿵 소리를 내며 닫힌 철문을 잠시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클로징 멘트를 급히 써내려갔다.
"그냥 줄타고 들어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저 얼굴에, 저 나이에, 저 책임감에. 완전 대박인데."
"진짜 권피디보다 훨 배 낫다."
"그건 당연한 소리고, 그 꼰대 예능국 가줘서 너무 고맙다 진짜."
음향 감독님, 보조 작가, 카메라 감독님 등 너나 할 거 없이 그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입가에도 슬쩍 미소가 걸려있었다. 본 지 몇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자 뒤로 숨을 헐떡이며 엘피판을 건네는 그가 등장했다.
문 바로 근처에 앉아있던 내게로 전해진 엘피판을 들곤 곧바로 부스로 들어가 재현 씨에게 전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클로징 멘트를 잔뜩 늘이던 재현 씨의 얼굴에도, 스탭들의 얼굴에도,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고르고 있는 피디님의 얼굴에도 모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마지막 곡 들려드리고 저희는 내일 밤에 다시 만나요. Boys Like Girls의 Two is better than One."
달달한 선율이 스튜디오 내에 울려 퍼졌다. 팝송이라 가사의 뜻을 정확히 알진 못 했지만 가수의 목소리가 귀에 콕콕 들어왔다. 고비를 넘겼단 안도감 때문인지, 그저 이 스튜디오에 흐르는 노래 때문인지 내 입가에 번진 미소는 떠나갈 줄을 몰랐다. 난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하얀 맨투맨의 소매를 걷은 채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잘 빠진 그의 입 꼬리는 조금 더 올라가 날 반겼고 이에 따라 내 심박수 또한 조금씩 속도를 내는 듯 했다. 왠지 모를 느낌에 고개를 먼저 돌리자 뒤에서 피식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덥다. 괜히 손부채질을 해보아도 식지 않는 열기였다.
I remember what you wore on the first day
난 우리의 첫 만남때 네가 무엇을 입었는지 기억해
You came into my life And I thought hey
넌 나의 삶에 들어왔고 난 생각했지
'Cause everything you do and words you say
왜냐하면 네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들이
You know that it all takes my breath away
내 숨을 멎게 할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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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지막 첫사랑은 안 들고 오고 이런 글을 들고와서 죄송합니다..!!아마 독방에서 제목 지어달라고 찡찡 대던 글 보신 분들도 계실겁니당..핳 제목 지어주신 분 감사해요!!!!!동혁이는 여주보다 연하지만 직진하는 피디라는 설정이고 글쎄요..둘 다 서로한테 약간 뿅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헤헿 마지막 첫사랑은 오늘 새벽이나 내일 밤 쯤 들고 오겠습니당 온에어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럼 모두 잘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