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추천 :: 산이(SanE) - 아는 사람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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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열] 인형놀이
W. 설탕
빙그르르르르- 돌아가는 회전판 위에 죽은 듯이 가만히 서 있던 나, 그리고 그런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너. 내게 입혀진 이 화려한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모순인건가? 깜빡여지지 않는 눈으로 애써 너를 쳐다봤어. 아닌데, 드레스는 창밖으로 내리는 저 새하얀 눈보다 훨씬 더 눈부신데. 다리가 너무 아픈데, 마비 될 것만 같아. 그건 그렇고, 내 머리는 어때? 헝클어지진 않았니?
"이상해."
그러지마. 말 하지마. 부디 그 고운 입술로는 예쁜 말만 해주겠니? 너무 완벽한 너는 이렇게 초라한 내겐 어울리지 않는걸. 아, 그렇다고 떠나라는 얘기는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난 니가 필요하거든. 그런데 명수야. 억지로 끼워지고 맞춰진 내 몸이 뒤틀리는것만 같아. 날 좀 잡아줄래? 머리가 꼭 깨질것만 같거든.
"넌 움직일 수 없잖아. 사람이 맞긴 하니?"
난 너의 그 예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걸 볼 수 있어. 사람? 내가 과연 사람이 맞을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널 사랑하는 내가 과연 사람이 맞을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동물원에서 길들여진 한 마리 기린 마냥 멀뚱히 널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나도 이젠 조금 지친것같아. 명수야, 나는 진심으로 널 사랑하고 있어. 말 하고싶은데 말이 나오질 않아. 내가 벌 받고있나봐.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이런가봐. 어쩌지? 내 마음만이라도 알아줘.
모두가 잠든 밤이면 난 혼자 깨어있어. 뭘 하냐고? 에이, 전에도 말했듯이 내 눈엔 너만 보이고 내 귀엔 너만 들리는걸? 매일 밤 너와 함께할 영원한 사랑을 꿈꿔. 헛된 허망이 아니길 바래면서 말이야. 아아, 구두가 조금 꽉 끼는것같아. 내 발에 꼭 맞는 구두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작아져버렸네. 내 손에 들린, 평생 아름답게 색을 지닐것같던 부케도 제법 시들었어. 이렇게 보면, 군데군데 갈색으로 변해버린 안개꽃을 볼 수 있어. 우리가 함께 해온 오랜 세월을 증명이라도 해주는듯 말이지.
그거 아니? 나는 유리심장을 가지고 살아. 그래서 언제 부서질지, 조각조각 깨져버릴지 나 조차도 가늠이 안 가. 시리게 차가운데 널 바라볼때면 유리심장이라 할지라도 뜨거워지는게 느껴지거든. 마론 인형처럼 딱딱한 내 피부도, 너의 손을 잡을때면 이렇게 보드라워지는걸? 그러니까 잠시만 내 곁에 있어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나에 대한 너의 마음이 동정이 아니었으면 해. 내가 늘 너에게 주는 것처럼, 너의 안에 있는 순수한 사랑을 받고싶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거야. 동정이라는건, 다시 말해 연민은 말이지, 정말 마음 아프면서도 슬픈 감정이거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정을 받을때, 그 기분은 정말 비참해.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는데, 굳이 설명하자면 내 심장이 바늘 따위로 콕콕 찔리는 기분이야. 아프진 않은데 많이 따가워. 지금처럼.
우리가 지금 하고있는게 한낱 인형놀이일지라도, 그 네 글자로 단정짓기엔 너에 대한 내 감정이 너무나 커져버렸는걸? 나조차도 제어를 못 할 지경이 됐어. 바보같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이슬이 어려있는 눈동자로 날 지나쳐가는 널 바라보는것뿐야. 진짜 이슬일지는 아무도 몰라. 말라버린지 오래거든.
"싫어."
누군가 그랬어. 말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화살이라고. 달콤한 말은 누군가에게 마치 큐피트의 화살처럼 달디 단 사랑의 세레나데가 될 수도 있지만, 모진 말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독약이 될 수 있다고. 보이니? 네 화살에 맞아서 흰 웨딩드레스가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있어. 몇 남지 않은 안개꽃들도 전부 시들어버렸네. 작아져버린 구두도 결국엔 깨져버렸어. 명수야, 그러지마. 나는 그냥-
널 사랑할뿐이야. 그것 뿐이야. 날 밀어내지마. 아무도 모를거야. 내 유리심장이 머지않아 부서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