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바람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06
" …안오네."
조용한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벌써 태형이와 연락을 안한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이제는 내가 태형이를 피하는건지, 태형이가 나를 피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함께 듣는 강의는 내가 가지 않았지만, 태형이 또한 내게 연락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서로 침묵을 유지한 지 일주일을 넘어 이주일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태형이가 내게 했던 많은 행동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아닐거라 믿고싶었던 그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 …멍청이, 병신."
머저리. 떠오르는 김태형의 얼굴에 왠지 가슴 한켠이 먹먹한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김태형에게 아무렇지않게 했던 그 수많은 친구라는 말들이, 내겐 행복했던 사랑 이야기들이, 또 힘들었던 연애 이야기들이…태형이에게는 비수로 꽂혔겠구나. 내가 그렇게 너를 힘들게 했을텐데, 너는 늘 웃으며 묵묵히 들어줬던거였구나. 내가 태형이에게 내려꽂았던 모든 말들이 이제 나에게 돌아와 찌르는 것만 같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빠져 앉아있었을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 탄소야."
" … …."
" 맥주 한 캔 할까? "
문을 열자 서있는건 맥주가 담긴 비닐봉투를 흔들며 웃고 있는 호석이었다. 그런 호석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좋지.'란 말과 함께 옅게 미소지었다.
* * *
호석이가 나를 이끌고 데려온 곳은 놀이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이 왔던 곳이었는데. 내겐 어렸을 땐 놀이터로, 학생 때는 공부에 지쳤을 때 휴식처로,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은 소소한 호프집 같은 곳이다. 그러고보니 그 모든 순간엔 태형이와 함께였다. 여기서 시소 타며 놀 때도 태형이와 함께였고, 독서실 갔다왔을 때도, 맥주 먹을 때도 다 함께였다. 그동안 넌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간질간질한 그 마음들을 모두 친구라는 이름 뒤로 숨겨버리지 않았을까.
" 무슨 생각해? "
" …그냥."
" 태형이? "
" … …."
내가 맞췄지? 라며 살짝 웃어보이는 호석이를 보며 나도 피식 웃었다. 이럴 때 보면 호석이나 태형이나 나에 대해선 귀신 같이 안다니까. 호석이와 맥주 캔을 맞대며 짠을 하고는 한모금을 마시자 그래도 뭔가 지금까지 속이 갑갑했던 것들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호석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태형이랑 연락은 안하고 있는거지? "
" 너도 태형이가 말해줘서 알고 있으면서, 뭘."
" 니 생각 궁금해서 묻는거 알고 있으면서, 뭘."
말장난을 하듯이 받아치는 호석이를 보며 살짝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 생각이라….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태형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은 계속 들고있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지고있는 이 답답함이 진짜 모두 미안함일까?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입술을 깨물고있자, 다시끔 호석이가 입을 열었다.
" 많이 복잡하겠지. 근데 탄소야."
" … …."
" 태형이가 많이 힘들어하더라."
" … …."
" 11년 동안 참았던 말인데, 그렇게 꺼내게되서 너한테 미안하다고 그러더라."
" …병신,나한테 뭐가 미안해."
" 너가 참으라했을때 참았어야했는데, 괜히 짐을 더 준 것 같다고."
" …하지말라했을 때 하지말지…."
사실 나도 알고있다.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게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형이였는데. 나한테 신경 쓰지말라는 말이나 '니가 뭔데'와 같은 말들에 마음이 많이 쓰렸겠지. 그 말들이 아마 그동안 참고 있던 마음을 터뜨리게 한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게 고백을 한 태형이에게 책임을 미루는건 아마 이 우정을 깨버린게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이기심 때문일테였다.
" 태형이랑은 이제 어떻게 하려구. 이렇게 계속 연락 안하고 지낼거야? "
" …안그랬으면 좋겠는데,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겠지? "
" 난 예전처럼은 안지냈으면 좋겠어."
" …무슨뜻이야? "
" 니 감정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그냥 이 일로 너가 태형이를 좀 더 봐줄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
" … …."
" 이건 태형이 친구로서의 생각이고."
" … …."
" 우리가 보는 거랑 상관없이 지금 남자친구가 너한테 잘해주고 좋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한테 진심을 다해야지."
" … …."
" 이건 니 친구로서의 생각."
호석이의 말에 살짝 웃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호석이 말대로 내가 지민이를 많이 좋아한다면, 태형이에게 신경을 쓰지말고 지민이에게 최선을 다해야만한다. 하지만…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지민이를 좋아해도 아직 내겐 오랜 친구인 태형이가 더 소중해서 이렇게 태형이에게 신경이 쓰이는건지, 아니면 태형이에게 감정이 생겨버린건지. …그것도 아니면, 나 또한 있던 감정을 숨기고 지내온건지.
" 그 때 남자친구 그렇게 나가고 나서 그 이후로 어떻게 됐어? "
" …모르겠어. 지민이도 생각할게 많은 것 같더라고."
" 그 일에 대해서 아무 얘기도 안해준거야? "
" …응, 친누나라는 얘기 듣고 차마 못물어봤어. 말하기 힘들어보여서."
" … …."
" …탄소야."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을 생각하던 호석이는 나즈막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런 호석이를 바라보고 있자, 호석이는 또 다시 생각에 잠긴듯 싶더니 곧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 …이거 몇일전에 그 누나라는 분이 나한테 주고 가신건데."
" …응."
" 너한테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너 더 복잡하게 만들까봐 고민했는데."
" … …."
" 그래도 줘야할 것 같아서."
호석이가 건네준 종이 속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듯한 글씨체가 적혀있었다.
' 지민이 누나입니다. 시간 되실 때 꼭 연락 부탁드려요.'
* * *
" …괜찮을까나."
카페 문을 열기 전,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는 한숨을 쉬었다. 호석이에게 이 쪽지를 받은 뒤, 밤이 새도록 고민했었다. 지민이가 나한테 알리고싶어하지 않는 걸 봤을 때, 그냥 모른 채 넘어가는 것이 맞지않을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않았다. 하지만 쪽지를 버리려다가도 쪽지 속 또박또박 쓰여진 글씨들이 왠지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가끔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 보였던 지민이의 공허한 눈빛 또한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렇게 그 여자가 있는 곳까지 와버렸다. 그래, 이제 되돌릴 수도 없는걸. 이제는 꾸깃꾸깃해진 그 쪽지를 바라보며 …후, 하고 쉼호흡을 한번 더 하고는 문을 열었다.
" 아, 여기에요."
" …안녕하세요."
" 제대로 처음 인사드리네요. 지민이 누나에요."
" …아, 네."
" 이름이 탄소씨 맞죠.저번에 이름 들었어서."
" 네, 맞아요."
" 지민이 여자친구…이신거죠? "
" 네."
여자친구가 맞다는 내 말에 '진짜 맞구나.' 라며 조용히 읊조리던 지민이의 누나는 곧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예쁘게 미소짓고 있던 얼굴을 잠시 감추었다. 그렇게 몇 초간 정적이 이어졌을까, 그녀는 곧 다시 미소 띈 표정으로 내게 입을 열었다.
" 사실 조금 놀랐어요."
" …왜요? "
" 지민이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거에요."
" …네? "
" 탄소씨가 지민이한테 특별한 존재인 것 같더라구요."
" … …."
" 그래서…이 부탁을 드리는게 맞는건지에 대해 생각이 많았는데."
" … …."
" 제가 너무 이기적이어서…무리일걸 알면서, 탄소씨 마음 불편해질걸 알면서도 부탁을 좀 드리려고해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 보이는걸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워서 하기싫다고 말하고싶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지민이와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면 되지않을까, 라는 마음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껏 얼마나 고민했고, 힘든 결정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부정도 하지않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앞에 있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 …일단 부탁드리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 … …."
" 지민이 이야기에요."
♬
안녕하세요! 흑흑, 계속 쓰고는 있었는데 역시 개강은 독입니다, 독!
과제에 치여 사는 인생이란…(ㅠ^ㅠ), 핑계를 집어치우고 늦었는데 분량도 많지않아서 너무 죄송할 따름입니다(ㅠㅠ).
게다가 이번 화는 로맨스 같은 것도 없고 밋밋해버렷..자괴감이 솟아올라버림니다..흐규.
원래 생각했던 스토리에도 호석이가 상담해주는 장면이나 지민이의 과거 때문에 그 이전 설명을 넣겠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두개를 한번에 넣게 될줄이야.. 남자주인공인 태형이는 게다가 짜게 식어가는중 -ing....
근데 다음 화는 거의 지민이 중심으로 이뤄질듯 해서 태형이는 …못난 내가 미안하다..!
그나저나 요새 날씨가 나름 따뜻해진것같아요! 봄이네요, 봄. 독자님들 모두 따뜻한 봄이 되길(U_U)
독자님들 늘 감사하고 ♡ㅏ랑해요 ♡
제사랑 암호닉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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