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바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03
홧김이었다. 태형이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사실 속으로 빌었다. 박지민이 나를 못보게 해달라고.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박지민한테 나도 너 아닌 남자를 사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막상 박지민을 보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이런 내 바램은 곧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는 지민이에 의해 처참히 무너졌다.
" 탄소야."
" … …."
" 영화 보러가?"
그런 박지민 때문에 넘어질뻔한 나를 잡아준 김태형은 곧 지민이를 날카롭게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 그럴 예정이니까 놔주시죠. 영화 시간 얼마 안남았는데."
" 아, 그러기엔 제가 탄소 남자친구라서. 손은 제가 잡고 있으니까 이제 손 놓으시는게 어떠세요?"
" 다른 여자랑 계시는 그 쪽한테 그런 얘기 듣기엔 얘 친구 …, 아. 얘 좋아하는 사람 입장으로서 듣고싶지 않은데요."
태형이의 말에 화들짝 놀라 바라보자, 김태형은 그런 말을 뱉어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저 박지민을 계속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랑 한 얘기들 때문에 그저 해본 얘기겠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지는것 같은 기분에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봤다. 얘 원래 이렇게 연기를 잘했나. …화나서 그런가? 박지민은 그런 김태형을 바라보면서 화가 나지도 않는지 표정변화도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무래도 제가 오해받는것 같은데, 저희는 뭐 아무 사이도 아니구요."
" 아, 전 얘 ㄴ…."
" 야, 너 그냥 가."
" … … 알겠어."
뭐야.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모습 중 제일 차가운 표정으로 같이 있던 여자에게 말을 꺼낸 박지민은 다시끔 내가 좋아하는 그 예쁜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말을 하더라. 왠지 쓸쓸해보이는 표정으로 걸어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곧이어 들려오는 지민이의 말에 사레에 걸릴뻔했다.
" 영화 취소하시고 5시인데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시죠. 싫으시면 탄소는 남자친구 권한으로 제가 데리고갈게요."
* * *
대체 이게 뭔 상황이람. 21년 김탄소 인생에 나 때문에 남자 둘이 신경전할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곱창집에서 이러고 있다니. 세상사 참 모르는 일이야. 박지민과 김태형을 번갈아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는 길에도 얼마나 힘들었던가. 조금이라도 김태형 쪽으로 걸으면 박지민이 끌어당기질 않나, 반대로 박지민 쪽으로 걸으면 김태형이 끌어당기고. 한건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과 박지민은 서로 소주나 따라주고있다.
" 그래서 … 우리 탄소를 좋아하신다구요."
" 그때 전화로 말했었는데. 탄소랑 바람 피울 사람이라구요."
" 남자친구 앞에서 되게 당당하시네. 근데 그게 혼자서 가능하나, 탄소도 그쪽을 좋아해야 성립되는거죠."
…아, 내가 먼저 제안했는데. 이 이상 이야기를 끌고나가면 왠지 내 욕심 때문에 태형이만 초라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지민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김태형이 먼저 입을 연다.
" 이제부터 절 좋아하게 만들거니까, 곧 성립될거에요."
" 자신만만하시네."
" 남자는 패기니까요."
당당해도 너무 당당한 태형이의 모습에 나도 당황스러운데, 지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저 얼굴에 미소를 띄운채 태형이를 바라보고만 있는다. 맞바람이라 했던게 이렇게 지민이 앞에서 대놓고 피우려던건 아니었는데. 근데 이 상황에서 곱창은 왜 이렇게 맛있는거야. 둘 다 내 이야기들 중이긴 하지만 어떻게 남자 둘의 대화에 낄 수가 없어서 그저 곱창만 주워먹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이건 너무 맛있다 …. 그렇게 둘 이야기에 끼지 못한 채 곱창 한 점에 소주 한 잔씩 슬쩍 슬쩍 먹다보니 어느새 점점 정신이 아늑해지는 기분이다.
" 야, 너 괜찮아?"
" …어어, 괜찮아. 하던 얘기들 해."
" 어우, 야. 혼자 열심히도 비웠네."
니들이 나 빼고 얘기하니까 그렇지. 술도 지들끼리 따르고. 생각해보니 왠지 섭섭한 기분에 지민이와 태형이를 번갈아가면서 째려봤다. 내 술버릇 중 하나. 술만 먹으면 왠지 섭섭해. 왠지 다 밉고 그렇다. 그렇기에 술만 취하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흑역사들이 생성되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런 날인가본지 김태형, 박지민 둘 다 갑자기 미워죽겠다.
" 야, 김태형."
" …어."
"너는 개자식이야."
" 또 시작이네. 그래, 이번엔 왜."
" 아무리 그래도 막 … 어? 좋아한다 그런 말 막 쓰는거 아니야."
" … …."
"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나 쓰는거야, 알겠지? "
" 그러고 있어."
응?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고 있다? 내가 원하던 답은 알겠다고 같은 긍정이니까 비슷한 뜻이겠지? 무슨 뜻인지 생각할 정신도 없는 탓에 그저 고개를 끄덕하고는 그 말을 넘겨버렸다. 이후엔 그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깨닫게되겠지만. 그렇게 태형이를 향해 있던 시선을 돌리자 내 시야에 박지민이 들어왔다. 아니, 박지민이 아니라 지금 내 눈엔 서운함 덩어리쳐럼 보였다.
" 박지민이네."
" … …."
" 너는 진짜 내가 서운한거 얘기하려면 어? 얘기하면서 뛰어가면 서울부터 강원도까지 갈 수 있어."
" 나한테 그렇게 서운한게 많아?"
" 넌 이제부터 박서운해. 아니다, 박섭섭어때."
" 그 이름은 좀 별로다."
별로긴 뭐가 별로야, 너랑 딱인데. 박지민을 째려보고는 술병을 드는데 벌써 이것도 비웠나보다. 아직 술이 모자르다는 생각에 '아줌마, 여기 후레쉬 한병이요!'를 외치는데, 그런 내 입을 김태형이 막고는 아주머니께 안시킨단다. 뭐야, 안먹을거면 지만 먹지 말던가.
" 야, 그만 먹어. 이제 집에 가자."
" 먹기싫으면 너만 먹지 말던가! 한 병만 더 먹을래."
" 진짜 웃기지말고 가자."
" 아,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데리고 갈게요."
" … 제가 집 주변 사니까 제가 데려다주면 돼요."
" 그래도 이건 남자친구가 하는 일이니까요."
지민이의 말에 반박을 못하겠는지 입을 꾹 다문 태형이는 곧 내게 "김탄소, 내일 일어나면 연락해." 라는 말과 함께 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민이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다음엔 제가 데려다주게 될겁니다."
* * *
" 탄소야, 걸을 수 있겠어?"
" 고럼고럼."
나를 부축해주는 지민이의 팔을 잡고는 비틀비틀 걸었다. 태형이가 나가고 난 뒤 한 병 더 시키긴 했는데 내가 한 잔 먹을 때 혼자 두, 세 잔을 먹어대는 박지민 때문에 사실 많이 먹지도 못했다. 지민이는 그렇게 더 먹고도 취하지도 않나보다. 이렇게 멀쩡한 거 보면.
" 섭섭아."
" 나 이제 섭섭이야?"
" 응, 섭섭아. 너는 안취해?"
" 나도 취하지."
" 근데 지금은 안취했잖아."
" 너 좋다는 남자애랑 술먹는데 그래도 이겨야지. 정신 차리고 먹어서 괜찮은거야."
" 근데 걔 사실 나 좋아하는거 아니야. 내가 너 미워서 도와달라고 한거야."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숨겨진 술버릇이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였는지, 아니면 이걸 얘기해서 서운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내게 지민이는 멈춰서서 '으이그' 하며 내 볼을 꼬집는다.
" 너도 맨날 다른 여자 만나고,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게 무기도 아니고."
" … …."
" 너가 그래도 내가 계속 너 좋아할거 알아서 그러는거지? 진짜 못됐어."
" … …."
" 맞아, 그리고 너가 오늘 일 때문에 이제 태형이랑 만나지 말라해도 난 계속 친구로 지낼거야. 내가 널 아무리 좋아해도 이건 양보 못해."
" 괜찮아, 계속 친하게 지내도."
와, 질투도 안나? 물론 만나지말라는 말을 기대한건 아니였지만 그래도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지민이의 모습에 질투도 안나냐며 휙 째려보자 지민이는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 이마에 뽀뽀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 안뺏길거니까 질투도 안하는거야."
그 말과 함께 지민이는 입을 맞춰왔고, 나 또한 박지민답다. 라는 생각과 함께 눈을 감았다. 날씨도 좋고, 밤하늘도 너무 예쁘고. 또, 허리를 감싸오는 박지민의 손길도 너무 좋아서 이대로라면 지민이를 평생 좋아할 수도 있겠다ㅡ 라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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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헣ㅎ헝(ㅠㅠ). 저번화에 많은 분들이 암호닉 신청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재밌다고 해주셔서 저는 너무 기뻤어요! 댓글은 저의 원동력이랄까ㅎ_ㅎ
읽어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제사랑 암호닉분들 :-) |
대추차 ㅂ 바다코끼리, 복치 ㅅ 숙자,섞진 ㅇ 열렬, 요정 ㅈ 정꾸, 자몽망고 ㅊ 침침이, 찬아찬거먹지마 ㅋ 쿠크바사삭, 캔디 ㅌ 태랑둥이, 태태베리 ㅎ 하설, 황막꾹 ㄸ 땅위, 뚝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