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스캔들 ost - Because of you
경성 비밀결사대 15
written by 스페스
사무실 안으로 적막이 흘렀다. 점심을 먹고 한창 식곤증이 몰려오는 시각이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다. 동료들은 턱을 괴고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윤기를 흘끗거렸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었으나 풍기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간혹 검지로 제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치다가 씩 웃는 윤기의 모습에 마주 앉은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良い事あるらしい。(요우이코토아루라시이)"
좋은 일 있나 봐요.
상념에 잠겨있던 윤기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금세 웃음기를 거둔 얼굴로 입을 뗐다.
" 大したことないのに。(타이시타코토나이노니)"
별일 없는데.
원체 낮은 목소리였으나 일본어를 할 때면 중저음의 톤이 더 도드라졌다. 시치미를 뚝 뗀 윤기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이미 만면에 스며있는 미소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별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윤기를 보고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린 직원이 손에 쥔 서류뭉치를 건넸다.
"夜勤するよ。早く決裁をしてください。(야킨스루요. 하야쿠 켓사이오 시떼쿠다사이.)"
야근하겠네. 빨리 결재해줘요.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서류더미를 보고 윤기가 얼굴을 구겼다. 내일 아침까지는 모두 끝내야 한다는 부장의 전언이 있었다고 했다. 안 그래도 답지 않게 오전 내내 한 가지 서류만 붙잡고 있던 윤기였다. 같은 문장을 수십 번 되뇌어도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어젯밤 일을 여러 번 곱씹으며 웃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 헛웃음이 났다. 그럼에도 자꾸만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 탓에 윤기는 몇 번이나 피곤한 척 얼굴을 감싸 쥐고 웃음을 꾹꾹 눌렀다.
평소 윤기의 업무처리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동료들보다 한참 늦게 시작해도, 언제나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주어진 일을 마치고는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업무는 답보상태였다. 하루 종일 붕 뜬 마음은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책상에 놓인 서류 뭉치를 흘끗 본 윤기가 다시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검지에 걸린 방아쇠를 당기던 그 손끝의 감각은 이제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총을 꺼내들었는지, 어떻게 일본군에게 총구를 겨눴는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다. 오로지 그 순간의 긴장, 떨림, 사색이 된 정국의 표정만이 머릿속을 느릿하게 떠다닐 뿐이었다.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을 벌이고 무작정 쌈닭에게 찾아갔던 것은 단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얼굴을 마주해야 비로소 답이 나올 것 같았다. 엉겁결에 저지른 일이었을지라도, 겁이 날지언정 후회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었다.
우산을 쓴 채 외로이 정거장을 서성이며 윤기는 숱한 생각을 했다. 혹시 누군가 목격자가 있지는 않을까. 피를 뒤집어쓴 채 눈이 마주쳤던 쌈닭의 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숙부가 눈치를 챈 건가. 수만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전차에서 내린 새하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수많은 계산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어떤 위로도 확신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제 행동을 정당화할 어떤 이유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윤기는 알았다. 아주 짧은 순간에.
* * *
남준은 꽤 긴장한 모습으로 데스크에 선 여자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언제 봐도 흐트러짐 없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여자의 표정에 남준은 종종 소름이 돋고는 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으나 기다림은 하염없이 계속되었다. 복도 보조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남준은 한껏 신경을 곤두세웠다. 부경감의 방안에서는 아마 긴급한 회의가 한창일 테다. 경감 살해 미수사건도 오리무중인데 취임식 사건까지 연달아 터진 탓에 총독부의 분위기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수뇌부 인사들이 우르르 부경감의 방을 빠져나왔다. 남준은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섰다. 한창 담배를 태우고 앉은 부경감이 남준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는 남준이 소파에 채 앉기도 전에 입에서 뿌연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뭐 좀 알아낸 거라도 있나?"
남준은 곧장 머릿속에서 석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의문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가 모든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준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요. 총독부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일개 기자가 그렇게 쉽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남준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부경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달아 터진 사건 탓인지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부경감을 바라보는 남준의 표정이 묘했다.
"아, 이번 취임식 총격사건 관련해서는 어떤 기사도 쓰지 말게. 자꾸 알려져봤자 좋을 게 없다는 내부의 판단이야."
남자가 다시금 뿌연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저번에 있던 살해 미수 사건은 범인을 잡았다고 써주게나. 대문짝만 하게 내주게."
남준이 의아한 얼굴로 부경감을 응시했다. 그 눈빛을 알아챈 부경감이 말을 이었다.
"경성 안에서 범인을 못 잡았다 말이 도는 모양이네. 그러니 계속 사기가 높아져 겁도 없이 총격 사건을 벌이겠지. 게다가 본국에서도 우리 총독부를 보는 눈초리가 좋지 않고."
"만약 진범이 나타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걱정 말게. 그래도 총독부 걱정해주는 건 자네뿐이군."
부경감이 껄껄 웃고는 남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짐을 진 채 사무실을 거닐던 부경감이 말을 이었다.
"진범이 나타나면 그때 진범을 잡으면 되겠지."
* * *
사무실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기에게로 향했다. 책 서너 권은 될법한 분량의 두꺼운 서류를 이제 막 부장의 책상 위에 올려둔 윤기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윤기를 응시하던 동료들이 금세 웅성거렸다.
“もう終わったの? (모우오왓타노?)"
벌써끝났어?
그중 한 사람이 물었다. 윤기가 피곤한 듯 눈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커버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윤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시곗바늘이 정확히 여섯시를 가리켰다. 가방과 외투를 들고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그를 보며, 같은 부서 사람들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일에는 하등 관심 없는 얼굴로 출근을 해서 늘 첫 번째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윤기였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두 번 볼 필요도 없을 만큼 그의 일처리는 완벽에 가까웠다.
동료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건물을 빠져나온 윤기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퇴근길인데도 발걸음은 유독 가벼웠다. 택시를 잡아탄 그가 행선지를 읊자 자동차가 서서히 도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창문에 기대어앉은 윤기는 어제의 일들을 곱씹었다. 마지막 순간을 떠올릴라 치면 자꾸 심장께가 간질거려왔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통에 입가가 뻐근해졌다. 약속지점이 가까워 질수록 주체할 수 없을만치 심장이 두근거리자, 윤기는 제 가슴위에 손을 얹어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참 별일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기분좋은.
* * *
시간은 참 느리게 흘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지만 통 잠이 오지 않아 늦은 밤이 되도록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럼에도 새벽녘 동이 틀 무렵 번쩍 눈이 떠졌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탁상시계가 이제 막 여섯시를 가리켰다. 그때부터 시간은 참 느리게도 흘렀다. 오후 여섯시 반, 경성역 앞. 약속시간을 기다리며 나는 틈만 나면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나랑 하자, 자유연애.'
갑작스러운 물음에 심장이 쿵 내려앉던 순간. 온 세상이 멈춘 것 같던 그때에 나를 보던 그의 눈빛. 내가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린 사이, 당황한듯했던 그의 얼굴. 자유연애라는 말을 두어 번쯤 곱씹었을 때 달음질이라도 한 것 마냥 내달리던 심장박동. 한참을 머뭇거리던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모습.
"... 싫어?"
한참이나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던 그가 슬쩍 고개를 들고는 내게 물었다. 여전히 심장이 쉴 새 없이 뛰어댔다. 머릿속이 하얘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파리하게 떨리는 가로등 밑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 저기... 다시 한 번만 말해줄래요?"
그가 난감한 얼굴로 다시금 내 얼굴을 훑었다. 마주친 시선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는 고개를 떨궜다.
"... 하자고... 연..애..."
고개를 숙인 채로 머뭇거리며 뱉은 그 말이 너무 귀여워서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조금씩 심장박동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뒷짐을 쥔 채로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모습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기... 혹시 내일... 대답해도 돼요?"
남자가 반사적으로 찡그린 표정을 했다. 얼굴 곳곳에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모던 잡지에서 읽었는데... 어.. 이런 건 바로 대답하는 거 아니라고..."
내 대답에 그가 곧장 헛웃음을 짓고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웃는 낯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 진짜 넌 뭐 이렇게 어렵냐."
투덜거리면서도 그 사랑스러운 입꼬리는 여전했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가를 매만지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여섯시 반 경성역 앞에서 봐."
집까지 뻗어있는 골목을 앞두고 그가 살짝 손을 들었다. 그에게 웃어 보이고는 골목길로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였다. 그가 내 뒷모습을 보고 있을 생각에 괜스레 걸음걸이가 신경쓰였다. 한걸음씩 걸을 때 마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연애하자는 말이 떠오르면 계속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리고 동시에 걱정이 몰려왔다. 혹시 내일 대답하겠다는 말이 거절로 들렸을까. 모던 잡지에서 뭐라 하든 그냥 오늘 대답했어야 하나. 윤기씨가 내일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어쩌지.
집을 열보 가량 앞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전봇대에 등을 기댄 채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였다. 남자는 팔짱을 풀고 얼른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갑작스레 무슨 용기였는지는 모르겠다. 뒤를 돌아 남자를 향해 뛰기 시작하니 그가 눈을 작게 뜨고는 의아한 듯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달음질하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숨을 몰아쉬며 그 앞에 멈추어 서자,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와 갸우뚱한 얼굴을 했다.
"내일 윤기씨 마음 바뀔까 봐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 나도 좋다고요."
남자가 웃었다. 밤하늘 달보다 더 환하게.
From.스페스
너무 오랜만입니다. 욕을 한트럭 얻어먹어도 죄송하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기다려주신 분들께는 머리숙여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