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나희덕-
택운의 갈 곳 없는 시선이 홍빈을 찾아 헤메었다.
주위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홍빈의 얼굴이 보였다.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사람들 턱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숙인다.
연회는 더욱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무희들이 색색의 소맷단을 휘날리며 추는 아름다운 검무가 축제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고,
여기 저기서 축배를 드는 이들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딘 기분. 역시, 이 곳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택운이 한 숨을 쉬었다. 이제는 다리가 저려오기까지 했다. 주먹을 말아 쥐고서 약하게 다리를 통통 쳐낸다.
꽃 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짙은 향이 택운을 감싸고 돌았다.
얼굴을 뒤덮은 분가루가 답답해 결국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이 들었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 건지, 태양의 얼굴이 조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손에 턱을 괸 채 무희들을 바라 보고 있는 시선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택운은 그에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듯 해 보였다. 무엇을 보던, 무엇을 듣던 간에 태양의 표정은 늘 한결 같았다. 마치, 계집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천으로 만든 인형처럼 말이다.
별안간 학연이 오른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에 춤을 추던 무희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축배를 나누던 대신들의 웃음소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끊겼다.
또 다시, 황성에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 … 지루하구나. "
학연의 다정한 목소리는 어딘가 모순적이었다. 목소리는 한 없이 따사로운 햇볕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 내용에는 늘 얼음장 마냥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 하는 것 처럼.
" … 무엇을 원하십니까, 태양? "
" 항상 똑같은 것을 하니,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오. "
진달래로 담근 두견주를 입에 털어 넣은 학연이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꽃 향이, 너무나도 달달하구나.
대신들의 표정이 굳었다. 당최 학연의 생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태양이라는 자가, 이 많은 이들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다니-.
어린 나이에 태양의 직위에 오른 학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괘씸한 어린 왕. 대신들은 학연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괘씸한 놈-.
홍빈이 웃음을 픽, 터뜨렸다. 제 옆에서 분노를 주체하지 못 한 대신 하나가 잇새로 떨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감정을 조절할 줄 모르니, 어찌 태양을 상대할 수 있겠소?
비웃듯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올린 홍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태양, 감히 청하 이홍빈이 제안을 하나 하겠사옵니다. "
" …… 무엇을? "
" 지루하시다면, 흥미로운 놀이를 구경하심이 어떠십니까? "
" …… 흥미로운, 놀이라. "
" 기억 하실런지요. 소인이, 태양께 가객광대의 놀음을 보여 드리겠다고…. "
" 아아, 아…. 기억이 나는 군. 그래. 얼마나 실력이 좋은 지, 한 번 보고 싶구나. "
택운의 어깨가 흠칫, 하고 떨렸다. 손이 떨려 왔다.
아직, 태양은 물론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제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태양에게서 눈을 돌려 어느 한 곳에 시선을 집중 한 홍빈의 입이 호선을 그리며 환히 올라갔다. 이제, 네가 나설 차례다. 택운아.
홍빈의 시선이 향하는 대로, 학연의 눈도 함께 움직였다.
그 끝에 닿은 것은, 새하얀 의복을 입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홍빈이 언급했던, 가객광대인 듯 싶었다.
" 어서, 이리 나와 보거라. "
학연이 다그치듯 말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택운에게로 집중되었다.
어떡하나, 어떡하지…. 안절 부절 못하는 행색인 택운이 눈을 빠르게 껌벅였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려웠다.
" 나가거라. "
홍빈의 다정한 음성이 바람결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택운의 놀란 눈동자가 홍빈을 향했다.
지금, 어서. 나가.
볼우물이 푹 패이도록 환히 웃으며, 그렇게. 택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저게 계집인지, 사내인지. 허옇게 칠한 분 때문에 가늠이 가지를 않는군. "
" 그나 저나, 청하의 심중도 파악하지 못 하겠구려. 무엇 때문에 태양을 위해 저런 광대까지…? "
" 다, 생각이 있겠지. 청하는 허튼 일을 할 사람이 아닐세. "
택운을 앞에 두고서 대신들의 이야기가 활개쳤다. 택운이 애써 어깨를 펴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이미 자신은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다. 천하디 천한 광대로서.
기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고통 받았던 그 옛날 처럼….
흐음-. 낮은 소리를 낸 학연이 옥좌에 기대었던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들어올렸다.
어디서, 많이 본 듯 한데……. 이것은, 나의 착각인가.
" 여인이냐, 사내이냐? "
" ……. "
" 대답을 않는구나. "
학연의 목소리에 택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금 제 모습은 영락 없는 계집일 터인데, 사내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사방이 온통 조용했다. 자신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듯, 바람 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택운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 사내… 입니다. "
" … 그런가? "
" ……. "
" 사내 치고는, 매우 아름답군. 그 분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
노래, 듣고 싶구나.
학연이 다시금, 등을 기대었다.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 쬐고 있었다. 조금씩 옅어지는 달달한 향 속으로, 낯 익은 향기가 섞여 들어왔다.
학연이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 ' 그 꽃 '과 매우 닮았구나.
후우. 숨을 한 번 내 쉰 택운이 살짝 고개를 돌려 홍빈을 바라 보았다.
청색의 의복을 입은 홍빈은, 매우 아름다웠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끄덕-. 홍빈이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서.
" … 희망의 바깥은 없다. "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 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 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란다
…
…….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미성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꽃 향기도 완전히 멎어버리고 말았다.
노래를 끝 맺은 택운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 내렸다.
제 하나 뿐인 희망이었던.
끝에는 결국 쓰디 쓴 향으로 남았던,
잊어 버릴 뻔 했구나.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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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홈도 차리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바쁜 와중이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찾아 와 주신 분들 전부 감사드리고요! 왕의 남자 진짜 이제 자주 쓸 거에요 ㅠㅠ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