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거
w.로스트
(한동근 - 그대라는 사치 (Inst))
“...진짜 연애를 해서 그런가.”
여주가 요 며칠 동안 다시 한번 퇴고해 넘긴 시나리오를 천천히 훑어보던 남준이 이내 제 턱 부근을 손으로 쓸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남준의 앞에 믹스커피 두 잔을 내려놓던 여주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준의 건너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아니, 극 중에 남녀 대사가 너무 자연스러워졌길래.”
남준이 테이블 위로 여주의 시나리오를 잠시 내려놓으며 여주가 건넨 커피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남준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여주가 괜스레 민망해진 얼굴로 그게 저의 연애랑 무슨 상관이냐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와, 김여주 기억 안 나나 보네. 그런 여주의 손짓을 가만히 웃으며 바라보던 남준이 장난스레 혀를 내둘렀다. 말끝을 길게 늘이는 폼을 보니 분명 또 여주를 놀릴 속셈인 것이 분명했다.
“너 전에 박 교수님한테 들었던 말 기억 안 나?”
“아, 선배. 그 얘긴 그만 좀,”
“여주 씨.”
“연애 한 번도 안 해봤죠.”
소싯적, 뭣도 모르고 남녀의 애정관이 들어간 내용을 소설 속에 집어넣었다가 남준이 재연한 것처럼 교수님께 아주 창피한 혹평을 들은 적이 있었던 여주였다. 그날의 혹평이 여주에겐 조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로 남아있었으나, 그 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남준에겐 그저 여주를 놀릴 꾸준한 놀림감이 하나 늘었을 뿐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지, 내가.”
여주의 언짢은 표정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그저 재밌다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남준이었다. 여주는 그런 남준을 보며 이젠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따지고 보면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여태 자신이 연애에 관한 글을 써보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남준을 향해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준의 작업실 인터폰이 울린 건 순간이었다.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손에 쥔 커피를 제 입가로 가져가던 남준이 갑작스런 인터폰 소리에 멈칫거리며 눈을 굴렸다. ..뭐야. 올 사람 없는데? 남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주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관문 쪽으로 향하는 남준의 뒷모습을 보며 여주가 묵묵히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전정국?”
그리고 마침내 인터폰 화면으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한 남준이 곧장 자리에 앉아있던 여주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남준의 시선에 여주가 기다렸다는 듯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자연스레 대답했다. 오랜만에 셋이 얼굴 보면 좋잖아요.
“리모델링 깔끔하게 잘됐네요, 선배.”
남준이 현관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은 역시나 정국이었다. 어디서 또 본 건 있는지 한 손엔 휴지, 나머지 한 손엔 남준이 좋아하는 믹스커피 한 박스를 들고 선 채였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은 역시 작업실 공기부터가 다르네.”
“이게 오자마자 까불지, 또.”
새롭게 리모델링 된 남준의 작업실에 와보는 건 정국 또한 처음이었으나 그럼에도 아주 능청스럽게, 익숙한 공간에 들어오듯 남준을 지나쳐 작업실 내부를 이리저리 훑어보는 정국이었다. 전보다 한층 더 넓어진 남준의 작업실을 보며 정국은 저 특유의 농담을 섞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고, 남준은 그런 정국의 동그란 뒤통수를 제 큰 손으로 마구 헤집어놓을 뿐이었다. 여주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오랜만에 평범하고, 또 오랜만에 편안한 이 분위기가 여주를 조금씩 안심시켜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선배 시나리오에요?”
정국이 여주의 옆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여주의 시나리오를 가리켰다.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그 속의 내용이 궁금했는지 펼쳐져 있던 여주의 시나리오 페이지를 일부러 티 나게 힐끔거리는 정국이었다. 그런 여주의 시나리오를 탁, 소리가 나도록 덮어 정국에게 건네준 건 다름 아닌 남준이었다. 정국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건너편에 앉아있던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이거 읽고 네가 공모전에서 왜 떨어졌는지 한 번 고민이라도 해 봐.”
“..아, 선배. 그렇게 남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리시면,”
“상처 안 받는 거 알거든.”
“들켰네.”
어찌 들으면 날카롭게 정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으나 정국은 그런 남준의 말이 진심으로 자신을 충고해주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 아무리 유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남준이라고 해도, 일이나 내 사람들을 챙기는 일에 있어서는 워낙 칼 같고 진지한 사람이었으니까. 정국이 여주의 시나리오를 받아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중앙의 소파로 향했다. 그런 정국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준과 여주가 동시에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맞추곤 작게 웃었다.
“저번에 말했던 메타포 부분도 잘 고쳐졌고, 결말 부분도 이 정도면...”
그렇게 본격적으로 남준의 작업실 한 편에선 영화 작업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국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 묵묵히 여주의 시나리오를 펼쳐 들었다. 신선한 소재와 매끄러운 대사들. 역시나 첫 도입부부터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여주의 시나리오였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정국은 여주의 작품에 더 깊이 집중했고, 어색함 없이 정갈하게 심어져있는 복선과 그에 따른 반전. 남준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잡아낼지 또한 궁금해져 정국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장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그런 정국의 머리가 순간 덜컥 느려지기 시작한 건 중간에 환기를 시키듯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의 애정씬에서 부터였다. 평소 여주의 작품에선 남녀의 애정씬이라고 해봤자 아주 짧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장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이번에도 어렴풋이 그러겠거니 싶었던 정국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꽤 긴 분량이었고, 대사에서 묻어나는 감정의 깊이하며 분위기까지, 그 모든 것이 예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금방이라도 떨림에 목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으면서도 이 사람의 파동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싶은, 그 이질적인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이 사람의 손끝에, 이 사람의 속삭임에, 이 사람의 입맞춤에. 오랫동안 마비되어 있던 나의 살갗은 마침내 부서져 내리고, 새 살 돋듯 새롭게 드러난 나의 연약한 신경은 지금처럼 고작 이 사람의 짧은 숨결 하나에도 나의 발끝을 한껏 움츠러들게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가히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었다.”
영화 속 애정씬의 배경에 깔릴 여주인공의 독백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펜촉을 눌러 쓰듯 꾹꾹 감정을 눌러 담은. 갑작스레 넘쳐나기 시작한 낯선 감정들에 허둥대다가 결국엔 그 혼란감 마저 미처 숨겨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글 속에 담아내 버린. 아무리 영화 속 여주인공의 탈을 빌려 드러낸 감정이라고 해도, 여지껏 여주가 지민에게서 느껴왔던 그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 너무도 선명히 정국에게로 밀려들고 있었다.
“......”
멍하니 작은 목소리로 독백을 따라 읽던 정국이 이내 독백의 마지막 마침표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정국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남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이미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던 거구나.
이젠 정말, 내가 인정해야 할 순간이 와 버린 거구나.
정국에겐 참으로 잔인하고 아프게만 박혀오는, 그러한 독백이 아닐 수 없었다.
-
“이 골목 걷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갑작스레 정국을 데려다주겠다며 식당을 나와 정국의 옆에 나란히 발을 맞춰선 여주였다. 평소였다면 그런 여주를 부득불 말렸을 정국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정국 또한 여주와 함께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순순히 여주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정국이었다. 남준이 맥주 두어 캔을 사 들고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정국의 동네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정국의 집에 가기 위해선 역시나 여주가 예전에 살던 동네를 지나쳐야 했는데, 그 때문인지 여주는 조금 들떠있었다.
“선배 혹시 그날 기억해요?”
“응?”
“내가 선배 처음으로 데려다준 날.”
약간의 술기운에 의지해 물은 정국의 질문이었다. 사실 술기운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정도의 취기였으나 그저 그런 핑계라도 두고 한 번쯤은 꺼내보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자그마치 4년 전의 일이었고 당연히 여주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 확신한 정국이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여주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일은 대부분 정국 자신 혼자만이 해오던 일이었으니까.
“기억하지.”
하지만 막상 들려온 여주의 대답이라곤 정국의 예상을 완전히 빗겨나간 대답이었다. 정국이 주춤거리며 제자리에 발을 멈춰섰다.
“너 엄청 떨었었잖아, 그때.”
“......”
“여기에서.”
그런 정국을 지나 한 발짝 앞서 나가던 여주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정국을 바라보았다. 정국은 그제야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우연히도 4년 전의 바로 그 자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너 그때 되게 귀여웠었는데.”
“......”
“...또 한 편으론 기쁘기도 했고.”
여주의 등 뒤로 여주가 살던 빌라가 우뚝하니 서 있었다. 기뻤다니? 묵묵히 여주의 말을 듣던 정국이 흔들리는 눈으로 여주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네가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내 글.
그랬다. 여주는 똑똑히 4년 전의 여름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국은 여주의 말을 들은 그 순간, 심장이 십 센티미터 정도 밑으로 낙하해버리는 듯한 기분과 함께 머리가 조금 띵해져 옴을 느꼈다. 어쩌면 정국은 그때 이미 자신의 감정을 모두 여주에게 드러냈는지도 모른다고. 문득, 그런 깨달음이 든 탓이었다.
“...정말,”
“......”
“그때 기뻤어요?”
정국이 조심스레 여주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어? 정국의 목소리에 그때와 같은 떨림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
“누군가한테 사랑받는 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니까.”
그것도 너처럼 잘생긴 애한테라면 더더욱. 여주가 꽤나 진지하게 말을 잇는 듯 보였으나 역시나 약간의 텀을 둔 마무리는 장난스러웠다. 잔잔한 정적이 이어졌고 여주는 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을 보며 살풋 어깨를 으쓱였다. 정국은 모호했다. 지금 여주와 자신이 나누고 있는 이 이야기가 정말 4년 전 과거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님 4년 후의 현재. 지금 이 순간을 말하고 있는 것 인지에 대해.
“...선배에 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
“그게 아니었나 봐요.”
정국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며 어깨에 힘을 뺐다.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던 감정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듯 차분해졌고, 때문에 정국은 조금 허무해졌다. 그날 선배의 표정과 대답을 이미 한 번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괜한 겁을 냈을까요, 나는.
“...좋아해요, 선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선배는 그날처럼 내 곁에서 그렇게 웃어주리란 것을,
“서서히 정리하겠지만, 아직은 그래.”
왜 나는 지금까지 믿지 못하고 의심했을까요.
정국의 고백을 들은 여주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정국이 입술을 달싹이며 여주와 눈을 맞췄다. 여주는 그런 정국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서서히 정국의 앞으로 다가서서 4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정국의 앞머리를 차분히 쓸어내릴 뿐이었다. ...응.
“고마워.”
“......”
“좋아해줘서.”
4년이란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 또다시 제자리였다. 언뜻 듣기엔 여주의 대답이 긍정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으나 그 속뜻은 부정이라는 사실을, 정국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국은 오히려 뭔가를 털어낸 듯한 마음 한 편의 후련함을 느꼈다. 저의 고백에 대해 여주는 쓸데없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무작정 저를 위로하려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고백의 거절에 대한 미안함. 정국이 매번 상상하고 걱정해왔던 그 미안한 표정을 여주는 조금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요.”
여주는 그저 정국이 보잘것없는 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감정 하나를 꾸준히,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담아내고 있었다는 것. 딱 그 사실에 대한 고마운 마음만을 조용히 드러냈다. 짧은 정적과 함께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던 여주의 손길이 거둬지고, 정국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마침내 웃는 얼굴로 여주를 마주 보았다.
“조심히,”
잘 가요, 선배.
정국의 오랜 짝사랑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근 한 달 만인가요?
과제에 치여 정신없이 시험을 끝내고 보니 어느새 종강을 했더랍니다. 그리고 성적도 나왔죠ㅎ
성적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글럼프가 와버렸는지 글도 잘 안 써지고 (변명
암튼 오랜만에 왔는데 정국이 짝사랑의 마지막을 이렇게밖에 그려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위동 텍파에 들어갈 정국이 번외편은 아주 짱짱하게 써놓을게요 독자님들이 원하시는 내용으로다가...
그러고 보니 위동 완결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뒤로 갈수록 얘기가 좀 지루해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함께 끝까지 달려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힘이 납니다
이번 편엔 지민이가 등장하지 못해 좀 아쉽긴 한데 사실 뒤에 내용을 더 썼다가 너무 길어져서 결국 잘랐어요 허허
그러니 다음 편에는 다시 지민이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자, 그럼 종강도 했겠다 앞으로 자주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여전히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저는 얼른 다음 편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굿밤 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