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아니, 멈추어 서야만 했다. 왼쪽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란색의 서류철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주워 담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정면을 응시한다. 한참의 정적, 어항 속 열대어의 파닥임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눈 앞의 상대가 천천히, 그리고 매혹적인 미소를 자아낸다. 그 순간 학연은 생각했다. 아, 너와 나의 질긴 인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구나. 2. " …… 반갑습니다. " " ……. " 여전히 말 없이 저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발가벗겨져 희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꼭, 옛날처럼…. 눈 앞에 있던 남자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로 다가온다. 강직한 목에 달려 있는 네임택이 가을 낙엽마냥 흔들거린다. 저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치고 만다.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차학연은 불안하고, 이재환은 여전히 여유롭다. " 반갑습니다, 보다는…. " " ……. " " 오랜만이야. 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 왜, 너는 또다시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그 동안 너를 잊기 위해 발버둥쳤던 지난 날들을, 너는 가볍게 비웃어버리고 만다. 열대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3. 목을 자근히 조여오는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한 치의 빈 틈 없이 단정했던 재환의 옷 매무새가 흐트러진다. 비딱한 고개를 하고서 제 앞의 차학연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훑어내렸다. 갈증을 부추기는, 섹시한 몸선이 달라지지 않았다. 너는, 나를 벗어나지 못했어. 자그마치 2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너와 나는 여전해. 그대로야. 확신에 찬 재환의 눈빛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꽤 높은 직급을 나타내는 듯한 고급스러운 네임택이, 학연의 것과 대조되어 무겁게 공기를 짓누른다. 또, 이재환은 위, 차학연은 아래. - 차선배님! 재환의 비뚤어진 고개가 올곧게 세워졌다. 진득한 흥미를 가득 담고 있던 눈동자가 불쾌로 인해 살짝 일그러졌다. 미동없이 재환을 바라보고 있던 학연의 고개가, 천천히 뒤를 향했다. 밝은 웃음을 띄며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직속 후배. … 한상혁. " 여기서 뭐하세요? " " 아, 그게…. " " 이 분은……. 아, 이번에 새로 오셨다는 저희 부서 팀장님이십니까? " 꾸벅, 허리를 숙여보인 상혁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기를 키웠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서류철들. 그 위로, 단정히 뻗은 재환의 다리가 보인다. 다시금, 서서히 굽히고 있던 허리를 올려세웠다. 상혁과 재환의 시선이 얽힌다. 재환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저를 쳐다보지 않고, 한상혁을 바라보며 불안한 듯 입술을 물어 뜯고 있는 차학연의 모습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바라 봐야지, 왜 눈깔을 굴려. " 반갑습니다, 팀장님. " " …… 이름이? " " 한상혁입니다. " " 한, 상혁…. " 말꼬리를 길게 늘인다. 한상혁, 한상혁이라……. 4. " 차선배님. 뭐하세요, 아까부터. " " 아…. 아냐. " " 나사 하나 빠진 것 같다니까. " 장난스러운 상혁의 말에도 학연은 단 한 번도 웃을 수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무언가가 학연의 심중을 끔찍이도 괴롭히고 있었다. 겨우야 벗어난 줄 알았던 관계의 소용돌이가 또다시 학연을 옭아매고 있었다. 어쩌면 더 강력해졌을지 모르는, 그런 소용돌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급히 들이마셨다. 그런 학연을 바라보는 상혁의 시선이 묘하다. 제가 아는 차학연은, 분명히 커피를 싫어했다. 5. 차선배님, 팀장님 호출이십니다. 후배의 깍듯한 언질에 넋을 놓고 있던 학연의 정신이 돌아왔다. 모두가 학연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차학연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그 낯 익은 감각에 퍼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듯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 학연의 눈 앞에, 이재환이 걸어 오고 있다. 괴로웠다. 이 모든 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 왜, 다시 나타난거야. 왜. " " ……. " " 내가, 어떻게 너를 잊었는데. " " 못 잊었잖아. " 잊은 척 하지마. 너를 잘 알아. ……. 복도를 지나던 상혁의 발이 조용히 정적 속에 휘감겼다. 이내, 그의 푹 패인 눈꺼풀이 천천히 감긴다.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그러고들 있으면 어떡하나. …… 짜증나게. 6. 서서히, 다시. 비정상적인 굴레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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