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여 애정을 바라지 말라
구태여 원망치도 말라
그저 물 흐르 듯
쉬이 바람 잦아 드는 들판
그 한 가운데
한 아름 염원을 담고서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바닷 물결 활개치는
노을 그림자 구석자리
몇 안 되는 미소 나누었던
아름다운 추억들
잊지 않겠노라고
구태여 애정을 바라지 말라
구태여 원망치도 말라
- 소리꾼, ' 구태여 '
살짝 벌어져 틈을 이루던 홍빈의 입술이 꾸욱, 닫히었다.
제 자신 마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택운의 노랫 소리는…… 아름다웠다.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짝 놀라 커졌던 홍빈의 동공이 차츰 가라앉았다.
오른 손을 들어 소맷단 끝 자락을 부드러이 다듬는 홍빈의 자태가 여유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 이 정도면…….
홍빈의 시선이 택운의 뒷통수로부터 어딘가로 찬찬히 옮겨졌다.
그 시선의 끝에는, 역시나 여지 없이 학연이 존재했다.
달의 선녀 항아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구나.
홍빈이 미소 지었다. 태양을 집어 삼킨 달이라-.
…
학연의 뒤로, 산 너머 태양이 지고 있었다.
붉디 붉은 노을만을 남긴 채로-.
" …… 매우, 아름답구나. "
" ……. "
" 눈물을 흘리는 연유가 무엇이냐. "
" … 아닙니다. "
택운이 급히 눈을 치켜 떴다. 그리움에 사무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버렸다.
손등으로 눈가를 박박 문질러 닦으니, 얼굴에 칠해져 있던 검은 염료가 그대로 묻어 나왔다.
새카맣게 물든 제 손등이, 마치 제 속 사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듯 해 가슴이 더욱 아리었다.
찰랑, 찰랑-.
학연의 술잔에 담긴 두견주가 양 옆으로 흔들렸다. 고개 숙인 택운의 머리를 하염 없이 바라 보던 학연이 후욱, 한 숨을 내쉬었다.
숨이 턱 막힌다는 기분이 이런 것이었던가. 아름답지만 어딘가 서글픈, 내 이런 노랫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학연의 입술이 들썩이다, 다시금 잠잠해진다.
바람이 불었다.
후회와 절망이 섞인, 거센 바람이 불어 와 그들을 송두리 째 흔들었다.
* * *
" …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 태양의 뜻 대로 하시겠지. "
" ……. "
" … 노래를 잘 부르지 못 한다더니, 잘만 부르더구나. "
홍빈이 흘깃, 택운의 옆 모습을 바라 보았다. 분이 채 다 지워지지 못해 얼굴 여기 저기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홍빈이 한 쪽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택운의 눈동자가 홍빈을 올곧게 바라 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의 그 때 처럼, 그렇게 서슬 퍼런 눈을 하고서.
" 그 눈, 차분하지 못하구나. "
" … 나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
" 너는 그냥 광대 놀음만 잘 해주면 되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 어렵다고 징징대느냐? "
" 그 광대 놀음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고. "
택운의 목소리가 분노에 떨리었다.
화가 치밀었다. 더 이상 홍빈의 흥밋 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설사 자신의 명줄이 끊긴다 하더라도, 더 이상의 치욕은 싫었다.
홍빈의 입가에 늘 은은히 맴돌던 미소가 단 번에 사라졌다.
말을 듣지 않는구나.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 택운에게 다가갔다.
……
그 순간, 안절 부절 못하는 시종의 목소리가 문 지방을 넘어 들어 왔다.
" 청하 님. "
" … 무엇이냐? "
" 저, 그것이…. 태양께서. 찾으십니다. "
태양이, 찾는다? 택운을 한 번 슥, 바라 본 홍빈이 의복을 단정히 고쳐 입었다.
태양은, 궁에 계시느냐? 제 앞을 스쳐 지나 묻는 홍빈의 모습에 시종이 고개를 조아렸다.
" 저, 그것이 아니오라……. "
" 그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
" … 청하 님을 뵈옵고자 하는 것이 아니옵고. "
" ……. "
시종의 시선이, 택운에게로 향했다.
…….
청하 님이 아닌,
저 분을, 들이시라 합니다.
* * *
택운의 발이 무겁게 움직였다. 태양의 궁으로 향하는 길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무언가를 숨기기라도 하고 싶은 것인지, 택운을 비추는 그 흔한 등불 하나 조차도 없었다.
조용한 정적 속에 들리는 것은 졸졸 흐르는 연못의 물줄기 뿐.
택운의 하얀 의복이 바닥을 스쳐 허공으로 흘러 들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니 시린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 위로 겹쳐 보이는….
그리운, 그 얼굴.
해맑게 웃던 얼굴이 생생했다.
또 다시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에 택운이 입술을 꽉 물었다.
택운의 발치에 길게 늘어진 달 그림자조차 서서히 흔적을 감추는, 깊은 밤이었다.
" ……. "
" ……. "
저번, 마당에서 태양을 마주 쳤을 적에 보았던 그 내관이었다.
말 없이 택운을 올려다 보던 내관이 고개를 돌려 태양이 있음직한 그 곳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 … 오셨습니다. "
……
- 들이게.
다정한 목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 와 택운의 심금을 울리었다.
언제 들어도 따스한 음성이었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흐릿한 불빛이 틈새 사이로 흘러 나왔다.
" 왔느냐. "
" ……. "
"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구나.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
택운이 자그마한 발을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마치 공기가 멈춘 것만 같았다.
" … 그 노랫 소리가, 궁에 있는 내내 잊혀지지가 않더구나. "
" ……. "
" 고개를, 들어 보아라. "
제가, 그 때 만났던 그 사내놈이라는 것을 알면, 태양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택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호롱불에 비친 택운의 얼굴이 하얗게 드러났다.
학연의 잇새에서 낮은 탄식이 터졌다.
" 너, 그…. "
" ……. "
" 그 때 만났었던…. "
" … 예. "
" … 그런가…. 하하. 어쩐지. "
학연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택운이 영문을 모르는 눈빛으로 학연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택운을 마주 본 학연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외양 뿐 아니라, 목소리도 어여뻤구나.
택운의 얼굴을 바라 보던 학연의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로 가라 앉았다.
옭아 매듯 택운을 훑어 내린 학연이 입을 열었다.
" 사내라고 하였지. "
" ……. "
" 분명 사내라고 하였는데, 옷 차림은 영락 없는 여인이구나. "
" ……. "
" 진정, 사내인지. "
옷을, 벗어 볼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