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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 Moon 03
w. 2젠5
내 영력이 이동혁에게 옮은 걸까. 끔찍한 모습의 귀신들이 내 눈이 비칠 때면, 이동혁은 내 어깨를 더 꽉 쥐곤 했다. 여기 좀 쎄하다. 괜찮아?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눈을 맞춰오는 네가 참 좋았다. 네 품에 안겨있으면, 아무것도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잘 자] 12시면 오는 네 문자면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아서. 김시민, 이동혁이 잘자래. 내가 이불을 덮고 누우면 이민형은 옆으로 돌아누워 내게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자장가를 부르던 이민형이 잠시 노래를 멈추고 문자를 읽어주면 정말 내 하루는 끝이었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달이 뜨면 해가 졌다.
다행히 그 날 이후로 이동혁과 마주치지 않았다. 이제노와 황인준이 어떻게 잘 한 탓도 있고, 나도 많이 노력했다. 김시민, 동혁이가.. 아, 아냐. 이제노는 늘 밥을 먹다가 딱 저기까지만 말하고 고개를 숙이곤 했다. 동혁이가 왜. 아프대? 넌 나를 그렇게 매정하게 버렸는데, 왜 난 네가 자꾸 궁금하지. 수저로 미역국을 뒤적이던 이제노가 어색하게 웃으면 나는 다시 흰 쌀밥에 코를 박았다. 나와 헤어진 이후로 이동혁은 SNS도 하지 않고, 동아리 방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겠다면서, 날 버린 네가 날 피하면 내가 너무 나쁜 애 같잖아. 황인준의 말에 따르면 이동혁은 수업에도 통 집중하지 못한단다. 어제는 펜을 굴리다 떨어뜨려서 교수님께 한 소리를 들었고, 오늘은 USB를 두고 와서 한참을 허둥거렸다고 했다. 너가 나보다 더 힘들면 난 어째야하지 동혁아. 나와 헤어진 넌, 날 후드집업 속에 숨겨주던 이동혁이 아닌 것 같다.
이민형은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힘든 것은, 내가 이제노와 마주보고 웃기라도 하면, 이민형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버린다는 것이었는데,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어 물어보면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 치는 탓에 이제는 그냥 이민형을 무시하고 있다. 이민형 같은 혼들은, 맘만 먹으면 사람들에게 제 몸을 드러낼 수가 있어서 예전에 어떤 미친 또라이가 우리 집 앞을 서성일 때 날 데리고 들어가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삭만 되면, 이런 뭣 같은 규율을 만든 옥황상제가 원망스럽다. 겨우 이틀이잖아. 나 없어도 이동혁 있으니까. 삭이 되기 전, 늘 어깨를 으쓱하곤 밖으로 나가던 이민형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삭 까지는 하루도 남지 않았는데, 내 옆엔 이동혁이 없다. 자장가를 부르며 날 토닥이던 이민형의 손길이 점점 느려진다.
"김시민. 나 안 죽었어. 확실해."
날 토닥이던 이민형이 내 머리를 느릿하게 쓸었다. 얇은 달이 창문에서 우릴 보며 키득거렸다. 이동혁은 그렇게 힘든데 넌 하나 더 있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난 은연중에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좋아해, 그렇게 말하던 이민형을 보고도 난 놀라지 않았다. 너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나 이동혁이랑 사귀어. 이민형은 내 얘기를 듣고 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엉엉 울었다. 나 살고 싶어 시민. 삭에도 너와 같이 있고 싶어. 네 차가운 몸이 날 빈틈없이 안아와도 난 이동혁의 섬유유연제 향을 떠올렸다. 마시멜로우 같은 이동혁. 자정을 넘긴 시간, 다소 늦게 온 이동혁의 문자가 휴대전화 안에서 꿈틀거렸지만 이민형은 애써 휴대전화를 열어보려하지 않았다. 민형이가 너 많이 좋아해 시민. 이태용을 마지막으로 본 날, 창 밖에서 하얀 들꽃을 건네며 그렇게 말하던 이태용을 기억한다. 이태용의 보라색 머리가 어느새 점점 분홍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 머리 색은 네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거야?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해도, 이태용은 짐짓 단호한 눈으로 날 응시하다 결국 고개를 떨궜다. 민형이가 삭에도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좋겠어. 순간, 이태용의 머리칼이 푸른 은색을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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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헤어지자. 잠시만"
우리집 골목 앞에서 이동혁이 내 손을 놓았다. 그림자에서 겨우 벗어난 달이 우리를 비췄다. 다음 삭에도, 그 다음 삭에도 난 네 옆에 없을거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동혁이 고개를 떨궜다. 이민형조차 없는 삭에, 난 이동혁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시민. 이동혁이 날 제 품에 넣었다. 오늘은 이동혁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우린 서로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야하는걸까. 내가 뭐 잘못한거 있어? 내 어깨에 제 고개를 묻고 들썩거리는 이동혁을 차마 떼내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물었다. 이동혁의 몸이 더 크게 요동쳤다. 차라리, 내가 계속 불행하더라도 너와 함께했으면 좋겠어.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이동혁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우리 안 헤어지면 안 되는거지. 얼굴이 눈물로 범벅되어 버린 이동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 없이 삭을 다섯번만 보내줘 시민. 네가 내게 입을 맞췄다. 하나도 달콤하지 않았다.
이동혁은 잠깐만 헤어지자고 했다. 왜? 이동혁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걸까, 아니면. 이동혁의 숨결이 내 숨결을 짓누르는 동안 내 손은 허공을 떠돌았다. 지랄하고 있네, 그렇게 말하는 이민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민형이 진짜 그렇게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잠깐만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냥 헤어지자 동혁아. 너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너무 아프지만, 곧 괜찮아지겠지. 너가 헤어지자고 말한게 아니라, 내가 헤어짐을 고한거다. 우리가 헤어진 건 다 내 탓인거야 동혁아, 네 숨결이 내 얼굴 주위에서 맴돌았다. 아니라고 말해줘, 응? 내 손을 붙잡고 애원하는 너를 보는 난 너무 아팠다. 이동혁이 제 큰 손으로 제 얼굴을 아무렇게나 부볐다. 분명히 이동혁에게도 이유가 있겠지만, 이동혁도 혼자 나름 많이 생각했을거야. 나와 잠깐 헤어지는 것 보단 어쩌면 평생 헤어지는게 이동혁에게 더 행복한 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넌 사랑을 주는 것보단, 사랑 받는게 더 어울리는 아이니까. 어쩌면 이동혁과 사귀기 시작한 그 날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끝은 눈물뿐일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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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걔가 좋아?"
얇은 여름 이불을 내 목 끝까지 올려주던 이민형이 내 쪽으로 제 몸을 당겼다. 이동혁 얘기 하지마 이민형. 왜 난 이동혁만 생각하면 막 슬프지. 분명 그날 빼면 우린 항상 행복했는데. 만약에, 내가 살아있으면 말야. 이민형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민형을 보고 있던 몸을 천장을 보게 돌렸다. 이민형의 눈이 날 홀렸다. 이젠 이민형의 눈을 보면 이동혁이 생각나는게 아니라, 이민형. 그냥 네가 보여. 이민형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 같긴 하다. 내가 만난 귀신들은 전부 살아있을 때 기억이 있었는데 얘만 없는걸 보면. 천장에서 이동혁이 붙였던 야광 별이 반짝거린다.
내가 네 태양이면, 넌 내 별 하자. 달은 싫어, 태양 때문에 빛나는거잖아. 넌 혼자서도 빛나야 해. 침대 위에서 낑낑대며 야광별을 붙이던 이동혁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저거 뗄래. 이동혁의 잔상에 가려 이민형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민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