뀨일행의 숙소는 벌써부터 몹시 지저분했어요. 버스에서 못 다 먹었던 과자를 짐승처럼 처먹느라 테이블과 방바닥에는 온갖 부스러기와 과자봉지가 즐비했고요. 마치 뱀이 벗어놓은듯한 허물을 연상시키는 런닝구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어요. 어느 것이 누구의 러닝셔츠인지 이름을 적어놓지 않는 이상 분간조차 어렵게 생겼네요.
무리중에서도 그나마 깔끔한 성격을 가진 성열이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사이 벌어진 숙소내 대참사를 보곤 뒤로 자빠질 뻔했다고 해요. 동우는 엄청나게 큰 자신의 가방에서 별 잡동사니를 다 꺼내놓곤 신나서 까르르 웃고 있었고, 호원이는 그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팔굽혀펴기를 하질않나, 우현이와 명수는 과자 한 봉지를 놓고 서로 자기꺼라며 고성을 지르있고, 성규는 그러거나 말거나 시체처럼 누워서는 TV시청에 임하고 있었어요.
그 무지막지한 광경덕에 성열이는, 멘붕상태에 이르렀답니다. 입소 30분 만에 개판이 되어버린 뀨의 숙소는, 과연 마지막날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요?
짐정리를 모두 마친 우리에게 저녁식사까지 30분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30분으로 뭘 해? TV나 봐야지 그냥. 아, 무슨 관광명소에, 역사박물관에, 볼 것도 없는데 걸어다니랴 첫날부터 진땀뺐다. 김성규다리 내놔.
쿵쿵쿵쿵, 화장실에서 나온 성열이가 모두 들으라는듯 유별난 발소리를 내며 내 옆까지 걸어온다.
“얌마, 너 때문에 천장에 붙은 먼지까지 떨어지겠다. 그만 좀 쿵쿵거려라.”
내 말을 듣기나 한건지 성열이가 바닥에 흩뿌려진 과자부스러기를 발로 연신 걷어낸다. 눈과 입이 아무렇게나 삐쭉댄다. 아, 화난거구나.
“아, 뭘 이렇↗게 많이 처먹었어!!”
짜증섞인 목소리가 귀를 찔러왔다. 푸하, 얘 또 말하다가 삑사리났어― 내 말에 성열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한껏 분위기잡고선 잔소리 좀 하려고 했더니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은게 분명했다. 과자를 두고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명수와 나무새끼는 그런 성열이가 웃겼는지 아예 대놓고 웃어 재낀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생소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 성열이 삑사리가 한 두번 있는일도 아니고. 늘 마지막은 이성열 푸념으로 끝나버리는게 불보듯 뻔하니.
“너는 분노와 전혀 안 어울리는 생물이야 임마, 그러니까 화내다가 삑사리나고 그러지. 병신, 매번 말해줘도 몰라.”
“이―씨 규인네…!!”
성열이가 신경질적으로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린다. 그래, 웃음거리된 상황에서 니가 짜증내봤자 본전도 못찾아 임마. 잘 생각했어. 위로해준답시고 성열이의 어깨를 두어번 다독였더니 그게 또 마음에 안들었는지 입이 댓 발 튀어나온다. 밀가루반죽에 이스트를 넣은듯 곧장 터져버릴것처럼.
“청소는 어지럽힌 사람이 해! 난 돼지우리에서 잠들기 싫으니까. 흥.”
“얘들아, 이성열 말 들었지? 니들이 다 치워야 돼.”
“뭐야 김성규? 그럼 너도 같이 치워야지 왜 혼자 내빼려고 그래?”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우현이 물귀신작전을 펼친다. 이런 씨, 망할새끼! 그럼 내가 같이 어지럽히기라도 했다는거야 뭐야? 정작 나는 어지럽힐 기운도 없는데?
조금 전 성열이가 그랬듯이 나 또한 불쾌하단 티를 팍팍내기 위해 오만상을 지어보이며 남우현을 째려봤더니, 이새끼는 ‘해볼테면 해 봐.’라고 말하듯 여유있는 표정으로 받아친다. 아오, 저 자식을 그냥.
별로 길지도 않은 다리를 뻗어서 ‘에잇-’하고 남우현을 밀어버리면, 남우현은 또 꼴좋게 뒤로 나자빠져버린다. 혼자만 뒹굴 순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제 상체를 벌떡 일으킨 남우현이 발로 날 밀어버리는데.
“야이 나쁜놈아! 난 이렇게 세게 안밀었잖아!”
너무 세게 밀쳐진 나머지 내 등판이 벽에 퍽-하고 붙었다가 떨어졌다. 말로만 붙었다 할 뿐이지 등뼈를 덮은 살에 멍이 들 것처럼 아렸다. 나, 이렇게되고선 한다는소리가 일곱 살짜리 여자애마냥 턱없이 모양빠진다. 그와 걸맞게 놀이터에서 넘어졌다고 우는 어린애처럼 눈물이라도 찔끔 짜고 싶었지만 얘들보다 내가 형이니까 쪽팔려서라도 참아야지-하는 마음으로 애써 앓는 소릴 삼켰다. 이씨, 근데 존나 아파. 존나!
이리저리 일그러진 내 얼굴이 만족스러웠던건지, 남우현은 재밌다고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어버린다. 좋냐? 니가 한 행동의 결과가 내 고통이라서?!! 이 못된나무새끼, 못된새끼. 똥개새끼.
아예 벽에 기대어서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쥐어들자, 정말 뜬금없게도 묘한 기류를 틈타, 동우가 말했다. 그앤 늘 그렇듯 아주 들뜬 상태였다.
“나 다시 태어나고 싶어!”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뭘로?”
팔뚝에 핏줄을 세운 채로 팔굽혀펴기에 매진하던 호원이가 적당히 맞장구 쳐주려는듯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호원이의 운동은 그 와중에도 멈출 줄을 몰랐다. 저게, 사람일까 로봇일까.
“개미! 개미로 태어나면 엄청 배부르게 먹겠지?”
그래, 개미겠지 개미…… 개미? 개미라고?
쿵, 방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동우에게로 향함과 동시에 호원이가 바닥에 엎어져버리고 말았다. 동우의 대답이 호원이 입장에서도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웠나보다. 저 기계같은놈이 운동하다 엎어질 정도면.
너무나 순진한 얼굴로 [개미]얘길 꺼내는 동우더러, 어느 누가 미친놈이라며 대놓고 욕을 할 수 있을까. 아, 미친놈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사고는 아닌 것 같다. 맞은편에 있던 성열이가 언제 기분이 구렸냐는듯 선홍색 잇몸을 드러내면서까지 동우의 선량한 꿈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이성열 저 얼굴은 마치… 아니 그냥, 너무 비열해.
“얌마 공룡아, 니가 공룡생활 포기하고 개미되면 나중엔 처참하게 밟혀죽는다? 니가 원하는 만큼 실컷 배부르게 먹고나서 밟혀죽는다니까?”
“아니야! 땅 속에서 살거야! 땅 속에서 살면 돼!!”
“짜식이 말을 못 알아듣네, 어차피 먹이구하려면 밖에 나가야하잖아.”
“큰 먹이 하나 열심히 가져와서 평생 먹을거야!!”
성열이는 동우로부터 돌아오는 반쯤 무식한 대답에 고개를 잠시 내저었다. 장동우에겐 '영악함'만 없을 뿐이지, 이성열만큼이나 강적이라는걸 우린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순진함으로는 아마 우리학교내에서 정점을 찍을만한 놈이니까.
지켜보고 있던 명수도 둘의 대화가 생각보다 흥미로웠는지 과자를 집어먹다 말고 무심한듯하지만 확실한 선을 그어버린다.
“공사한다고 사람들이 개미집 붕괴시킬 텐데. 거기서 살아남을 순 있냐.”
“왜 그래애― 내 꿈―!!”
부스럭- 다시금 명수가 과자봉지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려오면 동우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입꼬리를 쭈욱 내려버리는데, 여기서 싱겁게 끝나면 울림남고 장동우가 아니지….
낄낄거리는 남우현의 웃음소리를 용케 비집고 나온 동우의 얼굴은 아직도 들뜬 눈치였다. 이번엔 또 뭐냐? 모두의 이목이 동우에게로 쏠렸다.
“아 맞다! 나 말야, 자동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어릴때부터했다? 자동차 좋지!”
동우가 확신에 가득찬 눈망울로 우리쪽을 쭈욱 훑고나면, 어김없이 남우현표 동심파괴가 이어진다.
“좋겠네, 맨날 기름먹고.”
“그치? 좋겠지?”
대체 뭐가 좋다는거야 장동우 이 미친아. 저 말은 누가들어도 반어법인데.
“응 근데, 기름'만' 먹는다는게 좀 문제지.”
“아아 그건 싫어… 그으럼― 뭐가되지?”
이쯤되면 단 한마디도 안보태본 나도 기대된다. 장동우의 다음 꿈이.
“리모컨!! 리모컨 할래! 주인이 찾을 때 숨어버려야지―.”
“리모컨에 발이 달려있으면 판매를 못하지, 공장에서 폐기될 걸. 장동우폐기.” “아잌, 장동우 폐기래.”
흘끗- ‘장동우폐기’를 입에 담는 명수를 흘기는 호원이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왜?
“아! 비행기도 좋겠다~ 한 명만 태우는 비행기! 멋있지?”
“아잌, 그 한명이 바로 나!!”
“…….”
동우는 성열이가 예고없이 치고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불현듯 동우의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전용비행기가된 자신의 몸안에 이성열을 태우고 다니면…. 으으.
다음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동우가 고개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결국 스스로 꿈을 포기해버리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으니.
“…그럼 추락해야겠다. 난 국민영웅이 될거야.”
푸하하하- 기어코 폭발해버린 명수 웃음소리가 숙소 내부를 경박하게 울려댔다. 거기에 대고 그만 좀 웃으라며 로우킥을 연발해대는 성열이 얼굴이 보기좋게 울그락불그락하다. 명수는 성열이가 쏘아대는 발차기가 아프지도 않은건지 웃겨 죽겠다며 뒤집어진다. 이성열의 머릿속에 다시금 먹구름이 꼈다.
그 날, 울림고미소년 김명수는 신장 180cm의 거대 초딩에게 자유시간이 다할 때까지 구석구석 발맛사지를 받았다고 한다.
무슨 반찬인진 몰라도, 일단 고기인 건 확실했다. 이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에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허기졌다. 먹이를 향해 사냥하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식판 앞으로 돌진해 수저라는 무기를 챙겨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배식코너로 향한다.
나도 이 무리에 껴있지만,
미친 것 같았다.
“야, 다음 일정은 뭐냐?”
배식을 모두 마친후 테이블에 자리잡기까지는 거의 찰나의 순간이었다. 전쟁을 방불케할만큼 요란했던 식사시간의 시작이었다.
“아마 담력훈련일걸?”
“어…? 그럼 레슬링 못해?”
“레슬링은 내일하자 내일.”
“아 미친, 무슨 담력훈련이야.”
성열이가 짜증을 늘어놓으며 분노의 젓가락질에 가속을 더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반찬을 씹으며 동우쪽을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맞다, 장동우 어떡하냐? 쟤 새가슴인데.”
“그러게, 체육시간에 잠자리잡아서 들이밀었더니 놀라서 넘어졌잖아.”
“잠자리도 무서우면서 개미는 어떻게 되겠다는거야 대체.”
“쉿 해―!”
동우는 거의 매일 애들의 놀림거리였다. 다 큰 남자애가 지보다 훨씬 작은 잠자리를 눈물나게 무서워한다는건 옆반도 알고 선생님도 아는 사실. 임마, 잠자리는 너를 더 무서워해.
다음 일정소식을 들은 동우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거의 공황상태였다. 잠자리보다 담력훈련이 수십배는 더 무섭게 느껴질 터.
“동우야, 어차피 거기에 나오는 귀신들 다 선생님이야, 선생님들이 분장하고 서있는거라니까? 응?”
예방주사를 앞둔 어린이처럼 벌써부터 잔뜩 겁을 집어먹은 동우를 달래듯 호원이가 동우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얹어주었다. 저게 무슨 꼴이래… 이호원이 지금 뭔짓을….
아까 전, 숙소에서 남자다운 호원이의 몸을 봐뒀던터라 우리는 이 상황이 더더욱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헐, 야… 이호원 좀 봐.”
“보고 있어 새끼야….”
“저 자식, 아까 내 팬티찢겠다면서 정색하던 이호원맞음?”
이쪽 동네는 밥먹다 말고 강건너 불구경이다. 빈 수저를 입에 물고 있는 남우현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호원이가 친절히 반찬을 집어 동우의 수저에 올려주는 행동이 반복되자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다른 과 학생들도 의심스런 눈초리로 이호원과 장동우를 번갈아본다.
김명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선 왼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곤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남고에선 절대로 볼수 없는 행동을 서슴없이 해대는 이호원의 친구이자 2박 3일 룸메이트중 자신이 껴 있다는걸 애써 부정하는 눈치였다.
“새끼들아, 겸상하고 있는 우리도 좀 생각해라? 쟤들이 자꾸 쳐다보잖아.”
보다못한 내가 눈치를 주자 호원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제서야 이쪽을 향해있던 낯선 시선들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야, 박력있네 김성규―.”
남우현 이새낀 뭐가 좋아서 헤실거려? 썩 꺼지지못해?
“밥 먹다 말고 수저로 맞아본 적 있냐 남우현.”
“니가 때리면 야구빠따로 맞아도 안 아파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우, 능글거려.
널 보니까 아까부딪힌 등짝이 다 아프다. 그러니까 얼굴치워-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살짝 밀어내고선 다시 식사에 임했다.
지금 시각은 오후 8시 30분.
울림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정에 따라 숙소 근처의 낡은 학교에 도착했어요. 푸르스름한 빛을 띈 저녁하늘과 섬뜩히도 어울리는 학교의 모습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금세 소란스러움이 피어났어요.
“꺼이꺼이꺼이꺼―이, 나-는 무섭다고!”
“미친… 장소 하나는 기가막힌다….”
“폐교 아냐 폐교?”
“흔한 남고의 담력훈련이로구나….”
자-! 여기 주목해주세요! 학년부장 선생님이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 앞에 우뚝섰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성규는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축였다.
“룰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2인이 1조가 되어 1층 어딘가에 숨어있는 열쇠를 찾아 무사히 돌아오시면 되는거에요.”
“워어어어어…!”
야유소리가 빗발쳤다. 확실히, 재밌을거란 기대를 하는아이들보다 공포에 떨어대는 아이들이 많았던 이유였다. 물론 성규도 그 공포에 떨어대는 아이들중 하나였다. 하지만 복학생이라는 이유로, 이 아이들보다 한 살을 더 먹었단 이유로, 무섭지 않은척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야만하는 운명. 우리 성규, 속으론 아주 죽을 맛이다.
아무리 표정관리를한다 한들, 남우현의 눈에는 성규가 그저 늑대 앞에 놓인 어린양으로 비쳤다. 성규의 어깨위에 제 팔을 올린 남우현이 물었다.
“나랑 갈래?”
뜬금없는 남우현의 목소리에 성규가 질색하는 얼굴로 맞받아쳤다.
“내가 미쳤냐?”
“왜? 니가 들어가기 무서워하는것 같아서 같이 가주려고 하는건데?”
남우현이 뒷목을 긁으며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난 귀신같은거 별로 안무서워해서….
“……진짜? 넌 진짜 안무서워?”
“안 무섭다니까?”
성규가 반신반의한 눈치로 우현의 얼굴을 살폈다. 단순히 무서워 하지 않는'척'만 하는거라면 분명 티가 났을테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저 여유로운 낯빛을 보아하니, 우현이 거짓말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귀신을 보면 펄쩍 뛰거나 바닥에 주저앉을 장동우 혹은 이성열과 함께가느니, 차라리 무서운 분위기에 동요되지 않는 남우현과 가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뀨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이 씨― 천천히 가!”
성규가 짜증섞인 목소리와 함께 우현의 뒤를 급히 쫓았다. 학교 안으로 들어온 이상, 남우현과 한 발자국 이상 떨어져선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성규는 신경질을 내면서도 절대 우현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우현은 그런 성규의 모습이 웃겼는지 성규가 한눈을 팔때마다 저만치 먼저 걸어가버렸다. 그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라는 이유였다.
평소엔 까칠함으로 완전무장해서는 옆에 다가가기만 해도 몸서리를 쳤으면서, 아니, 까칠한 척한건가. 우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작게 웃었다. 1년 동안 지켜보면서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성규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 우현이었다.
“새끼야… 너 웃는거 다 알아, 여기 나갔담봐… 죽었ㅇ…악!!!!!”
행정실 앞을 지나치려던 때였다. 성규가 어금니를 꽉 문채로 우현에게 위협을 주려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무방비상태로 귀신인형에게 습격당했던터라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성규는 바닥 위로 거의 내동댕이쳐지듯 쓰러졌다. 그런 성규를 뒤늦게 일으키려던 우현은 성규의 울먹이는 얼굴을 보곤 그 자리에서 대놓고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런 남우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리 없는 멘붕상태의 성규가 더듬더듬 땅을 짚곤 스스로 일어나는데.
“어, 어! 조심해―.”
성규의 다리에 힘이 다 들어가지 못한 탓인지 거하게 휘청이는걸 우현이 가까스로 부축해 제 몸에 기대게 했다.
“이렇게 겁 많은사람이 남고까지 와서 쎈척하고 산거야? 어이구, 기특해.”
아직도 멍한 얼굴의 성규를 부축한채 걸음을 옮기는 우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닥쳐 나무새끼… 성규의 안절부절한 눈동자가 그래도 남우현만은 정확히 짚어낸다. 큰맘먹고 복학을 저질렀더니 어쩌다 이런놈을 만났을까, 맨날 시비나 거는 못된놈을 말이야.
“…너 여기 나가면 나한테 죽―어.”
“알았어, 우리성규 착해.”
“…이씨, 너한테 맞아서 난 맨날 손등멍들고… 아깐 등 아파서 죽을뻔했어…. 너 개새끼야.”
“알았어, 남우현이 제일 나빠.”
“아니, 너 개새끼라고. 이 개새끼야.”
“응, 나 개새끼야.”
“내가 형인데도 맨날….” 성규에겐 대충 얼버무려주며 어딘가에 있을 열쇠를 찾으랴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남우현이 바쁘다. 오십보쯤 걸었을까, 정신이 말짱히 돌아온 성규가 헛기침을하며 남우현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기척을 느낀 우현의 시선이 별안간 성규에게로 향했다. 학교내부는 너무나 어두웠고, 열린 문틈으로 간간히 빛줄기만 들어올 뿐이었지만 우현의 시야엔 너무나 선명히 잘 보였다.
성규의 하얗고 초조한 얼굴이.
우현은 늘 형노릇을 하려고 드는 성규를 보며 의문이 들었다. 다른 복학생들은 덩치도 크고 삭은 얼굴을 하고 있거나 가끔 학생답지 못한 얘기를 꺼내면서 본인의 기를 세우랴 여념이 없지만. 김성규는…. “누가 널 형이라고 생각하겠냐?”
먼저 정적을 깬 건 남우현이었다. 그 말에 울컥한 성규가 언성을 높였다.
“시발―! 니들 나 형으로 쳐준 적도 없었잖아!”
“형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왜! 내가 한살이나 많은데!”
“형같지가 않은데 어떡해?”
“왜 형같지가 않아! 왜!”
“귀여워서.”
“왜! …어??”
에라이 모르겠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남우현이 저만큼 걸어가버린다. 성규는 우현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제 발목을 붙들고 있는듯한 착각까지 일었다. 하지만 발목을 붙들은 묵직한 느낌이 분명 착각인 것만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한 성규가 시선을 발목쪽으로 내리깔았다.
“으으아아악!!!!!!!!!”
유난히 큰 성규의 비명소리에 저만치에서 걸어가고 있던 남우현이 뒤를 돌았다. 귀신코스프레를 한 사람이 성규의 발목을 붙든 채 엎드려 있었고, 성규는 그런 귀신 앞에서 또 한 번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이리저리 발을 구르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우현이 성규쪽으로 재빨리 달려가자 귀신이 이번엔 우현에게 달려든다.
귀신의 실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걸 누구보다 잘 아는 우현은 그런 섬뜩한 광경에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덤덤한 우현의 모습에 무안했던 귀신은 재빨리 빈 교실로 휙 들어가버린다. 저런 게 뭐가 무섭다고 김성규는.
쭈그려앉아서 벌벌떨고 있는 성규쪽으로 다가간 우현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더니.
“아아아악!!!!!!!!”
“야! 야 김성규 진정해!!”
어깨에 올려진 손이 귀신의 손인줄 알았던 성규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팔을 휘둘러대는통에 남우현만 정신없어졌다. 기겁을 하며 자신을 퍽, 퍽, 밀쳐대는 김성규의 두 팔목을 우현이 가까스로 꽉 붙들어매며 으름장을 놓았다.
“정신차려 김성…규…?”
억지로 마주쳐버린 성규의 두 눈에는 물기가 올라앉아 있다. 아직 공포감이 가시질 않았는지 진정못한 성규가 거칠게 숨을 고르며 천천히 팔힘을 뺐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성규의 눈물을보자 우현은 당황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벌칙으로 맞은 손등이 아파서 늘상 터트리던 눈물이 아니었다. 피곤에 쩔어버린 성규는 먼저 자겠다며 진실게임에서 빠져버리고, 다섯명만 남게된 진실게임에서는 묘한 질문이 오가는데…. “…좋아하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