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8장 ; 급할수록 돌아가라
"이 쪽으로!"
집 뒤로 이어져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자, 드문드문 집들이 있는 큰 골목이 나왔다. 이미 당한 것인지, 애초에 집에 사람이 없던 것인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살짝 지쳐 걸음이 느려지니 노인이 팔목을 덥석 잡고 등을 밀어주었다. 조금만 더 참게. 멈춰 서 숨을 고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뒤로 바짝 쫓아온 검은 것들을 원우 씨가 처리하면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먼저 가요! 곧 따라갈게요!"
"네? 원우 씨 그치만..!"
"얘네만 어떻게 하고 바로 뒤쫓아갈게요. 걱정 마요."
"..."
"얼른!"
꽤 단호한 음성에, 부탁한다며 노인은 멈춰 있던 나를 다시 이끌었다. 점점 멀어지는 형상에 입술을 짓이겼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도망만 다니고 있는 주제에 이 심판을 끝내겠다고? 내가 이 심판을 끝낼 수 있다고? 기죽음이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지친 걸음이 다시 힘을 찾았다. 다시 숲으로 이어지는 길에 속도를 더 낼 찰나, 튀어나오는 무언가에 의해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역시 우릴 쫓고 있는 그 자들임에 틀림없다. 노인은 바로 내 앞을 막아섰다.
'감히 영검을 인간에게 넘겨줬단 말이냐?'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인간을 이리 내!'
"절대 그렇게는 못 한다. 너희야말로 이 세계를 맘대로 어떻게 못할 것이야!"
화가 단단히 난 검은 것이 팔을 휘두르자 태양같이 붉은 원이 나타나 우리를 덮쳤다. 꼼짝없이 죽겠구나, 했는데 다행히 뒤쫓아오고 있던 원우 씨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쓰러졌지만 용케 살아나 다시 꿈틀대는 검은 것을 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숲이 나 있는 이 길로 쭉 가다 보면 강이 나올 거야."
"..."
"그곳에 집 한 채가 있을 걸세. 거긴 그나마 안전하니까 그곳으로 가게."
"저기..!"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공격해오려는 검은 것 앞에 노인은 두 팔을 벌린 채 섰다. 뭐 하나, 빨리 가지 않고! 가소롭다는 듯 노인의 모습을 비웃은 검은 것이 곧 팔을 들춘다. 저렇게 잠자코 바라볼 거냐고, 안 구해줄 거냐고 원우 씨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었지만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잠깐 숙일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있던 노인도 원우 씨의 모습에 살짝 웃어주고 자신의 앞에 있던 검은 것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눈앞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자며 재촉하는 손길을 뿌리쳤다.
"티스 씨, 시간이 없.."
".. 구해줄 수 있었잖아요."
"..."
"충분히, 구하고도 남았잖아요."
"..."
"또, 운명인가요? 저 할아버지의 운명이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였으니까 가만히 있던 거예요?"
"부탁을 들어드리는 겁니다."
"대체 무슨 부탁인데요? 할아버지 목숨보다 중요한 부탁이 대체 뭔데요?"
"당신을 지키는 일이요."
순간 심장이 저릿했다. 간과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내 모습에 원우 씨도 얼굴이 굳어졌다.
"티스 씨가 심판에 관여되어 있지 않다면, 저 노인분도 그런 부탁은 하지 않으셨겠죠."
"..."
"이 곳에 있을 존재 아니잖아요, 티스 씨는."
"..."
"잊지 마십쇼. 여긴 소설 속 아닙니다. 산 사람의 운명은 바꿀 수 있어도 망자의 운명은 변하지 않아요."
얼른 돌아가야죠, 티스 씨 원래 있던 곳으로. 금세 풀린 표정으로 앞장서서 걸으란 말에, 잠자코 몸을 움직였다. 저렇게 단호하게 얘기하는 모습은 또 처음이었기에. 익숙함의 향기에 취해 자신이 지금 어떤 곳을 온 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함부로 나댄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했다.
노인의 말대로 쭉 걸어 들어오자, 잔잔한 강 앞에 정말 집 한 채가 우두커니 있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말소리에 멈춰 경계하니, 곧 집 옆으로 나오는 사람들. 다행히 우리 일행들이었다. 셋이 아닌 둘이서 오니 여기저기서 묻는다. 노인은 어디 갔냐고. 노인의 동생도 집 안에서 나와 우리에게 다가왔다.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내가 죄인이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라버니.. 가셨군요."
"..."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하실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뇨.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노인의 동생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저 웃음이 오히려 더 죄책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아실까.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는 분위기에 답지 않게 눈치를 보던 지훈 씨가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이곳의 안전을 물었다. 이곳에 이렇게 있어도 괜찮은지, 얼른 가봐야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오는 대답은 괜찮다는 말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이곳은 안전하게끔 해주셨답니다."
"아.. 그렇군요."
"단 3일이에요. 그 이후론 이곳은 버티지 못해요."
"..."
"음식도 충분히 준비해뒀으니, 이곳에서 재정비 하신 후에 가세요."
"이렇게까지..."
"망각의 숲은 강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쭉 가시면 나올 거예요."
"..."
"부디, 여러분들께 행운이 깃들길 바라요."
"3일이 지난 후엔.. 그쪽은 어떻게..."
"오늘 밤에 떠날 겁니다."
오라버니를 따라가야죠. 그야말로 아무 미련이 없는 어투였다. 정말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살아온 마냥, 아무렇지 않게 떠나간다. 노인도, 이 동생분도. 아무리 현재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라지만 정확히 따지면 '죽음'이라는 고통을 똑같이 2번 겪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유유히 혼자 걸어가던 동생분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뒤돌았다. 참,
"방은 하나뿐인데."
얼떨결에 혼자 방을 쓰게 됐다.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겠냐는 정한 오빠의 말 덕분이었다. 밖에 나가서 새우잠을 자도 모자랄 판에, 혼자 독방이라니. 염치도 없지, 김티스. 하루 만에 대체 무슨 일들이 지나간 건지. 잠 잘 틈도 주지 않고 멋대로 치는 올라오는 생각에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침대에서 머리를 떼어냈다. 바람이라도 좀 쐴까, 거실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지나쳐 밖으로 나와 큰 흐름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을 멍하니 바라봤다.
"안 주무셨네요."
옆에서 들려오는 나긋한 음성에 옆을 돌아보니 역시나 노인의 동생이었다. 집을 안내해준 뒤로 밖에 나가 보이지 않아 말도 없이 가셨구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적어도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으니까.
"정말 많이 힘들 거예요, 티스 씨. 견뎌내야 해요."
"솔직히 말하면, 저 너무 무서워요."
"옆에 계시는 분들이 티스 씨 잘 지켜내실 겁니다. 정말 든든한 분들이세요."
"떠나실... 건가요?"
"제가 할 일은 다 했으니까요. 우리 오라버니 혼자 다 했지만."
"안녕히 가세요. 면목 없지만 정말 고마웠습니다."
오히려 고맙다고 나에게 고개 숙인 동생은 그대로 일어나 우리가 왔던 길로 걸음을 돌렸다. 이제 정말 가시는구나. 들어가지 않고 지켜보자, 동생은 다시 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얼른 들어가세요, 그래야 제 맘이 편해요.
"아니에요. 여기서 그냥 동생분 가실 때까지 보고 있을게요."
"..."
"파란 빛이 도네요."
"네?"
"파란 빛이 일렁이거든 얼른 영검의 조각을 손에 쥐세요."
"..."
"어떤 선택을 하든 본인을, 옆에서 티스 씨를 지켜주는 사람들을 믿어야 도움이 될 수 있어요."
"..."
손을 잡으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얼떨결에 자신도 얘기가 막 나와버렸다며 사과를 했다. 중요한 얘기를 마음의 준비 없이 들으니 사실 별 감흥은 없었지만 고마웠다. 이런 얘기라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냥 마음이 편했다.
이젠 진짜 가겠다며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얼른 들어가서 자라는 말에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저렇게 아무 두려움 없이, 심지어 좋아 보이는 얼굴로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러 간다는 동생을 보니 어쩌면 노인도 그랬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할 일을 끝내고 쿨하게 사라지는. 무턱대고 원우 씨에게 화낸 것이 다시 떠올랐다. 이젠 나한테 실망하기도 지친다. 대체 왜 그랬어 김티스 ...
애꿎은 머리에 꿀밤만 잔뜩 먹이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내내 마음에 걸릴 뻔했는데 가는 길이라도 배웅해주니 속이 후련해졌다. 점점 뻑뻑해져 오는 눈을 비비며 침대로 향했다. 이제 좀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건만, 제 손에 잡히는 종잇조각이 다시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접혀 있는 종이 사이로 흐릿하게 무언가 적혀 있는 것이 쪽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했다. 또, 누가 갖다 놨는지도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하, 잠자긴 글렀지.
- 너무 슬퍼하면 그분의 맘이 안 좋아요. 그러니 맘 놓일 수 있게 꼭 끝까지 버텨내세요. 신이 그대들을 져버리기 않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