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소꿉친구 민윤기를 기록하는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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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윤기를 만났다. 자신의 몸만큼 하얀 옷을 걸쳤는데 꼭 내 곁에서 영원히 멀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꿈에서 멀어져 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을 많이도 들었는데 이상하게 윤기를 따라가야만 할 것 같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비 같은 윤기의 팔을 잡는 순간 귀에선 머리가 울릴 정도록 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나, 윤기 형 일어났어요." 언제 내 귓가에서 찢어질 만큼 심한 소리가 들렸는지도 모를 만큼 지민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윤기가 일어났다니. 내가 꿈에서 본 윤기의 모습처럼 하얗다 못해 창백한 팔을 잡자마자 굉음이 아닌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윤기야, 윤기야. 작게나마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지 윤기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손을 살짝 쥐었다 펴주는 걸로 안부를 전해줬는데 왜 이게 난 더 행복할까. 옆에서 더 있고 싶었지만 이제야 깨어난 윤기는 다시 수술실로 향했다. 저렇게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이를 데리고 왜 수술실로 가는지 의사선생님이 참 원망스럽다. 지금 윤기 곁에는 내가 있어주는 게 가장 도움일 텐데. "여주 누나, 이거 입어요. 벌써 삼 일 동안 그 옷 입고 있었잖아요. 이제 윤기형도 일어났으니깐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같이 보러 가요." "아냐, 됐어. 아니다. 윤기 아픈데 이런 옷 입고 있으면 면역력 낮아지겠지? 갈아입고 올게. 고마워, 지민아." 삼일을 꼬박 학교도 안 가고 병실 근처에만 있었다. 그런 내게 지민은 학과 사무실에 소식을 대신 전했고, 자꾸만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줬다. 그리고 오늘은 윤기 집에 있던 내 옷을 갈색 종이봉투에 담아 건넸다. 왜 윤기가 지민이랑은 친하게 지내는지 알 것 같은 행동들을 곱씹어 보면서도 빠르게 갈아입었다. 이 순간에 윤기 수술이 끝나서 나올까 봐. 윤기가 차디찬 수술실에서 나오자마자 보는 사람이 내가 아니면 미안할 것 같아서. 덕분에 윤기의 몸에서 흐른 피가 묻어있는 티셔츠가 변기에 빠졌다. 순식간에 변기의 물은 빨갛게 물들었고, 속에선 알 수 없는 토사물이 튀어나왔다. 제대로 옷을 입지도 못했는데 정리할 생각도 없이 뱉어내는 소리에 지민이가 급히 들어왔다. 내가 보고 있어도 이렇게 속이 메스꺼워지는데 지민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내 등을 토닥였다. 윤기야, 넌 나보다 더 아팠지. 미안해. 오늘도 윤기에게 들려주지 못한 사과만 속으로 뱉어낼 수밖에.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막혀있었던 건지 한참을 토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속옷만 간신히 걸치고 있던 나에게 천천히 옷을 입혀주는 손길을 받아내곤 먼저 병원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길가에 버려진 고양이처럼 구부정하게 수술실 앞의 의자에 앉아있는데 불이 다른 색을 보여줬다. 윤기의 수술이 끝났는지 곧이어 의사 선생님이 나오셨다. 때마침 지민이도 화장실 뒷정리를 끝냈는지 나왔고, 이번에도 내가 아닌 지민이가 대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다가왔다. "지민아, 뭐라셔? 윤기 이제 괜찮대? 언제 일어난대? 후유증은? 응?" 대답할 시간도 안 주고 물어보는 내게 지민은 미소를 띄어주었다. 그거 하나로 대답은 됐다. 충분했다. "윤기가 얼른 일어나면 좋겠어. 지민아, 윤기 더 마른 것 같지. 여기 병원은 수액도 안 놔줘? 괜찮은 거야?" "누나, 괜찮아요. 그리고 아까 의사 선생님이 하나 주고 가셨어요. 누나 먼저 밥 챙겨요. 누나가 더 말랐어." "나는 괜찮아. 근데 윤기는 언제 일어나? 아니다. 그냥 천천히 일어나면 좋겠다. 몸 다 낫고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게. 그날 윤기는 안 다쳤고, 나는 안 울었다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서 일어나도 되니깐 안 아프면 좋겠어.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 되게 싫어했거든. 근데 오늘은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신이 계신다면 그래줬으면 좋겠어. 이미 내가 아닌 윤기가 여기 누워있는 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지만." 몹쓸 인간이 아닌 윤기가 여기에 누워있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한 번만 더 소원을 빌어보고 싶다. 그럼 다 용서해줄 수 있으니깐 제발 윤기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사고 나기 전 날로 되돌아가달라고. - "윤기야, 나 오늘은 학교 잘 갔어. 밥도 먹었는데 너는? 야, 무슨 남자애가 여자애보다 더 말랐어." "....." "너 나 안 쳐다볼 거야? 이제 친구도 버리겠다 이거네. 와, 진짜 치사해. 박지민만 친구야? 우리 17년 우정 버렸대요, 여러ㅂ..." "시끄러워." 윤기가 깨어났었다. 아직 일주일 밖에 안 지났지만 윤기는 생각보다 조금은 빠르게 회복이 되고 있었다. 아직 혼자서 발을 내딛지는 못하지만 의사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상처 부위가 빨리 아물어간다고 하셨다. 근데 우리의 관계는 조금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실은 느끼는 것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였다. 윤기와 나를 이어주는 우정의 실이 많이 가늘어졌다는걸. "윤기야, 미안. 많이 시끄럽지. 나 오늘은 이만 가볼게. 조금 있으면 지민이 오니깐 밥 챙겨." "네가 뭔데 자꾸 챙기라고 하는데." "나? 네 친구지. 친구. 17년을 함께 보낸 친구. 지민이랑 꼭 밥 챙겨, 민윤기." 음. 윤기가 우리의 우정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래. 딱 이 말이 팩트고, 사실이다. 지민이가 그랬다. 윤기의 기억이 많이 아파졌다고. 우리의 우정을 쓴 종이를 잊어버렸단다. 처음에는 윤기가 거짓말을 치는 줄 알았다. 날 보는 그 눈빛과 말투는 똑같은데 나를 기억 못 하니깐. 윤기가 깨어난 그날, 지민이와 나는 멍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자마자 꺼낸 말이 내 이름이 아닌 욕이었으니. 그날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깨었났으니깐, 이제 민윤기가 혼자서 아파하지 않고 내 옆에서 내 보살핌 다 받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근데 그다음 날도 삼일 뒤에도 내 이름은 그저 박지민의 입에서만 흘러나왔다. '누나, 아직 병원이죠?' '응. 천천히 와. 병실 앞이야.' '춥게 왜 거기 있어요. 내가 준 카드로 근처 카페에 가지.' 날 챙겨주는 사람이 윤기가 아니라는 그 사실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누나, 나랑 같이 내려가요.' 지민에게서 온 문자를 끝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한숨을 쉬려는 순간 차차 적응돼가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는 지민이었으니깐. 가기 싫다는 나를 데리고 카페에 들렀는데 자꾸 내 쪽으로 조각 케이크를 잘라서 올려놓았다. 나 안 먹는다니깐. 이번에도 안 먹고 그냥 가면 자기 시급이 아깝다나 뭐라나 투정 부리는 지민이를 흘깃 쳐다보곤 억지로 한 입 가져다 댔다. 윤기한테 제대로 받은 초콜릿이 없었는데 여기서 초코 케이크를 먹고 있으니 괜히 죄짓는 기분이 든다. 윤기한테 초콜릿 받아보고 싶었는데. 조각난 케이크만 애꿎은 포크로 괴롭혔다. "윤기 형이 초콜릿 샀었어요." "응? 언제 샀어? 걔 나한테 안 줬는데..." "화이트데이였나. 그때 우리 과 동기들이랑 같이 근처 편의점 갔었는데 곰돌이 초콜릿 보더라고요. 그거 누나 안 줬어요? 내가 그 초콜릿 여자들한테 인기 많다고 추천도 했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다. 윤기가 초콜릿을 샀다니. 근데 화이트데이? 그때 우리 만났나. 아, 안 만났었구나. 그 다음날 해장 같이 했었는데. 초콜릿 나 안 주려고 그랬었나. 왜 안 가져왔을까. 윤기한테 따져야지, 라는 말을 꺼낸 순간 까만 아메리카노처럼 우리의 공간에는 적막만 감돌았다. 애써 적막에서 벗어나오려고 아까 조각 내버린 케이크를 한 입 지민이에게 건넸다. "누나, 조심히 들어가요. 내리기 전에 전화도 하고요. 이어폰은 끼면 안 돼요. 알겠죠?" "얼른 들어가래도, 지민아. 나 어린애 아니야. 기사님이 우리 쳐다보신다... 눈치 보여." "아, 미안해요. 누나, 근데 진짜 전화는 꼭 해요." "할게. 할게. 얼른 들어가. 윤기 혼자 있잖아. 걔 생각보다 외로움 많이 타거든. 나 갈게." 전화 안 하면 윤기한테 내 이야기를 안 전해준다고 귀엽게 협박하는 탓에 지민이가 잡아 준 콜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울렸는데 안 받네. 윤기랑 밥 먹는 중인가 싶어서 끊으려던 찰나에 받았다. 박지민, 네가 하라고 해놓고선 늦게 받으면 어쩌냐. 윤기랑 밥 먹어? 맞다. 아까 초코 케이크 잘 먹었어. 고맙다는 말까지 했는데 대답이 없다. 뭐지? 박지민한테 건 전화가 아닌가 싶어서 통화 화면에 윤기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미쳤나 보다. 분명 박지민에게 전화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화번호부를 뒤졌는데 내 손은, 그러니깐 내 뇌는 민윤기를 떠올리고 걸었었다. 근데 윤기한테 박지민이랑 있었다는 거 말하면 기분 안 좋을 텐데 괜찮을까. 윤기가 지금 우리의 우정을 잊었어도 걱정되는 건 여전했다. '누나 왜 전화 안 했어요? 잘 들어갔어요? 저 지금 윤기 형 재우고 집 가는 길.' '미안. 추워서 바로 들어갔어. 윤기한테 수면 양말도 줬지?' '그럼요. 분홍 색이라고 엄청 투덜거렸어요. ㅋㅋ 근데 잘 어울린다고 하니깐 버리래요.' *추신 - 윤기의 기억 일기장이 하얀 백지라면 내가 대신해서 하나씩 옮겨 적어주고 싶다. 며칠,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년이 걸린다고 해도. ******* 안.... 녕..... 하..... 세..... 여..... 독.. 자..... 님..... 들......? ?❤️ 제가 너무 늦었죠. 엄청 늦었죠. 우리 윤기를 너무 오래 눕혀놨어요 ㅠㅁㅠ 죄송합니다 그래서 이번 편은 구독료를 0으로 설정했습니다!!!!!!!!!!! 근데 이게 자랑은 아니져? 희희... 이걸로 우리 독자님들 마음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다녀간 건 아닌 수준이져. 그쳐. 그래서 아주 작은 선물을 하나 더 드리려고 합니다 보고 싶은 조각글을 고민 0.5초 하시고 눌러~ 주쎄요~~ 빠른 시일 내에 데려올게요!!!!!!!!!! 약속!!!!!! 도장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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