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정말이지, 너무 좋은 친구라서
참고: 구름이네 & 클라우디 에스프레소 구조 |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클라우디 에스프레소 |
"그래서, 둘이 팀플을 하게 됐다고?"
"예... 뭐. 팀플이라 하기도 좀 뭐하지만."
"오히려 잘된 거 아니야? 캐리는 다니엘이 할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하지만..."
후배들 무서워서 같이 있기 영 불편해서요. 라고 말하기에는 쪽팔리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하여간 여러모로 좀 그랬다.
지성오빠가 아무리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고민도 잘 상담해주고 그런다고 한들 학교 내에서 내가 느끼는 그 미묘한 분위기까지 세세하게 읊기는 좀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어떻게 된 거냐면, 한마디로 다니엘과 둘이서 호텔경영론 팀플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상황이 영... 좀 거시기했다.
호텔경영론은 보통 팀플을 하고 그 팀은 중간고사 전에 구성되는데, 특이하게 2인 1조라 파트너를 잘못 만나면 그대로 재수강 행이다. 내가 그 재수강 행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고.
파트너 구성은 희망자가 있으면 희망자들끼리 붙고, 희망자가 없으면 희망자가 없는 사람들끼리 붙는다.
내가 호텔경영론을 처음 들었을 땐 희망자가 없었다. 그래서 무작위로 붙은 한 명과 마음이 도무지 맞지를 않아 그야말로 상처 뿐인 한 학기를 보냈던 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희망자는 없었으나... 아니, 없는 줄 알았으나... 그건 내 착각이었을 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니엘이 조교에게 이야기를 해두었고, 나는 팀 구성을 발표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다니엘의 파트너라는 걸 깨달았다.
"G조, G조는 13학번 ○○○, 16학번 강다니엘."
조교가 G조를 발표하자마자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옆에 앉은 다니엘을 쳐다봤다. 다니엘은 한쪽 눈을 찡긋, 하더니 내가 말했다. 하고 웃었다.
...야 인마... 최소한 나한테 귀띔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하고 이를 악물고 이야기했더니, 미리 얘기하믄 내랑 팀 안 할 거였잖아요. 하며 말을 늘인다.
물론 인정하는 바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그리고 그 조 구성을 발표한 뒤로 따라붙은 웅성거림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다니엘과 같이 안 다녀주면 안 되겠냐는 후배도 생각나고, 왠지 지금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은데 또 눈을 맞춰서 바라보자니 영 좀 그렇고.
괜히 짓지 않아도 될 죄를 지어버린 듯한 기분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쓸 데 없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나 싶은 생각도 안 들은 건 아니다.
"내 잘할게요. 울 누나 재수강은 했어도 삼수강은 없다."
해주는 말이야 기특하다만, 그야말로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가 다니엘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긴 했다. 그래도 명색이 선배인데, 면목이 없긴 해도 기댈 수밖에 없어서..
사람이 철저히 자기 자신의 이익을 찾아가는 동물이긴 하다는 걸 실감했다. 같은 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것은 잠깐이었고, 묻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으니까.
나 너무 쓰레기인가... 그래도 할 수 있는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야지. 너무 다니엘에게 민폐가 되는 것도 잘못이니까. 마음 속에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누나 토요일에 알바 끝나고 집에서 함 만나요. 중간고사 끝나고 거의 직후니까 시간 얼마 없고로."
토요일에 만나자는 다니엘을 향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을 본 다니엘은 흡족한듯 웃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다.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강의실을 나서고 말았는데,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되도록 못내 신경이 계속 쓰이는 거다.
차라리 내 상황을 모르는 다른 누군가와 팀이 되어서 비슷한 양으로 공평하게 나눠서 준비하게 되면 모를까.
내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아는 다니엘이었기 때문에 절대 공평하게 나누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생각이 너무 앞서갔던 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팀플의 마지막 단계인 발표를 하게 될 때도... 내게로 집중될 시선을 예상하니 그게 참.. 많이 부담스러웠다.
괜한 짓을 한 걸까. 지금이라도 팀을 바꾼다면 늦은 일일까. 다니엘이 많이 서운해 할까.
여러가지 생각이 뒤섞여 이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는데, 마침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지성오빠인 것 같았다.
"여튼 뭐... 세세하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상황이에요."
"니엘이 얘 학교에서 꽤 잘 나가나보네. 피씨방만 잘 나가는 줄 알았더니."
"동기들한테 인기 많은가 보더라고요. 저야 잘 모르고요."
"내가 뭐 하나 말해도 돼?"
"뭔데요?"
"그런 애가 너 좋다 하는데 뭐 어떡하냐. 그것도 네 복이지."
'좋다' 한다라....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순간적으로 미간이 확 구겨졌다. 지성오빠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잔뜩 좁혀진 내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인상 펴시죠. 하는 말과 함께.
좋다는 게 무슨 의미인데요? 라고 묻게 된다면, 그에 따라올 대답에 내가 영향을 받지 않으리란 보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충분히 영향을 받고도 남을 것 같았다는 말이다.
가만히 할 말을 고르고 있자니, 지성오빠는 뭐, 네 입장에서는 손해 볼 거 하나도 없어.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하며 내게 눈을 맞췄다.
"후배들이야 너 졸업하면 만나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까 걔네 신경쓴다고 너한테 득될 게 하나도 없고."
"...."
"다니엘은 뭐, 혹시 알아? 졸업하고도 계속 만나게 될 뭔가가 생길 수도 있을지."
"...."
"그게 뭔지는 난 모르겠다만-"
"....."
"난 니엘이를 좀. 응원해주고 싶네."
말로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미 다 알고 있고, 추측하고 있는듯했다. 지성오빠는.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라는 게 이럴 때 드러난다.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빨리 나이 먹고 싶은 건 아니고.
정신없이 뒤엉킨 감정의 실타래를 풀려다가 어쩐지 조금은 더 꼬여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성오빠는 내가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가장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래서 지성오빠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는 게 내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걸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나는 오빠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오빠는 고마우면 밥 사. 하고 웃었고, 나는 치맥 한 번 하자고 말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계산하도록 두지 않을 거란 것도 안다.
그러면 나는 오빠가 카드를 내밀도록 순순히 놔두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는 실랑이를 하게 되겠지.
나는 허리를 두어 번 톡톡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마감해야지. 밤이 늦으니 손님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줄었다.
- 오세요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국내에서 고르자면 A가 좋을 것 같고, 국외에서 보자면 B가 좋을 것 같고...
지난 번에 들었을 때는 A 하는 애들은 있었는데, B 하는 애들은 없었어."
토요일 알바가 끝나고, 나와 다니엘은 다니엘의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팀플로는 첫만남을 시작했다.
팀플 주제는 '국내외 호텔체인 분석'. SWOT 분석(브랜드의 강점, 약점, 기회, 위협 등을 분석)을 중심 툴로 호텔체인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막학기에 겨우 SWOT 분석이라니. 4년 내내 한 게 SWOT 분석이라 안 쉬울 수가 없었지만 이건 누가 SWOT 분석을 잘 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좋은 호텔체인을 주제로 하느냐의 문제였다.
나와 다니엘은 국내외 여러 호텔체인을 놓고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A 체인은 이러이러해서 좋을 것 같고, B 체인은 저러저러해서 괜찮다..
C는 애들이 많이 할 수 있으니까 가급적 피하고, D는 요새 뜨는 편이라 참신해서 좋긴 한데, 정보가 너무 없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간 것이다.
나는 국내 브랜드인 A가 국외 브랜드인 B보다 정보 수집하기가 쉬울 것 같아 A가 좋겠다고 말했지만, 다니엘은 살짝 난색을 표했다.
별로인가... 이유가 궁금해서 별로야? 하고 물었더니, 별로는 아인데... 하며 말문을 여는 다니엘이다.
"울 아부지네라서. 애들 앞에서 뭐라 말하기 좀 민망타."
".........너희 아버지 호텔이 여기야?!"
소리를 크게 내려던 건 아닌데, 너무 놀라버려서 소리가 크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리를 크게 내고 나서야 내가 이렇게나 큰 소리를 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쉿, 형들 깬다. 다니엘은 검지손가락을 제 입술 위에 올리며 제법 엄숙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쉿, 했다. 나는 어어.. 미안... 하며 얼버무렸다.
아니 근데, 아버지가 호텔 하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무슨 부산에서 조그맣게 호텔 몇 군데 운영하는 것처럼 말해놓고 A 브랜드라니. 요 근래 이렇게 놀란 적이 없어 뜨악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그걸 와 미리 말하노. 자랑이가."
"자랑이지, 이 정도면!!"
"재수없고로. 안 그래도 애들땜시 피곤한디."
"야... 대박이다... 나 진짜 몰랐어."
"모를 줄 알았다."
"와... 충격."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묻게 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호텔은 할아버지 때 처음 생겨, 아버지가 운영하시면서 제법 지점 수와 함께 크기를 키워갔고, 저는 아버지 뒤를 잇겠다는 생각이라고.
저한테 줄지 안 줄지는 모르지만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야 한다고. 그렇게 다니엘이 말했다. 내가 살다살다 A 브랜드 사장 아들이랑 같이 살아보네. 이런 영광이 어딨나 싶어 와아... 하는 감탄사만 줄곧 내뱉었다.
"근데 누나 와 그렇게 놀랐어요?"
"...그때, 네가 나한테 호경 왜 왔냐고 물었잖아. 나 그냥 점수 맞춰서 왔다고 말했고..."
"네."
"좀 줄인 이야기가 있는데.. 울 아빠 돈벌이 좀 괜찮았을 때, 우리 가족이 여행을 갔는데 너네 호텔에서 잤거든."
"...."
"그때 나 열 살이었어. 근데 뭐랄까.. 꿈이란 게 처음 생겼던 거야.
이런 호텔에서 일하고 싶다는 그런 꿈.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런 호텔을 경영하고 싶다는 것도."
"....."
"워너비지, 워너비. 집안사정 안 좋아지기 전까지는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
"....."
"호텔에서 일도 하고, 경험 쌓으면 내 호텔을 갖고... 그게 당연한 순서인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게 다 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았고, 우리 가족에게 세상은 그렇게 따뜻한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특히 나의 꿈을 이루어줄 정도로 다정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내게 미안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미안해 하는 것조차 싫었다. 내 꿈을 이루어주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과 미안함이 아니라 결국 돈이라는 걸 그 즈음 깨달았던 것이다.
돈이라... 그때부터 그에 얽매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돈 때문에 뭘 못하고, 뭘 해야만 하고, 그런 것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어린 나이도, 그렇다고 그다지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 닥쳤으니까, 내게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그대로 받아들인 게 전부였다.
"하여간 부럽다, 다니엘."
"안 부러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뭔데."
"말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은디."
"그럼 말하지 마. 말하면 때린다."
짐작이 가는 건 있었지만, 다니엘의 말대로 한 대 때리기 충분한 답일 것 같아 굳이 묻지 않았다. 다니엘은 아, 그래도 좀 물어봐주면 안 돼요? 했고, 나는 안물, 안궁. 하며 고갤를 저었다.
다니엘은 정없다... 하며 씩 웃었다. 그러면서 하여간 A는 좀 그렇고, B가 낫겠다. 누나. 하고 말했다.
무언가 숙연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 같아서, 나도 묵직해진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더 씩씩하게 말하고, 웃었다.
그렇게 주제는 B로 정해졌다. 주제가 제대로 정해지니 마음이 한 결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편안해진 게....
"......으으..."
스르륵, 머리카락이 넘겨지는 감촉이 잠을 깨웠다. 뭐야... 나 언제부터 잤어? 나 요즘 왜 이렇게 조금 편하다 싶으면 그냥 잠들어버리는 거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빤히 나를 쳐다보는 다니엘이 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아... 미안, 나 피곤했나봐. 하고 말했다.
다니엘은 그런 것 같아서 안 깨웠어요. 했다. 나는 어디까지 했어? 나 어디부터 하면 돼? 하고 물었다. 다니엘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피곤하면 좀 더 자요. 하고 답했다.
"아냐. 내 방 가서 자야지.. 너도 편하게 자야지."
"나야 누나 있으면 더 편하죠."
"야, 그게 어떻게 더 편하냐..
너 내일 시간 괜찮아? 우리 내일 좀 더 할래?"
"마음이 편해서요. 자는 거 보니까 내 마음이 좀 놓여서."
내 물음에는 들은 척도 않고, 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다니엘이다. 나는 무어라 받아쳐야 하나 망설이다가, 끝내 입을 닫아버렸다.
다니엘은 손을 들어 내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겼다. 내 잠을 깨운 그 촉감과 같았다. 나는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다니엘은 그대로 빤히 내 얼굴을 바라봤고, 나는 눈을 마주치기도, 안 마주치기도 어려워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일어나봐야 하나, 이제 가서 자겠다고, 너도 잘 자라고 해야 하나. 이 전공책이랑 필통이랑 다 들고 그냥 나가면 되는 건가... 뭐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
"...가요. 가서 자요."
".....으응."
"누나, 우리.. 방에서는 만나면 안 되겠다.
좀 위험한 갑다."
표정 없는 얼굴로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전공책과 필통을 챙기려던 손짓을 멈추고 다니엘을 쳐다봤다.
언제 그랬냐는듯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이는 다니엘의 얼굴을 마주했다. 괜히 쿵, 하고 마음 언저리를 누가 때리는 느낌이 들었다.
잘 자요. 굳 나잇-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이마 앞에 검지와 중지를 모아 날 향해 날리는 시늉을 하는 다니엘이다.
그래.... 잘 자라.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품에 전공책과 필통을 안고 다니엘의 파란 방을 나서는 나다.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긴 몰라도, 내 생각보다 많이 '와버렸다'는 생각이 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많이... 와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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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너 학교 안 가?"
"......"
"뭐야. 너 왜 이렇게 뜨거워. 너 아파?!"
1교시가 있는 날이었다. 환절기면 꼭 걸려버리는 감기는 이번에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늘 피곤하니까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과제 때문에 요 며칠 잠을 못 잤다고 이렇게 쉽게 감기에 걸려버릴 줄이야.
이번 감기는 단순히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고, 재채기를 좀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독감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열이 펄펄 끓는 게 침대 밖으로 채 한 발자국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팠다.
하필 1교시부터 4교시까지 전공으로 꽉 차있는 날, 그러나 마침 아르바이트는 없는 오늘 같은 날,
학교에 가버리면 꼼짝없이 며칠 내내 감기를 앓겠다는 판단이 든 나는 별 고민의 여지 없이 자체공강을 선택했다.
학교 갔다가는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되고 말 거야. 하는 나름의 당당한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가지 않은 걸 알아챈 옹성우가 내 방에 들어왔다.
"학교 못가... 몸 너무 안 좋아..."
"감기야? 왜 이렇게 열이 나."
"모르겠어..."
새벽 내내 난 식은땀은 이미 베개를 일부분 적셨다. 나는 몸이고 머리고 너무 무거워서 침대맡에 걸터 앉은 게 옹성우의 다리인지 뭔지를 확인할 새도 없었다.
급한대로 수건에 찬물을 적셔온 옹성우가 내 이마에 수건을 올려놨다. 나는 아.... 차거.... 하며 웅얼거렸고, 옹성우는 언제부터 이랬어.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하고 물었다.
폐를 끼치려는 마음도, 의도도 아닌데 정신이 하나도 안 드는 게 영 힘들어서 어쩔 수가 없다.
"어제부터.. 그냥 쉬면 돼..."
"바보야. 너 내일 또 알바 있잖아. 약 먹어야지."
"몰라.... 병원 갈 힘도 없어..."
"잠깐 일어나봐. 나 성운이형 차 좀 빌려 올테니까 병원 가자."
"....아아..."
싫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옹성우는 단호했다. 외투 입고 있어. 성운이형 차 빼서 전화할테니까 챙겨입고 내려와. 딱딱한 말투에 더 이상 개기면 안 되겠다 싶었다.
성우는 그대로 내 방을 나섰다. 나선 이상 차를 빼오는 데는 5분도 채 안 걸릴 테니 난 서둘러야 했다.
열은 열대로 나는데 추워 죽겠네... 계절감과 맞지는 않지만, 있는대로 두꺼운 옷을 껴입고 오들오들 떨며 방에서 나왔다.
죽겠다... 왜 하필 이럴 때 이렇게 독하게 걸려버려가지구... 으으... 곡소리를 내며 신발을 신었다.
"아프면 말을 해야 될 거 아니야.
내가 네 방 안 들어갔으면 어쩔 뻔 했어."
옹성우는 팔을 뻗어 내게 안전벨트를 매줬다. 귀에 닿아오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나는 대답할 힘도 없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 열 나는 거 말고는 다른 증상 없어? 물어오는 말에 목 아퍼.. 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옹성우는 아... 진짜. 하면서 짜증을 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짜증을 내냐고 물어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물을 힘도 없어 가만히 있었다.
옹성우가 운전하는 성운오빠의 차는 금방 병원 앞에 도착했다. 차를 세워둔 옹성우는 내게 맨 안전벨트를 다시 풀어주었다.
그대로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서는데, 나도 모르게 핑 도는 어지러움에 휘청거리고 말았다. 차 전원을 끄고 내게로 걸어오면서 휘청대는 날 본 옹성우가 손을 뻗어 내 몸을 감쌌다.
"........."
엉겁결에 안겨버린 몸에 화들짝 놀랐으나 또 밀어낼 힘이 없어 난감했다. 옹성우는 난감해 하는 나를 눈치 챈 건지 바로 팔을 풀었다.
팔짱 껴. 단호한 명령조가 이어졌다. 그리고 나를 향해 각잡고 팔을 내미는 옹성우다. 나는 손을 뻗어 팔짱을 꼈다. 든든하게 감겨오는 힘에 몸을 의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건물 4층에 위치한 내과에 도착. 열이 펄펄 끓는다며, 단순한 감기라고 보기는 너무 독한 것 같으니 주사든 링거든 좀 놔달라는 성우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나는 간호사 언니의 손에 맡겨졌다.
그렇게 진료를 마치고 안정실로 옮겨진지 두 시간, 나는 한 팩의 링거를 다 맞고 나서야 스멀스멀 정신이 들어 혼자 걸을 힘이 생겼다.
푹 자면서 전기장판에서 땀 좀 빼니까 훨씬 나은 것 같다. 온몸을 질질 끌어가며 안정실에서 나오니 저쪽 귀퉁이 소파에서 옹성우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성우야."
"...."
"옹성우."
"....어... 아. 왔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로 나를 본 옹성우가 왔냐며 중얼거렸다.
○○○님- 마침 타이밍 좋게 수납처의 간호사 언니는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일어나려다 그대로 나를 내리누르는 옹성우의 손에 눌려버렸다.
야아. 핑 도는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옹성우는 수납처에 가 제 카드를 내밀었다. 뭔데... 왜 계산을 네가 하는데. 힘 없이 웅얼대는 말이 들릴 리가.
계산을 마친 옹성우가 내게로 걸어와 내 팔을 들어올렸다. 약 타러 가자. 그 말에 나는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야, 오바야. 왜 네가 계산을 해."
"고마우면 나중에 갚아. 너 여유 있을 때."
"......"
아픈 것조차 죄처럼 느껴지는 시기인지라, 옹성우의 이런 말과 행동이 안 고마울래야 안 고마울 수가 없었다.
무어라 대꾸하려 했지만 옹성우는 그럴 만한 틈을 주지 않았다. 약국에서 약을 받은 우리는 그대로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사 힘이 좀 생기나 싶었는데, 조금이나마 홀로 움직일 수 있는 것 같더니 금방 뱃속에서는 꾸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에 누워있어. 한 마디에 나는 곧이 곧대로 방으로 향하고, 외투를 벗고 침대에 누운 지 한 삼십분 지났을까.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려던 차에 옹성우가 방에 들어왔다.
손에 놓인 쟁반에는 야채죽 한 그릇과 김치 약간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죽 먹고 약 먹고 자자."
고맙다고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고마워서, 내가 나중에 너 아프면 진짜 밤새워서 간호해줄게. 했더니, 밤 안 새우기만 해보라고 그런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났다. 이 상황에서 웃을 수가 있는 게 참 신기하다 싶어서 죽을 먹다 말고 옹성우를 쳐다봤다. 왜. 별로 맛 없어? 하고 물어오는데 눈물이 울컥 날 뻔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 아플 때 이렇게 누가 챙겨준 적이 없어서. 라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한 쪽 눈썹을 꿈틀거린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더 떠서 물었다.
"...이제 아플 때 누가 안 챙겨주는 게 이상할 정도로 챙겨줄 테니까."
"...."
"그러니까 이거 다 먹고 마음 푹 놓고 한숨 자."
"......"
"...왜 이렇게 아프고 그러냐. 속상하게."
속상하게 왜 아프고 그러냐는 옹성우의 얼굴이 정말이지 속상해 보여서, 나는 그 이상으로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몇 숟가락 더 떠서 먹었더니 야채죽 한 그릇이 금방 비워졌다. 자고 일어나면 더 해주든지 할게. 기다려봐, 약 갖고 올테니까. 하며 옹성우가 쟁반을 도로 갖고 나갔다.
금방 따뜻한 물이 담긴 머그잔을 가지고 방에 들어온 성우는 내가 약까지 넘기는 모습을 보고, 이불을 덮고 눈을 감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마음이 좀 놓이는 듯했다.
이불을 덮고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냈더니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
녀석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아왔다. 손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아직까지도 내 머리에 열이 있구나 싶었다.
나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왠지 녀석의 눈을 마주보면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헷갈려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내 뜨거운 이마 위에 제 손을 두고 있던 성우는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마에서 손을 떼어냈다.
"...푹 자고 나면 안 아팠으면 좋겠다."
"....."
"건강해지는 꿈 꿔라."
성우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사뿐사뿐 걸어 내 방을 나갔고, 곧 문을 닫아주었다.
내가 건강해지는 꿈을 꿨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녀석의 병원 동행과 야채죽, 따뜻한 물이 담긴 머그잔으로 인해 내 몸이 조금은 건강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성우처럼 좋은 친구가 생겼음에 감사하며, 이런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정말이지, 너무 좋은 친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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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편 암호닉(강과장 최종 암호닉 리스트에 계신 분들에 한함. 006편 업로드 전 댓글 달아주신 분들에 한함.) [어어] [분홍색솜사탕] [녤부] [알바생] [0226] [구원자] [해령] [다녤잉] [121027] [에비츄] [딸기시럽] [사용불가] [1122] [@불가사리] [강달리엣] [샤넬] [숮어] [포카리] [꼬꼬망] [입학하자] [쌈장] [무네큥] [마카롱] [크뽀] [칸타타] [휘린] [빨간머리] [슬] [굥뷰죰햬] [달달한복숭아] [지블] [옹성우] [마요] [피치수플레] [mj] [맥주톡톡] [리본] [일개사원] [녤과장] [리베르떼] [녜리] [묭묭이] [송송아] [몽쟈] [딸기모찌롤] [둡돌고래] [일이일공] [쀼쀼]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Y사원입니다. 혐생 정말 넘나리 바쁜 것 실화냐.... 그리고 저는 어제 저녁비행기를 타고 오늘 아침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엉엉 연말을 이렇게 일로 불태울 줄은 나도 몰랐고 독자님들도 몰랐고 워너원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이제사 막 워너원고 재방 보고, 6편 암호닉 정리하면서 7편을 새롭게 들고 왔습니다. 7편 올라가고 나면 암호닉 신청 글 올릴 예정입니다. 미뤄둔 강과장 마지막 메일링도 할 텐데, 의도치 않게 많이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날씨 넘나 추운 것ㅠㅠ 저는 제가 사는 오피스텔이 이렇게 추운지 몰랐는데 저어어어엉말 춥네요.. 하하... 하여간 감기 조심하시구 저체온증 조심하시구.. 다들 건강하게 겨울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성운이 말이 유독 명언처럼 느껴지는 요즘이에요. 공부 안 해도 되니(...) 정말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비양심적이고 안 착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네요.. 우리 독자님들은 그런 사람들 최대한 덜 만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 여튼 갑작스런 공백 끝에 오늘도 기꺼이 찾아와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구름이네와 함께 즐거운 월요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암호닉 공지에서 만나요! ㅎㅅㅎ |