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1920년 8월의 그 일을 잊으셨냐 물었습니다."
1920년 8월. 그 날짜에 징어의 숨이 막혀왔다.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징어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가 비틀대자 백현이 다가와 그녀를 잡았다. 평소라면 사내의 품에 그대로 쓰러졌을 징어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 사건을 알고 있다는 것에 그리고 그로 인해 징어가 협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치가 떨려 백현의 호의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어찌, 대체 어찌 알고 계신겁니까?"
"....혹시나 해서 찔러본 것인데 역시나였나 봅니다."
준면의 얼굴에 살짝 비웃음이 스쳐갔다. 순간 징어는 아차싶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넘어가지 않았을 미끼였거늘, 그 숫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버렸다. 차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다시 술상 앞에 앉았다. 남자를 대하는 애교어린 눈빛이 아닌, 날카로운 징어 그녀의 눈빛으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겝니까."
"다 알고 있다 치지요."
"이리 나오시면 불리한 것은 도련님들이십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총독부에 알려도 상관 없다는 말입니까?"
"그대가 이 방을 나갈 수 없다면 말은 달라지지요."
준면의 차가운 말에 세훈이 조용히 일어나 문을 잠갔다. 조용히 눈치를 보던 징어의 손이 은밀하게 치마폭에 가려져있는 은장도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언제 본 것인지 백현이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리 나오시면 섭하지요?"
아까의 그 능글거리는 웃음이었다. 징어는 깨달았다. 그녀가 완벽한 덫에 걸렸다고.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완벽한 덫에.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대의 자리가 어디까지 추락할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러니 결정하시지요.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질지,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우리와 함께할지."
1920년 8월. 그녀가 이 기방으로 팔려온 바로 직후였다. 어떻게든 기방에서 나가고자 했던 징어는 매일 밤 탈출로를 찾다 어느 밤인가 개구멍을 찾아냈다. 8살의 작은 몸이었기에 수월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발이 이끄는대로, 칠흑같은 어둠속에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일본 순사 하나와 마주쳤다. 미처 피하기도 전에 그는 징어에게 다가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말을 해대며 징어의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그 소름끼치는 감촉에 징어는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고 그 과정에서 순사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총이 떨어졌다. 징어는 그 총을 재빠르게 집어 총구를 순사에게 향했다. 당황한 그는 두 손을 내저으며 무어라 말했다. 조금씩 뒤로 멀어지는 그의 모습에 징어가 긴장을 풀고 총을 내려놓으려 할 때쯤 그가 다시 징어에게 달려들었다.
빵. 총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깼다. 오발이었다. 멍청한 그 순사가 징어에게 달려들면서 총의 방아쇠를 잡아버려서 일어난 일이었다. 징어의 작은 몸에 피가 흥건하게 묻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다시 기방을 향해 뛰었다. 살려면 그 곳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조용히 징어를 찾고 있던 화란각 행수는 피가 잔뜩 묻은 채 다시 돌아온 징어를 씻기고 사건의 전말을 물었다. 다음 날 경성이 난리가 났다. 죽은 그 순사가 하필이면 일본 고위관료의 아들이었고 징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목격자가 어떤 소녀가 총을 쐈다고 진술했다. 전 경성을 돌며 이뤄진 수사에서 화란각 행수는 징어를 위해 모든 뒷처리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징어가 화란각에 메여있을 수밖에 없는 족쇄가 되었다.
더 재수 없게도, 그 순사의 아버지가 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재임중이었다. 하나밖에 없던 아들을 잃은 그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범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사건이 세간에 공개되면 징어는 그 뒷일이 어찌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어온 자리, 부, 명예 모든 것이 한 줌의 재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나같이 애국심이 전혀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뭡니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난 위험한 인물이 아닙니까. 까딱하면 다 불어버릴 수도 있는데."
"애국심이 없는 대신 지금 그 자리에 대한 욕심이 어마어마한 사람 아닙니까. 자리에 대한 욕심은 가벼운 입도 무겁게 만드는 법이지요."
그들은 징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무얼 해야합니까."
"우선 이곳에 지장부터 찍으시지요."
경수가 흰 봉투를 내밀었다. 그 봉투 안에는 결의문이 들어있었다. 무영(無影)의 단원으로서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그런 결의문.
"증거를 남겨야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믿지 못하듯 우리도 당신을 믿지 못하니까."
찬열의 낮은 목소리가 징어를 압박했다. 징어는 무너져가는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곳에도 기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치달은 그런 기분.
"내가 홍랑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찍었을겁니다. 그 사건, 세간에 밝혀지면 조선 전체가 떠들썩할겁니다."
찬열에 이어 경수의 목소리가 징어의 귀에 맴돌았다. 맞는 말이다. 밝혀지는 순간 조선이 흔들릴 것이다. 조선 최고의 기생 홍랑이 조선 총독부 총독의 외아들을 죽였다. 얼마나 자극적인 이야기인가?
".........찍겠습니다."
종인이 조용히 인주를 내밀었고, 징어는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결의문에 지장을 찍었다. 지장을 찍는 순간, 징어는 느꼈다.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될 것이라고.
"내일 우리 중 누군가가 다시 그대에게 접촉을 할겁니다. 그 때 그대가 해야할 일을 전달하겠습니다."
"........."
"그대 말대로 밤이 깊었으니 우리는 이만."
준면의 말에 매화방을 채우고 있던 그들은 빠르게 화란각을 빠져나갔다. 징어는 한참을 그 방에 홀로 앉아있었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오전에 하루가 잘 풀렸던 것일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웠다. 오지 않는 그녀를 찾아 매화방에 온 시월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징어는 겨우겨우 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화장만 지운채 그녀는 잠을 청했다. 지금 이 기분, 이 절망을 죽지 않고 버텨내려면 그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
"홍랑언니!!!"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이야."
"밖에 엄~청 잘생긴 모던보이가 언니를 찾는데요? 언니랑 만나기로 되있대요! 뭐 뻔한 거짓말 같은데 생긴게 보통이 아니라서 언니 구경 시켜 주려고 알려 드리는 거에요."
".....이름이 무엇이라 했는데?"
"이름은 안 알려주고 여기 쪽지. 언니 진짜 오늘 만나기로 한 남자 있어요?"
쪽지에는 '은장도'가 적혀져 있었다. 백현이었다. 그녀가 나가야하나 백현을 불러야하나 고민하는데, 어딜가나 징어의 인지도 때문에 보는 눈이 많을 터였다. 어차피 봐야할 눈이 많다면 징어가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화란각이 훨씬 나았다.
"내 방으로 모셔와."
"예에에에? 언니 방으로요?"
"....두 번 말해야 돼?"
"아,아니요. 얼른 모셔올게요."
"다과도 내오고."
징어는 습관적으로 경대를 열어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했다. 그녀 스스로가 봐도 예쁜 얼굴이다. 큰 눈, 오똑한 코, 하얀 피부, 쪽을 지면 조선의 여인이 되고 풀면 모던걸이 되는 구불구불한 머리. 그런데 어제 그 남자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세한 떨림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자존심이 팍 상했다. 징어는 연지를 집어 입술을 더 빨갛게 칠했다. 더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오늘은 모던걸이시네요?"
"아, 오셨네요."
연지를 경대에 집어넣자마자 백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밝을 때 보니 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소년과 남자가 모두 담겨있었다.
"너무 딱딱하면 재미없으니 차부터 드시지요."
"하하, 어제보다는 기분이 많이 풀리신 것 같습니다."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절망만 하고 있으면 좋을 것이 없지요."
모든 것을 체념했다는 징어의 말에 백현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미묘한 웃음이다. 웃고는 있는데 그 속에서 정말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제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
백현이 종이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총독부 고위관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보아 암살 대상인 것 같았다. 그들의 이름 밑에는 이들이 3월 3일에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알아내달라는 전언이 써있었다. 글을 다 읽고 백현을 쳐다보자 그가 이름을 다 외웠냐고 물었다. 징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백현은 그녀의 손에서 종이를 빼 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남겨서 좋을 것이 없지요."
징어는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쉽게 입 밖으로 꺼낼수도, 흔적을 남겨서도 안 되는 이 일의 중심에 그녀가 자리하게 됐다는 것을.
"자, 그럼 우리 관계를 정해볼까요?"
"네?"
"앞으로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일은 제가 할겁니다. 화란각을 계속 들락거려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런 의심이 가지 않을 명분은 만들어야지요."
"아........"
"애인?"
애인이라며 능글거리게 말하는 백현을 징어가 놀란듯이 쳐다보았다.
"이렇게 가면 제가 여러 남자들의 표적이 될 것 같으니 접어두고."
"......."
"음.........소울메이트는 어때요?"
"소울....메이트요?"
"서양에서는 엄청 친한 벗을 그리 칭한다 하더군요. 어때요? 아주 어렸을적부터 우정을 나눈 그런 벗."
"....나쁠 것 없지요."
징어는 백현을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그의 모습에서 그녀 자신을 발견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닮아있었다. 쉽게 속을 알 수 없다는 것도,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 안다는 것도, 어떻게 사람을 다뤄야하는지 안다는 것도.
"화류계에 발을 들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는 여인네들에게서는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뭐 이유야 짐작은 가는데 저를 보통 견제하는 게 아니더군요."
"하하하하하"
징어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백현이 매우 크게 웃었다. 이런 반응이 나올지 몰랐던 징어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미안. 미안합니다. 그냥 그대의 자신감이 보여 재밌어 웃은겁니다."
"아....예."
"그대 말이 맞아요. 그래서 화류계에 발을 한 번 담가볼까 합니다. 일본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서 새로운 평판을 얻기 딱 좋거든요. 뭐 딱히 내 취향은 아닌데 나머지 놈들이 워낙 딱딱해서 나밖에 할 사람이 없대나 뭐래나."
"한동안 조선 여인네들이 시끌시끌하겠네요."
징어의 웃음 섞인 말에 백현도 엷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말을 높일 예정입니까?"
"예?"
"소울메이트잖아요 소울메이트. 그런 사이가 존댓말을 해서는 안되지요."
"그럼 지금부터 놓지 뭐."
아무렇지 않게 백현에게 반말을 던지는 모습에 백현이 다시 피식하고 웃었다.
"저돌적인 신여성이네."
"답답한거 재미없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백현은 일어나 쓰고 왔던 모자를 챙겼다.
"가려고?"
"응. 근데 너 데리고 가려고."
"날 데리고?"
백현이 징어에게 일어나라며 손을 내밀었다. 징어는 재밌다는듯 싱긋 웃으며 백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날 데리고 거리를 활보해서 유명해지시겠다?"
"똑똑하네. 괜히 홍랑이 아니야."
"그래 뭐. 나쁠거 없지."
징어는 서랍장에 넣어놓은 장갑과 오늘 입은 빨간 원피스에 맞는 빨간 모자를 챙겨 백현 옆에 섰다. 둘은 화란각 마루를 지나 대문 앞으로 갔다. 웬만한 남자가 아니면 만나주기는 커녕 눈빛도 주지 않는 징어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잘 알려지지 않은 남자와 하하호호 웃으며 화란각 중앙을 관통하자 화란각의 모든 눈이 그들에게 쏠렸다.
"홍랑이 비싸긴 엄청 비쌌나보네? 나랑 걷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시선이 쏟아지는걸 보면."
"귀찮잖아. 이 남자 저 남자한테 찡긋거리는거."
백현은 웃음을 머금은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징어가 자연스럽게 백현의 팔짱을 꼈다.
"왜?소울메이트 말고 애인 해주려고?"
"아니. 그냥 화제몰이 좀 제대로 하려고."
백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굉장히 재밌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위험한 동행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지만 동행 내내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내사랑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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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 둘씩 친해지는거죠!
늘 기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이많이 기대해주세요~
아무래도 제가 바빠서 연재텀이 길어질 것 같아요ㅠㅠㅠㅠㅠㅠ이해해주세요ㅠㅠㅠ
나름 위험한(?) 시도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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