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금을 바꿨습니다 :)
재밌게 읽으셨다면 예쁜 댓글 남겨주세요:)
나는 네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다.
김시민 우산 같이 쓰재두. 우산을 건네는 네 손을 왜 자꾸 내쳤는지 모르겠다.
[NCT/이동혁] 크레파스
w. 2젠5
나는 13살 부터, 너는 1살 무렵부터 여기에 있었다. 엄마의 바람과 아버지의 자살은 겨우 13살이던 나를 혼자로 만들어버렸고, 고모는 날 모른 척 했다. 고작 13살이었다. 많이 안다면 알았고, 몰랐다면 몰랐을 13살의 나는 내 발로 고아원에 들어갔다.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을 붙잡고 내가 첫번째로 한 말이었다.
3번 방 쓰렴. 가족이 된 걸 축하해. 원장님은 올리버 트위스트나 소공녀 세라에 나오는 선생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어른들보다 온화하고, 따뜻할지도. 3번방은 내가 들어오기 전 입양을 간 애가 쓰던 방이었다. 인원이 다 차서 남자애랑 같이 방을 쓰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던 원장님의 손길을 기억한다. 앞으로 네 친구가 될 아이의 이름은 동혁이야. 이동혁. 그게 이동혁과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처음 3번방으로 발을 내딛었을때, 넌 네 예쁜 눈으로 날 가만히 바라봤다. 아, 하고 아무말도 못 한 채 입만 벌리고 있던 네게 먼저 인사를 건넨건 나였다. 안녕, 김시민이야. 너는 수줍게 웃곤 다시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를 칠했었다. 빨강, 주황, 초록, 그리고 검정. 겨우 네가지 색 크레파스였다.
-
이동혁과 다르게 친구들은 내가 고아라는 걸 몰랐다. 시민아, 너 왜 동혁이랑 같이 하교해? 친구들이 그렇게 물으면 난 동혁이가 좋아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친구들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저마다 제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갔고 난 이동혁의 옆에서 나란히 걷다가, 서서히 이동혁보다 빨리 걸었다. 김시민, 진심으로 한 말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해 고아원을 나간 태용 오빠에게 물려받은 교복이라 약간 넉넉한 겉옷이 이동혁을 더욱 작아보이게 만들었다. 진심이냐고 묻는 네 눈이 흔들리지도 않고 또렷했다. 그럼, 진짜지. 그렇게 대답해야했으나 난 그러지 않았다. 대답도 안 하고 더 빨리 걸었다.
이동혁은 내가 우리 반 이제노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 이제노를 좋아한다는게 사귀고 싶고 이런 감정이 아니었지만 이동혁을 볼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던게 맞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노는 내 짝꿍이었고, 우리반 반장이었다. 제노야, 이렇게 부르면 응? 하면서 그 예쁜 눈웃음을 짓는게 그렇게 좋았다. 딱 맞는 이제노의 바지가 발목 부근에서 맴도는 게 좋았다. 그래서 자꾸 가면을 썼다. 난 고아면서, '부모님이 있다는건 축복이야.' 이런 말을 한다던가, 이동혁이 사준 팔찌가 예쁘다고 하는 이제노에게 '엄마가 사줬어' 따위의 거짓말을 했다. 그걸 보면서 씁쓸하게 웃는 이동혁을 늘 봤지만 모른 채 하기 일쑤였다.
고아원으로 돌아오면 난 어린 아이들의 저녁식사를 도왔고, 이동혁은 원장님을 따라 청소기를 돌렸다. 그리고 나면 9시가 조금 넘어있었고, 나와 이동혁은 3번 방에서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했다. 이동혁이 다시 물었다. 김시민, 아까 진심이었어? 내 쪽을 보고 엎드린 이동혁이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벌써 반쯤 잠든 이동혁이 이상하다는 생각 따위를 했던 것 같다. 나는 태일 오빠가 풀던 개념원리를 지우개로 지우는 중이었다. 흰색 지우개가 서서히 작아졌다. 이동혁 나 바빠. 집중이 흐트러져서 종이가 찢어지면 안 됐기 때문에 나는 이동혁의 말을 쳐냈다. 나 목욕하고 올테니까 얼른 마무리하고 자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머리를 헝클이던 이동혁이 짜증난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이동혁이 나간지 1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다. 이동혁의 목에는 수건이 걸려있었으나 이동혁의 갈색 머리는 바싹 말라있었다. 이동혁은 빨리 씻는 아이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이동혁이 나를 위해 늦게 들어온 거라는 걸 알았지만 난 애써 그 사실을 모른 채했다. 시민아, 벌써 11시야. 이동혁이 제 목에 걸린 분홍색 수건을 우리의 방 앞에 있는 빨래 통에 넣었다. 뭐 어쩌라고. 그런 표정을 지으며 이동혁을 흘겨봤다. 이동혁이 제 분홍색 이불에 몸을 구겨넣는게 보였다. 고단해보였다. 고아라는 꼬리표가 힘들겠지. 그렇지만 이동혁이 부러웠다. 나랑 다르게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애써, 밝은 척 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래서 개념원리를 덮고 양치를 하러 나갔다. 이동혁이 분명히 피곤하다고 했는데 방 불도 끄지 않은 채로 화장실로 향했다.
10분 정도가 흐르고, 방으로 돌아오자 이동혁은 이미 잠들어 있는 것인지 벽을 보고 누워있었다. 이동혁의 침대와 내 침대는 마주보고 있어서 옆으로 돌아누우면 바로 이동혁과 눈이 마주치곤 했다. 오늘은 괜히 눈 마주칠 일 없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프탈렌 냄새가 옅게 나는 내 곤색 이불에 몸을 구겨넣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에 아직 빛의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동혁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이동혁, 미안해. 찌르르- 하고 우는 풀벌레들의 소리 탓이었을까, 아니면 창문 사이로 들어온 달빛에 비친 이동혁의 머리칼 때문이었을까. 이동혁의 뒷 통수에 대고 한참을 속삭였다. 미안해 동혁아, 미안해. 하고.
-
그 다음날은 주말이었다. 고아원 아이들에게 주말이란 보통 아이들의 주말과는 달랐다. 주말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를 오기 때문에 우리는 단단히 긴장을 해야했다. 시민아, 일어나.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이동혁의 손길에 잠에서 깼던 것 같다. 이동혁의 이부자리는 단정하게 정리되어있었고, 이동혁은 내 이불 끝을 손으로 쥔 채 내 눈치를 보며 이불을 살살 당기고 있었다. 토요일이구나,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안도감에 숨을 크게 쉬었다.
오늘은 영어 단어를 좀 외워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책상 위에 있는 포스트잇 뭉치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시발, 이동혁이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내 앞에선 욕을 잘 안 하는 이동혁이었다. 왠지 모르게 이동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질적이었다. 한참 창문 밖을 내다보던 이동혁이 커튼을 치며 제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보통이었다면 왜 그래? 하고 물었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동혁의 눈빛에 꽁꽁 묶여버렸다고 하면 맞을까. 김시민. 오늘은 그냥 여기 있어. 내가 원장님한테 잘 둘러댈테니까. 이동혁이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와선,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크게 얘기해도 어차피 아무도 못 듣는데, 이동혁은 굳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동혁의 숨결이 귀에 스쳤다.
이동혁이 나간 후에 커튼을 걷었다. 밝은 햇살이 이동혁의 침대에 비쳤다. 바깥에서 이동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지성아 뛰지 마, 지성아 이거 먹으면 안 돼. 따위의 목소리였다. 그때였다. 박스를 들고 고아원 마당을 걷던 이제노와 눈이 마주쳤다. 김시민? 이제노의 입모양이 그렇게 움직이는 걸 봤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어쩌지, 이동혁 말 들을걸. 후회가 물 밀 듯이 밀려왔다.
-
김시민. 굳은 표정의 이동혁이 문이 부서질 듯 열고 들어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제노가 내 얘기 하는 걸 들은 거겠지. 넌 진짜,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이동혁이 벌써 눈 근처 까지 길어버린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문장들을 토해냈다. 미안해. 라고 말해야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또,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제노한테는 너 그냥 우리 고아원에서 봉사한다고 말해놨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동혁은 내가 이제노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
다행히 이제노는 금방 고아원을 떠났고, 나는 커튼 뒤에 숨어서 그걸 가만히 봤다. 김시민. 나직하게 말하는 이동혁의 목소리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너는 나랑 이렇게 다른건지. 내가 이제노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이동혁은 굴하지 않았다. 마치 내게 자기 밖에 없다는 듯이 굴었다. 저녁 먹어야지. 이동혁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저녁은 이동혁이 좋아하는 김치찌개였다. 자원봉사자들 때문에 식단에 신경을 못 쓴 것인지 오늘 반찬은 시금치 무침과 김치 볶은것이 전부였다. 옆에서 지성이가 투덜거리는게 들렸다. 이동혁이 제 김치 찌개에 들어있는 참치 한 덩이를 내 식판에 놓았다. 이동혁과 눈을 맞췄다. 이동혁의 눈이 예쁘게 휘었다. 아무말도 안하고 이동혁은 가만히 턱짓했다. 너 먹어, 이렇게 말하는 이동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오늘은 개념원리를 한장도 못 풀었는데. 머리가 살짝 젖은 이동혁이 내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해야했지만 난 또 아무 말도 안했다. 불 끌게, 난 이미 잘 준비가 끝났는데 이동혁은 굳이 불을 끄겠다고 말했다. 탁,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동혁의 침대에 눕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불이 부드럽게 사부작거렸다. 난 이동혁 쪽을 보고 누워있었다. 이동혁은 천장 쪽을 보고 누워있었다. 김시민. 이동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 쪽을 보고 누웠다. 이동혁의 얼굴이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달빛에 비쳐 눈동자가 조금씩 반짝거릴 뿐이었다.
이제노가 너 고아라고 소문 내면 어쩔거야. 이동혁이 제 손을 배게 밑에 넣은 채로 웅얼거렸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난 이동혁 보다 이제노를 더 모르니까. 만약, 이동혁이라면 절대 말 안 할테지만 이제노는 모를 일이었다. 그 애랑 나는 그냥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였다. 이동혁이 응? 하면서 부스럭거렸다. 서서히 졸음이 쏟아졌다. 이동혁. 이동혁의 이름 석자를 내뱉었다. 응, 이동혁이 대답했다. 이제노가 정말 소문을 그렇게 내더라도, 난 너 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