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12.
며칠이 지났다. 잘 산다고 말하기엔 좀 우습지만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물론, 준면이형네서. 집으로 돌아가면 날 기다리고 있을 엄마의 잔소리가 무섭긴 했지만, 그것도 문자 한통 보내놨으니 조금 덜 할 거다. 어디에서 지내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혹시나, 김종인 귀에 들어 갈까봐.
밥도 꼬박꼬박 잘 챙겨먹고, 잠도 잘 자고, 술도 안마시고 있으니 잘 살고 있는 게 맞을 거다. 학교에 잘 나가지 않는 것만 빼면. 점점 쌓여가는 오세훈의 폭탄 문자와 엄청난 전화도 조금 무섭고, 준면이형의 은근한 잔소리도 조금 귀찮긴 한데 다 견딜 만하다. 그러니까, 김종인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나는.
팔팔 끓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다가, 아차 싶어서 들고 있던 라면봉지를 뜯었다. 그러고 있는데 바지춤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아, 뭐야. 오세훈인가?
[야 도경수]
[이제 대출 안 해준다.]
[좀 있음 시험인데 도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잔소리. 잔소리. 남 일에 관심 없을 것처럼 굴면서 잔소리는….
[어디서 뭐하고 사냐.]
[살아 있기는 하냐?]
[보면 씹지 말고 연락 좀 해라. 제발?]
홀드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곧, 액정 화면이 까맣게 변한다. 잠시간 핸드폰을 쥔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훈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항상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고,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 것 같으면 묻기도 전에 숨어버리는 내 못된 습관을 안다. 나도 아는데 오세훈이 모를 리가 없다. 학교에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3일째다. 사실은, 피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김종인을 마주칠까 무서워서. 그 아이가 마음만 먹으면 찾아올 학교라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부터였을까. 난 언제부터 숨는 방법을 택한 것일까.
나는 변했다. 김종인에게 자신이 없어진 나는 숨을 수밖에 없었다. 겁이 나서. 그 아이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저, 조용히 숨어서 그 애가 내게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경수야, 저녁 먹지 말고 있어.]
[오늘은 밖에서 저녁 먹자.]
문자를 확인하느라 미처 넣지 않은 라면 봉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가스레인지 버튼을 돌려 껐다. 냄비 안에서 팔팔 끓고 있던 물이 점차 식어가는 게 보였다. 손에 쥔 핸드폰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삼일 동안의 문자나, 최근 통화목록을 다 뒤져봐도….
“…….”
김종인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一
“세훈이가 너 벼르고 있더라….”
“…뭐, 하루 이틀인가요.”
“화 많이 난 것 같던데?”
“…….”
“경수야.”
“…….”
“웬만하면 수업은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형의 말에 못들은 척 대답을 않고, 불판 위에 구워지는 애꿎은 삼겹살만 뒤적였다. 그에 마주 앉은 형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 짧은 한숨에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다.
“저 원래 수업 잘 안 들어가는 거 알잖아요, 형.”
“…….”
“날씨도 춥고, 일어나기도 싫고 하니까 학교 가기 싫은 거예요. 정말, 그 뿐이에요.”
“…….”
“뭐, 그리고 오세훈 걔도 항상 벼르기만 했지, 제대로 혼낸 적도 없어요.”
노릇하게 잘 익은 고기를 형 쪽으로 밀어주었다. 아무 말 없이 내가 하는 걸 지켜보던 형이 또 작게 한숨을 쉰다.
“…며칠 만요.”
“…….”
“며칠만 봐줘요.”
이 방황은, 며칠 뒤엔 끝날 것이다. 언제까지나 감정에 휩쓸려 지낼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오세훈 말대로 시험기간이 코앞인데 계속 방황하는 건 나만 손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멈출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에이, 고기 다 식네. 빨리 먹어요. 형.”
“…너는.”
“전 많이 먹고 있어요. 진짜 맛있다. 형, 안 먹으면 제가 다 먹어요?”
“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
어색하게나마 장난을 치며 웃어보였더니, 형이 이제야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간다.
“오늘은 제가 쏩니다?”
“…됐어.”
“왜요. 제가 이래 뵈도 양심은 있다구요.”
“으이구, 됐고. 고기나 많이 먹어. 너 요 며칠 새 살이 쪽 빠졌어. 그건 아냐?”
“에이, 설마요. 쪘으면 쪘지,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살이 찌기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살이 찌겠냐?”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형이 자꾸만 그 믿음을 무너뜨린다.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데. 형은 왜 아니라고만 하는지 모르겠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형이 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내게 내민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형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어서 입 안 벌리고 뭐해. 하기에 억지로 입을 벌렸다. 입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고기를 꾸역꾸역 씹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많이 먹어.”
“…네.”
“억지로 웃지 말고.”
“…….”
“일단 우리 집에 있는 이상 너 잘 먹고, 잘 자야 돼. 알겠어?”
“…….”
“…….”
“…네.”
그제야 형이 표정을 풀고 나를 향해 웃어준다. 억지로 입술을 물었다. 감정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형을 향해 웃지도 못했다. 억지로 웃지 말라는 말 때문에. 그 말에 왜 울컥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一
어제 저녁에 먹은 고기가 말썽을 일으켜서 잠들기 직전까지 속이 좋지 않았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는지 모른다. 잠든 형의 옆에서 새벽까지 식은땀을 흘리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속이 좋지 않았던 탓일까.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찾아 쥐었다.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혹시나 그 애에게서 연락이 와있을 까봐.
[형 먼저 나갈게. 일어나면 연락해.]
형에게서 온 문자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일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꼴인가 싶다.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오늘로 벌써 4일이다. 연락을 안 한지 꼬박 4일이나 지났는데. 어디서 뭘 하고 살기에 아직도 연락이 없는지 궁금했다. 내려놓은 핸드폰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그 애의 연락이 무섭다고 했으면서도 기다리고 있는 나는 대체…. 일상이 엉망진창이다. 그 애와 틀어졌다고, 학교도 안 나가고, 집에서도 나오고. 이런 내가 너무 바보 같다.
그래서 그냥 그만두고 말았다. 아침부터 너무 지친다. 아니, 꿈에서부터였으니 어제 밤부터 시달린 건가.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것 같으면서도 밤마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꼭 밤이 아니더라도 혼자 있을 때마다 울적하다. 그래서일까. 어제는 악몽을 꾸었다. 그 애가 나와서 나를 보며 말한다. 헤어지자고. 이제 그만 하자고. 그 말만 반복을 한다.
“…헤어…지자.”
그 말을 자꾸만 반복하던 그 애의 모습이 내 머리를 장악한다. 베개를 만져보니 축축하게 젖어있다. 그 축축한 느낌이 싫어서 반대편으로 뒤집어버렸다.
겁이 난다. 김종인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연락이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걸지도… 모르겠다.
一
혼자 있기가 싫어서 나갈 준비를 마치자마자 백현이의 병원으로 향했다. 일주일 정도 입원해있어야 한다던 녀석의 퇴원도 이제 겨우 이틀 남았다. 병실로 들어가기 전, 혹시 몰라서 시간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수업시간이다. 오세훈도, 박찬열도, 김종인도…. 없을 시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언가를 잔뜩 먹고 있는 변백현이 보였다.
“또 먹냐?”
“어, 왔어?”
“너 이렇게 많이 먹어도 돼?”
“그럼, 그럼. 당연하지.”
마취에서 깨어난 뒤 하루가 지나서야 가스가 나온 터라 그 하루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퀭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만 있던 녀석이었다. 그 한을 푸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가스가 나온 이후로 계속 먹을 걸 입에 달고 산다. 먹는 건 좋은데, 적당히 먹으라며 녀석을 향해 타박했다. 그랬더니, 못들은 척 대꾸도 않는다.
“그나저나, 넌 학교 안가냐?”
백현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그 시선을 못 본 척 외면하며 간이 의자를 끌고 와 녀석 앞에 턱 하니 앉았다.
“오세훈이 너 여기 오면 연락 달라고 하던데…. 너 요즘 뭐하고 지내길래 걔가 그래?”
“그래서, 연락 했어?”
“아니. 너 언제 올 줄 알고 내가 연락을 해. 지금 하면 모를까.”
“하려고?”
“너 하는 거 봐서.”
백현이 핸드폰을 쥐고 내 눈 앞에서 살랑살랑 흔든다. 오세훈한테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할 수 있어. 뭐, 그런 표정을 짓고서.
“야, 야. 내가 설마 하겠냐? 안 해. 그러니까 표정 좀 펴.”
“진짜지?”
“그래, 그래. 안 한다고.”
녀석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버렸다. 내 손안에 내 핸드폰과 녀석의 핸드폰까지 쥐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잠수한지 4일 쯤 되니까, 이제는 오세훈도 겁이 난다. 그 성격에 노발대발 난리를 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오세훈 존나 무서웠어. 너 조심해라.”
“…어.”
녀석이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꾹꾹 누른다. 병원에 갇혀 있으니 할 거라곤 티비 보는 거 밖에 없다며 중얼거린다.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옆 침대는 아직 비었네?”
“어.”
녀석이 입원할 때, 빈 병실이 2인실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웬걸? 녀석이 입원하자마자 같은 방에 계시던 아저씨가 퇴원하신 덕에 아직도 녀석 혼자였다. 덕분에 1인실이나 다름이 없어서 변백현이나 나나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녀석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냈다. 티비를 보니, 녀석의 변덕에 정신없이 채널이 돌아가고 있다.
“근데 니들 요즘 문제 있냐?”
“무슨 문제…. 오세훈이 나 학교 안 나가서 잡아 죽이려는 문제?”
“그거 말고.”
“…그럼 뭐.”
“김종인이랑 너 말이야.”
뜬금없는 백현이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티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리모컨만 눌러대던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김종인 며칠 전에 한번 왔었는데, 애가 핼쑥해져서는 못 봐주겠더라.”
손에 쥐고 있는 음료수병을 만지작거렸다.
“걔나 너나, 며칠사이에 말라비틀어져서는.”
“…….”
“꼭 무슨 일 있는 것 같기에.”
타인에게 전해 듣는 그 애의 소식이 왠지 낯설다. 그래서 조금 씁쓸해졌다.
“살이, 빠졌어?”
“…어.”
“요즘 어떻게 지낸대?”
“그건 나도 모르지.”
“…병원엔 언제 왔었는데.”
“화요일인가, 수요일인가…. 좀 됐어. 아무튼.”
“…….”
“너네 싸웠지?”
내 얼굴로 쏟아지는 백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서, 고개를 더 푹 숙이고 말았다. 마음이 복잡하다. 살이 많이 빠졌더라는 녀석의 말만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엄두도 안 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없다. 그래서 김종인이 먼저 다가와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연락이 없다고, 그 애 또한 연락이 없다.
김종인이 미웠다.
“빨리 화해해라.”
“…….”
“니들 둘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인거 알잖아.”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녀석을 향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백현이 안심한 듯 고개를 돌려 다시 티비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애꿎은 음료수병만 만지작거렸더니 손에 땀이 다 찼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녀석이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너무 늦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